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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왕실 또하나의 상징,
조선의 왕비를 만나다!
왕의 정실부인이자 조선의 국모인 왕비는 현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 생산이라는 막중한 책임 외에도 절대 권력의 중심부에서 나라의 국모로 여러 가지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여성이었던 만큼 간택을 받는 순간부터 조선의 왕비는 이미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정치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는 비록 적었으나 정치와 무관한 존재는 아니었다. 조선왕조사 곳곳에는 외척을 통한 왕비의 정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때로는 왕위에 오른 아들과 손자를 앞에 두고 수렴청정을 통해 왕 못지 않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선의 왕비는 대부분 왕의 그늘에 가려 있는 존재이거나, 또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대상으로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의 왕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녀들의 일상사에서부터 권력의 행사에 이르기까지 무궁하고 무진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살펴보는 왕비의 모습은 조선 당대의 정치 및 사회와 문화를 비롯하여 나아가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는 조선 왕조 권력의 정점인 왕과 함께 왕실의 또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던 조선의 왕비에 주목한 책으로서 왕비의 법적 지위는 물론, 그녀들이 왕비가 되는 순간부터 궁궐에서의 일상, 왕비를 둘러싼 친인척과 정치세력 등 여러 가지 측면을 복합적으로 살핌으로써 왕비의 일상적 삶과 역사적 자취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조선의 왕비를 만나다!
왕의 정실부인이자 조선의 국모인 왕비는 현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 생산이라는 막중한 책임 외에도 절대 권력의 중심부에서 나라의 국모로 여러 가지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여성이었던 만큼 간택을 받는 순간부터 조선의 왕비는 이미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정치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는 비록 적었으나 정치와 무관한 존재는 아니었다. 조선왕조사 곳곳에는 외척을 통한 왕비의 정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때로는 왕위에 오른 아들과 손자를 앞에 두고 수렴청정을 통해 왕 못지 않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선의 왕비는 대부분 왕의 그늘에 가려 있는 존재이거나, 또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대상으로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의 왕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녀들의 일상사에서부터 권력의 행사에 이르기까지 무궁하고 무진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살펴보는 왕비의 모습은 조선 당대의 정치 및 사회와 문화를 비롯하여 나아가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는 조선 왕조 권력의 정점인 왕과 함께 왕실의 또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던 조선의 왕비에 주목한 책으로서 왕비의 법적 지위는 물론, 그녀들이 왕비가 되는 순간부터 궁궐에서의 일상, 왕비를 둘러싼 친인척과 정치세력 등 여러 가지 측면을 복합적으로 살핌으로써 왕비의 일상적 삶과 역사적 자취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서장 조선시대의 왕비
1 왕비의 위상과 역할
2 왕실 여성의 위계와 왕비의 궁중생활
3 다양한 왕비의 모습들
제1부 왕비의 간택과 책봉
1 만민을 친히 하는 혼례, 가례
2 금혼령과 왕비의 간택
3 왕은 왕비와 혼인해야
4 왕이 왕비와 한 몸 되기
5 왕비가 되는 마지막 절차
제2부 아이를 낳고 기르다
1 왕비, 아이를 낳다
2 왕실의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
제3부 왕실 여인의 권력 참여, 수렴청정
1 수렴청정이란 무엇인가
2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의 권한
3 시기마다 다른 수렴청정
제4부 왕실 여성의 독서와 글쓰기
1 왕실 여성이 되는 첫걸음, 간택
2 궁궐의 삶과 독서
3 글쓰기를 통한 문필의 모습
제5부 왕비와 왕실의 외척
1 왕실 외척의 위상과 존재
2 왕비와 외척의 관계
제6부 왕비와 궁중 여성들
1 왕비와 궁중 여성들의 관계
2 후궁의 삶
부록
왕비 가계도 | 왕비를 배출한 가문 | 왕을 낳은 곳, 낳은 날 | 참고문헌 | 도판목록 | 찾아보기
서장 조선시대의 왕비
1 왕비의 위상과 역할
2 왕실 여성의 위계와 왕비의 궁중생활
3 다양한 왕비의 모습들
제1부 왕비의 간택과 책봉
1 만민을 친히 하는 혼례, 가례
2 금혼령과 왕비의 간택
3 왕은 왕비와 혼인해야
4 왕이 왕비와 한 몸 되기
5 왕비가 되는 마지막 절차
제2부 아이를 낳고 기르다
1 왕비, 아이를 낳다
2 왕실의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
제3부 왕실 여인의 권력 참여, 수렴청정
1 수렴청정이란 무엇인가
2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의 권한
3 시기마다 다른 수렴청정
제4부 왕실 여성의 독서와 글쓰기
1 왕실 여성이 되는 첫걸음, 간택
2 궁궐의 삶과 독서
3 글쓰기를 통한 문필의 모습
제5부 왕비와 왕실의 외척
1 왕실 외척의 위상과 존재
2 왕비와 외척의 관계
제6부 왕비와 궁중 여성들
1 왕비와 궁중 여성들의 관계
2 후궁의 삶
부록
왕비 가계도 | 왕비를 배출한 가문 | 왕을 낳은 곳, 낳은 날 | 참고문헌 | 도판목록 |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일상사부터 정치의 세력화까지, 조선의 왕비에 관한 종합적 스펙트럼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는 왕비의 위상과 지위, 왕비의 일상생활, 왕실 여성들의 호칭 등에 투영된 왕비의 역할 등에 관한 개괄적인 소개로 문을 연다. 이어지는 제1부에서는 왕실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진다. 주요 절차마다 다양한 상징과 의례가 함께 전개되는 결혼식을 통해 우리는 일반 사가의 여인이 왕실의 여인이 되는 과정과 유형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결혼을 치르고 나서 이어지는 것이 출산과 육아라는 점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 출산과 육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조선 왕실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제2부에서 다루고 있는 출산의 의미와 태교, 왕실의 자녀교육법 등은 대체적으로 흥미롭지만, 특히 후계자를 낳는 데까지만 역할을 요구받고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아이라기보다 왕실의 후계자로 자식을 대해야 했던 왕비의 축소된 역할에 주목할 만하다. 제3부는 조선 왕비의 수렴청정의 역사로서, 수렴청정에 관한 일반적인 배경과 사실 관계를 설명한 뒤 실제 대표적인 유형을 보인 3명의 대비의 사례를 통해 조선 왕실의 여인이 권력의 정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4부는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 여성들의 독서와 여가활동을 다루고 있는데 왕실 여인들이 읽고 쓴 책들의 목록은 문자와 기록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제5부에서는 조선시대 정치 권력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의 가문과 외척에 대해 다룸으로써 권력의 구도에 따라 명멸하는 가문의 흥망성쇠와 맞물려 돌아가는 왕비의 운명과 이로 인해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왕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제6부에서는 후궁과 궁녀를 중심으로 왕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궁중의 여성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록 왕비가 왕의 아내이자 조선의 국모이지만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수많은 궁중의 여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궁중 생활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역사 속 인물로서의 왕비를 좀더 현실감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양한 왕실 관련 자료들을 총동원하여 조선 왕비의 일상생활을 실감나게 구현해 냈다. 몇 해에 걸쳐 분야별 최고의 전문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결과물이지만, 일반 독자들을 배려해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엮었으며 이야기의 근거가 된 해당 자료들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제시해 줌으로써 더욱 현장감 넘치는 이해를 돕고 있다.
사가의 여인에서 왕실의 여인이 된 왕비, 그녀가 보낸 왕실의 한평생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조선의 왕은 왕실에서 태어나 세자로 책봉을 받은 뒤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비는 사대부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간택을 받기 전까지는 평범한 양반가의 딸로 살다 간택을 통해 왕실로 들어오게 된다. 때문에 ‘왕의 일생’을 다루는 것은 가능하나, ‘왕비의 일생’은 간택 이전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간택 이후에도 왕비의 궁중생활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왕비의 일상에 관해 살펴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실 관련 자료 등을 토대로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에서 왕비의 일상사를 집대성한 의의가 크다 하겠다.
세자빈으로 간택,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왕비가 되다 ; 왕비의 간택은 왕이 즉위한 이후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긴 하나, 대부분 세자빈으로 간택이 된 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함께 왕비가 되었다. 간택은 초, 재, 삼간택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후보는 서른 명 정도에서 시작, 5~7명으로 압축된 뒤 대부분 3명으로 최종 압축하여 그 가운데 한 명을 결정한다. 간택에 참여하는 여성은 대부분 명문가, 권세가의 딸이었으며 간택의 기준은 당사자의 외모나 성품 등도 살폈지만 어느 가문의 딸인가, 하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혼인을 통하여 고위 관료 집단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정치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통치권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 ;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생산은 왕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임무였다. 왕실은 왕비의 임신을 간절히 기원하고 그를 위해 왕비는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력 끝에 임신을 한 뒤 왕비는 또한 태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가 태어나면 왕비의 역할과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맏아들인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출산과 사후관리,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왕비 자신보다 국가나 왕실의 몫과 역할이 더 컸다. 왕비가 낳은 아이이긴 하나 왕비의 아이이기 전에 왕실의 아이요, 왕실의 후계자로서의 존재감이 더 컸던 탓이다. 물론 후궁에게서도 아이를 얻긴 했으나 적서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에서 왕비가 낳은 자녀와 후궁이 낳은 자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우의 차이를 받았다.
남편과 아들의 처지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다 :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던 이들이 몰락하자 살해의 위험을 당하고, 서궁에 유폐되었다. 비록 광해군이 물러난 뒤 복호가 되긴 했으나 아들과 친정아버지는 죽임을 당했다. 우리에게 『한중록』의 저자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였던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정실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오히려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친정이 폐위된 연산군의 처가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반정공신들에 의해 출궁이 된 것이다.
왕비의 궁중생활의 변수, 궁궐의 다른 여성들 ; 왕비는 왕비이기 이전에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며느리이자 수많은 후궁과 궁녀를 다스리는 역할을 해야 했다. 왕실의 어른인 대비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왕비는 하루아침에 폐위(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될 수도 있고, 후궁이 욕심을 부리면 왕비인 자신은 폐위가 되고(숙종의 비 인현왕후) 거꾸로 후궁(희빈 장씨)이 왕비가 되는 수모를 겪을 수도 있었다. 또한 왕비와 궁녀는 근본적으로 주종의 관계이기는 했으나 때로 연적이 되기도 했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는 후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비는 자신의 궁녀를 주인의 자격으로 관리해야 했지만 동시에 잠재적인 연적으로도 관리해야 했다. 최악의 사례로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효빈 김씨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왕비의 사후, 능호를 붙이는 방식 ; 왕실에는 위계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덤에도 명칭이 있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일 수 있었다. 후궁의 무덤은 ‘묘’라고 하였다. 훗날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에는 ‘원’이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영조가 숙빈 최씨의 무덤을 소령원으로 격상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조선시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역할과 위치를 규정하는 명분을 매우 중시하였고, 이것은 사후 무덤의 호칭에까지 깊이 작용하고 있었다.
정치를 할 수는 없으나, 정치력은 가져야 했던 왕비, 그들의 정치사
조선의 왕비는 공식적으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왕비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의례에 참석하였고, 특히 외척이 든든한 후원자로 조정에 있을 경우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왕비가 왕실의 최고 연장자가 될 경우 왕비는 현실 정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권한을 가졌고, 나아가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도 있었다.
정희왕후, 대비가 왕위를 정하다 ;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재상들이 곧바로 달려간 곳은 예종의 어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의 처소였다. 재상들은 정희왕후에게 예종의 상주를 정해달라고 청하였다. 예종의 상주는 곧 다음 왕위를 잇는다는 의미였다. 재상들의 청을 받아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지목하였고, 이렇게 왕위에 오른 임금이 바로 성종이다. 정희왕후는 어린 성종이 자랄 때까지 청정을 시행하였고, 이렇게 하여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수렴청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문정왕후 ; 1545년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이자 인종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의 섭정을 선포하였다. 이후 인종의 외척인 대윤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외척인 소윤을 동원,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을사사화) 이뿐만 아니라 문정왕후는 유교를 국시로 표방했던 조선에서 광범위한 반대를 물리치고 승려 보우를 통해 불교의 부흥을 꾀하는 등 백성들과 사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와 그녀의 외척 소윤의 영향력은 철렴 이후는 물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외척의 대표 정순왕후와 종친의 대표 정조와의 대결 ;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정은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으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노론에 비판적이었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정순왕후와 그 외척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이들을 좋아할 리 없었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은 물론 즉위한 이후에도 정순왕후와 그 외척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고, 급기야는 암살의 시도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재위 중에 종친의 처우개선과 안위를 위해 노력했으나 매번 정순왕후와 갈등을 일으켰으며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정조가 행했던 시책들을 되돌리고 종친들을 억압하였다.
왕비와 함께 하는 왕의 여인, 후궁과 궁녀들
조선의 왕비가 궁중에서 주로 함께 지내는 여성들은 왕실의 가족과 궁녀들이었다. 왕실의 가족 관계에서 왕비는 위로는 대비를 모시고, 아래로는 세자빈과 후궁을 관리해야 했다. 궁녀들 역시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왕비가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무수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 궁궐의 여성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위계와 질서가 갖추어져 있었고, 그 위계와 질서가 원활하게 잘 유지되도록 하는 것 역시 왕비의 역할이었다.
지위와 위계에 따라 달랐던 아침저녁 문안법 ;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족 간에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참고했던 『주자가례』의 ‘사마씨 거가잡의’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등을 보면 왕비는 아랫사람인 세자빈이나 후궁들로부터 문안 인사를 받기도 하지만 윗사람인 대비에게도 문안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내명부의 수장이기는 하나 왕비가 대비전에 문안인사를 올리는 이유는 유교 윤리가 철저하게 상하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문안의 횟수는 조금씩 달랐는데 세자빈은 왕비에게 매일 아침 문안을 드리고, 후궁들은 일이 있을 때만 문안을 했던 것으로 나온다. 왕비는 대비전에 3일 또는 5일에 한 번씩 문안을 받았던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이 항상 지켜졌던 것 같지는 않다.
간택후궁과 승은후궁 ; 왕의 후궁은 품계에 따라 구분이 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품계가 아닌 신분과 후궁이 되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되었다. 궁녀나 기녀 중에서 사사로이 왕의 승은을 입고 책봉된 후궁은 승은후궁이라 하고, 사대부 출신의 여성으로 정식 간택 절차를 거쳐 책봉된 후궁은 간택후궁이라고 한다. 주로 왕과 왕비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정치적,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후궁은 승은후궁들이었는데 연산군대의 장녹수, 광해군대의 김개시, 숙종대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간택후궁은 주로 후사를 잇기 위해 들인 후궁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킨 예는 많지 않다. 숙종대의 영빈 김씨, 헌종대의 경빈 김씨 등이 대표적이다.
본방나인과 궐 안의 궁녀 ; 왕비가 간택이 되어 궁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가에서 거느리던 몸종이나 유모 등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왕비만이 아니고 후궁이나 세자빈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엄격히 말하면 궁궐의 소속이 아닌 왕비 개인 소속의 종 즉, 공노비가 아닌 사노비였다. 이들을 가리켜 본방나인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궁중에서 왕비는 자신이 친정에서 데리고 들어온 본방나인과 가장 가깝게 지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왕비의 속옷을 빨아주는 것도,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것도 본방나인이었고 심지어는 폐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나갈 때도 함께 하는 것도 본방나인이었다. 때문에 본방나인의 운명은 왕비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본방나인 외에도 중전에는 수많은 궁녀가 배속되어 있었다. 일정치는 않지만 성종 무렵 약 20여 명으로 추정되고, 점점 늘어나 고종 대에는 약 100명 내외가 되었던 듯하다. 궐 안의 궁녀 역시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일차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존재였음으로 충성을 바치는 일차 대상도 자신들의 주인이었다.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는 왕비의 위상과 지위, 왕비의 일상생활, 왕실 여성들의 호칭 등에 투영된 왕비의 역할 등에 관한 개괄적인 소개로 문을 연다. 이어지는 제1부에서는 왕실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진다. 주요 절차마다 다양한 상징과 의례가 함께 전개되는 결혼식을 통해 우리는 일반 사가의 여인이 왕실의 여인이 되는 과정과 유형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결혼을 치르고 나서 이어지는 것이 출산과 육아라는 점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 출산과 육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조선 왕실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제2부에서 다루고 있는 출산의 의미와 태교, 왕실의 자녀교육법 등은 대체적으로 흥미롭지만, 특히 후계자를 낳는 데까지만 역할을 요구받고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아이라기보다 왕실의 후계자로 자식을 대해야 했던 왕비의 축소된 역할에 주목할 만하다. 제3부는 조선 왕비의 수렴청정의 역사로서, 수렴청정에 관한 일반적인 배경과 사실 관계를 설명한 뒤 실제 대표적인 유형을 보인 3명의 대비의 사례를 통해 조선 왕실의 여인이 권력의 정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4부는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 여성들의 독서와 여가활동을 다루고 있는데 왕실 여인들이 읽고 쓴 책들의 목록은 문자와 기록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제5부에서는 조선시대 정치 권력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의 가문과 외척에 대해 다룸으로써 권력의 구도에 따라 명멸하는 가문의 흥망성쇠와 맞물려 돌아가는 왕비의 운명과 이로 인해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왕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제6부에서는 후궁과 궁녀를 중심으로 왕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궁중의 여성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록 왕비가 왕의 아내이자 조선의 국모이지만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수많은 궁중의 여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궁중 생활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역사 속 인물로서의 왕비를 좀더 현실감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양한 왕실 관련 자료들을 총동원하여 조선 왕비의 일상생활을 실감나게 구현해 냈다. 몇 해에 걸쳐 분야별 최고의 전문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결과물이지만, 일반 독자들을 배려해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엮었으며 이야기의 근거가 된 해당 자료들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제시해 줌으로써 더욱 현장감 넘치는 이해를 돕고 있다.
사가의 여인에서 왕실의 여인이 된 왕비, 그녀가 보낸 왕실의 한평생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조선의 왕은 왕실에서 태어나 세자로 책봉을 받은 뒤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비는 사대부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간택을 받기 전까지는 평범한 양반가의 딸로 살다 간택을 통해 왕실로 들어오게 된다. 때문에 ‘왕의 일생’을 다루는 것은 가능하나, ‘왕비의 일생’은 간택 이전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간택 이후에도 왕비의 궁중생활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왕비의 일상에 관해 살펴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실 관련 자료 등을 토대로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에서 왕비의 일상사를 집대성한 의의가 크다 하겠다.
세자빈으로 간택,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왕비가 되다 ; 왕비의 간택은 왕이 즉위한 이후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긴 하나, 대부분 세자빈으로 간택이 된 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함께 왕비가 되었다. 간택은 초, 재, 삼간택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후보는 서른 명 정도에서 시작, 5~7명으로 압축된 뒤 대부분 3명으로 최종 압축하여 그 가운데 한 명을 결정한다. 간택에 참여하는 여성은 대부분 명문가, 권세가의 딸이었으며 간택의 기준은 당사자의 외모나 성품 등도 살폈지만 어느 가문의 딸인가, 하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혼인을 통하여 고위 관료 집단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정치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통치권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 ;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생산은 왕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임무였다. 왕실은 왕비의 임신을 간절히 기원하고 그를 위해 왕비는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력 끝에 임신을 한 뒤 왕비는 또한 태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가 태어나면 왕비의 역할과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맏아들인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출산과 사후관리,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왕비 자신보다 국가나 왕실의 몫과 역할이 더 컸다. 왕비가 낳은 아이이긴 하나 왕비의 아이이기 전에 왕실의 아이요, 왕실의 후계자로서의 존재감이 더 컸던 탓이다. 물론 후궁에게서도 아이를 얻긴 했으나 적서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에서 왕비가 낳은 자녀와 후궁이 낳은 자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우의 차이를 받았다.
남편과 아들의 처지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다 :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던 이들이 몰락하자 살해의 위험을 당하고, 서궁에 유폐되었다. 비록 광해군이 물러난 뒤 복호가 되긴 했으나 아들과 친정아버지는 죽임을 당했다. 우리에게 『한중록』의 저자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였던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정실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오히려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친정이 폐위된 연산군의 처가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반정공신들에 의해 출궁이 된 것이다.
왕비의 궁중생활의 변수, 궁궐의 다른 여성들 ; 왕비는 왕비이기 이전에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며느리이자 수많은 후궁과 궁녀를 다스리는 역할을 해야 했다. 왕실의 어른인 대비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왕비는 하루아침에 폐위(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될 수도 있고, 후궁이 욕심을 부리면 왕비인 자신은 폐위가 되고(숙종의 비 인현왕후) 거꾸로 후궁(희빈 장씨)이 왕비가 되는 수모를 겪을 수도 있었다. 또한 왕비와 궁녀는 근본적으로 주종의 관계이기는 했으나 때로 연적이 되기도 했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는 후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비는 자신의 궁녀를 주인의 자격으로 관리해야 했지만 동시에 잠재적인 연적으로도 관리해야 했다. 최악의 사례로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효빈 김씨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왕비의 사후, 능호를 붙이는 방식 ; 왕실에는 위계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덤에도 명칭이 있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일 수 있었다. 후궁의 무덤은 ‘묘’라고 하였다. 훗날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에는 ‘원’이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영조가 숙빈 최씨의 무덤을 소령원으로 격상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조선시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역할과 위치를 규정하는 명분을 매우 중시하였고, 이것은 사후 무덤의 호칭에까지 깊이 작용하고 있었다.
정치를 할 수는 없으나, 정치력은 가져야 했던 왕비, 그들의 정치사
조선의 왕비는 공식적으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왕비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의례에 참석하였고, 특히 외척이 든든한 후원자로 조정에 있을 경우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왕비가 왕실의 최고 연장자가 될 경우 왕비는 현실 정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권한을 가졌고, 나아가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도 있었다.
정희왕후, 대비가 왕위를 정하다 ;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재상들이 곧바로 달려간 곳은 예종의 어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의 처소였다. 재상들은 정희왕후에게 예종의 상주를 정해달라고 청하였다. 예종의 상주는 곧 다음 왕위를 잇는다는 의미였다. 재상들의 청을 받아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지목하였고, 이렇게 왕위에 오른 임금이 바로 성종이다. 정희왕후는 어린 성종이 자랄 때까지 청정을 시행하였고, 이렇게 하여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수렴청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문정왕후 ; 1545년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이자 인종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의 섭정을 선포하였다. 이후 인종의 외척인 대윤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외척인 소윤을 동원,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을사사화) 이뿐만 아니라 문정왕후는 유교를 국시로 표방했던 조선에서 광범위한 반대를 물리치고 승려 보우를 통해 불교의 부흥을 꾀하는 등 백성들과 사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와 그녀의 외척 소윤의 영향력은 철렴 이후는 물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외척의 대표 정순왕후와 종친의 대표 정조와의 대결 ;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정은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으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노론에 비판적이었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정순왕후와 그 외척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이들을 좋아할 리 없었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은 물론 즉위한 이후에도 정순왕후와 그 외척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고, 급기야는 암살의 시도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재위 중에 종친의 처우개선과 안위를 위해 노력했으나 매번 정순왕후와 갈등을 일으켰으며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정조가 행했던 시책들을 되돌리고 종친들을 억압하였다.
왕비와 함께 하는 왕의 여인, 후궁과 궁녀들
조선의 왕비가 궁중에서 주로 함께 지내는 여성들은 왕실의 가족과 궁녀들이었다. 왕실의 가족 관계에서 왕비는 위로는 대비를 모시고, 아래로는 세자빈과 후궁을 관리해야 했다. 궁녀들 역시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왕비가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무수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 궁궐의 여성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위계와 질서가 갖추어져 있었고, 그 위계와 질서가 원활하게 잘 유지되도록 하는 것 역시 왕비의 역할이었다.
지위와 위계에 따라 달랐던 아침저녁 문안법 ;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족 간에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참고했던 『주자가례』의 ‘사마씨 거가잡의’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등을 보면 왕비는 아랫사람인 세자빈이나 후궁들로부터 문안 인사를 받기도 하지만 윗사람인 대비에게도 문안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내명부의 수장이기는 하나 왕비가 대비전에 문안인사를 올리는 이유는 유교 윤리가 철저하게 상하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문안의 횟수는 조금씩 달랐는데 세자빈은 왕비에게 매일 아침 문안을 드리고, 후궁들은 일이 있을 때만 문안을 했던 것으로 나온다. 왕비는 대비전에 3일 또는 5일에 한 번씩 문안을 받았던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이 항상 지켜졌던 것 같지는 않다.
간택후궁과 승은후궁 ; 왕의 후궁은 품계에 따라 구분이 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품계가 아닌 신분과 후궁이 되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되었다. 궁녀나 기녀 중에서 사사로이 왕의 승은을 입고 책봉된 후궁은 승은후궁이라 하고, 사대부 출신의 여성으로 정식 간택 절차를 거쳐 책봉된 후궁은 간택후궁이라고 한다. 주로 왕과 왕비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정치적,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후궁은 승은후궁들이었는데 연산군대의 장녹수, 광해군대의 김개시, 숙종대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간택후궁은 주로 후사를 잇기 위해 들인 후궁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킨 예는 많지 않다. 숙종대의 영빈 김씨, 헌종대의 경빈 김씨 등이 대표적이다.
본방나인과 궐 안의 궁녀 ; 왕비가 간택이 되어 궁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가에서 거느리던 몸종이나 유모 등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왕비만이 아니고 후궁이나 세자빈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엄격히 말하면 궁궐의 소속이 아닌 왕비 개인 소속의 종 즉, 공노비가 아닌 사노비였다. 이들을 가리켜 본방나인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궁중에서 왕비는 자신이 친정에서 데리고 들어온 본방나인과 가장 가깝게 지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왕비의 속옷을 빨아주는 것도,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것도 본방나인이었고 심지어는 폐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나갈 때도 함께 하는 것도 본방나인이었다. 때문에 본방나인의 운명은 왕비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본방나인 외에도 중전에는 수많은 궁녀가 배속되어 있었다. 일정치는 않지만 성종 무렵 약 20여 명으로 추정되고, 점점 늘어나 고종 대에는 약 100명 내외가 되었던 듯하다. 궐 안의 궁녀 역시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일차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존재였음으로 충성을 바치는 일차 대상도 자신들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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