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1.조선왕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동방박사님 2022. 6. 1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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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생활로 해부하는 조선 최고 권력자!
조선의 왕,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일성록」, 왕들의 글과 문학작품을 모은 「열성어제」 등의 문집, 의궤와 기록화, 왕을 상징하는 궁중의 유물들, 왕이 살았던 공간인 궁궐 등 다양한 자료를 총동원하여 조선 왕의 일상생활을 실감나게 구현한 책이다.

조선의 최고 권력자이자 그 자체로 '국가'로 인식되었던 왕, 그는 어떤 존재였으며 과연 하루를 어떻게 살아갔을까?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던 왕의 사생활은 어떠했고, 그들의 문학적 성취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왕은 건강을 어떻게 유지했고, 왕들의 질병과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왕이 중심이 된 왕실과 궁중문화는 유교통치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핵심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왕의 진면목을 밝히는 일은 당대 정치 및 사회와 문화, 즉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왕의 호칭과 왕위 계승, 왕이 되는 예식인 즉위식 등 형식적인 부분에서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국왕의 하루 가운데 왕의 사생활, 지식인으로서의 왕의 면모, 건강 관리 등을 세세하게 살펴본다. 의례와 형식, 끝없는 규율과 원칙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왕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이야기는 조선의 역사를 좀 더 흥미롭게 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국가의 상징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고 민생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선 국왕의 치열한 공적 일상과 함께, 인간적인 고뇌와 정서가 엿보이는 개인으로서의 삶의 단편들을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서장 조선시대의 왕
1 왕에 주목하는 이유
2 조선시대의 왕과 왕권
3 호칭으로 본 왕과 왕실
4 조선시대 정치 운영의 특징과 왕의 일상
5 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1부 왕의 권위와 역할
1 왕의 즉위와 정통성의 확립
2 왕의 권위 표현
3 권력자로서의 왕
4 백성과 함께하는 왕

제2부 국왕의 하루 엿보기
1 조선의 하루해가 열리다
2 학문으로 일과를 시작하다
3 신하들의 접견과 업무 보고
4 국정과 민생을 돌보다
5 수라와 조상숭배
6 국왕의 보호와 민국을 위한 고뇌

제3부 왕의 사생활
1 왕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2 쫓겨난 왕들의 사생활
3 칭송받는 왕들의 사생활

제4부 한시漢詩로 보는 국왕의 문학
1 국왕도 시인이었다
2 단종의 비애와 세조의 의지
3 성종과 월산대군의 우애
4 폭군의 시와 정서
5 전환기 국왕의 시
6 국왕의 한시와 문학적 성취

제5부 국왕의 건강관리
1 왕은 왜 건강해야 하는가
2 왕실의 건강관리법
3 왕의 직업병

부록 조선 왕실 세계도|조선의 왕릉|궁궐도

필자 약력
 
 

저자 소개

저 : 심재우 (沈載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강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네 죄를 고하여라: 법률과 형벌로 읽는 조선』, 『조선 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심리록』 연구』, 『조선 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공저), ...

저 : 임민혁

조선시대 전공, 한국의례문화연구소 소장. 주요 논저로 『국역 대한예전』 상·중·하(공역), 『조선국왕 장가보내기』, 『조선의 왕·왕비·왕세자로 살아가기』(공저) 등이 있다.

저 : 신명호 (申明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왕비실록』(역사의 아침, 2007),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역사의 아침, 2014), 『조선왕조 스캔들』(생각정거장, 2016), 『조선시대 해양정책과 부산의 해양문화』(한국학술정보, 2018)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조선 최고 권력자이자 한 인간이었던, 왕의 일상과 사생활을 엿보다!

조선에서 국왕은 어떤 존재였으며, 국정 운영과 공부를 중심으로 한 왕의 하루 일과는 어떠했을까?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던 왕의 사생활은 어떠했고, 그들의 문학적 성취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왕은 어떻게 건강을 유지했고, 왕들의 질병과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시대 왕실은 사적私的으로는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조선의 국권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가’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왕실과 궁중문화는 유교 통치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핵심이며,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중심축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시대 국왕과 국왕권의 실체, 나아가 왕의 인간적인 모습과 진면목을 밝히는 일은 당대 정치 및 사회와 문화, 즉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자 핵심 키워드일 것이다.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는 권력의 정점에 있던 국정 최고 책임자임과 동시에 한 인간이기도 했던 조선의 왕이 살았던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는 우리가 왕을 알아야 하는 이유와, 왕을 제대로 알기 위한 기본 상식을 알려준다. 제1부에서는 덕치와 위민의 의무를 지닌 통치자로서 왕의 역할과 권한을 소개하고, 나아가 왕의 권위 표현 방식 및 왕실 의례의 의미 등을 살펴본다. 제2부에서는 하루의 시간 순서에 따라 국왕이 수행해야 하는 매일의 일과를 개관하였고, 제3부에서는 국왕의 사적 생활이 영위되는 공간인 침전과 후원 등에서 이뤄지는 왕의 사생활, 그리고 쫓겨난 왕과 존경받는 왕의 특별한 사생활을 엿본다. 제4부에서는 시기별로 국왕의 독서와 저술 활동을 살펴보고, 국왕의 시문에 드러난 인간적 면모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5부에서는 국왕의 건강 관리법과 질병 치료, 실제 치료 사례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 등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들은 관찬 자료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왕들의 글과 문학작품을 모은 『열성어제』 등의 어제 문집류, 왕실 주요 행사의 상세 보고서인 의궤와 기록화, 왕을 상징하는 궁중의 유물들, 왕이 살았던 공간인 궁궐 등 다양한 왕실 관련 자료들을 총동원하여 조선 왕의 일상생활을 실감나게 구현해 냈다. 이 책은 몇 해에 걸친 공동 연구의 성실한 결과물이지만, 일반 독자들을 배려해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엮었으며 이야기의 근거가 된 해당 자료들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제시해 줌으로써 보다 현장감 넘치는 이해를 돕고자 했다.

사실 이 책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내용은 왕이 배변 후 뒤처리를 스스로 하지 않았다는 것과, 중국의 황제는 공식적으로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었고 한 달 동안 그들과 여러 조합으로 합궁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연산군이 정력을 위해 궁궐 후원에 동물원까지 경영했다는 엽기적인 사실과, 세종은 고기를 유난히 밝히는 편식이 심한 왕이었고 임질을 포함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는 기록 등이다. 의례와 형식, 끝없는 규율과 원칙으로 가득한 왕과 왕실에 관한 이야기는 왠지 딱딱하고 권위적이거나 어려울 것 같지만, 이렇듯 흥미로운 이야기로부터 쉽게 접근한다면 점차 무궁무진한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한 조선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전문 연구자들이 펴낸 진지하고 성실한 기록물이지만, 곳곳에서 이러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국가의 상징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고 민생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선 국왕의 치열한 공적 일상과 함께, 인간적인 고뇌와 정서가 엿보이는 개인으로서의 삶의 단편들을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왕, 그는 누구인가?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왕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관통하는 초월적인 존재이자, 우주를 통괄하는 덕德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다.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이기에 그 권한이 막강하였고, 이를 규정하거나 제한할 수 없었기에 왕의 권한은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세속적인 최고의 권한과 함께, 하늘 제사를 통해 신과 소통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왕을 부르는 호칭, ‘조’祖와 ‘종’宗의 차이 ; 왕이 살아 계실 때, 그 누구도 감히 왕의 호칭을 부를 수 없었다. 역사 시간에 외웠던 태정태세문단세…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의 명칭은 왕의 사망 후 삼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사용되는 묘호廟號였다. 그런데 어떤 왕은 ‘조’를 붙이고 어떤 왕은 ‘종’을 붙였을까? 중국 문헌인 『예기』禮記에 따르면, “공功이 있는 자는 조祖가 되고, 德이 있는 자는 종宗이 된다”고 하였는데,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선대 왕의 묘호는 후대 왕의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종’보다는 ‘조’라는 호칭을 더 높게 보는 인식이 생기면서, 왕들은 선대 왕을 높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고자 선대 왕에게 ‘조’를 붙이려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호칭은 묘호뿐 아니라 시호와 존호 등이 있었는데, 이 호칭들이 덧붙어 사후 왕에게 붙여진 이름은 몇 십 자를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 ; 조선시대 왕위 계승 방식에는 양위讓位와 사위嗣位, 반정反正이 있었다. 양위는 왕이 살아계실 때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경우, 사위는 왕의 사후에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 반정은 현재의 왕에게 문제가 있어 이를 쫓아내고 다른 왕을 세우는 경우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역사상 양위는 태종이 살아있을 때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경우뿐이다. 본문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실록에서 발췌하여, 흥미롭게 재구성하였다. 또한 묘호를 받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 다음의 왕인 중종과 인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이다. 그렇게 보면,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위 계승은 ‘사위’를 통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왕위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한 권위를 중요시했는데, 조선 27대 왕 중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또한 단 일곱 명의 왕에 불과하며, 장자 승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왕권이 반드시 강했던 것도 아니었다.

왕권을 제한할 수 있었던 요소들 ; 앞서 왕의 권한은 하늘이 내린 것으로, 신성불가침하며 세속에서는 가장 막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왕권을 제한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왕들은 우선 선대 왕들이 마련한 대대로 내려오는 법령과 의례에 제약을 받았다. 다음은 유교적 교리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매사에 유교적 교리에 충실한 도덕적인 군주상을 강조함으로써 왕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규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번째는 정책 결정 구조로, 조선은 국왕 이하 조직된 여러 정책 집행 기관과의 합의를 통해 정책을 수립해나가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시스템으로 운영되었기에 모든 정책을 마음대로 집행할 수는 없었다. 또한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사관의 존재도 왕권을 견제하는 요소였다. 병풍 뒤에 숨어 왕의 언행을 기록하고, 얼굴을 가린 채 숨어들어 왕의 사냥놀이를 기록했던 사관의 존재는 왕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마저 주었다. 사관의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기록인 사초와 이를 기반으로 편찬되는 실록을 왕이 함부로 볼 수 없었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왕이 되는 예식, 즉위식 ; 요즘의 대통령 즉위식은 화려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다. 그러나 조선 왕위 계승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위嗣位의 경우를 살펴보면, 즉위식은 슬픔을 억누른 엄숙한 분위기 속에 국상國喪의 한 과정으로 치러졌다. 새로운 왕은 선왕의 사망 3~5일 후 상복을 입고, 그 뒤 잠시 상복을 벗고 길례복인 면복冕服을 입었다가,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즉위의 절차는 선왕의 유언에 해당하는 유교遺敎와 대보大寶를 받드는 과정, 즉위 의식 거행 과정, 하례를 받고 사유赦宥를 내리는 과정의 3단계였다. 대보를 받들고 어좌에 앉으면, 세자 등의 칭호가 전하殿下로 바뀌었다. 유일한 양위였던 세종의 즉위식과 반정으로 인한 정권 교체 시의 즉위식 모습은 본문 63~67쪽에 그 절차가 상세하다.

오늘 하루, 당신이 조선의 왕으로 살게 된다면?

왕의 하루는 웃어른께 문안을 드리고, 아랫사람에게 문안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왕은 보통 새벽 5시경에 일어났는데, 문안 인사를 받은 후 침전에서 편전 등으로 자리를 옮겨 신하들과의 학문과 정치토론을 위한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경연이 끝나고 아침식사를 한 후에는 조회朝會가 시작되었는데, 왕의 공식 집무는 이때부터였다. 조회는 관원들과 국정을 논하는 자리로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조참, 상참, 차대, 윤대 등이 있었다. 경연과 조회라는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점심식사를 하고, 정오경에 다시 경연에 나아갔다. 낮에 하는 강의라 하여 주강晝講이라 하였으며, 주강 이후 지방 파견 관리들을 만나 행정에 관한 보고를 받거나 민원을 해결하는 등, 오후에도 역시 국정과 민생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업무들을 마치고 오후 5시경이 되면 왕의 공식 업무가 끝났는데, 이것으로 하루 업무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었고 다시 석강이라 불리는 저녁 경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석강 후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낮에 처리하지 못했던 업무를 마저 보기도 했다. 본문 제2부의 『국왕의 하루 엿보기』에서는 위와 같은 일과에 따라 국왕의 하루를 살펴보며, 국왕의 공적 업무 수행의 실례와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을 통해 현장감 있게 재구성하였다.

왕에게도 사생활이 있었다

이토록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조선의 왕에게, 과연 사생활이 있었을까? 이 책에서는 왕의 사생활을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이야기해 준다(?3부 『왕의 사생활』). 왕의 침전이었던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이 갖는 의미와 이곳에서의 실제 왕들의 부부생활, 쫓겨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의 사생활, 그리고 칭송 받았던 왕인 세종과 정조의 사생활이 그것이다.

강녕전이라 이름 지은 뜻 ;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중전 영역인 교태전, 후궁들의 영역인 후궁을 중심으로 왕의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이 이루어졌다. 경복궁 각 전각의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아 조선왕조 설계의 총책임을 맡았던 정도전이 지었는데, 그가 경복궁 침전을 강녕전이라 이름 지은 것에는 왕의 밤 생활에 대한 유교적 훈계가 들어 있었다.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천하 통치의 아홉 가지 비결)에서 말하는 복 중에 강녕이라는 복이 있는데,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 황극皇極을 세우면 이 강녕이라는 오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황극이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태극’과 같은 의미로, 우주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근본이며 지극히 고요한 중용의 상태를 뜻하였다. 즉 정도전이 왕의 침전을 강녕전이라 이름 붙인 데는, 왕이 밤 시간 동안 우주의 황극과 같은 중용의 도를 닦음으로써, 복을 누리고 왕조를 더욱 굳건히 하며 복을 후세에 전하라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왕이 인간적인 욕망에 휩싸여 중용의 도를 잃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 왕들의 밤 생활 ; 동양에서 황제나 왕의 부부생활에 관한 유교적 전범은 『주례』에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 중국 황제는 공식적으로 총 121명의 배우자를 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121명 배우자와의 한 달간의 합방 방식도 규정해 놓았는데, 최고 9명과 합방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기록상으로 배우자들과 집단 합방을 하지 않았다. 『주례』에서는 황제가 하루도 쉬지 않고 황후나 후궁들과 합방하는 것으로 규정하였지만 조선의 왕은 매일 밤 합방하지도 않았다. 왕과 왕비는 평소에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다가 후손을 생산하기에 길한 날을 잡아 합방하였으며, 그 외에 왕의 합방은 순전히 왕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황제들은 환관들과의 동성애 기록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왕의 경우 비교적 성 윤리가 엄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선 왕의 배우자와 자녀수에 대해서는 364~370쪽 부록, 왕실 가계도 참조)

연산군의 흥청망청 ; 조선의 왕들 중 가장 타락한 사생활을 한 왕으로 연산군을 꼽는다. 조선시대의 정도전이나 율곡 이이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은, 왕도정치의 기초는 왕의 수양 즉 왕의 모범적인 사생활이라 주장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연산군은 최악의 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연산군은 서른한 살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는데, 지붕 없이 개방된 평교자를 타고 완전히 노출된 채 많은 주민들의 야유를 받으며 강화 교동으로 압송되었다. 연산군이 음주가무를 위해 뽑아 들인 기생들을 ‘일만 흥청’이라 불렀는데, 연산군은 이들을 늘 곁에 두고 내키는 대로 즐겼으며, 더욱 많은 여성들을 섭렵하기 위해 정력 식품에도 집착했다. 『연산군일기』에는 보양 식품 섭취를 위해 창덕궁 후원에 동물원과 마구간을 두고 사냥을 했고, 육해공의 진귀하고 기괴한 짐승들의 진상이 전국 각지로부터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백성 생활의 근간인 말과 소를 정력에 좋다고 마구 소비한 왕의 행태는, 극렬히 지탄받은 파행이었다.

공부를 사랑한 일벌레 세종 ; 조선시대 왕과 유학자들은 왕도정치의 이상을 ‘요순시대의 구현’에 두었다. 요순시대의 실현을 위해서는 왕의 덕성이 중요하고, 왕이 덕을 닦기 위해서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 왕의 공부가 바로 ‘경연’이었으며, 경연의 공부 내용이 바로 제왕학이었다. 조선시대 왕들이 공부한 제왕학의 기본 교제는 사서삼경이었고, 그중에서도 『대학』이 가장 널리 이용되었다. 형 양녕과 효령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세종은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세종은 책을 읽을 때 100번?200번을 반복 독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즉위 후 제왕학의 학습을 위해 전력했으며 『대학연의』를 통해 제왕학을 시작했다. 재위 32년간 날마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였으며, 보통 새벽 2~3시에 일어나 공무를 시작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주로 공부하고 사색하는 데 썼다고 실록은 전한다. 이러한 탁월한 학문적 소양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재위 기간 세종은 수많은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모범적인 심성 수양, 정조 ; 새벽부터 밤까지 공무에 바빴던 조선시대 왕에게, 자기만의 시간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고민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던 왕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꼭 필요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틈 날 때마다 ‘회심와’會心窩라고 하는 움집에 들러 자신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말 그대로, 바쁜 일상 속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하기 위한 장소였다. 『홍재전서』에는 이 공간에 대한 글인 『회심와명』會心窩銘이 남아 있는데, 규모가 작고 소박한 이 움집에서 마음과 도를 모으고 스스로 경계하니 마음이 맑아진다고 토로했다. 이곳에서 그는 명상과 독서로 마음을 닦았다. 정조의 수신에 대한 노력과 다짐은 그의 호 “만천명월주인옹”에도 잘 드러나는데, 이 호와 관련된 『홍재전서』에 실린 글에는 태극과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닫고 이러한 깨달음과 덕을 만천하에 달처럼 비추는 존재가 되고자 스스로를 연마하였던 정조의 의지가 담겨 있다. 정조는 이렇게 얻은 맑은 마음과 깨달음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갔으며, 그의 큰 성취 뒤에는 모범적인 심성 수양이 있었다고 하겠다.

학자이자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조선의 왕, 그들이 남긴 시와 문집

한 나라를 통치하는 공적 주체이자 왕실의 가장이며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조선의 국왕. 건국 직후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던 조선 초기의 왕들과 단명했던 왕들을 제외하고, 국가적?사회적으로 안정을 이룬 성종 대 이후의 국왕들은 전문 작가 못지않은 뛰어난 시문詩文을 남겼다. 국왕이기 이전에 성리학에 바탕을 둔 학자이자 지식인이었기에, 독서와 그에 따른 기록, 시문의 창작은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왕의 글을 모은 문집 발간 ; 왕의 시문이 문집의 형식으로 간행된 것은 숙종 이후의 일이다. 특히 영조의 문집은 『어제집경당편집』御製集慶堂編輯, 『영종대왕어제속편』英宗大王御製續編, 『영종대왕어제』英宗大王御製, 『어제시문』御製詩文 등 여러 권으로 나뉘어 편집되어 있다. 또한 봉모당奉謨堂(정조 대에 역대 왕들의 글, 글씨, 그림, 고명, 유고 등을 보관했던 전각)에 소장되어 있던 3,000여 첩에 이르는 시첩도 남아 있다. 완벽한 문집의 형태로 발간된 것은 정조의 『홍재전서』로, 정조가 살아 있을 때 직접 정리를 명하여 발간하도록 했다. 영조와 정조의 문집 이후 국왕의 문집이 별도로 간행되는 전통이 마련되었으며, 이후 왕의 다양한 편저들은 『열성어제』에 편입되는 동시에 별도의 문집으로도 간행되었다.

시문에 표출된 국왕의 마음 ; 『열성어제』에 실려 있는 시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단종이 영월 유배 중에 지은 시가 있다. 왕위를 빼앗기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서, 유배 중의 억울한 심사와 서글픈 신세를 한을 품은 채 쫓겨난 어린 새에 비유한 ‘영월군 누대에서 짓다’라는 시이다. 반면 어린 조카를 내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등극을 정당화하며 난국을 헤치고 대업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진취적인 시를 남기기도 했다. 방탕한 생활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오히려 왕으로서는 쉽게 표출하기 힘든 솔직한 내면의 감정을 여과 없이 시로 표현했다. 그의 광기가 표출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어머니의 죽음과 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시, 그리고 싫은 경연에 참석할 것을 강권하는 신하에 대해 유감을 표현한 시, 연정과 취락醉樂을 주제로 여과 없이 감정을 표출한 시 등이다. 그는 시 창작의 핵심이 인간의 자연스럽고 진실한 감정과 욕구의 표출에 있다고 보았다. 쫓겨난 왕으로 『열성어제』에도 실리지 못했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 받는 그의 작품은 『연산군일기』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효와 세손을 향한 사랑 ; 영조는 조선 국왕 중에서 가장 많은 독서를 하고 가장 많은 창작물을 남긴 왕이다.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며 세자와 세손, 신하들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서 끊임없이 회한하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3,000여 첩의 시첩에 남겨진 그의 시를 통해, 인간 영조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영조를 가장 영조답게 만드는 것은 미천한 무수리 출신으로 평생 겸손하고 근신했던 어머니 숙빈최씨에 대한 그리움과 추숭의 사업들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장수했고 가장 오랜 기간 재위했던 영조의 시는, 평생에 걸친 어머니에 대한 효와 세손 정조에 대한 애틋한 가르침으로 일관된다.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왕,
그들의 건강은 어떠했으며, 질병과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왕을 중심으로 돌아갔던 사회 조선, 당연히 조선에서 왕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자 아프면 여러 사람이 괴로운 존재였다. 왕의 건강상태나 질병, 죽음은 늘 관리되고 예상되고 준비되어야 했다. 왕은 다음 왕을 생산해야 하는 존재였기에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 왕은 매일 음식을 잘 먹고 순환을 잘 시켜야 했으며, 신하들은 이를 상시로 확인했다. 국왕의 병은 미리 예방되어야 했고, 병이 나면 잘 대처해야 했다. 따라서 왕의 식사 관리와 어의御醫 시스템은 철저하게 갖추어져 운영되었다.

하루 다섯 번, 궁중의 일상식 ; 궁중의 정식 식사는 아침 10시경의 아침 수라와 오후 5시경의 저녁 수라이다. 이외에 초조반이라 하여 죽이나 미음 등을 올리는 조반 전에 먹는 식사와, 간단한 점심, 야식의 총 5번의 식사가 있었다. 왕의 수라는 흔히 12첩 반상이라 부르는데 밥과 탕, 조치(찌개), 찜, 전골, 김치류와 장류를 제외하고 12가지의 반찬을 올리는 밥상이다. 왕의 수라에는 고기와 생선류, 숙채와 생채, 해조류 등이 골고루 차려져 영양상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왕 중에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편식을 하는 왕들도 있었다. 『계축일기』에는 ‘날고기를 즐겨 눈이 점점 붉어지더라’라는 광해군의 식성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세종 역시 고기를 무척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상 3년 동안 왕도 고기를 금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태종은 이러한 아들의 식성을 염려하여 세종이 원래 국상 중 금지되어 있던 육식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세종은 태종의 상중 6개월만 고기를 금하고 그 이후에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왕의 운동과 신체 단련 ; 조선의 국왕들은 평생의 대부분을 궁궐에서 살아야 했고 또한 정무에 바빴기에, 운동량이 절대 부족했을 것이다. 또한 끊임없는 권력에의 도전과 신하들로부터의 견제, 과중한 업무 등으로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왕이 궁궐 안에서 행할 수 있었던 운동이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는 사냥과 격구, 활쏘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왕들의 기호에 따라 무예武藝에 능했던 태조나 세조?태종은 활쏘기나 사냥을 즐겼고, 몸 움직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세종 같은 왕은 이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특히 격구에 대한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은 격구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통달해 있으면서도 실제 격구를 즐기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다른 목적으로 사냥을 즐겼던 연산군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사냥을 했음이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중종 대 이후 사냥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점차 줄어들고, 왕과 신하들이 활쏘기 하는 행사는 유지되지만 도덕적이고 호학적인 분위기가 점차 더해지면서 왕의 사냥은 사라져갔다.

세종의 과로와 비만 ; 세종은 스스로도 과로를 삼가야겠다고 했을 만큼 늘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다. 그러나 앉아서 공부하고 일하기 좋아했던 세종은 육식을 좋아하고 비만했으며, 운동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다리가 아픈 풍병, 피부에 생기는 종기, 당뇨로 인한 소갈과 시력 저하, 요즘도 앉아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척추 관련 질병, 운동부족과 비만으로 인한 관절 이상 등 다양한 성인병을 앓았다. 또한 임질을 앓았다고도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성병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기 학자인 권근權近도 자신이 임질에 걸렸다고 하였는데, 세종은 임질 때문에 정사를 보기 어려울 정도라 토로하기도 했다. 비록 성군으로 칭송받고 수많은 업적을 이룬 왕이지만 건강관리에는 취약했던 세종은, 안타깝게도 말년에 거의 없는 병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의 잘 관리된 죽음 ; 숙종은 60세의 나이로 승하했는데(1720년), 죽기 전까지 오랜 기간 병석에 있었다. 재위 기간이 길었던 숙종은 그 동안 질병이 무척 많았는데, 1713년 이후 계속 병이 반복되었으며 1717년에 이르면 업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결국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숙종은 꼭 집어 무슨 병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인 증세를 호소했는데 특히 포만증, 부기, 변비, 창증(가슴이 답답한 증상), 다리 통증, 한열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숙종이 승하하기 전 6개월 동안의 상황을 일별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숙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질병의 상황과 신하들의 간병 과정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종의 임종을 대비한 6개월 동안 신하들은 매일의 상황에 신속하고 충실히 대처하면서도, 왕의 관인 재궁을 준비하는 등 철저하게 죽음에 대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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