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1.조선통신사

초량왜관

동방박사님 2021. 12. 8.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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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초량왜관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부산포에는 470년 동안 왜관이 존재했었다. 그중 후반기인 1678년(숙종 4) 새띠벌 초량에 왜관을 설치한 이후 200여 년을 이어왔다. 왜관, 그중에서도 초량왜관을 논하지 않고 부산의 역사를 살펴보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초량왜관은 빼앗긴 것도, 수탈당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선의 제도와 법령으로 왜인을 다스리고, 그들을 교화함으로써 일본을 사이좋은 이웃나라로 만든 공간이다. 왜인들에게 교역을 허락하고, 그들과 문화를 교류하면서 200년 동안 조·일 두 나라의 평화를 이뤄냈다. 초량왜관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화평 비용으로 왜인들에게 빌려준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간략하게 왜관의 역사를 기술하고 조선 시대 후반기에 설치된 초량왜관에 초점을 맞춰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이 부산의 역사를 연구하거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은 물론이고, 부산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공헌을 할 것이다.

목차

1장 왜관의 역사
Ⅰ. 부산포왜관
Ⅱ. 절영도왜관
Ⅲ. 두모포왜관

2장 초량왜관
Ⅰ. 초량항의 옛 모습
Ⅱ. 성곽 속에 가둔 왜인
Ⅲ. 초량왜관 면적과 구조
Ⅳ. 동관東館의 공·사公·私 건물
Ⅴ. 서관 삼대청과 육행랑

3장 조선관아朝鮮官衙
Ⅰ. 복병막과 외교 공관
Ⅱ. 연대청과 초량객사
Ⅲ. 왜관에서 일어난 사건·사고
Ⅳ. 초량왜관 수리와 화재
Ⅴ. 왜관의 모든 의례
Ⅵ. 왜관 약조와 금조
Ⅶ. 왜관 금수품과 처벌

4장 초량왜관 무역
Ⅰ. 왜관무역과 대마도
Ⅱ. 화폐개혁의 타격

5장 표류민과 구호
Ⅰ. 바다로 이어진 이웃나라
Ⅱ. 일본에서 조선인 표도 구호

6장 왜관의 직제와 업무
Ⅰ. 대관과 종씨 소속 관리
Ⅱ. 초량왜관 관련 조선인 직제와 녹봉
Ⅲ. 연례송사

7장 초량왜관! 기억의 저편으로
1. 초량왜관에서 성신교린의 균열
2. 동래부전령서
3. 동래부사 역대 일람표
4. 왜관 관수 역대 일람표

저자 소개

저자 : 최차호(崔次鎬)
1945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2000년 현업을 정리할 때까지 일본 유학, 공직, 개인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001년부터 대마도를 70여 차례 방문하는 등 한·일 근세사와 왜관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2003년 부산문화유산해설사회 초대회장, 2003년 한국문화유산해설사회 초대회장, 2006년 아메노모리 호슈 외교교류회 한국측 이사를 거쳐 2010년부터 현재까지 부산초량왜관연구회장을 역임...
 
 
 

책 속으로

초량왜관 건축 공사는 그 유례를 달리 찾아볼 수 없다. 두모포왜관에서는 건물을 수리할 때 왜인들이 주거 공간은 일본식 구조로 만들어 주도록 요청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초량왜관은 기초공사 때부터 조선과 일본이 절충식 건물을 세우는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주거 공간[내부]은 일본식, 지붕은 조선식 구조의 조·일 절충식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조·일 절충식 건물은 누수 등으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그때마다 일본 목수들은 ‘조선식 기와지붕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목수들은 ‘일본식 건축은 구조가 튼튼하지 않아, 무거운 기와지붕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다.’ 라고 받아넘겼다.

***

1868년(고종 5) 새로이 성립한 명치정부는 외교업무의 일원화를 꾀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대마번에 대해 조선 정부와 새로운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왕정복고를 통보하도록 명 했다. 동시에 대마번주 종의달(소우 요시아키라)은 조선수호의 임무를 띠고 강호에서 대마도로 귀국하여 조선 외교업무에 착수하였다.
당시 대마번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조선 정부가 초량왜관을 통해 철공철시를 강행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무렵 대마번에서는 1864~1865년에 걸쳐 발생한 카쓰이 소동이라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대마번은 200명이 넘는 많은 인재(주로 아메노모리 호슈 학통)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대마번은 필요한 인재가 부족하여 조선 정부와 성신교린을 수행할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때문에 조선과의 외교정책을 이끌어갈 수 없게 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대마번이 초량왜관을 통한 조선외교는 1871년부터 명치정부 외무성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 5월에는 초량왜관에서 일본 정부의 관리가 난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철공철시 제재를 받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명치정부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파견하여 1872년(고종 9) 9월24일 초량왜관을 일본 외무성에서 관리하였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조선·일본 두 나라 200년 평화의 비용-세계도시 부산을 만들다.

조선 전기에는 남해안의 부산포·제포·염포 등 세 곳에 왜관이 존재했다. 이를 삼포왜관이라 했다. 그러나 임진·정유재란으로 삼포왜관은 모두 폐쇄되었다. 전란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은 국교가 회복되어 부산포에만 왜관이 설치되어 270여 년 동안 왜관이 존재했다. 절영도, 두모포, 초량으로 옮겨가면서 부산에만 유일하게 왜관이 존속했다. 하지만 1876년 초량왜관의 폐쇄와 함께 조선에서 왜관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래부의 변방으로 한가롭던 부산항이 오늘날 세계 5대 무역항으로 발전한 것은 초량왜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세계 5대 물류항으로 발전한 부산은 초량왜관이 크게 역할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연결고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왜관의 문을 모두 닫았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은 왜관을 다시 열고자 대마도를 앞세워 끈질기게 조선에 매달렸다.
10만여 평의 터를 갖춘 초량왜관은 상주하는 왜인만 4~500여명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토진야시키의 10배, 데지마의 25배 규모였다. 게다가 초량왜관은 조·일 양국의 기술자가 공동으로 만든 조·일 절충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200년이란 세월은 하나의 왕조가 성립되어 소멸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이 기간에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서 부산은 조선의 작은 정부 역할을 했고, 초량왜관은 소통창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9세기 말 초량왜관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되고 말았다. 초량왜관이 잊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량왜관의 탓도, 부산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200년 화평의 시대를 누리는 동안 부패와 정쟁으로 위정자들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올바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다. 서구는 산업혁명으로 농경사회를 벗어나 현대화로 질주했고, 일본 역시 명치유신으로 서양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는 격변의 시대를 겪었으나, 조선은 바깥세상으로 향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세월을 보냈다.

초량왜관의 역사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계기

초량왜관 200년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겠다는 욕심을 낸 저자가 10여 년 동안 모으고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결과물을 내놓게 됐다. 대마도를 70여 차례 방문하며 자료를 모으고, 각종 고문헌에 파고들어 정리한 이 책은 역사 속에 파묻혀 우리 기억에서도 지워졌던 초량왜관의 재발견이자, 초량왜관의 역사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부산부사원고』 등 많은 고문헌을 통해 확보한 내용으로 씨줄을 삼고, 지난 10여 년간 저자가 옛 초량왜관 일대와 대마도 등을 직접 답사하며 확인한 내용으로 날줄을 삼아 구성됐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미 알려진 내용도 있겠지만, 저자는 새롭게 발굴한 내용과 독자적인 해석을 담아, 저자의 후속연구는 물론이고 왜관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도록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