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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멕시코의 역사』는 인류가 정착하고 농경이 시작되던 고대부터 2000년에 이르는 멕시코 역사를 7개의 시대 구분을 통해 시대 순으로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멕시코 최고의 연구·교육기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멕시코대학원(Colegio de Mexico)이 최신의 시대 구분과 해석방법을 도입하고 전문 역사가들에게 집필을 맡겨, 가장 신뢰할 만한 멕시코 역사 서술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멕시코 역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멕시코의 일반 대중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쉽고 흥미롭게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 멕시코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번 『멕시코의 역사』 한국어판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이자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소장인 김창민 교수의 전문적이고 간결한 번역으로 선보이고 있으며, 멕시코 정부의 문화진흥프로그램인 ‘멕시코 저서의 외국어번역 지원프로그램’(PROTRAD)에 선정되는 등, 멕시코 현지에서도 번역의 의의를 인정받고 있는 ‘멕시코 역사’의 정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멕시코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 역시 통사로서 『멕시코의 역사』의 큰 장점이다.
특히 이번 『멕시코의 역사』 한국어판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이자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소장인 김창민 교수의 전문적이고 간결한 번역으로 선보이고 있으며, 멕시코 정부의 문화진흥프로그램인 ‘멕시코 저서의 외국어번역 지원프로그램’(PROTRAD)에 선정되는 등, 멕시코 현지에서도 번역의 의의를 인정받고 있는 ‘멕시코 역사’의 정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멕시코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 역시 통사로서 『멕시코의 역사』의 큰 장점이다.
목차
서문
지도 | 멕시코의 각 주와 주요 도시들
1장 | 고대 멕시코
수렵 채집인들 | 문명의 여명 | 지역적 다양성의 기원 | 제국의 시대 | 위기와 변화 | 케찰코아틀의 전사들 | 물의 귀족들 | 정복 전야 | 에필로그
2장 | 1760년까지의 식민시대
식민지 수립 기간, 1519~1610 | 성숙과 자치의 시기, 1610~1760 | 결론
3장 | 부르봉 왕가의 개혁들
전체적인 조망 | 부르봉 왕가의 초기 개혁들 | 누에바 에스파냐의 법정과 국고에 대한 전반적 시찰 | 부왕 권력과 관리청장 제도 | 방향전환. 1790년대 | 왕실 차용증서의 공고화와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 | 누에바 에스파냐의 민족주의 감정
4장 | 독립에서 공화국의 안정화까지
독립 혁명 | 멕시코 국가가 건설되다 | 외국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제와 독재를 경험하다 | 자유주의 개혁, 프랑스의 개입, 공화국의 결정적 승리 | 공화국으로 서서히 변화하다
5장 | 포르피리오 통치시대
포르피리오의 정치 | 공공재정과 경제발전 | 농촌사회와 도시사회 |
문화
6장 | 혁명
비판자, 반대자 그리고 선구자 | 반대에서 무장투쟁으로 | 시대착오적 자유주의 | 헌법수호 투쟁 | 헌법수호파 대 국민회의파 | 카란사 파의 장점과 한계 | 새로운 국가
7장 | 마지막 기간, 1929~2000
세계적 위기와 정치적 재조직 | 안정과 경제 성장, 1940~1958 | 분란과 국가통제주의적 대응, 1958~1982 | 주민 동원과 정치적 변화, 1982~ 2000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지도 | 멕시코의 각 주와 주요 도시들
1장 | 고대 멕시코
수렵 채집인들 | 문명의 여명 | 지역적 다양성의 기원 | 제국의 시대 | 위기와 변화 | 케찰코아틀의 전사들 | 물의 귀족들 | 정복 전야 | 에필로그
2장 | 1760년까지의 식민시대
식민지 수립 기간, 1519~1610 | 성숙과 자치의 시기, 1610~1760 | 결론
3장 | 부르봉 왕가의 개혁들
전체적인 조망 | 부르봉 왕가의 초기 개혁들 | 누에바 에스파냐의 법정과 국고에 대한 전반적 시찰 | 부왕 권력과 관리청장 제도 | 방향전환. 1790년대 | 왕실 차용증서의 공고화와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 | 누에바 에스파냐의 민족주의 감정
4장 | 독립에서 공화국의 안정화까지
독립 혁명 | 멕시코 국가가 건설되다 | 외국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제와 독재를 경험하다 | 자유주의 개혁, 프랑스의 개입, 공화국의 결정적 승리 | 공화국으로 서서히 변화하다
5장 | 포르피리오 통치시대
포르피리오의 정치 | 공공재정과 경제발전 | 농촌사회와 도시사회 |
문화
6장 | 혁명
비판자, 반대자 그리고 선구자 | 반대에서 무장투쟁으로 | 시대착오적 자유주의 | 헌법수호 투쟁 | 헌법수호파 대 국민회의파 | 카란사 파의 장점과 한계 | 새로운 국가
7장 | 마지막 기간, 1929~2000
세계적 위기와 정치적 재조직 | 안정과 경제 성장, 1940~1958 | 분란과 국가통제주의적 대응, 1958~1982 | 주민 동원과 정치적 변화, 1982~ 2000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책 속으로
약스칠란의 기록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서기 681~742년 사이에 통치했던 특별히 유복했던 왕, 이쓰암나아흐 발람 2세가 있다. 그는 약스칠란의 여러 곳에서 문틀의 상부 가로지름 기둥에 위대한 전사로, 그 도시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그의 통치로 나라는 융성했고, 그는 자기 어머니처럼 오래 살았다는데, 90세 이상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여러 부인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카발 훅이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약스칠란의 가장 훌륭한 신전이 바쳐졌다. 그 내부는 다른 도시들에서 데려온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다. 왕보다 7년 뒤에 죽자 카발 훅은 그 훌륭한 신전에 묻혔고, 흑요석 칼 2만 점이 봉납되었다. --- p.42
나우아의 도시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의례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인간의 죽음을 포함하는 의례였을 것이다. 메시카족은 고대 멕시코의 모든 부족 중에서 여러 형태로 인간의 희생의식을 가장 광란적으로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폭풍과 비의 신인 틀랄록을 기쁘게 하기 위해 수십 명씩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 아이들을 소용돌이 물에 던져 버리거나 산에 설치된 제단에서 희생시키기도 했다. 어떤 축제에서는 노파의 목을 자른 뒤, 한 전사가 그 잘린 머리의 머리채를 잡고서 마구 흔들면서 온 도시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봄의 신인 시페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한 사제가 희생된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상처 입히기, 사지절단, 죽음 등은 테노치티틀란과 다른 주변 도시에서 늘 볼 수 있었다. 주민들은 공개적인 유희가 제공하는 카타르시스에 참여함으로써 그러한 희생의례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극복할 수 있었다. 길거리 장난들이나, 장대기둥 타고 오르기같이 짓궂은 면이 있는 의례들도 있었고, 어릿광대극도 있었다. 특히 이 어릿광대극에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땅벌 분장을 하고 건물 높은 곳에서 비틀거리다가 떨어지면 그들은 조롱하기도 했고, 늙은이나 불구자, 환자 역할을 하는 배우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희생제의의 어떤 행사는 종교적인 의미 외에도 삼각동맹 군대의 군사적 힘을 보여 주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메시카의 왕들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왕이었던 아우이초틀에 의해서 감행된 우아스테카족에 대한 공격은 수천 명의 적군과 남자 아이들, 여자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4일 밤낮 동안 멕시코 계곡에 있는 네 개의 신전 계단 앞에 각각 한 줄씩 서서, 돌로 된 제단에서 자기가 희생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관습처럼 슬픈 새 울음소리를 내었다. --- pp.63-65
누에바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차지해 가고 있던 지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생산된 은(페루에서 생산된 은과 마찬가지로)은 에스파냐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유럽 대부분 지역에 뿌려졌다. 그 최종 목적은 에스파냐 왕가의 엄청난 부채를 갚고, 공업발달이 부진했던 관계로 생산할 줄 몰랐던 재화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유럽 경제에 있어 이렇게 뿌려진 은의 영향은 엄청났다. 한편, 누에바 에스파냐의 은은 중국에도 유통되었다(중국에서 멕시코 화폐의 사용은 19세기까지 흔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무역 경로를 통해 인디아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일본의 무역사절단이 1610년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모든 면에서 누에바 에스파냐가 혹은 적어도 그 일부라도 전지구를 얽어 새롭게 짜인 틀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메소아메리카가 고립 속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점은, 언급된 교류가 순전히 상업적인 것만 아니라 상당한 문화적 교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페루와 긴밀한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에바 에스파냐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바로 그때 그 추진력을 억압당하게 된다. --- pp.100-101
첫번째 예상치 못했던 일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바로 1994년 첫날에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 조직의 원주민 구성원들은 정부군과 그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여러 마을을 점령했는데, 가장 중요한 지역은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였다. 멕시코 시와 여타 지역의 대규모 집회에서 사람들은 적대적 행위의 종식을 요구했다. 전쟁은 겨우 11일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충격은 엄청났다. 제1세계의 문턱에서 사회적 요구(보건과 교육 서비스)와 인디오 마을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정치적 요구를 동시에 하는 집단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치아파스가 전국에서 원주민이 가난하게 사는 유일한 ?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부사령관’ 마르코스 같은 도시 출신의 급진주의단체 운동가들, 해방신학에 동조하는 가톨릭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빠르게 팽창하는 목축업과 농지배분 문제로 분열이 있었고, 프로테스탄티즘이 예사롭지 않게 전파되고 있었다. 봉기는 살리나스 정부의 낙관주의가 얼마나 허위였는지 심각하게 보여 주었다.
나우아의 도시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의례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인간의 죽음을 포함하는 의례였을 것이다. 메시카족은 고대 멕시코의 모든 부족 중에서 여러 형태로 인간의 희생의식을 가장 광란적으로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폭풍과 비의 신인 틀랄록을 기쁘게 하기 위해 수십 명씩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 아이들을 소용돌이 물에 던져 버리거나 산에 설치된 제단에서 희생시키기도 했다. 어떤 축제에서는 노파의 목을 자른 뒤, 한 전사가 그 잘린 머리의 머리채를 잡고서 마구 흔들면서 온 도시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봄의 신인 시페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한 사제가 희생된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상처 입히기, 사지절단, 죽음 등은 테노치티틀란과 다른 주변 도시에서 늘 볼 수 있었다. 주민들은 공개적인 유희가 제공하는 카타르시스에 참여함으로써 그러한 희생의례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극복할 수 있었다. 길거리 장난들이나, 장대기둥 타고 오르기같이 짓궂은 면이 있는 의례들도 있었고, 어릿광대극도 있었다. 특히 이 어릿광대극에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땅벌 분장을 하고 건물 높은 곳에서 비틀거리다가 떨어지면 그들은 조롱하기도 했고, 늙은이나 불구자, 환자 역할을 하는 배우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희생제의의 어떤 행사는 종교적인 의미 외에도 삼각동맹 군대의 군사적 힘을 보여 주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메시카의 왕들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왕이었던 아우이초틀에 의해서 감행된 우아스테카족에 대한 공격은 수천 명의 적군과 남자 아이들, 여자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4일 밤낮 동안 멕시코 계곡에 있는 네 개의 신전 계단 앞에 각각 한 줄씩 서서, 돌로 된 제단에서 자기가 희생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관습처럼 슬픈 새 울음소리를 내었다. --- pp.63-65
누에바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차지해 가고 있던 지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생산된 은(페루에서 생산된 은과 마찬가지로)은 에스파냐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유럽 대부분 지역에 뿌려졌다. 그 최종 목적은 에스파냐 왕가의 엄청난 부채를 갚고, 공업발달이 부진했던 관계로 생산할 줄 몰랐던 재화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유럽 경제에 있어 이렇게 뿌려진 은의 영향은 엄청났다. 한편, 누에바 에스파냐의 은은 중국에도 유통되었다(중국에서 멕시코 화폐의 사용은 19세기까지 흔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무역 경로를 통해 인디아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일본의 무역사절단이 1610년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모든 면에서 누에바 에스파냐가 혹은 적어도 그 일부라도 전지구를 얽어 새롭게 짜인 틀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메소아메리카가 고립 속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점은, 언급된 교류가 순전히 상업적인 것만 아니라 상당한 문화적 교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페루와 긴밀한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에바 에스파냐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바로 그때 그 추진력을 억압당하게 된다. --- pp.100-101
첫번째 예상치 못했던 일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바로 1994년 첫날에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 조직의 원주민 구성원들은 정부군과 그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여러 마을을 점령했는데, 가장 중요한 지역은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였다. 멕시코 시와 여타 지역의 대규모 집회에서 사람들은 적대적 행위의 종식을 요구했다. 전쟁은 겨우 11일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충격은 엄청났다. 제1세계의 문턱에서 사회적 요구(보건과 교육 서비스)와 인디오 마을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정치적 요구를 동시에 하는 집단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치아파스가 전국에서 원주민이 가난하게 사는 유일한 ?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부사령관’ 마르코스 같은 도시 출신의 급진주의단체 운동가들, 해방신학에 동조하는 가톨릭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빠르게 팽창하는 목축업과 농지배분 문제로 분열이 있었고, 프로테스탄티즘이 예사롭지 않게 전파되고 있었다. 봉기는 살리나스 정부의 낙관주의가 얼마나 허위였는지 심각하게 보여 주었다.
--- pp.353-354
출판사 리뷰
문화를 넘어 역사로, 국내 최초의 멕시코 통사를 읽는다!!
오늘날의 멕시코를 만든 모든 역사적 장면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다!
우리에게 멕시코는 매우 친숙한 나라이다. 한국이 최초로 본선에 진출한 멕시코 월드컵이나 최근 성행하고 있는 멕시코 요리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아즈텍과 마야 문명,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마르코스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등등, 우리가 멕시코에 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은 적지 않다. 게다가 최근 FTA에 관한 찬반논쟁에서 NAFTA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이 언급되거나,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멕시코의 열악한 경제적 · 사회적 상황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높아져 왔다. 하지만 멕시코가 갖는 정치적 · 경제적 중요성과 그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에 비해 멕시코의 역사는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멕시코는 정복과 독립, 외세에 의한 침략, 독재와 혁명, 민주주의의 정착에 이르는 매우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역사가 오늘날의 멕시코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배경지식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국내에 제대로 된 멕시코 통사가 한 권도 출간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을 넘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의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본격 통사인『멕시코의 역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 책은 멕시코 최고의 연구 · 교육기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멕시코대학원(Colegio de Mexico)이 최신의 시대 구분과 해석방법을 도입하고 전문 역사가들에게 집필을 맡겨, 가장 신뢰할 만한 멕시코 역사 서술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멕시코 역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멕시코의 일반 대중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쉽고 흥미롭게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 멕시코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특히 이번『멕시코의 역사』 한국어판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이자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소장인 김창민 교수의 전문적이고 간결한 번역으로 선보이고 있으며, 멕시코 정부의 문화진흥프로그램인 ‘멕시코 저서의 외국어번역 지원프로그램’(PROTRAD)에 선정되는 등, 멕시코 현지에서도 번역의 의의를 인정받고 있는 ‘멕시코 역사’의 정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멕시코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은 통사로서『멕시코의 역사』의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오늘날의 멕시코를 있게 한 모든 역사적 장면들을 7개의 시대 구분을 통해 우리 앞에 펼쳐 보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데에 있어 서로의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한 보여 주고 있다.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연구 성과들을 집대성하고, 유럽과 영미 중심의 학계풍토에 새로운 시각을 환기시키기 위한 기획을 지속해 온 ‘트랜스라틴 총서’는 역사가 상호 이해의 기본이라는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이후에도 『브라질의 간결한 역사』(2012년 상반기 출간 예정),『라틴아메리카 현대사』(2012년 출간 예정) 등,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소개하는 작업들을 꾸준히 지속해 나갈 예정이다.
멕시코 문화의 두 뿌리, 인디오 문명과 유럽 문명의 만남
멕시코의 고대 문명에 대한 흔한 오해는 아즈텍과 마야의 문명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고대문화의 통칭이라는 인식이다. 찬란하지만 정체된 문명, 그 기술적 미개함으로 인해 선진화된 유럽 문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 문명이라는 식의 인식이다. 하지만『멕시코의 역사』 1장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부족과 도시들이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정복 직전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정복 이전의 메소아메리카의 도시들 역시 동맹과 전쟁 같은 복잡한 정치적 과정을 통해 유지되는 고도의 체제였다는 점을 그동안의 학술적 성과들을 종합하여 서술하고 있다. 멕시코 만의 풍요로운 충적 평야에서 발생한 올메카 문명을 시작으로 멕시코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들을 건설한 테오티우아칸, 치첸 이차나 욱스말 같은 유카탄 반도의 여러 마야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발견되는 도시 거주지와 거대한 의례 중심지의 유적들은 메소아메리카의 문명이 얼마나 큰 규모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달되어 있었는지를 가늠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유명한 항해로 시작된 유럽 문명과의 만남은 메소아메리카에 재앙으로 다가왔다. 말과 화약 등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고, 부족 간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에스파냐인들은 그들이 몰고 온 천연두로 쇠약해져 있는 멕시코-테노치티틀란의 주민들을 1년여의 격렬한 공성전 끝에 제압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도시, 멕시코 시를 건설했다. 게다가 에스파냐의 정복 이후 발생한 여러 차례의 역병과 열악한 처우는 원주민 인구를 더욱 줄였다. 특히 1576 ~ 1581년 사이에 유행한 티푸스는 원주민 인구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는데, 이 역병으로 남은 원주민 인구는 200만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동시에 멕시코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들 역시 본국의 에스파냐인과는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백인과 원주민, 메스티소 간의 인종적 차이는 큰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원주민들의 막대한 희생 위에서 조성된 새로운 인종적 환경은 원주민 문화와 유럽 문화의 ‘혼종화’를 통해 멕시코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정복 이후의 역사, 강대국의 그늘에서 살아남기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아즈텍 문명이 정복당한 이래, 멕시코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는 초강대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에스파냐가 부왕(??)을 파견하여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에스파냐’라는 의미)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식민지에서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던 에스파냐 왕실과 이미 누에바 에스파냐에 정착한 이주민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항상 첨예하게 대립했다. 본국에서 파견된 부왕은 끊임없이 기득권 세력들을 규제하여 누에바 에스파냐를 왕실의 전용금고로 삼으려 했고,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은 때로는 반란으로 때로는 타협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대립이었다. 하지만 정복 후 약 2세기 동안의 혼종화는 새로운 민족적 · 인종적 정체성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갈등의 양상은 바뀌게 된다. 반도인(에스파냐인)들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지닌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은 무적함대의 패배(1588년)로부터 시작된 에스파냐 국력의 쇠퇴와 부르봉 왕가의 개혁(18세기)이라는 역사적 변화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한 에스파냐 왕가의 몰락과 그에 이은 에스파냐에서의 자유주의 개혁은 곧바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지난한 독립투쟁으로 이어진다.
1808년 미겔 이달고의 투쟁에서 시작되어 1824년 멕시코연합국의 성립을 선언하기까지, 오랜 투쟁을 통해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되지만, 새로운 멕시코 국가는 부채를 짊어진 채,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된, 쇠약한 상태로 탄생했다. 이러한 국가의 쇠약함과 그에 대비되는 광대한 영토와 자원은 강대국들로 하여금 신생 멕시코에 군침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구 식민본국으로서 영향력을 되찾고 싶어했던 에스파냐를 위시하여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강대국들은 멕시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급기야 1862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 시를 점령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아노를 황제로 앉히기에 이른다. 프랑스에 의한 군주제의 부활 기도는 막시밀리아노 황제가 3년 만에 후아레스가 이끄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처형되면서 막을 내리지만, 이런 일련의 혼란 속에서 멕시코는 외채상환 문제와 재정 위기로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신생 멕시코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북쪽의 이웃인 미국이었다. 1840년대 들어 멕시코와 미국의 세력불균형은 매우 심각해졌다. 미국의 인구가 2천만을 넘어서고 있을 때, 멕시코의 인구는 겨우 7백만을 넘기고 있었으며, 이렇게 인적 · 물적 자원이 우월했던 미국은 팽창주의적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1845년 이미 멕시코로부터 독립해 있던 텍사스를 합병하고, 1846년부터는 멕시코와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전쟁은 1847년 멕시코 국립 궁전에 미국 국기가 휘날리고, 1848년 평화조약이 조인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멕시코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멕시코는 영토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의 영토를 미국에 넘겨야 했고, 이후 1853년 메시야 고원을 추가로 넘기면서 현재의 미국 - 멕시코 국경이 확정된다. 이후 더 이상의 영토적 분쟁은 없었지만, 멕시코는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지정학적 · 경제적 영향권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의 대규모 유전 발견에 기댄 재정의 무리한 확대와 이후 유가 하락으로 인한 멕시코의 재정 실패는 1993년의 NAFTA 체결까지 이어지면서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혁명과 새로운 국가의 건설
1877년부터 1911년까지 34년은 ‘포르피리아토’라고 불리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통치시기였다.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독재권력을 휘둘렀던 이 34년간 파탄지경이었던 멕시코의 재정은 어느 정도 안정화잵었고, 사회적 인프라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산업의 발전과 풍부한 자원의 수출은 나라 전체의 부를 증가시켰다. 하지만 이 부의 혜택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을 뿐, 대다수 농민과 급격한 도시화로 증가한 도시의 하층민들은 여전히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이런 격차와 불균형이 포르피리아토 정권 말기, 멕시코 역사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히게 된다. 풍운아 판초 비야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원조’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처럼 잘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프란시스코 마데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알바로 오브레곤 등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분투했다.『멕시코의 역사』 6장은 바로 이 혼란스러웠던 혁명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면서, 10년여의 혁명이 새로운 시대의 멕시코 건설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혁명 이후의 국가로서 멕시코는 1920년경에 탄생했다. 이때에 혁명에 참여했던 여러 사회적 세력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멕시코 혁명의 가장 ‘사나운’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1920년경부터 카란사, 오브레곤, 카예스 등이 차례로 집권하고, 1929년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국가혁명당이 창설되는 등 정치적 안정화가 진행되면서, 향후 수십 년간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위한 기반이 닦이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안정에 기반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멕시코는 수입대체산업에 주력하게 되고 그 성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전후 황금기의 종말은 멕시코 경제에도 심각한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농축산업의 침체로 인한 식량 생산의 위기로 더 이상 산업발전은 뒷받침되지 못했으며, 수출과 수입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 외화 창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던 1970년대 후반의 재정 실패는 1982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멕시코의 사회적 불안정성을 증가시켰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영향은 IMF를 통해 멕시코의 공공지출과 공공투자를 급격히 줄이도록 했는데, 이런 정책기조는 NAFTA로 이어졌고, 그 결과 사회의 양극화와 대미의존도 심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1세기 ‘새로운 멕시코’는 가능할 것인가?
멕시코의 시우다드 후아레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도시로 악명이 높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싸운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이 붙은 도시답지 않게, 미국으로 마약을 공급하는 마약 카르텔의 세력이 가장 성한 곳으로 2010년 한 해에만 3,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고 검거작전에 나섰지만, 이 ‘전쟁’을 이끄는 고위 관료들마저 살해되거나 살해 위협을 받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이 도시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과 살해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도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멕시코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는 과연 이런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극심한 사회적 격차로 인해, 멕시코의 젊은이들이 마약 카르텔에 들어가거나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먹고살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혼란의 극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멕시코의 역사는 우리에게 멕시코가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멕시코인들이 수없는 정치적 실험을 통해 스스로의 사회와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또한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의 말처럼 ‘21세기 멕시코’에 희망을 가져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멕시코가 가진 역사 · 문화적 저력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멕시코를 만든 모든 역사적 장면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다!
우리에게 멕시코는 매우 친숙한 나라이다. 한국이 최초로 본선에 진출한 멕시코 월드컵이나 최근 성행하고 있는 멕시코 요리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아즈텍과 마야 문명,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마르코스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등등, 우리가 멕시코에 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은 적지 않다. 게다가 최근 FTA에 관한 찬반논쟁에서 NAFTA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이 언급되거나,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멕시코의 열악한 경제적 · 사회적 상황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높아져 왔다. 하지만 멕시코가 갖는 정치적 · 경제적 중요성과 그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에 비해 멕시코의 역사는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멕시코는 정복과 독립, 외세에 의한 침략, 독재와 혁명, 민주주의의 정착에 이르는 매우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역사가 오늘날의 멕시코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배경지식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국내에 제대로 된 멕시코 통사가 한 권도 출간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을 넘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의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본격 통사인『멕시코의 역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 책은 멕시코 최고의 연구 · 교육기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멕시코대학원(Colegio de Mexico)이 최신의 시대 구분과 해석방법을 도입하고 전문 역사가들에게 집필을 맡겨, 가장 신뢰할 만한 멕시코 역사 서술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멕시코 역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멕시코의 일반 대중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쉽고 흥미롭게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 멕시코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특히 이번『멕시코의 역사』 한국어판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이자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소장인 김창민 교수의 전문적이고 간결한 번역으로 선보이고 있으며, 멕시코 정부의 문화진흥프로그램인 ‘멕시코 저서의 외국어번역 지원프로그램’(PROTRAD)에 선정되는 등, 멕시코 현지에서도 번역의 의의를 인정받고 있는 ‘멕시코 역사’의 정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멕시코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은 통사로서『멕시코의 역사』의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오늘날의 멕시코를 있게 한 모든 역사적 장면들을 7개의 시대 구분을 통해 우리 앞에 펼쳐 보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데에 있어 서로의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한 보여 주고 있다.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연구 성과들을 집대성하고, 유럽과 영미 중심의 학계풍토에 새로운 시각을 환기시키기 위한 기획을 지속해 온 ‘트랜스라틴 총서’는 역사가 상호 이해의 기본이라는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이후에도 『브라질의 간결한 역사』(2012년 상반기 출간 예정),『라틴아메리카 현대사』(2012년 출간 예정) 등,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소개하는 작업들을 꾸준히 지속해 나갈 예정이다.
멕시코 문화의 두 뿌리, 인디오 문명과 유럽 문명의 만남
멕시코의 고대 문명에 대한 흔한 오해는 아즈텍과 마야의 문명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고대문화의 통칭이라는 인식이다. 찬란하지만 정체된 문명, 그 기술적 미개함으로 인해 선진화된 유럽 문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 문명이라는 식의 인식이다. 하지만『멕시코의 역사』 1장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부족과 도시들이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정복 직전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정복 이전의 메소아메리카의 도시들 역시 동맹과 전쟁 같은 복잡한 정치적 과정을 통해 유지되는 고도의 체제였다는 점을 그동안의 학술적 성과들을 종합하여 서술하고 있다. 멕시코 만의 풍요로운 충적 평야에서 발생한 올메카 문명을 시작으로 멕시코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들을 건설한 테오티우아칸, 치첸 이차나 욱스말 같은 유카탄 반도의 여러 마야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발견되는 도시 거주지와 거대한 의례 중심지의 유적들은 메소아메리카의 문명이 얼마나 큰 규모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달되어 있었는지를 가늠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유명한 항해로 시작된 유럽 문명과의 만남은 메소아메리카에 재앙으로 다가왔다. 말과 화약 등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고, 부족 간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에스파냐인들은 그들이 몰고 온 천연두로 쇠약해져 있는 멕시코-테노치티틀란의 주민들을 1년여의 격렬한 공성전 끝에 제압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도시, 멕시코 시를 건설했다. 게다가 에스파냐의 정복 이후 발생한 여러 차례의 역병과 열악한 처우는 원주민 인구를 더욱 줄였다. 특히 1576 ~ 1581년 사이에 유행한 티푸스는 원주민 인구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는데, 이 역병으로 남은 원주민 인구는 200만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동시에 멕시코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들 역시 본국의 에스파냐인과는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백인과 원주민, 메스티소 간의 인종적 차이는 큰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원주민들의 막대한 희생 위에서 조성된 새로운 인종적 환경은 원주민 문화와 유럽 문화의 ‘혼종화’를 통해 멕시코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정복 이후의 역사, 강대국의 그늘에서 살아남기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아즈텍 문명이 정복당한 이래, 멕시코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는 초강대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에스파냐가 부왕(??)을 파견하여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에스파냐’라는 의미)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식민지에서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던 에스파냐 왕실과 이미 누에바 에스파냐에 정착한 이주민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항상 첨예하게 대립했다. 본국에서 파견된 부왕은 끊임없이 기득권 세력들을 규제하여 누에바 에스파냐를 왕실의 전용금고로 삼으려 했고,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은 때로는 반란으로 때로는 타협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대립이었다. 하지만 정복 후 약 2세기 동안의 혼종화는 새로운 민족적 · 인종적 정체성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갈등의 양상은 바뀌게 된다. 반도인(에스파냐인)들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지닌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은 무적함대의 패배(1588년)로부터 시작된 에스파냐 국력의 쇠퇴와 부르봉 왕가의 개혁(18세기)이라는 역사적 변화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한 에스파냐 왕가의 몰락과 그에 이은 에스파냐에서의 자유주의 개혁은 곧바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지난한 독립투쟁으로 이어진다.
1808년 미겔 이달고의 투쟁에서 시작되어 1824년 멕시코연합국의 성립을 선언하기까지, 오랜 투쟁을 통해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되지만, 새로운 멕시코 국가는 부채를 짊어진 채,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된, 쇠약한 상태로 탄생했다. 이러한 국가의 쇠약함과 그에 대비되는 광대한 영토와 자원은 강대국들로 하여금 신생 멕시코에 군침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구 식민본국으로서 영향력을 되찾고 싶어했던 에스파냐를 위시하여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강대국들은 멕시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급기야 1862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 시를 점령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아노를 황제로 앉히기에 이른다. 프랑스에 의한 군주제의 부활 기도는 막시밀리아노 황제가 3년 만에 후아레스가 이끄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처형되면서 막을 내리지만, 이런 일련의 혼란 속에서 멕시코는 외채상환 문제와 재정 위기로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신생 멕시코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북쪽의 이웃인 미국이었다. 1840년대 들어 멕시코와 미국의 세력불균형은 매우 심각해졌다. 미국의 인구가 2천만을 넘어서고 있을 때, 멕시코의 인구는 겨우 7백만을 넘기고 있었으며, 이렇게 인적 · 물적 자원이 우월했던 미국은 팽창주의적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1845년 이미 멕시코로부터 독립해 있던 텍사스를 합병하고, 1846년부터는 멕시코와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전쟁은 1847년 멕시코 국립 궁전에 미국 국기가 휘날리고, 1848년 평화조약이 조인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멕시코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멕시코는 영토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의 영토를 미국에 넘겨야 했고, 이후 1853년 메시야 고원을 추가로 넘기면서 현재의 미국 - 멕시코 국경이 확정된다. 이후 더 이상의 영토적 분쟁은 없었지만, 멕시코는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지정학적 · 경제적 영향권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의 대규모 유전 발견에 기댄 재정의 무리한 확대와 이후 유가 하락으로 인한 멕시코의 재정 실패는 1993년의 NAFTA 체결까지 이어지면서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혁명과 새로운 국가의 건설
1877년부터 1911년까지 34년은 ‘포르피리아토’라고 불리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통치시기였다.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독재권력을 휘둘렀던 이 34년간 파탄지경이었던 멕시코의 재정은 어느 정도 안정화잵었고, 사회적 인프라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산업의 발전과 풍부한 자원의 수출은 나라 전체의 부를 증가시켰다. 하지만 이 부의 혜택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을 뿐, 대다수 농민과 급격한 도시화로 증가한 도시의 하층민들은 여전히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이런 격차와 불균형이 포르피리아토 정권 말기, 멕시코 역사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히게 된다. 풍운아 판초 비야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원조’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처럼 잘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프란시스코 마데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알바로 오브레곤 등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분투했다.『멕시코의 역사』 6장은 바로 이 혼란스러웠던 혁명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면서, 10년여의 혁명이 새로운 시대의 멕시코 건설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혁명 이후의 국가로서 멕시코는 1920년경에 탄생했다. 이때에 혁명에 참여했던 여러 사회적 세력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멕시코 혁명의 가장 ‘사나운’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1920년경부터 카란사, 오브레곤, 카예스 등이 차례로 집권하고, 1929년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국가혁명당이 창설되는 등 정치적 안정화가 진행되면서, 향후 수십 년간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위한 기반이 닦이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안정에 기반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멕시코는 수입대체산업에 주력하게 되고 그 성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전후 황금기의 종말은 멕시코 경제에도 심각한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농축산업의 침체로 인한 식량 생산의 위기로 더 이상 산업발전은 뒷받침되지 못했으며, 수출과 수입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 외화 창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던 1970년대 후반의 재정 실패는 1982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멕시코의 사회적 불안정성을 증가시켰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영향은 IMF를 통해 멕시코의 공공지출과 공공투자를 급격히 줄이도록 했는데, 이런 정책기조는 NAFTA로 이어졌고, 그 결과 사회의 양극화와 대미의존도 심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1세기 ‘새로운 멕시코’는 가능할 것인가?
멕시코의 시우다드 후아레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도시로 악명이 높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싸운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이 붙은 도시답지 않게, 미국으로 마약을 공급하는 마약 카르텔의 세력이 가장 성한 곳으로 2010년 한 해에만 3,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고 검거작전에 나섰지만, 이 ‘전쟁’을 이끄는 고위 관료들마저 살해되거나 살해 위협을 받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이 도시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과 살해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도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멕시코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는 과연 이런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극심한 사회적 격차로 인해, 멕시코의 젊은이들이 마약 카르텔에 들어가거나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먹고살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혼란의 극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멕시코의 역사는 우리에게 멕시코가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멕시코인들이 수없는 정치적 실험을 통해 스스로의 사회와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또한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의 말처럼 ‘21세기 멕시코’에 희망을 가져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멕시코가 가진 역사 · 문화적 저력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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