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축복과 은혜의 열매를 맺다
한국의 험악한 국난 속에서 우리 기독교회 혼난 속에서 장로교회의 아름다운 역사를 빛내주신 장철수 목사님께 무릎 꿇고 인사드립니다. 특히 장철수 목사님께서 백세가 되어서도 세례 받으신 한국의 모교회인 소래교회의 역사를 기록하여 출판하게 된 것에 놀랄 뿐입니다.전남 무안 복길교회, 전남 함평 백호교회, 목포시 목포교회, 서울 신일교회 그리고 신일기도원 등 아름다운 예수님의 발자취를 걸어오신 장철수 목사님의 빛나는 걸음 앞에 넘치는 감사를 담아 축하드립니다. _ 서기행 목사
『소래교회사』에는 이 땅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선교의 횃불을 들었던 소래성도들의 신앙과 정신이 이 땅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애국적 헌신이 실려 있는 역사서로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성도들이 북한에 소래목동교회가 세워질 때쯤이면 북한 선교의 기도가 현실 되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_ 이영원 목사
축복과 은혜의 열매를 맺다
한국의 험악한 국난 속에서 우리 기독교회 혼난 속에서 장로교회의 아름다운 역사를 빛내주신 장철수 목사님께 무릎 꿇고 인사드립니다. 특히 장철수 목사님께서 백세가 되어서도 세례 받으신 한국의 모교회인 소래교회의 역사를 기록하여 출판하게 된 것에 놀랄 뿐입니다.전남 무안 복길교회, 전남 함평 백호교회, 목포시 목포교회, 서울 신일교회 그리고 신일기도원 등 아름다운 예수님의 발자취를 걸어오신 장철수 목사님의 빛나는 걸음 앞에 넘치는 감사를 담아 축하드립니다. _ 서기행 목사
『소래교회사』에는 이 땅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선교의 횃불을 들었던 소래성도들의 신앙과 정신이 이 땅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애국적 헌신이 실려 있는 역사서로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성도들이 북한에 소래목동교회가 세워질 때쯤이면 북한 선교의 기도가 현실 되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_ 이영원 목사
목차
추천사
저자 소개
머리글
1장 소래교회와 장철수 목사
1. 대구면(大救面) 이름의 유래
1) 서대방 솔샘(松泉) 마을에 소래교회 설립
2) 동학란 때 구원의 역사
3) 서대방 향장 김윤오 집사
2. 대구면과 소래마을 위치
3. 소래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래
1) 토마스 선교사와 순교자 김자평(金子平) 성도
2) 콜벳 선교사와 목동(牧洞) 출신 순교자 김자평 성도
3) 마티어 선교사와 순교자 김자평(金子平) 성도
4. 소래(松川)교회 설립의 역사적 배경
2장 소래교회 역대 교역자
1. 소래교회 설립자 서상륜 조사
1) 서상륜 성도 세례
2) 성경 번역과 인쇄
3) 전도
4) 서상륜 성도와 선교사의 만남
1. 소래교회 초대 장로, 초대 목사 서경조
1) 소래교회 설립
2) 장로장립
3) 목사 장립
4) 감사절 제정
5) 목회
3. 이승철(李承哲) 목사
4. 김응순(金應珣) 목사
5. 조응철 목사
6. 허간(許侃) 목사
3장 선바위골 예배처소
1. 선바위골 위치
2. 설립교인 김성섬(金聖贍) 집사 전도
3. 소래교회 설립예배
4장 아래소래 예배처소
1. 아래소래 위치
2. 아래소래 예배처소
3. 신앙교육
1) 성수주일
2) 사경회
4. 사회개화운동 실시(社會開化運動實施)
1) 미신타파와 제사폐지
2) 양력 지키기
3) 단발과 유색 옷 장려
4) 개량농사법과 펜윅 평신도 선교사
5) 구미포 선교사 휴양지와 명사십리 해수욕장
2. 동학란에서 구원
1) 동학란에서 소래교회 구원
2) 매켄지 목사 동학 해서지방 도접주 이돈선 구명
3)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
5장 소래교회 예배당 건축
1. 예배당 건축과 헌당
2. 예배당을 T자로 8칸 증축
3. 소래교회 초대 담임목사 매켄지 선교사 순교
4. 사회개화운동
1) 해서제일학교
2) 식목
3) 도로정비
4) 3·1 독립만세운동
6장 새 예배당
1. 새 예배당 건축
2. 희년예배
7장 김성섬(金聖贍) 집사 가계(家系)
1. 김성섬(金聖贍) 집사
2. 장남: 김윤방(金允邦) 집사
1) 장녀 김함라 권사(金函羅, 1887~1975)
2) 차녀 김미염(金美艶) 의사
3) 삼녀 김마리아 열사(金瑪利亞, 1891~1944)
3. 차남: 김윤오(金允五) 집사(1853~?)
1) 외동딸 김세라
4. 삼남: 김윤열(?~1891년)
5. 사남: 김필순(金弼順)(1878년 6월 25일–1919년 9월 1일)
6. 장녀: 김구례
1) 남편: 서병호
7. 차녀: 김순애(金淳愛) 선생(1889~1976)
8. 삼녀: 김필례(金弼禮) 권사(1891년 12월 19일~1983년)
8장 소래교회에서 세운 지교회
1. 봉대교회(구미포교회)
2. 송탄교회
3. 서의동교회(西儀洞敎會, 서꼴교회)
4. 소래목동교회
맺는 글
참고문헌
소래목동교회 사진 인용 현황
저자 소개
머리글
1장 소래교회와 장철수 목사
1. 대구면(大救面) 이름의 유래
1) 서대방 솔샘(松泉) 마을에 소래교회 설립
2) 동학란 때 구원의 역사
3) 서대방 향장 김윤오 집사
2. 대구면과 소래마을 위치
3. 소래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래
1) 토마스 선교사와 순교자 김자평(金子平) 성도
2) 콜벳 선교사와 목동(牧洞) 출신 순교자 김자평 성도
3) 마티어 선교사와 순교자 김자평(金子平) 성도
4. 소래(松川)교회 설립의 역사적 배경
2장 소래교회 역대 교역자
1. 소래교회 설립자 서상륜 조사
1) 서상륜 성도 세례
2) 성경 번역과 인쇄
3) 전도
4) 서상륜 성도와 선교사의 만남
1. 소래교회 초대 장로, 초대 목사 서경조
1) 소래교회 설립
2) 장로장립
3) 목사 장립
4) 감사절 제정
5) 목회
3. 이승철(李承哲) 목사
4. 김응순(金應珣) 목사
5. 조응철 목사
6. 허간(許侃) 목사
3장 선바위골 예배처소
1. 선바위골 위치
2. 설립교인 김성섬(金聖贍) 집사 전도
3. 소래교회 설립예배
4장 아래소래 예배처소
1. 아래소래 위치
2. 아래소래 예배처소
3. 신앙교육
1) 성수주일
2) 사경회
4. 사회개화운동 실시(社會開化運動實施)
1) 미신타파와 제사폐지
2) 양력 지키기
3) 단발과 유색 옷 장려
4) 개량농사법과 펜윅 평신도 선교사
5) 구미포 선교사 휴양지와 명사십리 해수욕장
2. 동학란에서 구원
1) 동학란에서 소래교회 구원
2) 매켄지 목사 동학 해서지방 도접주 이돈선 구명
3)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
5장 소래교회 예배당 건축
1. 예배당 건축과 헌당
2. 예배당을 T자로 8칸 증축
3. 소래교회 초대 담임목사 매켄지 선교사 순교
4. 사회개화운동
1) 해서제일학교
2) 식목
3) 도로정비
4) 3·1 독립만세운동
6장 새 예배당
1. 새 예배당 건축
2. 희년예배
7장 김성섬(金聖贍) 집사 가계(家系)
1. 김성섬(金聖贍) 집사
2. 장남: 김윤방(金允邦) 집사
1) 장녀 김함라 권사(金函羅, 1887~1975)
2) 차녀 김미염(金美艶) 의사
3) 삼녀 김마리아 열사(金瑪利亞, 1891~1944)
3. 차남: 김윤오(金允五) 집사(1853~?)
1) 외동딸 김세라
4. 삼남: 김윤열(?~1891년)
5. 사남: 김필순(金弼順)(1878년 6월 25일–1919년 9월 1일)
6. 장녀: 김구례
1) 남편: 서병호
7. 차녀: 김순애(金淳愛) 선생(1889~1976)
8. 삼녀: 김필례(金弼禮) 권사(1891년 12월 19일~1983년)
8장 소래교회에서 세운 지교회
1. 봉대교회(구미포교회)
2. 송탄교회
3. 서의동교회(西儀洞敎會, 서꼴교회)
4. 소래목동교회
맺는 글
참고문헌
소래목동교회 사진 인용 현황
책 속으로
소래교회에서 해변 쪽으로 도로를 지나 100m 정도 내려오면 솔샘이 있다. 이 샘물은 불타산에서 지하로 수로를 만드시어 소래교회를 지나 솟아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소래평야를 적시어 풍성한 곡식을 주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 평야가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었는데 소래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김 판서 댁을 통하여 개간하게 하시어 옥토로 만들게 하셨다. 그 결과 소래마을은 풍요로운 마을이 되었다.
솔샘이 우리 가문에 주신 주님 사랑의 흔적은 놀랍게도 소래교회에서 분립하여 세운 소래목동교회를 통해 구원해 주신 것이다. 솔샘을 통해 소래마을을 풍요롭게 하셨던 것처럼 소래교회 서상륜, 서경조를 통해 대구면, 장연군, 황해도, 서울과 경기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 p.27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黃命大)는 친히 목격하였던 것을 오문환 장로(1918년부터 토마스 목사 행적을 조사하며 200여 명을 면담한 후 1928년 토마스 목사 전을 출간)에게 “토마스는 죽기 전에 뱃머리에서 용감하게 홀로 ‘야소’를 외치며 남은 성경을 뿌렸다.”라고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는 1932년 토마스 목사 기념교회로 선정되었다. 제너럴셔먼호가 불탈 때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를 따라 친척 김성집과 함께 구경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을 들고 돌아왔다. 그때 20세였던 이신행도 한 권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 후 그녀는 여자로서는 평양 최초의 교인이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며칠 후 제너럴셔먼호에서 받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는 관령(官令)이 내려졌다. 성경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렸는데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 벽지로 사용하였다.
--- p.53
대상자는 일차적으로 서울에서 상업하고 있는 고향 친구들이었다. 서상륜 성도가 전도한 13명의 개종자를 얻어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로스 목사의 입국이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하여 세례를 받지 못했다. 1884년 세례받기를 원하는 신자가 79명으로 증가하여 다시 로스 선교사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같이 서상륜이 열심히 전도하고 있을 때 1884년 가을 알렌 의료선교사가 입국하였고, 1885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이때는 이미 서울에 삼백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교회가 없어 정식 예배는 드리지 못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세울 때 백홍준과 함께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고, 설립 교인 14명 중 서상륜 성도가 인도한 교인 13명이 창립 교인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씨를 뿌려야 할 때 이미 열매를 거두고 있다.”라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때 새문안교회에서 백홍준과 함께 장로로 피택되었지만, 장로직을 가정적인 이유로 받지 않았다.
1887년 9월 27일(화)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던 존 로즈 선교사는 3년 후인 1890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 p.74
허간 목사는 1885년 9월 1일 백령도에서 출생했다. 교육가이며, 사회사업가인 허간 목사는 12세 되던 1897년에 예수를 영접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백령도 중 화동(中和洞)교회 집사로 교회봉사를 시작하였다. 청년 시절에 소래교회에서 세운 해서제일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직하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세부측량 때 일본 정부에서 백령도를 국유지로 만들어 백령도 도민의 생활권이 박탈되는 위기에서 청년 허간은 백령도 도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상대로 5년간 재판한 결과 승소하여 백령도를 다시 민유지화(民有地化)함으로 백령도 도민의 은인으로 추앙(推仰)받았다. 1915년 11월부터 백령도 중화동교회, 사곶(沙串)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하여 1917년 장연 태탄교회(苔灘敎會), 무산교회(茂山敎會), 금동교회(金洞敎會), 사동교회(寺洞敎會), 가당교회(柯堂敎會) 등 5개 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년 반 옥고를 치르고, 재령군 미생촌교회(美生村敎會)에서 시무 중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하고, 4월 9일 황해노회 임시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다. 목사 장립 후에도 미생촌교회에서 시무하였고, 이후 상거동교회(上居洞敎會), 강동촌교회(江東村敎會), 태탄교회(苔灘敎會), 이도교회(耳島敎會) 등에서 목회하였다. 신사참배가 굴욕적으로 이루어진 1938년 황해노회장으로 피선되어 난국을 극복했다.
1939년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소래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시무 중 1942년 반동사상가로 지목되어 교역자 예비검속에 걸려 옥중에서 고역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소래교회에서 시무 중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목회자들의 감시가 심해지고 박해가 심해지자 월남하기로 결심하고 1947년 5월 23일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목동 우리 집(장철수 목사)으로 오셔서 밤에 뱃사공에게 부탁하여 백령도로 떠나도록 도와 드리고 나도 위험을 느껴 다음날인 1947년 5월 24일 밤에 월남하였다. 허간 목사는 백령도에서 토마스 전도 대원이 되어 옹진지구 여러 교회를 설립하고, 백령도 7개 교회가 연합하여 백령도 목회가 시작되었다. 1948년 황남노회를 창립하고, 백령도 성경학교를 설립(1948년 11월)하여 교장으로 봉직하며 교회지도자들을 양성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피살되지 않고 살아있다가 국군의 진격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백령도 자체 치안책 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고아를 위한 자육원(慈育院)도 운영하여 자선 구제에 앞장섰다.
--- p.99~100
청일전쟁이 일어난 직후(1894년)에 도처에서 동학이 일어나 서양인 배척의 구호를 내걸고 예수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장연지역 동학군은 기세가 매우 강하여 장연읍을 습격하여 군기고를 탈취하여 총검으로 완전무장을 하여 기세가 충천하니 많은 남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동학당으로 활동하며 주일에는 소래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으로 행세하였다. 이때 소래교회는 수백 명으로 교인 수가 급증하였다.
동학군의 해주 접주 김원삼이 동학군을 이끌고 서양종교를 믿는 지도자 서경조와 서양인 메켄지, 그리고 소래교회 교인들을 처치하러 30리 밖까지 진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래교회 성도들은 모두 예배당에 모여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던 서경조는 죽음을 각오하고 분연히 일어나 소래를 향하여 오며 이웃 동네에서 작폐가 적지 않은 동학의 두목 김원삼을 찾아갔다. 이때 동학의 두목 김원삼은 자기가 죽이려 하는 서경조가 자기 발로 찾아옴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같이하고 동학대전(東學大典)의 진리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김원삼은 자신도 완전히 해석하지 못하는 동학의 경문을 서경조가 해석하는 것을 보고 서경조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원삼은 동학군들에게 “소래의 서경조와 메켄지를 안전하게 보호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소래를 침범하지 않고 곧바로 후퇴했다.
--- p.135
1895년 7월 23일은 매켄지 목사가 순교한 날이다. 독신으로 송천에 와서 오로지 선교에 열중하여 교회를 돕던 매켄지 목사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남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다가 조금이라도 불편을 덜기 위하여 예배당이 준공되기 전에 남자 부속실을 급히 꾸미고 거처를 옮겼다. 부속실에서 생활하던 중 열병에 걸려 교인들이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의료시설도 없고, 약품 공급도 원활하지 못한 시골이어서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어느 날 밤 총소리가 요란하게 마을에 울려 펴졌다. 사람들은 총소리가 난 예배당으로 달려가 매켄지 목사의 거처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방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고, 화약 냄새만 났다. 방문을 뜯고 들어가 보니 매켄지 목사가 죽어 있고 그의 옆에는 평소 지니고 있던 총이 놓여 있었다. 송천교회에서 첫 순교자가 난 것이다.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예배당 뒤 500m 정도 떨어진 벌판에 안장했다. 그리고 커다란 하얀 차돌로 비석을 세웠다. 앞면에는 약력을 쓰고, 뒷면에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요 12: 24)을 중심으로 그의 순교 정신을 새겼다.
--- p.161
1919년 3월 1일 평양과 서울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3월 5일이 서울의 학생들이 남대문 역(현 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날이었다. 이날 독립만세 시위에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다수 참석하였기에 일경의 방문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곳에 있던 김마리아 열사(烈士)도 독립만세 운동의 주모자라며 체포하여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악명높은 왜성대(倭城臺) 조선총독부 경무대로 끌려갔다. 무서운 고문 도구가 가득한 취조실에서도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배후와 연루자를 밝히라는 압박과 혹독한 고문을 하며 ‘일본 연호로 대답하라’는 말에 ‘나는 일본 연호는 모르고 서기밖에 모른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재판관이 ‘피고를 무죄로 석방하면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는가?’라고 질문하자 ‘독립운동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느냐? 재판관은 자기 나라가 망해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니, 그런 온당치 않은 말이 어디 있소.’라며 도리어 꾸짖었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해 메스토이병에 걸려 평생 고통에 시달렸다.
일제 형사들은 김마리아 열사(烈士)와 동경 유학생 조직과의 관계를 캐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날카로운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막대기로 머리를 때려 실신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실로 충격적인 고문을 감행했다. 김마리아를 죄수나 옥에 갇힌 사람들 앞에 옷을 벗기고 다니게 하고 심지어 죄수들 앞에 세워두고, 기어서 다니게 하여 최대한 수치심을 유발하였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달군 인두로 한쪽 가슴을 수차례 지져 한쪽 가슴이 없어졌다. 이 사실은 김마리아 열사(烈士)의 수양딸 배학복이 간직해온 특별한 한복 저고리를 보여주며 한 증언이다.
간수가 김마리아를 데리고 법정으로 갔다. 일본인 재판관은 “너희의 소란으로 조선의 독립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는 복종해야만 한다. 앞으로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어라”고 말하였다. 후에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재판관은 알았을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바로 그 현모양처란 말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가던 나를 다시금 깨어나게 해준 것을.”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41세 때 기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느냐?”라고 물어보자 “나는 평범한 삶을 포기한 지 오랩니다. 비록 족두리는 쓰지 않았지만, 결혼한 거나 다름없죠. 일본 재판관이 현모양처가 되라고 했을 때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기로 했으니까요.” 대답하였다. 1919년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감 후에도 조국 독립의 꿈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하게 활동하며, 정신여학교 동문과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연합회 회장을 맡고, 황애덕이 총무로 선임하여 활동하였고, 김마리아는 “본회의 목적은 대한민국 국권을 확장하는 데 있다.”라고 하여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임을 분명히 밝혔다.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모금하여 1919년 11월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 p.197~198
김필례(金弼禮) 권사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 구석몰에서 아버지 김성섬 집사와 어머니 안성은 성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소래교회에서 설립한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校)를 졸업하고, 1903년 서울 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두 번 월반하고, 1907년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 후 연동여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였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오빠 김필순을 도와 부상병을 간호하면서 이 끔찍한 현장을 목격(目擊)하며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1908년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 자격이 주어지는 일본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 중등부에 입학하여 역사를 전공하고 1913년 졸업하고, 고등부를 1916년에 졸업했다.
1914년 영화음악전문학교(英和音樂專門學校)를 같이 수학(受學)하였다. 1915년 4월 동경 여자유학생이 모여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김필례(金弼禮)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친목회는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고, 한국여성계의 광명이 되어 스웨덴의 여성해방론자 엘렌 케이(Ellen Key)와 같은 이상적 부인의 삶을 창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김필례 권사가 귀국한 후 조카 김마리아가 회장직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 교양 잡지 “여자계”를 1917년 12월 출간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에 기독교 청년연합회(YWCA)에서 활동하며 식견을 넓혔다. 1916년 동경 여자학원 고등부와 영화음악전문학교(英和音樂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4월부터 정신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20일 의사 최영욱(崔泳旭)과 결혼하여 정신여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살게 되었다. 결혼 후 오빠 김필순이 치치하얼(濟濟哈爾, 제제합이)로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보내 온 제안이 의미와 보람이 크기에 반갑게 받아들여 흑룡강성(黑龍江省) 치치하얼(濟濟哈爾)에 봉사하러 갔다. 남편 최영욱은 병원 일을 하고, 김필례 집사는 주로 농사짓는 농민 동포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이때 첫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시어머니의 곤경을 듣고 귀국해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 p.220~221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우리 가정까지 월남하니 소래목동교회는 또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소래목동교회 만이 아니고 북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주의 종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여 남한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계승시키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여 부천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들들에게 복음을 계승시키며 살던 중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장인이 목회하고 있는 학다리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고 있는데 공산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인, 처남, 나 이렇게 남자 세 명은 가족들을 학다리에 두고 부산으로 피난 가다 강진 송산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공산군이 지나가 부산으로 가는 길도 막혀 산속에 들어가 숨었다. 산속에 숨어있으며 나는 장예숙을 장철수라 개명하고 새사람이 되어 내려와 가족이 있는 학다리로 돌아오는 길에 공산당에게 붙잡혀 죽게 된 순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다.
첫 목회지 복길교회는 공산군이 1950년 10월에 후퇴하며 마을 사람 149명을 잔혹하게 학살(성도 43명이 순교)당해 복길교회 성도들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나는 학살이 일어나고 3개월 후(1951년 1월) 복길교회에 부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공산 정권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나를 보내셔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말씀을 전하며 성도들을 위로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미자립교회로 보내셔서 예배당을 건축하게 하시고, 총회신학교에 보내셔서 공부하고 1958년 2월 졸업(제7회)했다. 1960년 2월 12일에 목포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은 후 독천교회에서 당회를 조직하고 날마다 부흥되고 있을 때, 목포노회에서 해남 원진교회로 파송하였고, 다시 목포노회에서 목포교회로 파송하여 목회하였다.
나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목회하기를 원했고, 우리 가정의 형편을 고려하여 피하려 하지 않았다.
1971년 6월 6일 신일교회를 개척하여 2003년 6월 6일 은퇴할 때까지 32년간 목회하고 신일교회 원로목사와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2003년 은퇴 후에는 군 여단장이 문암교회 담임목사로 위촉하여 2013년까지 군 선교목회를 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고향 소래목동교회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공산당에게 빼앗긴 소래목동교회를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재건하겠다는 생각을 명절에 만나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포천군 문암리에 신일기도원을 세우며 “통일이 될 때까지 가문의 고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자”라며 이십여 년을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둘째 형일 장로가 “아버지! 아들 장가람 목사와 사위 장재우 목사가 할아버지 시대에 잃어버린 북한교회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통일이 되면 복원할 청사진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소래목동교회가 자손들의 가슴속에서도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며 전율이 일어나 아들들과 소래목동교회 재건의 꿈을 공유하고 청사진을 그리며 지내니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블레셋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고, 다윗왕은 산성에 있으면서 다윗왕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샘물을 갈망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말하자 세 용사가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온 사건이 떠 오른다. 다윗왕이 적군에 빼앗긴 베들레헴 우물물을 갈망한 것처럼 나도 공산정권에 빼앗긴 저 북녘땅에 있는 목자들의 샘물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다.
남북통일이 되면 사랑하는 자손들이 목자들의 샘을 되찾고 재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문에게 사랑의 표로 주신 귀한 목자들의 샘물을 길어오는 꿈을 꾸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솔샘이 우리 가문에 주신 주님 사랑의 흔적은 놀랍게도 소래교회에서 분립하여 세운 소래목동교회를 통해 구원해 주신 것이다. 솔샘을 통해 소래마을을 풍요롭게 하셨던 것처럼 소래교회 서상륜, 서경조를 통해 대구면, 장연군, 황해도, 서울과 경기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 p.27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黃命大)는 친히 목격하였던 것을 오문환 장로(1918년부터 토마스 목사 행적을 조사하며 200여 명을 면담한 후 1928년 토마스 목사 전을 출간)에게 “토마스는 죽기 전에 뱃머리에서 용감하게 홀로 ‘야소’를 외치며 남은 성경을 뿌렸다.”라고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는 1932년 토마스 목사 기념교회로 선정되었다. 제너럴셔먼호가 불탈 때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를 따라 친척 김성집과 함께 구경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을 들고 돌아왔다. 그때 20세였던 이신행도 한 권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 후 그녀는 여자로서는 평양 최초의 교인이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며칠 후 제너럴셔먼호에서 받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는 관령(官令)이 내려졌다. 성경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렸는데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 벽지로 사용하였다.
--- p.53
대상자는 일차적으로 서울에서 상업하고 있는 고향 친구들이었다. 서상륜 성도가 전도한 13명의 개종자를 얻어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로스 목사의 입국이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하여 세례를 받지 못했다. 1884년 세례받기를 원하는 신자가 79명으로 증가하여 다시 로스 선교사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같이 서상륜이 열심히 전도하고 있을 때 1884년 가을 알렌 의료선교사가 입국하였고, 1885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이때는 이미 서울에 삼백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교회가 없어 정식 예배는 드리지 못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세울 때 백홍준과 함께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고, 설립 교인 14명 중 서상륜 성도가 인도한 교인 13명이 창립 교인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씨를 뿌려야 할 때 이미 열매를 거두고 있다.”라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때 새문안교회에서 백홍준과 함께 장로로 피택되었지만, 장로직을 가정적인 이유로 받지 않았다.
1887년 9월 27일(화)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던 존 로즈 선교사는 3년 후인 1890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 p.74
허간 목사는 1885년 9월 1일 백령도에서 출생했다. 교육가이며, 사회사업가인 허간 목사는 12세 되던 1897년에 예수를 영접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백령도 중 화동(中和洞)교회 집사로 교회봉사를 시작하였다. 청년 시절에 소래교회에서 세운 해서제일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직하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세부측량 때 일본 정부에서 백령도를 국유지로 만들어 백령도 도민의 생활권이 박탈되는 위기에서 청년 허간은 백령도 도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상대로 5년간 재판한 결과 승소하여 백령도를 다시 민유지화(民有地化)함으로 백령도 도민의 은인으로 추앙(推仰)받았다. 1915년 11월부터 백령도 중화동교회, 사곶(沙串)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하여 1917년 장연 태탄교회(苔灘敎會), 무산교회(茂山敎會), 금동교회(金洞敎會), 사동교회(寺洞敎會), 가당교회(柯堂敎會) 등 5개 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년 반 옥고를 치르고, 재령군 미생촌교회(美生村敎會)에서 시무 중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하고, 4월 9일 황해노회 임시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다. 목사 장립 후에도 미생촌교회에서 시무하였고, 이후 상거동교회(上居洞敎會), 강동촌교회(江東村敎會), 태탄교회(苔灘敎會), 이도교회(耳島敎會) 등에서 목회하였다. 신사참배가 굴욕적으로 이루어진 1938년 황해노회장으로 피선되어 난국을 극복했다.
1939년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소래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시무 중 1942년 반동사상가로 지목되어 교역자 예비검속에 걸려 옥중에서 고역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소래교회에서 시무 중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목회자들의 감시가 심해지고 박해가 심해지자 월남하기로 결심하고 1947년 5월 23일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목동 우리 집(장철수 목사)으로 오셔서 밤에 뱃사공에게 부탁하여 백령도로 떠나도록 도와 드리고 나도 위험을 느껴 다음날인 1947년 5월 24일 밤에 월남하였다. 허간 목사는 백령도에서 토마스 전도 대원이 되어 옹진지구 여러 교회를 설립하고, 백령도 7개 교회가 연합하여 백령도 목회가 시작되었다. 1948년 황남노회를 창립하고, 백령도 성경학교를 설립(1948년 11월)하여 교장으로 봉직하며 교회지도자들을 양성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피살되지 않고 살아있다가 국군의 진격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백령도 자체 치안책 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고아를 위한 자육원(慈育院)도 운영하여 자선 구제에 앞장섰다.
--- p.99~100
청일전쟁이 일어난 직후(1894년)에 도처에서 동학이 일어나 서양인 배척의 구호를 내걸고 예수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장연지역 동학군은 기세가 매우 강하여 장연읍을 습격하여 군기고를 탈취하여 총검으로 완전무장을 하여 기세가 충천하니 많은 남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동학당으로 활동하며 주일에는 소래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으로 행세하였다. 이때 소래교회는 수백 명으로 교인 수가 급증하였다.
동학군의 해주 접주 김원삼이 동학군을 이끌고 서양종교를 믿는 지도자 서경조와 서양인 메켄지, 그리고 소래교회 교인들을 처치하러 30리 밖까지 진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래교회 성도들은 모두 예배당에 모여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던 서경조는 죽음을 각오하고 분연히 일어나 소래를 향하여 오며 이웃 동네에서 작폐가 적지 않은 동학의 두목 김원삼을 찾아갔다. 이때 동학의 두목 김원삼은 자기가 죽이려 하는 서경조가 자기 발로 찾아옴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같이하고 동학대전(東學大典)의 진리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김원삼은 자신도 완전히 해석하지 못하는 동학의 경문을 서경조가 해석하는 것을 보고 서경조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원삼은 동학군들에게 “소래의 서경조와 메켄지를 안전하게 보호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소래를 침범하지 않고 곧바로 후퇴했다.
--- p.135
1895년 7월 23일은 매켄지 목사가 순교한 날이다. 독신으로 송천에 와서 오로지 선교에 열중하여 교회를 돕던 매켄지 목사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남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다가 조금이라도 불편을 덜기 위하여 예배당이 준공되기 전에 남자 부속실을 급히 꾸미고 거처를 옮겼다. 부속실에서 생활하던 중 열병에 걸려 교인들이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의료시설도 없고, 약품 공급도 원활하지 못한 시골이어서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어느 날 밤 총소리가 요란하게 마을에 울려 펴졌다. 사람들은 총소리가 난 예배당으로 달려가 매켄지 목사의 거처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방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고, 화약 냄새만 났다. 방문을 뜯고 들어가 보니 매켄지 목사가 죽어 있고 그의 옆에는 평소 지니고 있던 총이 놓여 있었다. 송천교회에서 첫 순교자가 난 것이다.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예배당 뒤 500m 정도 떨어진 벌판에 안장했다. 그리고 커다란 하얀 차돌로 비석을 세웠다. 앞면에는 약력을 쓰고, 뒷면에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요 12: 24)을 중심으로 그의 순교 정신을 새겼다.
--- p.161
1919년 3월 1일 평양과 서울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3월 5일이 서울의 학생들이 남대문 역(현 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날이었다. 이날 독립만세 시위에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다수 참석하였기에 일경의 방문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곳에 있던 김마리아 열사(烈士)도 독립만세 운동의 주모자라며 체포하여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악명높은 왜성대(倭城臺) 조선총독부 경무대로 끌려갔다. 무서운 고문 도구가 가득한 취조실에서도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배후와 연루자를 밝히라는 압박과 혹독한 고문을 하며 ‘일본 연호로 대답하라’는 말에 ‘나는 일본 연호는 모르고 서기밖에 모른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재판관이 ‘피고를 무죄로 석방하면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는가?’라고 질문하자 ‘독립운동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느냐? 재판관은 자기 나라가 망해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니, 그런 온당치 않은 말이 어디 있소.’라며 도리어 꾸짖었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해 메스토이병에 걸려 평생 고통에 시달렸다.
일제 형사들은 김마리아 열사(烈士)와 동경 유학생 조직과의 관계를 캐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날카로운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막대기로 머리를 때려 실신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실로 충격적인 고문을 감행했다. 김마리아를 죄수나 옥에 갇힌 사람들 앞에 옷을 벗기고 다니게 하고 심지어 죄수들 앞에 세워두고, 기어서 다니게 하여 최대한 수치심을 유발하였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달군 인두로 한쪽 가슴을 수차례 지져 한쪽 가슴이 없어졌다. 이 사실은 김마리아 열사(烈士)의 수양딸 배학복이 간직해온 특별한 한복 저고리를 보여주며 한 증언이다.
간수가 김마리아를 데리고 법정으로 갔다. 일본인 재판관은 “너희의 소란으로 조선의 독립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는 복종해야만 한다. 앞으로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어라”고 말하였다. 후에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재판관은 알았을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바로 그 현모양처란 말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가던 나를 다시금 깨어나게 해준 것을.”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41세 때 기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느냐?”라고 물어보자 “나는 평범한 삶을 포기한 지 오랩니다. 비록 족두리는 쓰지 않았지만, 결혼한 거나 다름없죠. 일본 재판관이 현모양처가 되라고 했을 때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기로 했으니까요.” 대답하였다. 1919년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감 후에도 조국 독립의 꿈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하게 활동하며, 정신여학교 동문과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연합회 회장을 맡고, 황애덕이 총무로 선임하여 활동하였고, 김마리아는 “본회의 목적은 대한민국 국권을 확장하는 데 있다.”라고 하여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임을 분명히 밝혔다.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모금하여 1919년 11월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 p.197~198
김필례(金弼禮) 권사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 구석몰에서 아버지 김성섬 집사와 어머니 안성은 성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소래교회에서 설립한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校)를 졸업하고, 1903년 서울 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두 번 월반하고, 1907년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 후 연동여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였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오빠 김필순을 도와 부상병을 간호하면서 이 끔찍한 현장을 목격(目擊)하며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1908년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 자격이 주어지는 일본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 중등부에 입학하여 역사를 전공하고 1913년 졸업하고, 고등부를 1916년에 졸업했다.
1914년 영화음악전문학교(英和音樂專門學校)를 같이 수학(受學)하였다. 1915년 4월 동경 여자유학생이 모여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김필례(金弼禮)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친목회는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고, 한국여성계의 광명이 되어 스웨덴의 여성해방론자 엘렌 케이(Ellen Key)와 같은 이상적 부인의 삶을 창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김필례 권사가 귀국한 후 조카 김마리아가 회장직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 교양 잡지 “여자계”를 1917년 12월 출간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에 기독교 청년연합회(YWCA)에서 활동하며 식견을 넓혔다. 1916년 동경 여자학원 고등부와 영화음악전문학교(英和音樂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4월부터 정신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20일 의사 최영욱(崔泳旭)과 결혼하여 정신여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살게 되었다. 결혼 후 오빠 김필순이 치치하얼(濟濟哈爾, 제제합이)로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보내 온 제안이 의미와 보람이 크기에 반갑게 받아들여 흑룡강성(黑龍江省) 치치하얼(濟濟哈爾)에 봉사하러 갔다. 남편 최영욱은 병원 일을 하고, 김필례 집사는 주로 농사짓는 농민 동포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이때 첫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시어머니의 곤경을 듣고 귀국해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 p.220~221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우리 가정까지 월남하니 소래목동교회는 또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소래목동교회 만이 아니고 북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주의 종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여 남한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계승시키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여 부천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들들에게 복음을 계승시키며 살던 중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장인이 목회하고 있는 학다리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고 있는데 공산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인, 처남, 나 이렇게 남자 세 명은 가족들을 학다리에 두고 부산으로 피난 가다 강진 송산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공산군이 지나가 부산으로 가는 길도 막혀 산속에 들어가 숨었다. 산속에 숨어있으며 나는 장예숙을 장철수라 개명하고 새사람이 되어 내려와 가족이 있는 학다리로 돌아오는 길에 공산당에게 붙잡혀 죽게 된 순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다.
첫 목회지 복길교회는 공산군이 1950년 10월에 후퇴하며 마을 사람 149명을 잔혹하게 학살(성도 43명이 순교)당해 복길교회 성도들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나는 학살이 일어나고 3개월 후(1951년 1월) 복길교회에 부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공산 정권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나를 보내셔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말씀을 전하며 성도들을 위로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미자립교회로 보내셔서 예배당을 건축하게 하시고, 총회신학교에 보내셔서 공부하고 1958년 2월 졸업(제7회)했다. 1960년 2월 12일에 목포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은 후 독천교회에서 당회를 조직하고 날마다 부흥되고 있을 때, 목포노회에서 해남 원진교회로 파송하였고, 다시 목포노회에서 목포교회로 파송하여 목회하였다.
나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목회하기를 원했고, 우리 가정의 형편을 고려하여 피하려 하지 않았다.
1971년 6월 6일 신일교회를 개척하여 2003년 6월 6일 은퇴할 때까지 32년간 목회하고 신일교회 원로목사와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2003년 은퇴 후에는 군 여단장이 문암교회 담임목사로 위촉하여 2013년까지 군 선교목회를 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고향 소래목동교회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공산당에게 빼앗긴 소래목동교회를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재건하겠다는 생각을 명절에 만나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포천군 문암리에 신일기도원을 세우며 “통일이 될 때까지 가문의 고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자”라며 이십여 년을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둘째 형일 장로가 “아버지! 아들 장가람 목사와 사위 장재우 목사가 할아버지 시대에 잃어버린 북한교회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통일이 되면 복원할 청사진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소래목동교회가 자손들의 가슴속에서도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며 전율이 일어나 아들들과 소래목동교회 재건의 꿈을 공유하고 청사진을 그리며 지내니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블레셋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고, 다윗왕은 산성에 있으면서 다윗왕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샘물을 갈망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말하자 세 용사가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온 사건이 떠 오른다. 다윗왕이 적군에 빼앗긴 베들레헴 우물물을 갈망한 것처럼 나도 공산정권에 빼앗긴 저 북녘땅에 있는 목자들의 샘물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다.
남북통일이 되면 사랑하는 자손들이 목자들의 샘을 되찾고 재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문에게 사랑의 표로 주신 귀한 목자들의 샘물을 길어오는 꿈을 꾸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 본문 중에서
'47.기독교-개신교 (독학>책소개) > 2.한국기독교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만식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진, 조선의 간디 (2011) (0) | 2024.07.30 |
---|---|
景交經義(경교경의) 2023 (0) | 2024.07.28 |
노래에 담긴 한국교회 (2024) - 1957년 『백합화』 이야기 (0) | 2024.07.07 |
김교신 거대한 뿌리 (2011) - 조선산 기독교를 온몸으로 살다 (0) | 2024.06.19 |
윤치호와 김교신 (2009) - 근대 조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0) | 2024.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