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1.조선왕

왕의 화가들

동방박사님 2022. 6. 2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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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왕의 얼굴을 그린 화가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1897~1910)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왕실의 회화(繪畵)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왕의 화가들’을 크게 네 가지 주제 하에 분석한 치밀하고도 풍부한 연구 성과물이다. 시리즈의 전작 『왕과 국가의 회화』와 『조선 궁궐의 그림』이 각각 최고 통치권자인 “왕”과 궁궐이라는 공간 속의 “그림”을 중심으로 조선의 궁중회화를 살폈다면, 이 책은 실제 그림을 담당했던 사람들 “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로써 “왕”, “그림”, “화가”를 중심으로 각각 살펴본 조선시대 궁중회화 3부작이 완결되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속해 일하던 기능직 장인(匠人) ‘화원’(畵員)에서부터, 왕을 직접 대면하여 왕의 초상을 그리고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던 화원들의 로망 ‘어진화사’, 조선 문예 최성기인 정조 대에 새롭게 마련되어 화원의 전성기를 구가한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대한제국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기에 외교관ㆍ기술인ㆍ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으로 발돋움하며 예술가로서 폭넓은 활약상을 보여준 ‘근대 전환기 화가들’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 살면서 시대를 그림으로 대변한 조선시대 궁중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면면히 살피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조선시대 화원畵員과 궁중회화 _황정연
1 화원畵員, 궁중회화를 탄생시키다
2 화원의 신분과 생활 여건
3 화원제도의 운영과 변천
4 화원의 시험과 선발
5 화원의 임무와 역할
6 화원 가문의 형성과 세습
7 화려한 궁중회화 뒤에 숨겨진 화원의 삶

제2부 왕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 _윤진영
1 왕의 초상과 어진화사
2 어진화사의 선발과 평가
3 선대 왕의 어진과 어진화사
4 재위 왕의 어진과 어진화사
5 어진화사의 그림 세계

제3부 제국의 황실화가들, 화가에서 '시대인'으로 _강민기
1 전환기 한국화단의 왕실의 화가
2 도화서의 마지막 화가들
3 외교의 문화사절이 되어
4 화가에서 기술직 전문인으로
5 근대 미술교육의 선구자들
6 외국인 화가들의 활동

제4부 궁중회화에 담긴 길상의 세계
1 궁중회화에서 길상의 중요성
2 천지에 담긴 길상의 도상과 양식
3 동물에 담긴 길상의 도상과 양식
4 식물에 담긴 길상의 도상과 양식
5 궁중회화에 나타난 길상 표현의 특징

부록
 

저자 소개 

저 : 윤진영 (尹軫暎)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으로 1998년 석사학위와 200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있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이며 왕실문헌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서울시문화재 전문위원, 한국민화학회 회장,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조선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왕의 화가들』(공저), ...

 

저 : 강민기 (姜玟奇 )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충북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 주요 논문은 「동양화의 근대적 모색: 한국적 기법과 일본적 기법의 경계」, 「일제 강점기 한국과 일본의 서화회 연구: 전통의 계승과 재편」, 「대한제국기 궁중회화를 담당한 화가들」 등이 있다. 최근에는 변관식, 이숙자, 천경자, 하태진, 오태학, 박래현 등 한국의 근현대 작가론을 썼다. 공저로는 ...
 

 

저 : 황정연 (黃晶淵)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논저로는 「조선시대 서화수장書畵收藏 연구」, 「『흠영欽英』을 통해 본 유만주兪晩柱의 서화 감상과 수집활동」(『미술사와 시각문화』 7호), 『조선왕실의 미술문화』(공저, 대원사, 2005)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왕의 화가,
그림으로 시대를 말하다


이 책 ‘왕의 화가들’은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1897~1910)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왕실의 회화繪畵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왕의 화가들’을 크게 네 가지 주제 하에 분석한 치밀하고도 풍부한 연구 성과물이다. 시리즈의 전작 『왕과 국가의 회화』와 『조선 궁궐의 그림』이 각각 최고 통치권자인 “왕”과 궁궐이라는 공간 속의 “그림”을 중심으로 조선의 궁중회화를 살폈다면, 이 책은 실제 그림을 담당했던 사람들 “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로써 “왕”, “그림”, “화가”를 중심으로 각각 살펴본 조선시대 궁중회화 3부작이 완결되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속해 일하던 기능직 장인匠人 ‘화원’畵員에서부터, 왕을 직접 대면하여 왕의 초상을 그리고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던 화원들의 로망 ‘어진화사’, 조선 문예 최성기인 정조 대에 새롭게 마련되어 화원의 전성기를 구가한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대한제국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기에 외교관ㆍ기술인ㆍ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으로 발돋움하며 예술가로서 폭넓은 활약상을 보여준 ‘근대 전환기 화가들’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 살면서 시대를 그림으로 대변한 조선시대 궁중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면면히 살피고 있다.

아쉽게도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김홍도나 신윤복, 장승업처럼 오랫동안 회자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해진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조선시대 각종 왕실 행사에서 일했던 장인匠人으로서 작업한 내용과 이름 정도가 간략히 기록에 남아 있을 뿐, 그들 개인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들은 많지 않다. 왕조 교체기의 화가들 역시 체제의 혼란을 겪으며 안정된 화업畵業을 행할 수 없었고 그들에 관한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남아 있는 기록 자료들과 화가들의 개성적인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연구하여 ‘조선시대 궁중화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화원畵員, 화려한 궁중회화 뒤에 숨겨졌던
조선 최고의 예술가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는 화원畵院제도를 두어 화가들을 양성했다. 이들은 화원畵員이라 불렸으며, 왕실의 다양한 행사와 의례ㆍ외국 사신의 접대ㆍ궁궐의 영건 등 궁중에서 일어난 일상과 모든 현장을 시각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왕족의 상주 공간을 치장하는 길상화, 가례ㆍ상례ㆍ즉위식 등 행사에 소용되는 그림들과 행사 기록화, 왕세자의 교육과 왕 및 신하들의 감계를 위한 감계화, 국가가 편찬하는 기록물에 삽입되는 삽화와 도설圖說, 건물을 치장하는 벽화와 단청, 왕이 지방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려 바치도록 한 각종 지도와 지방지형도, 최고 지존의 모습을 그린 왕의 초상화와 공신들에게 왕이 사여하는 공신초상까지, 조선 궁궐의 화가들은 조선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남긴 숨은 주역들이자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었다.

제1부에서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회화 담당 관청 도화서圖畵署 시절부터, 궁궐 내 화업畵業과 편찬 사업이 절정에 달하며 화원에 대한 대우도 최고에 이르렀던 정조 대 차비대령화원 시기,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왕조인 대한제국기까지, 조선시대 화원은 어떤 역할을 하였고 화원의 신분적 지위는 어떠하였는지, 화원은 궁궐의 미술 작업을 하고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그 대가는 어떠했는지, 화원을 어떻게 뽑았고 조선시대에 화원제도는 어떻게 유지되었는지, 시대가 흐르면서 화원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예술가로서 인식되는 시기는 과연 언제부터인가라는 주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조선시대 화원의 삶 전반에 대한 치밀한 접근을 시도한다.

17세기에 이르면 기술직 중인층의 지위가 상승되기 시작하고 화가들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는데,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기록을 통해 40개 이상의 화원 집안이 파악된다. 미법산수를 발전시킨 이정근을 배출한 경주 이씨 가문, 김득신ㆍ김응환 등 조선 후기 풍속화와 진경산수의 걸출한 화원을 배출한 개성 김씨 가문, 문방도 그림에 뛰어났던 이형록으로 대표되는 전주 이씨 가문, 아버지 장득만과 아들 장경주로 대표되며 200년 이상 화원 가계를 이어온 인동 장씨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화원 가문의 형성과 세습, 그리고 그들이 남긴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작품들을 통해 궁중의 화원직과 직업화가를 오가며 구축했던 화원들의 뛰어난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어진화사,
왕의 얼굴을 그린 화가들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의 제작은 왕명과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시행된 왕실의 주요 행사였다. 엄격한 검증을 거친 전문 화가를 선발하여 그림을 맡겼고, 왕과 대신들도 제작과정을 살피며 점검하였다. 이를 통해 그려진 어진은 왕과 왕실의 위엄이 깃든 엄정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어진화사에게는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대상에만 충실하는 철저한 사실정신과 객관적인 시각이 요구되었다. 수많은 전문 화가들이 오르고자 했던 어진화사御眞畵師는 당대 최고의 기량을 지닌 화가로서 어진을 포함한 초상화의 발전과 왕실문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인 어진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들이 몇 점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진화사들의 공력이 집적된 그 수많은 어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창덕궁 신선원전에 보관되었던 어진이 한국전쟁 중 부산에 옮겨졌다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1935년의 기록인『선원전영정수개등록』璿源殿影幀修改謄錄에 의하면 이곳에 46본의 어진이 최종 봉안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안타깝게도 화재 현장에서 구해내 현재 남아 있는 어진은 〈태조어진〉〈영조어진〉〈철종어진〉〈순조어진〉〈익종어진〉 등 총 5점뿐이다.

어진을 그릴 화가는 ‘시재’試才라는 선발 시험을 통해 실력 있는 화가를 엄정하게 검증한 뒤에 선발하였다. 솜씨에 따라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主觀畵師, 의복과 신체를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그리고 배경을 담당하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뉜다. 이들 가운데 주관화사는 왕이 지목하는 경우도 있고, 지방 출신의 화가와 함께 시재를 거쳐 낙점되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남아 있는 실제 작품은 적지만, 조선시대 어진 제작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다. 제2부에서는 어진 제작 관련 자료를 통해 어진을 그렸던 화가들의 선발 과정과 그들의 작품 경향을 꼼꼼히 분석한다.

어진을 그린 화가들의 선발 과정과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진의 도사(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경우), 모사(이미 그려져 있는 작품을 보고 그리거나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베껴 그리는 경우), 추사(왕의 얼굴을 기억하거나 상상해서 그리는 경우) 때에 남겨진 관련 의궤나 그날의 일정을 남긴 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에서 편찬한 기록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영조어진〉(이모)이나 〈철종어진〉(도사), 어진박물관 소장의 〈태조어진〉(모사)처럼 작품과 그 제작 경위를 함께 알 수 있는 작품들이 있고, 현재 어진은 남아 있지 않으나 기록과 함께 남아 있는 해당 화가의 일반 사대부 초상을 통해 어진의 수준과 양식을 유추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 최고의 어진화사로 꼽히는 화가로는 조세걸, 윤상익, 진재해, 변상벽, 장경주, 이한철, 이재관, 조중묵, 박기준, 조석진, 채용신 등이 기록으로 전한다. 그 가운데 영조시대 최고의 어진화사라면, 전신傳神(형태와 정신까지 오롯이 담음)의 경지에 이른 초상화를 그렸다고 평가되는 장경주를 꼽을 수 있다. 영조어진 도사를 주도하고 영조의 부왕인 숙종어진의 모사에서도 주관화사로 참여한 그가 그린 〈윤증초상〉이 남아 있어, 그가 그렸다는 영조어진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 걸작 초상화라 칭해지는 〈오재순초상〉과 김홍도와의 합작 〈서직수초상〉을 그린 이명기는 정조의 어진을 수차례 그린 정조시대 최고의 어진화가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의 〈태조어진〉은 고종 재위 연간(1872년)에 모사된 그림으로, 기존에 존재하던 원본의 퇴색과 화재로 인한 소실을 복구하기 위해서 모사가 진행되었다. 주관화사는 조중묵과 박기준이 맡았다. 당시는 서양화법이 도입되어 초상화에도 어느 정도 입체감이 표현되던 시기였으나, 이 어진은 정면상과 평면적인 얼굴 표현 등 고식적인 표현요소를 유지하며 원화의 특색을 옮겨 그렸다. 조선 말기 최고의 화가인 조석진과 채용신이 그린 〈영조어진〉(1900년 제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은 1744년에 장경주와 김두량이 그렸던 영조어진을 이모한 것이라 하는데, 〈고종어진〉 같이 당시 사진과 같은 입체적인 표현으로 주가를 올리던 채용신의 개성적인 화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27세에서 61세(1838~1872)에 이르기까지 규장각의 차비대령화원을 지냈고 그 동안 세 차례나 어진화사로 일했던 이한철 역시 인물화와 산수화 등 화역을 구분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꼽힌다. 철종의 어진을 두 차례 그렸고 고종의 어진도 그렸는데, 그 중 군복을 입은 〈철종어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이 남아 있다.

시대적 격변기,
다채로운 화가들의 삶


제1부와 2부가 왕실 소속 관청에 속하여 봉직했던 화가 즉 ‘화원’의 이야기라면, 세 번째 이야기는 그 대상이 조금 달라진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화원’의 위상과 개념, 화원이 속하여 일하는 조직체계와 역할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제3부에는 갑오개혁 이후 변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들과, 궁궐을 출입하며 그림을 남긴 화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 초기부터 왕실 화업畵業의 핵심을 이루었던 도화서가 갑오개혁(1894년) 이후에 폐지됨으로써, ‘화원’이 속한 조직이나 화가들의 명칭은 복잡하고 혼란스런 변화를 거쳤고, ‘장례원’(1907년)의 ‘도화서기랑’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명칭은 사라진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황실의 재건사업과 다양한 장식화 제작에 당시 궁내부에 속했던 화가들의 참여가 활발하였을 것이나, 각종 의궤와 어진의 모사나 도사에 참여한 것 이외에 개개 화가들의 활동 내역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고 그 위상이 흔들림과 동시에 전환기 화원화가들의 활동과 위상도 위축되었으며, 많은 수의 화원들이 국가의 공적 활동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수요에 응해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이들이 동시대 화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화되면서, 이들에 관해 주목한 동시대나 후대의 기록 및 성과가 미미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환기의 황실화가들은 비록 익명의 화가들이긴 해도 19세기 또는 19세기 후반 작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궁중 장식화와, 같은 소재 민화류들의 제작과 관계가 있을 것이며, 정형화된 소재와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화려한 채색과 기량 면에서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많이 창작해 낸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반면 전환기의 화가들 가운데 황실과 권력층의 최측근에 있으면서 국가적 위기상황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들도 있었다. 대외교섭에 동원되고, 직접 외교관이 되어 문화사절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국가 주도의 개화정책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외래문화를 일찍이 접하고 이를 통해 신문물을 익혀 기술직 전문인이 된 화가도 있었고, 미술교육자로서 전통화단과 근대화단의 가교 역할을 했던 화가들도 있었다.

도화서 시절의 화원으로 철종의 어진도사에 참여하였고 철종 대의 의궤 제작에 참여한 바 있던 김용원은, 1876년에는 수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개화파와 고종의 신임을 받던 그는 조러밀약 때 고종의 밀사로 러시아에 파견되었을 만큼 외교적으로도 큰 역할을 했던 화원화가이다. 명성황후의 조카로 뿌리를 드러낸 〈노근묵란도〉로도 유명한 민영익은 조선 보빙사의 일환으로 미국에 다녀온 인물로,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하고 말년에는 망명지 상해에서 시서화를 벗삼아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학 역관으로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화가 강진희는 미국의 풍경을 그린 풍경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60대 이후에는 미술단체의 조직과 미술교육에도 몸담았다. 평양화단의 대표 화가였던 양기훈은 노안도로 유명한 도화서 화원으로 화원화가로서의 활동상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83년 민영익이 이끄는 보빙사 일행을 수행하여 미국을 다녀오면서 《미국풍속화첩》을 그렸다고 한다. 왕께 헌상했던 그의 다양한 화조화 작품들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여항문인의 한 사람으로 고종을 촬영한 지운영, 우리 문화재와 국토의 풍경을 찍은 사진가이자 서화가 황철, 영친왕의 사부로 천연당사진관을 운영했던 김규진 등의 기술직 전문인으로서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 외 여러 화가들의 다채로운 삶의 궤적은 제3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궁중회화 속
‘길상’의 의미와 표현들


이 책이 왕실과 관련된 화가들 즉 인물들을 주로 이야기하는 데 반해, 4부에서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왕의 화가들’을 이야기한다.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은 누구보다 길상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했으며,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도 익숙해야 했다. 화원 그림의 양식과 길상 표현은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궁중의 모든 그림들은 상징을 빼놓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징조’를 뜻하는 각종 길상 의미들을 총망라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길상 하면 대개 복록수福祿壽 즉 다복과 입신출세ㆍ장수 등을 말하지만, 궁중 길상의 키워드는 왕위 계승과 관련이 있는 장수와 다남多男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해와 달ㆍ구름ㆍ파도와 폭포ㆍ산과 바위 등 천지자연에 담긴 길상의 상징 의미와, 봉황ㆍ거북ㆍ사슴ㆍ학ㆍ공작ㆍ원앙 등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에 담긴 길상의 의미, 모란ㆍ복숭아ㆍ영지ㆍ연꽃ㆍ소나무ㆍ매화ㆍ대나무 등 장수와 다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에 깃든 길상의 의미를 상세히 살펴보면서, 이러한 소재들이 궁중회화에 어떠한 형식과 양식으로 재현되고 있는지를 함께 알아본다. 이를 통해 왕실 화가들이 숙지하고 표현해야 했던 길상의 그림세계와 그 양식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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