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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는 시사평론가로, 인문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올해 초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다.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 수술 이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한동안 앉기만 해도 실신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앓았다.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는 저자가 힘겨운 투병과 재활 중에 휴대폰 앱과 노트북에 한 글자 한 글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뇌수술을 받고 간단치 않은 후유증으로 재활 중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강한 의지, 병실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발견해내는 긍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사유와 고통 속에서 얻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저자가 꾹꾹 눌러 쓴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겹고 우울한 이들에게는 위로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뇌수술을 받고 간단치 않은 후유증으로 재활 중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강한 의지, 병실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발견해내는 긍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사유와 고통 속에서 얻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저자가 꾹꾹 눌러 쓴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겹고 우울한 이들에게는 위로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소중한 책이다.
목차
프롤로그|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삶
1부 병과 고통 사이에서 만난 생의 기쁨
“뇌 속에 종양이 있습니다”
수술을 기다리는, 평온한 일상
50대 부부의 때늦은 사랑 고백
인간은 약해질 때 누구에게 의지하나
걷는 것이 감격스러운 사람
나는 왜 병상에서도 글을 쓰는가
인생의 시련을 대하는 태도
재활, 힘겹고도 아름다웠던 시간
나는 나의 뇌를 믿는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에 대해
어떻게든 내 발로 걸어가는 인생
2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불 꺼진 병실에도 행복은 찾아온다
존경받는 인간이 된다는 것
모두에게 맞는 정답은 없다
사랑을 도덕으로 단죄할 수 있나
경계하자, 열정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 삶을 위해
나를 위한 삶은 세상을 배반하는 것인가
좋은 글과 나쁜 글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면
중대한 결단을 내릴 때는,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을 선택하는 데 타인의 동의가 필요한가
영화 [아무르]가 남긴 질문
에필로그|가장 소중한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일
1부 병과 고통 사이에서 만난 생의 기쁨
“뇌 속에 종양이 있습니다”
수술을 기다리는, 평온한 일상
50대 부부의 때늦은 사랑 고백
인간은 약해질 때 누구에게 의지하나
걷는 것이 감격스러운 사람
나는 왜 병상에서도 글을 쓰는가
인생의 시련을 대하는 태도
재활, 힘겹고도 아름다웠던 시간
나는 나의 뇌를 믿는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에 대해
어떻게든 내 발로 걸어가는 인생
2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불 꺼진 병실에도 행복은 찾아온다
존경받는 인간이 된다는 것
모두에게 맞는 정답은 없다
사랑을 도덕으로 단죄할 수 있나
경계하자, 열정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 삶을 위해
나를 위한 삶은 세상을 배반하는 것인가
좋은 글과 나쁜 글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면
중대한 결단을 내릴 때는,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을 선택하는 데 타인의 동의가 필요한가
영화 [아무르]가 남긴 질문
에필로그|가장 소중한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일
저자 소개
책 속으로
수술을 위해 입원할 날을 기다렸다. 특별히 겁나거나 무서운 것은 없었다. 나는 깊은 잠에 들 것이고, 잠에서 깨어나고 나면 집도의 선생이 나쁜 종양을 제거해놓을 것이니 불안할 것 없다고 믿었다. 혹여 후유증으로 몸에 불편한 부분이 남는다 해도 내 것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게 일상은 돌아갔다. 그 평온함이 수술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리라고 믿었다. 내 마음이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해 나 자신에게 감사했다.
그날 밤 아내는 “당신은 나의 전부였다”고 같이 살아온 날을 회고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뭔데, 내가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한 여인의 이토록 간절한 마음을 얻고 있단 말인가. 과분했다. 잘못하고 미안했던 여러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미안하다.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투병생활이야 아프고 처절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의미가 있었다면 우리 부부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것이다.
중환자실은 오전과 오후 한 번씩, 하루에 두 차례 잠깐씩 면회가 허용된다. 면회 시간이 되어 문이 열리면 아내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먼저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일찍 내 얼굴을 보려고. 그리고는 자기가 중환자실 벽에 붙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편히 있으라고 말했다. “바로 저 벽 뒤에서 내가 여보를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
우리는 두 딸이 함께하는 ‘단톡방’에서 스스럼없이 부부의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 종종 서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모티콘으로 전하고, 잘 자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대화를 엿보던 두 딸은 “마치 연인들의 톡을 훔쳐보는 기분”이라며 부모의 카톡 애정행각을 샘내기도 했다. 우리는 아빠와 엄마가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는 과정을 딸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나중에 세상을 살다가 혹시라도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두 딸이 부모를 떠올리며 힘을 낼 수 있다면 우리의 몫을 다한 것이 아닐까.
후배는 나를 보더니 “창선이 형,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라고 물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꾹 참았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 아 참, 이렇게 된 거구나.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후배의 그 말에 울컥했던 내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새삼스럽지 않은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병원생활을 잘 해왔던 내가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다니.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기에 그랬는지 궁금해졌다. 비록 재활병원에서 그런 모습으로 재활을 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에 대해 슬픈 감성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힘들었구나! 이성적인 나는 힘든 것을 힘든 줄 모르고 견뎌내며 여기까지 왔지만,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 심연 속의 감정은 많이 힘들어했었구나. 그래 힘들었다면 그래도 괜찮다. 그동안 애썼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려운 과정이었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였다. 입원 생활 내내 마음의 평정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수술을 받았고 살아나고자 했으며 신체에 남은 불편함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래도 목숨을 건지고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련을 피할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얼굴을 한 시련이 예고 없이 엄습해온다.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을 피할 방법은 없지만, 그 시련에 대처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지는 운명 앞에 무릎 꿇고 마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다. 의지를 갖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태도를 갖는 데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내게 나쁜 병이 찾아왔을 때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이런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겁니까. 신이여,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습니까”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 현실을 이겨내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연한 재앙이나 병마가 착한 사람은 피해가고 나쁜 사람을 골라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을 흔들어놓는 재앙이나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나는 지금 오랜 병상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다른 환자들이 모두 잠든 불 꺼진 병실에서 혼자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면서 나만의 소소한 행복의 시간을 갖는다. 누가 들으면 미친 객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행복이란 원래 타인의 승인을 거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내가 행복해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의 두려움은 '죽음' 앞에선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날 밤 아내는 “당신은 나의 전부였다”고 같이 살아온 날을 회고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뭔데, 내가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한 여인의 이토록 간절한 마음을 얻고 있단 말인가. 과분했다. 잘못하고 미안했던 여러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미안하다.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투병생활이야 아프고 처절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의미가 있었다면 우리 부부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것이다.
중환자실은 오전과 오후 한 번씩, 하루에 두 차례 잠깐씩 면회가 허용된다. 면회 시간이 되어 문이 열리면 아내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먼저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일찍 내 얼굴을 보려고. 그리고는 자기가 중환자실 벽에 붙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편히 있으라고 말했다. “바로 저 벽 뒤에서 내가 여보를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
우리는 두 딸이 함께하는 ‘단톡방’에서 스스럼없이 부부의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 종종 서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모티콘으로 전하고, 잘 자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대화를 엿보던 두 딸은 “마치 연인들의 톡을 훔쳐보는 기분”이라며 부모의 카톡 애정행각을 샘내기도 했다. 우리는 아빠와 엄마가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는 과정을 딸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나중에 세상을 살다가 혹시라도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두 딸이 부모를 떠올리며 힘을 낼 수 있다면 우리의 몫을 다한 것이 아닐까.
후배는 나를 보더니 “창선이 형,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라고 물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꾹 참았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 아 참, 이렇게 된 거구나.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후배의 그 말에 울컥했던 내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새삼스럽지 않은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병원생활을 잘 해왔던 내가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다니.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기에 그랬는지 궁금해졌다. 비록 재활병원에서 그런 모습으로 재활을 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에 대해 슬픈 감성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힘들었구나! 이성적인 나는 힘든 것을 힘든 줄 모르고 견뎌내며 여기까지 왔지만,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 심연 속의 감정은 많이 힘들어했었구나. 그래 힘들었다면 그래도 괜찮다. 그동안 애썼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려운 과정이었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였다. 입원 생활 내내 마음의 평정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수술을 받았고 살아나고자 했으며 신체에 남은 불편함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래도 목숨을 건지고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련을 피할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얼굴을 한 시련이 예고 없이 엄습해온다.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을 피할 방법은 없지만, 그 시련에 대처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지는 운명 앞에 무릎 꿇고 마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다. 의지를 갖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태도를 갖는 데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내게 나쁜 병이 찾아왔을 때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이런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겁니까. 신이여,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습니까”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 현실을 이겨내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연한 재앙이나 병마가 착한 사람은 피해가고 나쁜 사람을 골라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을 흔들어놓는 재앙이나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나는 지금 오랜 병상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다른 환자들이 모두 잠든 불 꺼진 병실에서 혼자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면서 나만의 소소한 행복의 시간을 갖는다. 누가 들으면 미친 객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행복이란 원래 타인의 승인을 거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내가 행복해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의 두려움은 '죽음' 앞에선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삶의 기쁨
저자는 시사평론가로, 인문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올해 초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다.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 수술 이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후유증이 심해 6개월 넘게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동안 앉기만 해도 실신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앓았다. 앉지도 못할 때는 누워서 휴대폰 앱에, 앉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침대 밥상에 노트북을 펴놓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다. 힘겨운 투병 중에도 저자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힘들수록 글쓰기가 더 간절했다.
“장소가 어디든,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병실에 있으면서 나에게는 고통을 이겨낼 강한 의지 혹은 앞으로의 삶을 위한 다짐이 필요했고,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힘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병상에서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선인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글을 씀으로써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고, 앞날에 대한 계획이 빼곡했던 저자에게 갑자기 찾아온 뇌종양이라는 중대한 질병은 인생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 저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나의 본성을 억압한 채 살아왔던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힘겹게 얻은 두 번째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작가 생텍쥐페리가 “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라고 말했듯이 저자 역시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며 이러한 질문에 천착하게 된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나답게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들려준다. 살다보면 느닷없이 닥치는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시련을 대하는 삶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소소한 행복에 대한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신체가 달라졌어도, 그래서 내가 처한 조건과 환경이 달라졌어도, 정작 나의 내면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만의 행복 만들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병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나만의 행복이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이렇게 지켜지고 있다. 불 꺼진 병실에서도.”
이 책을 읽노라면, 뇌수술을 받고 간단치 않은 후유증으로 재활 중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강한 의지, 병실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발견해내는 긍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사유와 고통 속에서 얻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저자가 꾹꾹 눌러 쓴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겹고 우울한 이들에게는 위로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소중한 책이다.
“나를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응원하는 책!
저자는 깊고 넓은 사유를 통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그는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새롭게 얻은 삶, 이전처럼 세상의 기준에 맞춰 혹은 대의명분에 짓눌려 본성을 억압한 채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소소하고 가벼운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인생의 가치라고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나는, 남은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하는 삶, 페르소나를 벗고 내 얼굴 그대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삶이 아니라 작은 삶, 무거운 삶이 아니라 가볍고 소소한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돌보고, 나를 배려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두가 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면 세상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저자는 각자가 나를 위해, 나를 돌보는 삶을 살 때 세상이 더 살 만해진다고 강조한다. 저마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며 자신의 행복을 찾을 때 타인에게 더 관대해지고 타인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획일화된 우리의 삶을 더 다양하게 만들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본시 지성은 집단의 열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고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두가 집단이 되어 하나로 획일화될 때 역사는 다시 뒤로 후퇴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삶은 정당하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살리는 길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삶의 기쁨
저자는 시사평론가로, 인문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올해 초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다.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 수술 이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후유증이 심해 6개월 넘게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동안 앉기만 해도 실신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앓았다. 앉지도 못할 때는 누워서 휴대폰 앱에, 앉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침대 밥상에 노트북을 펴놓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다. 힘겨운 투병 중에도 저자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힘들수록 글쓰기가 더 간절했다.
“장소가 어디든,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병실에 있으면서 나에게는 고통을 이겨낼 강한 의지 혹은 앞으로의 삶을 위한 다짐이 필요했고,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힘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병상에서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선인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글을 씀으로써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고, 앞날에 대한 계획이 빼곡했던 저자에게 갑자기 찾아온 뇌종양이라는 중대한 질병은 인생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 저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나의 본성을 억압한 채 살아왔던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힘겹게 얻은 두 번째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작가 생텍쥐페리가 “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라고 말했듯이 저자 역시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며 이러한 질문에 천착하게 된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나답게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들려준다. 살다보면 느닷없이 닥치는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시련을 대하는 삶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소소한 행복에 대한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신체가 달라졌어도, 그래서 내가 처한 조건과 환경이 달라졌어도, 정작 나의 내면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만의 행복 만들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병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나만의 행복이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이렇게 지켜지고 있다. 불 꺼진 병실에서도.”
이 책을 읽노라면, 뇌수술을 받고 간단치 않은 후유증으로 재활 중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강한 의지, 병실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발견해내는 긍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사유와 고통 속에서 얻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저자가 꾹꾹 눌러 쓴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울림이 크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겹고 우울한 이들에게는 위로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소중한 책이다.
“나를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응원하는 책!
저자는 깊고 넓은 사유를 통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그는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새롭게 얻은 삶, 이전처럼 세상의 기준에 맞춰 혹은 대의명분에 짓눌려 본성을 억압한 채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소소하고 가벼운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인생의 가치라고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나는, 남은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하는 삶, 페르소나를 벗고 내 얼굴 그대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삶이 아니라 작은 삶, 무거운 삶이 아니라 가볍고 소소한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돌보고, 나를 배려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두가 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면 세상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저자는 각자가 나를 위해, 나를 돌보는 삶을 살 때 세상이 더 살 만해진다고 강조한다. 저마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며 자신의 행복을 찾을 때 타인에게 더 관대해지고 타인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획일화된 우리의 삶을 더 다양하게 만들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본시 지성은 집단의 열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고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두가 집단이 되어 하나로 획일화될 때 역사는 다시 뒤로 후퇴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삶은 정당하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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