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1.조선통신사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동방박사님 2021. 12. 8.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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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시대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통신사’들에 대한 얘기다. 특히 1592년 발생해 7년간 참화를 빚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 에도시대에 파견된 사신들에 대한 얘기다.

지금까지 통신사는 ‘조선통신사’의 이름으로 여러 곳에서 출간되어 왔지만, 일본학자나 재일사학자의 저서 혹은 한일간 공동연구의 결과물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고, 모두 학술서의 범주에 있어, 일반독자들이 ‘통신사’ 하면 공부하는 사람들이 연구하는 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에도시대의 기행문’을 연구하였으며,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는 지금도 에도시대에 관심을 가지고 통신사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저자는,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학자층에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책의 집필 동기로 들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면서
들어가는 글

1장 1607년 임진왜란의 상처 속에 다시 일본으로
_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적정 탐색과 포로 쇄환
1. 왜란과 ‘통신사(通信使)’
2. 일본 조총(鳥銃)을 사오라
3. 대마도의 살 길
4. 화려한 접대의 뒷면
5. 국가 체면이 중요하다
6. ‘구우일모(九牛一毛)’인 피로인 쇄환

2장 1617년 실리(實利) 외교와 국서 위조
1. 급박한 북변 사정과 히데요시 일족의 멸망
2. 사신을 보내자
3. ‘조총’과 실리 외교
4. 피로인 쇄환의 어려움
5. 막부 예물은 더러운가
6. 위조된 국서

3장 1624년 마지못해 떠난 사행과 뜻밖의 큰 수확
1.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
2. 대마도의 횡포
3. 사신 파견 목적
4. 비단을 팔아서 조총을 사오라
5. 귀국을 꺼리는 피로인
6. 재침 걱정은 없다
7. 일본의 질서와 경제력

4장 1636년 ‘통신사’ 명칭의 사용과 문화적 우월감
1. 이제부터 ‘통신사’라 부르자
2. 사신의 마음가짐
3. 막부가 준 예물을 버리다
4. 글자 하나에도 국가 체면이 걸렸다
5. 억지로 끌려간 ‘닛꼬 유람’
6. 문화적 우월감을 갖다
7. 일본 유학을 낮게 보다

5장 1643년 우호관계의 유지와 일본에 대한 시각 변화
1. 병자호란의 충격
2. 대마도의 오만한 태도
3. 이에미쓰 장군과 닛꼬
4. 실리를 위한 우호관계
5. 사신들의 일본 관찰

6장 1655년 나라의 안전을 위한 적극적인 사행
1. 북벌(北伐) 계획
2. 남쪽이 불안하다
3. 골치 아픈 대마도
4. 닛꼬 참배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5. 피로인 이진영(李眞榮)과 이전직(李全直) 부자
6. 오랑캐가 잘사네
7.「문견별록」의 일본 연구

7장 1682년 대마도의 위상과 왜관 통제
1. 북벌 포기
2. 왜관을 새로 지어 주다
3. 대마도의 당당한 목소리
4. 문화 교류의 이중성
5. 역관 홍우재의 일본관
6. 사신이 좋아한‘남초(南草: 담배)’

8장 1711년 밀고당기는 치열한 외교전
1.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행
2. 갑작스런 빙례 개변
3. 예단을 안 받겠다
4. ‘일본국왕’이라 불러다오
5. 또 한차례의 빙례 개변 통고
6. 협박 속에 받아들인 개변 요구
7. 국서 개서(改書)의 장군 멍군
8. 또 하나의 외교, 필담(筆談)

9장 1719년 청천 신유한이 본 일본
1. 조선의 중화사상
2. 빙례를 복원하다
3. 어쩔 수 없이 사행에 나선 청천
4. 경치 좋은 대마도
5. 청천이 본 일본인
6. 일본 시문(詩文)이 뒤떨어진 이유

10장 1748년 사행 준비의 어려움과 일본 연구의 발전
1. 안정된 국제관계
2. 어려운 경제 사정과 예단 걱정
3. 사행선이 불타다
4. ‘계륵(鷄肋)’같은 꿩고기
5. 일본을 보는 시각의 변천사
6. 일본을 주목한 이익(李瀷)

11장 1764년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노력과 불미스러운 사건
1. 어려운 양국 경제
2. ‘이능송백(二陵松栢)’
3. 겉과 속이 다른 대마도
4. 배울 것은 배우자
5. 최천종(崔天宗) 살해 사건
6. ‘번주의 지시’는 과연 있었는가

12장 1811년 대마도로 간 마지막 통신사
1. 뜻밖의 제안
2. 막부의 연기 요청
3. 막부의 속사정
4. 대마도에서 만나자
5. 과거 쇄신을 위한 절목 강정 31개항
6. 대마도로 출발
7. 여전히 화려한 접대
8. 형식적인 문화 교류

나오는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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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정장식
서울교육대학과 국제대학 일문학과를 마치고, 일본 히로시마 대학원에서 일본고전문학(석사과정)과 일본학(박사과정)을 연구하였다. 현재 청주대학교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일본 에도시대에 관심을 가지고 통신사를 연구하고 있다.
일본의 문학, 역사, 철학을 두루 아는 ‘지피지기(知彼知己)’ 정신이 통신사들에게 부족하였음을 절감하며, 일본을 알리기 위해 고전수필의 정수인 『도연초(徒然草)?호조키(方丈記)』(을유문화사?2004)를 번역 출간하였다.
 

출판사 리뷰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보았나. 조선은 일본을 어떻게 여겼나.
지금의 일본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해 읽어야 할 우리 역사 속 대일본외교 이야기.

이 책의 기본 사료는 통신사의 일본여정 기록이 그대로 실린 『국역해행총재(國譯海行摠載)』(전12권)와 『조선왕조실록』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저자는 1607년부터 다시 시작되어 12회에 걸쳐 이루어진 일본 사행을 순서대로 전개하고 있다.
침략의 기억과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들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일본이지만, 400년 전 에도시대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내정 안정을 꾀하기 위해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였고, 조선도 일본의 정세를 탐지함으로써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막부의 요청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총 12회에 걸쳐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한 권에 모두 모였다.
당시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 대내외적인 배경, 즉 주변국의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 조정에서 이루어진 논의, 일본 정치세력의 새로운 판도 등이 그때그때 소개되어 시대적 배경을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중간중간에 인용된 통신사의 사행록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처음 접하는 일본 문물에 대한 놀라움, 일본 문화를 한수 낮게 보려는 자존심, 일본 유학자와 필담을 주고받은 소감 등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일본을 어떻게 보았으며, 일본에서는 조선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통신사에게 시와 그림을 청하여 받는 것을 즐겨했으며, 이는 일본 내에서 비싼 가격에 매매되기도 했다. 또한 일본 유학자들은 통신사와 마주앉아 시문을 자랑하거나 학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기꺼워하였다.

한마디의 말이나 몇 자의 글도 큰 보배로 여길 뿐만 아니라, 효고(兵庫)에 서벽에 쓴 시 두 폭의 값이 각각 1백 냥이고 부사 산율시(富士山律詩) 8수는 온 나라 안이 전해 베끼었는데 이는 반드시 그 사람들이 참으로 확실히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번 지극한 보배라 하면 온 나라 안이 몰려드니 또한 한번 웃을 만하다. -김세렴, 『해사록』2월 12일 (82쪽)

이외에도 외교문서에서 막부 장군을 어떻게 칭할 것인가 하는 호칭문제, 범휘문제, 양국간에 오고가는 예단문제, 외교실무자로 활동한 대마도의 국서조작과 조선 수행원 살해사건 등 200년간 12회에 걸친 통신사의 일본행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들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침략의 아픈 기억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일본.
12회에 걸쳐 이루어진 외교사절단 통신사의 일본 여정을 통해
‘믿음을 나누는’ 통신(通信) 외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겼으나 대체로 외교를 통하여 국가의 실리를 얻으려고 애썼고, 또 당당하게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양국간 평화 유지에 기여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으나 에도시대 대일본외교의 기본은 ‘성신(誠信)외교’였다.
에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들어선 메이지정권의 침략적 성격과 이후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치욕적인 일들을 생각할 때, 과연 이러한 외교가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는 통신사가 오고갔던 조선 후기 대일본관계에 무심했으며, 일본에 대한 인식 또한 늘 ‘불행한 과거’ 위에서 출발해왔다. 이 책을 통해 ‘통신사’라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이해하고 당시 대외외교의 모습을 되짚어보는 가운데 지금 우리가 그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지만, 이 명제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서가 아닐까 한다.

오늘날의 한일관계는 해방 이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이며, 마치 에도시대처럼 서로 이해를 쌓아가는 시기에 있다. 때로는 정치가들의 한심한 타산으로 양국 관계가 난기류에 빠질 때도 있지만, 에도시대에 이미 ‘한류’가 있었듯이 오늘날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때에 양국이 ‘성신외교’를 지향한 ‘통신(通信: 믿음을 주고받는다)’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232쪽)

본문에서 발췌
조정은 1607년 사행 파견 전부터 대마도가 국서를 위조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고 있었고, 사신은 대마도가 국서를 고쳤다는 심증을 사행록에 기록하였다. 이번에도 사신이 전례를 들어가며 대마도 실무자들을 힐문했을 때 그들이 실색하며 애걸하는 모습에서도 국서 개작에 대한 심증은 충분하였고, 이른 아침에 대마도 실무자가 국서를 직접 가져온 것도 충분히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
일본 국서가 개작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는 몇 가지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나 사신은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지 않고 모른 척하였다. 사신은 오히려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이 어려운 외교 문제를 중간에서 쉽게 해결하는 대마도의 간교한 처사가 내심 고맙기도 하였을 것이다. 왕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왕’자를 붙이기 싫어하는 막부 장군에게 조선이 억지로 ‘왕’자를 붙이라고 한 것은, 조선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항례’로 교류해야만 조선의 자존심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정사 오윤겸의『동사상일록』과 종사관 이경직의『부상록』을 볼 때, 사신은 대마도가 꾸민 국서 개작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마도가 개작한 국서가 귀국 후의 사신의 탄핵을 막아 주며, 또 조선의 체면까지 세워 주는데 일부러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신은 외교적 실리를 생각하여 알면서도 모르는 척 위조된 국서를 받아 왔으니, 외교에는 이렇게 단수 높은 연기도 필요하였다.(52쪽)

막부의 물량공세에 대하여 사신들은 남는 양식과 찬물은 되돌려주며 물질에 담백한 면을 보이려고 애썼다. 접대를 맡은 쪽은 되돌려 받으면 미안하다고 이것을 화폐로 환산하여 은자로 보내기도 하였으나 사신들은 명분이 없는 은자를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번에도 에도를 떠나올 때 남긴 양식과 찬물이 얼마나 많았던지, 막부측에서는 그것을 환산하여 천 냥이 넘는 은자를 금으로 바꾸어 사신에게 보냈다. 이것을 그냥 받아서 수행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곤란하고, 도주를 시켜서 돌려보내려니 배달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사신들은 이 금을 대마도가 인수하라고 권하였으나 대마도는 막부의 눈치를 보느라 받지 않았다.
사신들은 이것을 받아 가지고 오면서 며칠을 궁리하다가, 나고야(名古屋)에 가까운 하마나꼬(浜名湖) 호수 근처의 이마키레(今切)라는 곳에 이르러서 물에 던져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군관과 역관을 시켜서 대마도 사람들이 알게끔 물에 던지도록 하였는데 대마도 사람들이 물에 버려진 금을 그냥 두고 올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막부의 얼굴도 세워주고, 사신들의 체면도 지키며, 중간에서 애쓰는 대마도로 이득이 돌아가게도 되어, 결국 삼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이 사건은 사행의 기개를 과시한 좋은 실례(實例)가 되었고, 그 후 사신들은 이곳〔금절하(今切河)]을 지날 때마다 이 사건을 전설처럼 말하며,“ 하수가에 사는 사람들이 사모하여 금절(金絶)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자랑하였다. (77쪽)

먼저 종사관이 “일본에 선진(先秦)의 책이 전한다고 들었는데, 왜 그것을 등사하여 세상에 내놓지 않느냐?”며 일본의 문화적 후진성을 따지듯 물었다. 여기서 하쿠세키는 수세에 몰렸으나 곧 공세에 나서, 자신은 대서양, 이탈리아, 화란, 오키나와 등의 사람들을 접하여 넓은 세상을 안다고 자랑하며, 조선에 만국전도(萬國全圖)가 없다면 한 장 줄 수 있다고 과시하였다. 이어 하쿠세키는 여세를 몰아 해외 지리와 해외 사정, 천주교, 오키나와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선은 멸망한 명나라의 의례(儀禮)에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물었다. 1715년에 『서양기문(西洋紀聞)』이라는 서양 연구서를 낼 만큼 서양 사정에 박식한 그에게는, 사신들의 중국 일변도 지식이 매우 고루하게 보였을 것이다. (155-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