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4.대한제국사

대한제국 황제릉

동방박사님 2023. 1. 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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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한제국 황제릉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

대한제국은 고종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만든 제국이었다. 비록 단명하긴 했지만 고종은 자신을 황제라고 칭한 유일한 왕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황제릉이 두 곳 있다. 고종과 순종의 무덤인 홍릉과 유릉이 그것이다. 이 책은 황제릉 조성의 시대적 배경을 분석하고 청량리 명성황후의 홍릉에서 고종 홍릉 조성까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대한제국의 황제릉은 격동기였던 조선말-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비단 대한제국 황제릉에 대한 서술에만 그치지 않고 고종이 모델로 삼았던 중국 명·청 시대의 황제릉들을 사진과 설명으로 실었다. 이로써 조선 왕릉과 대한제국의 황제릉 그리고 그 모델이 되었던 중국의 황제릉까지 모두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I . 머리말
II . 대한제국 황제릉 조성
1. 시대적 배경
2. 대한제국 황제릉의 구조
III . 고종 홍릉
1. 홍릉의 조성 과정
2. 홍릉의 석물
IV . 순종 유릉
1. 유릉의 조성 과정
2. 유릉의 석물
V . 맺음말

특집. 중국 황제릉의 신도석물

도판목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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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김이순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사학 석사 학위를 취득, 뉴욕주립대학교(버팔로)에서 각각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부교수, ICOMOS-Korea 위원,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이다. 현재는 한국 조각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근현대 조각은 물론, 전통 조각 중에서 능묘 조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현대조각의 새로운 지평』,『한국의 근현대미술』,『근대미술의 대외교섭』(공...
 

출판사 리뷰

1. 기획의도

한국 역사상 황제는 단 두 명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릉도 단 두 기가 남아 있다. 바로 홍릉과 유릉이다. 2009년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으나, 전문적인 연구서는 이번이 첫 출간이다. 연구 결과 수많은 역사적 곡절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

고종이 서거했을 당시 이미 고종은 황제가 아니었고 순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왜 존재하지도 않는 황제의 능을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했을까? 그리고 과연 그 능은 조선총독부 단독으로 조성한 것일까?

연구 결과 고종은 30년 이상 황제릉 조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터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세부 사항의 준비 작업에도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러므로 고종의 의지 또한 일정하게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달려 있는 그 긴박한 시기에 황제릉 조성에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을까?

단 두 기의 황제릉은 현재 문화유산으로, 조용한 공원처럼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일제와 대한제국(혹은 고종), 두 세력의 각축전이 황제릉의 석물과 건축양식 면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역사의 길항을 꼼꼼하게 들여다본 연구가 바로 이 책이다.

2. 주요 내용

- 대한제국 황제릉 조성 배경
황제릉 조성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조선 왕릉과 대한제국 황제릉을 구조적으로 비교하며 그 상징성을 설명한다.
- 고종 홍릉
청량리 명성황후의 홍릉에서 고종 홍릉 조성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황제릉으로 격상된 홍릉의 석물 종류, 제작 방식, 조성 배경에 따른 시대적 상황과 특징을 살펴본다.
- 순종 유릉
순명황후의 유강원에서 순종 유릉의 조성까지 일제가 주체가 되어 진행되었던 능역 조성의 배경과 조성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석물 양식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 살펴본다.
- 중국의 황제릉
고종이 모델로 삼았던 중국 명·청 시대의 황제릉들을 사진과 설명으로 실었다. 조선 왕릉과 대한제국의 황제릉 그리고 그 모델이 되었던 중국의 황제릉까지 모두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3. 흥미로운 대목들

러시아 공사관에서 꾼 황제의 꿈
19세기 후반의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고종은 1895년에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다. 그런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치욕적인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특명을 내려 중국에 화가를 보낸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능을 모사(模寫)해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특사의 이름이나 정확한 날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 즉 1900년에 황제릉 조성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러시아 공사관에서부터 대한제국 황제와 황제릉의 꿈을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다.

황후의 능을 천봉하라
명성황후의 무덤은 본래 청량리에 왕릉 형식으로 조성되어있었다. 하지만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의 묘를 천봉하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이후 바로 천봉에 들어갈 장지를 선정하였는데 ‘남양주 금곡’이 길하다 하여 금곡으로 정해졌다. 당시 천봉의 이유로 황후의 묘터가 ‘허(虛)’하다는 명분을 들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청량리로 장지를 정할 때 전국에서 터를 잘 보는 이들 8명을 모두 대동하였었기 때문이다. 아마 청량리 홍릉이 황제릉으로 조성하기에 터가 좁았기 때문이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이로써 고종의 황제릉의 꿈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장례는 일본식으로, 무덤은 황제릉으로
고종은 황제릉 조성 사업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1919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황제의 장례는 승하한 직후에 『상례보편』에 따라 조선식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하면서 일본식으로 변경되었다. 황제라면 7개월장이고 왕이라도 5개월장으로 치러져야 했지만, 3개월 장으로 축소되어 진행되었고, 하관식도 밤 10시에 거행되는 아픔을 겪었다. 일제는 궁내에서 진행된 ‘국장 의식’은 완전한 일본식으로 진행했고, 민중들이 볼 수 있는 ‘장지 행렬’만 조선식으로 진행하였다. 3·1운동으로 민심이 무서운 시기였다.

일본인 조각가, 순종을 위해 조각하다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당하고 ‘이왕’으로 강등되었으며 사후 금곡에 묻혔다. 1926년 이미 일제의 식미지였기에 유릉의 조성 주체는 일제가 되었다. 석물의 제작은 일본인 아이바 히코지로가 담당하였는데, 일제는 홍릉 바로 옆에 유릉 석물을 조성하면서 ‘조선의 예술품은 영 쇠멸하였고, 신생기가 도래하여 장래 역사에 좋은 사실을 남기기 위하여 그 시대의 예술 작품을 남겨두어 후세에 전하게 하자는 대조로 불과 지척인 유릉과 유릉에 전연 딴 취미의 석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조선의 문화와 미술은 쇠퇴하여 본받을 가치가 없다는 논리로 일본의 문화가 앞서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조선 식민지화의 정당성을 드러내려했던 일제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유릉 석물은 바로 곁의 홍릉 석물과 비교하여 그 입체감과 아름다움을 인정받아왔다.

명나라 황제릉, 청나라 황제릉, 대한제국 황제릉
조선의 전통 왕릉과 대한제국 황제릉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석물의 배설 위치에 있다. 전통 왕릉에서는 봉분이 있는 능상 공간에만 석물이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도에는 박석만이 깔려있다. 그러나 홍릉과 유릉에서는 능상 공간에는 물론 신도의 좌우에 문무석인과 석수를 도열시키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명 태조 효릉과 이후 13대 황제들의 능 체제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이 책의 부록에서는 이를 보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중국 황제릉 편을 실어, 명·청대 황제릉과 조선 왕릉, 그리고 대한제국 황제릉을 동시에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