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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온다 살아야겠다 (2024) - 죽음과 삶을 생각하는 시간

동방박사님 2024. 5. 1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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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죽음과 삶을 생각하는 시간

‘죽음’. 저자 이종건은 그 말을 생짜로 썼다. 그 말을 대하는 사람이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그리하는 것이 죽음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라 생각해서다. 삶도 그런 식으로 아무 수식 없이 생각하고, 함께 또는 홀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대하는 것이 성숙해 가는 길이자 성숙의 표식이 아니겠냐고 생각한다.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외로움도, 좌절도 모멸도 겉치레 없이 에두르기 없이 과장 없이 피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경험하며 사는 것 혹은 살 수 있는 것. 저자는 그것이 원숙하고 맑은 삶이라 생각한다.

저자 이종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매듭 지으며 살아왔다. 은퇴를 앞둔 여러 해 전, 죽음에 대해 찬찬히 생각했고 은퇴 이후에는 자신이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고자 준비했다. 내 집 짓기 프로젝트로 잠시 미뤘지만, 은퇴하면서 또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 그로써 삶에 대해 다시 따져보게 되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생각을 반드시 불러낸다는 뻔한 사실을 예상치 않았던 탓이다. 죽음을 앞에, 삶을 뒤에 둔 이 책의 구성은 그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왜 죽음을 생각하는가?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 질문으로 시작하는 『죽음이 온다 살아야겠다』는 부조리 혹은 무의미, 환상, 사랑, 연민 등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끊임없이 탐구하다가 종국에는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을 왜 묻는가? 다시 질문하고 생각한다.

목차

프롤로그: 삶의 땅과 죽음의 하늘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

1. 왜 죽음을 생각하는가?
2.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
3. 죽음의 두려움
4. 에고의 문제
5. 자발적 죽음
6. 죽음을 이기는 삶

삶을 생각하는 시간

1. 자기파괴
2. 죽음의 유혹
3. 궁극적 관심
4. 부조리 혹은 무의미
5. 의미 이야기
6. 자기기만
7. 환상
8. 삶의 진리
9. 자기초월
10. 지고의 가치
11. 비극의 정신
12. 진리를 향한 의지
13. 사랑
14. 연민
15.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에필로그: 삶의 의미(와 목적)

저자 소개

저 : 이종건
조지아 공과대학교 건축 대학에서 역사/이론/비평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 건축 비평지 《건축평단》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주간을 맡고 있다. 『텅 빈 충만』, 『문제들』, 『건축 없는 국가』 등 여러 권의 건축 비평서를 냈으며, 에세이 『인생거울』과 『건축사건』, 장편소설 『건축의 덫』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차이들: 현대 건축의 지형들』, 『건축 텍...

책 속으로

우리는 왜 죽음을 생각하는가. 살아갈 생각도 벅차고 힘겨운 마당에 왜 죽음을 생각해야 할까. 누군가 죽었다는 일상의 뉴스가 하루를 거르는 일이 없고 누군가의 장례식에 가지 않고 보내는 해가 단 한 차례도 없다. 누군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고, 지척 거리의 누군가가 황망히 죽는 것을 듣거나 본다. 이렇게 일상에 만연한 죽음을 우리가 굳이 생각해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 p.13

‘좋은 죽음’ 혹은 ‘죽음’ 자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 뿐 아니라 거기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없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우리는 그 사실을 ‘그저 알 뿐’ 결코 실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실감하고자 해도 우리는 죽음을 결코 실감할 수 없다. 죽음은 경험의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할 수 없는 것은 구체성을 결여하고, 추상에 갇힌 앎은 현실의 삶과 무관하다. 그러한 까닭에 철학자들은 죽음을 다만 신비 또는 수수께끼 혹은 (우리가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 다룬다.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은 미지의 사태라는 사실뿐이다.
--- p.22

우리 모두 죽음이 두렵다. 죽음을 미학화하거나 찬미하는 것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을 ‘영면(영원한 잠)’이라거나 ‘돌아갔다’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말이 풍기는 불편한 기미를 지우고 싶어서다. ‘웰 다잉’은 ‘좋은 죽음’이라는 말보다 확실히 덜 불편하다.
--- p.32

헝가리 태생의 영국 소설가, 저널리스트, 비평가 쾨슬러는 1983년 일흔일곱 살에 자살했다. 아내와 함께 그리했다. 말년에 파킨슨병에 시달린 그는 다른 병이 더 생긴 절망적 상태에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될 모욕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 p.52~53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왜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마지막이자 가장 진중한 사건인데도 우리는 죽음을 삶의 공간에서 말끔히 치운 채 마냥 외면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로써 귀한 순간들을 귀하게 살지 않은 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삶이 경박한 것은, 그리고 가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예리한 의식이 없이는 죽는 순간까지 삶을 의미 있고 충만하게 살기 어렵다.
--- p.62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자전적 수기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프랭클에 따르면 고통을 견디게 하는 궁극적인 힘은 ‘삶의 목적’이다.
--- p.90

부조리는 카뮈의 철학과 죽음을 관통한다. 그에 따르면 부조리는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경험으로서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맞먹는 실존의 출발점이다. 삶(의 의미)의 문제에 대한 실존의 고민은 부조리를 다루는 데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세계는 그것에 냉담하고 무심하다. 그리하여 어떤 시도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한다.
--- p.97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교는 대부분 현실의 삶을 고통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안 제시를 교리의 골자로 삼는다.
--- p.105

환상은 우리가 ‘세계내존재’로 살아가는 데 핵심 기능을 떠맡는다. 일반적으로 환상의 대척으로 간주하는 현실, 좀 더 정확히 현실 감각도 우리의 마음과 그것이 미치는 외부 세계 간의 주고받기에서 출현하는 하나의 창작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란 현실과 환상의 결합물이라는 것이다.
--- p.119

삶의 진리가 환상(거짓)과 현실(진리)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 법하다는 생각은 다음의 사실에 기초한다. 인간은 동물이자 상징으로 혹은 다르게 말해 몸이자 자아로 형성된 갈등의 존재다. 자연 법칙에 따르는 몸(욕구)과 문화의 구성물인 정신(욕망)은 차원이 달라 매끄러운 봉합이 불가능하다. 니체는 그것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모범 인간)가 묶고 있는 심연 위의 밧줄이다.” 심연 속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짐승도 위버멘쉬도 꼭 붙잡아야 한다.
--- p.12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가 밝혔듯 사랑은 삶의 에너지다. 생명력이다. 사랑 없는 땅은 생명의 불모지다. 사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누구에게서도 사랑 받지 못한다는 인식과 감정은 그보다 더 지독하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것보다 더 영혼을 파먹는 것은 없다. 그로써 자존, 곧 마지막 삶의 의미와 가치가 무너진다.겉은 살아 있으되 속은 이미 죽은 존재다. 자기살해는 그것의 최후 진술이다.
--- p.176

출판사 리뷰

삶의 땅과 죽음의 하늘

우리가 익히 아는 사상가들은 대개 죽음을 긍정할 뿐 아니라 희한하게도 때때로 좋아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안도로 여겨 고대했고, 삶을 고통으로 여긴 석가모니는 종국적이고 절대적인 절멸을 최고의 선으로 삼았으며, 아우렐리우수를 포함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죽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우주적으로 정당한 자연법칙의 일부로 여겨 사랑했다. 또한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몽테뉴는 철학적 지혜를 죽음의 수용과 동일시했으며, 현대 죽음학의 거장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고치가 나비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들이 죽음에 맞서기보다 기꺼이 순응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상태가 더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 평생 죽음이 두려웠던 톨스토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생각의 술책을 썼다. 죽음 이후 전개될 사태에 대해 궁금해서는 안 된다고 종종 주장하면서도, 그와 달리 장자의 호접몽처럼 죽음을 잠(꿈)에서 깨어나는 것, 씨앗이 과일에서 떨어져 대지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것, 물방울이 대양에 합류하는 것 등으로 비유했다. 그리고 삶은 오직 죽음의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죽음을 공간, 시간, 분리된 개별 자아 등 물질적 ‘제약들’을 극복하는 수단, 곧 물질주의 셰계관을 논박하는 궁극적 심급으로 삼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삶을 “일정하고 점진적인 자기발견의 과정”으로 규정하고, 노인을 “인류의 도덕적 진보의 소지자”로 여겼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노화와 질병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숙 과정으로 이론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는 죽음이라는 사건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과정이 포함된다. 죽는 과정도 삶이라고 여긴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우리가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죽기까지의 사태이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죽음이 온다 살아야겠다』는 일대기처럼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역순으로 죽음을 생각해보고 삶을 살아보자는 죽음과 삶에 관한 탐구서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우리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