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3.조선의전쟁

인조仁祖 1636 (2024)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동방박사님 2024. 8. 14.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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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만문노당(滿文老?)』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인조와 병자호란에 대한 완전한 재인식!
어리석은 군주의 권력욕이 불러온 병자호란의 참화와 소현세자의 죽음을 낱낱이 파헤친 역사 평설

『인조仁祖 1636』은 병자호란에 대해 완전히 다른 문제 인식을 제공하는 책이다. 먼저 저자는 1636년을 중심으로 조선의 내외 정세 및 대응 그리고 전쟁의 실질적 피해자인 백성들의 참상을 사료를 근거로 상세히 서술한다. 저자에 의하면 병자호란은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었다. 이 책은 인조반정→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무능한 지도자의 그릇된 인식과 판단이 엄청난 전쟁의 원인이며, 그것의 최종 피해자는 백성임을 밝힌다. 『인조仁祖 1636』은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주전파와 주화파의 허망한 논쟁보다,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보다 남한산성에 숨은 왕을 구하기 위해 근왕군으로 동원된 병사와 의병 그리고 백성들의 죽음, 청으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억울한 백성들이 왜 그러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한다. 이제 독자들은 막연히 조선의 3대 혼군으로 알려진 인조의 시간을 여행하며, 오욕의 역사에서 현재를 생각하는 ‘역사의 눈’을 키우게 될 것이다.

목차

서문 |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고 대국을 섬기기만 하면 백성은 어떻게 되는가?

제1부 병자호란 전 인조

1. 광해군
임진왜란과 광해군 / 광해군의 술 취한 밤 / 광해군 일가의 최후
2. 이괄
1624, 이괄의 분노 / 2일 천하 / 안전하게 도망갈 곳, 남한산성
3. 조선 국왕, 인조
“그대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노라” / 돌아보건대, 너희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 가도를 깔고 앉은 모문룡
4. 누르하치
누르하치의 맹세 / 1616, 누르하치의 후금(後金) 건국 / 강홍립, 명과 후금의 사이에서 / 영원성 패배와 누르하치의 죽음
5. 홍타이지
홍타이지의 조선 정벌 / 정묘년(1627), 다국적국 3만 조선을 침략하다 / 평안감사 윤훤 참수당하다
6. 혼군
인조는 또다시 강화도로 도망치고 /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다” / 정묘호란 최대의 승리, 용골산성전투 / 소현세자의 분조 / 정묘약조의 후폭풍 / 멸망의 길로 들어선 명나라 / 황제가 된 홍타이지 / 파국으로 치닫는 양국 관계

2부 병자호란 중 인조

1. 남한산성
병자호란, “죽여야 할 자는 죽이고, 노획할 자는 노획하라” / 최명길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다 / 섣달 열 나흗날 밤, 인조 남한산성에 도착하다 /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통
2. 갇혀 있는 왕
“나를 구하라” / 쌍령전투 : 왕을 구하려다 죽어간 군사들 / 김준룡 부대, 적장 양구리 전사시키다 / 병자호란 최대 승첩, 김화전투 /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황제께 글월을 올립니다”
3.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
강화검찰사 김경징 / 강화도 함락 / 강화도는 지휘부의 무능으로 무너졌다 /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부녀자들 / 김경징 사사당하다
4. 삼전도의 굴욕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 / 삼학사 / 김상헌, 최명길 심양으로 압송되다 / 비극! 청으로 잡혀간 피로인들

3부 병자호란 후 인조

1. 의혹의 두 인물
미원 산골짜기로 숨어든 도원수 김자점 / 임경업은 명장(名將)인가, 명장(明將 )인가?
2. 미약한 희망
조청 연합군 / 소현세자의 심양길 / 역관 정명수의 패악 / 소현세자의 고국 방문 / 1,000일 갈이의 밭
3. 착오와 정세
청 태종, 홍타이지 죽다 / 여섯 살 황제와 섭정왕 도르곤 / 명의 운명을 걸머진 오삼계 / 소현세자, 명나라의 최후를 목격하다 / 청의 북경 천도 / 도르곤의 죽음과 의순공주의 비극
4. 무능의 광기
소현세자와 아담 샬 / 소현세자의 죽음 / 검은빛 / 강빈의 사사 / 비극의 끝

부록 남한산성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유근표
서울성곽이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어 수풀 속에 방치되어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2000년 초부터 6년에 걸쳐 답사한 끝에 ‘서울성곽 탐방안내도’를 완성, 2006년 2월 언론에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서울성곽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문화재 관련 단체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서울성곽 안내와 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강의했다. 현재는 독립운동사 연구와 역사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조 1636』,...

책 속으로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그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p.5

이괄은 기개와 야망이 넘치는 타고난 무인이었다. 또한 문장과 필법에도 뛰어났기에 항간에서는 이괄이야말로 장래 ‘병조판서 재목’이라고 회자되었다. 이귀도 이 점을 인정하고 그를 병조판서로 추천했다. … 김류와 이귀는 이괄이 1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괄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서울은 그의 말발굽 아래 유린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p.36

반정 주체인 서인들은 먼저 기찰 대상자 명부를 만들었다. 그 대상자는 병력 동원 능력과 광해군 정권의 실세였던 북인과의 연계 여부를 기준으로 했다. 이어서 기찰 중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잡아들이고, 혐의가 짙으면 목을 베었다.
---p.54

반란이 두려웠던 인조 정권은 말로는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고 하면서도 변방의 장졸들에게 조련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 조련이 안 된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국방력은 나날이 쇠약해져갔다.
---p.54

이괄의 난 후유증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명나라에서 오는 책봉사 접대 문제로 나라의 곳간이 비어 가도(?島)에 머무는 모문룡에게 손을 내미는 상황에서도 조정의 권신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는 잔치를 강행했다. 여기에 더하여 변방으로 내려가서 국방에 전념해야 할 군인들조차도 회맹연입네 분축연입네 하면서 도성에 머물러 며칠씩 먹고 마시고 놀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회맹연에 불참한 가제조(假提調) 이섬(李?)과 청성감(靑城監) 이희순(李希舜) 두 사람을 파직시킨 일이다.
---p.64

애초에 광해군은 명에서 원군을 요청했을 때 이에 응하지 않으려 했다. 광해군은 이미 저물어가는 명나라를 돕다가 신흥 강국인 후금과의 마찰을 빚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p.81

이날 이완과 함께 죽은 사촌 아우 ‘신’은 사실 이순신의 아들이었다. 이순신은 적실 상주 방씨(方氏)에게서 회(?), 울(蔚), 면(?)) 3형제를 얻고, 측실 해주 오씨에게서 ‘훈(薰)’과 ‘신(藎)’ 두 아들을 얻었다. ‘훈’ 또한 무인으로 그는 지난 이괄의 난 때 길마재 싸움에서 전사하고, 아우 신은 이번 의주성전투에서 전사했으니, 과연 충무공의 후예다운 의로운 죽음이었다.
---p.98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인조 정권이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좀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지나친 숭명배금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방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p.130~131

“적의 세력이 시각을 다툴 만큼 급박하니,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구려! 비록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시신이 나뒹구는 산야에서 어떻게 나의 시신을 찾을 수 있겠소. 이 편지 띄운 날을 내가 죽은 날로 삼으시오만, 다만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어미와 아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살 곳을 잃는 슬픔만 겪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소. 편지를 써 놓고 보니 슬프고도 망연하구려!”(1637년 1월 1일 쌍령에서)
---p.171~172

난이 끝난 후 양사(兩司)에서는 인조에게 검찰사 김경징과 주사대장 장신에게 군율을 적용하여 참형에 처할 것을 주청했다. 이에 대하여 인조는 “김경징이 거느린 병력이 턱없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원로 대신의 외아들을 죽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명분을 들어 양사의 주장을 물리치고, 평안도 강계로 유배시키라고 명했다.
---p.214

잉굴다이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면서 울부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p.224

안단은 의주부윤 조성보(趙聖輔)에게 자신의 내력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뒷날 문책을 두려워한 조성보는 안단의 사연을 칙사에게 알렸고, 칙사는 안단을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하라고 명했다. 군졸의 손에 이끌려가던 안단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보내면 어떡하느냐?”
---p.241

소현세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직후 가장 먼저 목도한 장면은 북으로 끌려가는 수많은 피로인 행렬이었다. 그 행렬은 의주대로를 꽉 메워 걸음조차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p.267

청에 잡아두었던 김상헌과 최명길 등의 귀국도 허용하는데, 겹치는 경사 속에서도 인조는 세자에게 냉대로 일관했다. 인조가 청에서 8년에 걸쳐 혹독한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이처럼 모질게 대한 것은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세자에게 양위를 시키지 않을까 하는 의혹 때문이었다.
---p.318

소현세자의 치료를 주도했던 이형익은 인조의 총비(寵妃) 소용(昭容) 조씨(趙氏)의 모친과 염문으로 인하여 세간의 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인조를 등에 업고 세자 내외를 무함(誣陷)하기 일쑤였던 조 소용은 소현세자 사후에 세자빈까지 사약을 받게 만든다. 따라서 소현세자가 독살 의혹에 시달리게 된 데에는 이형익이 치료를 담당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p.323

강빈을 사사한 인조는 세상의 눈을 의식하여 소현세자와 강빈이 남긴 석철 3형제를 한동안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 후 강빈이 죽은 지 일 년 남짓 지나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며 자신의 손자들인 석철 3형제를 멀리 제주도로 유배하도록 명했다. 당시 큰손자 석철(石鐵)의 나이는 열두 살, 둘째 석린(石麟)은 여덟 살, 막내 석견(石堅)은 겨우 네 살이었다.
---p.332

출판사 리뷰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침략인가, 인조의 오판과 무능이 불러온 전쟁인가?
명청 교체기 국제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인조의 외교 정책과 병자호란

병자호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원인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명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반정에 성공한다. 따라서 인조에게 전 정권 세력 척결과 광해군의 외교 정책 폐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그랬을까? 인조는 떠오르는 강자 후금을. 한낱 오랑캐로 규정할 뿐이었다. 더구나 인조는 명을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정책으로 일관해,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려고도 수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첫 번째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1618년 명과 후금은 사르후에서 전투를 벌인다. 조선은 강홍립을 필두로 1만 3,000의 지원군을 파견하는데, 중원 진출을 노리는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조선을 먼저 정벌해야 할 군사적 필요성을 확신한다. 게다가 후금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조선이 불러들인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어리석은 군주 인조의 시간은 정묘호란으로 그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저자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행한 명나라의 은공을 갚아야 한다며 대명의리를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대명의리에 빠져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도,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 증강 등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10년 후 홍타이지가 즉위하고 명나라 정복이 본격화하면서 또다시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야 했다. 병자호란은 유례없는 굴욕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과연 인조는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비겁한 왕으로만 역사의 시간에 멈춰 있어야 하는가?

“나를 구하라” 근왕령 발동으로 인조를 구하려다 죽어간 수많은 병사, 의병, 그리고 지휘관들
절대군주가 불러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백성이었다.

최고 권력자 인조


인조는 반정에 성공한 조선의 전제군주였다. 그리고 반정의 실질적인 책임자이기도 하다. 광해군이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다며 반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나 그는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백성을 버리고 자기 살길만 찾는 군주를 백성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청나라가 기마병을 앞세우고 순식간에 서울 인근에 당도하자 인조는 강화로의 피난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반란이 무서워 군사훈련을 금지했던 인조 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조선군은 홍타이지와 백전노장 장수들이 이끄는 청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남한산성에 갇혀 청군의 홍이포 공격에 속수무책이던 인조는 도성 이남의 군 지휘관들에게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동원하여 자신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병자년 12월, 삼남에서 몰려온 군사들, 의병들, 지휘관들은 혹독한 추위와 군수물자의 부족 속에서 왕을 위해 혈전을 벌였다. 남한산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주전파와 주화파 놀이를 주관한 것도 인조였고, 거듭되는 패전에 스스로의 목숨을 구걸한 당사자도 인조였다.

병자호란을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에서만 원인을 찾는다면 왕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병사, 의병, 장수들 그리고 억울하게 청으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백성들의 역사적 한(恨)은 여전히 방기되고,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남지 않을 것이다.

인조의 권력욕이 불러온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
오만과 무능으로 조선 최악의 비극을 불러온 군주, 인조

소현세자의 죽음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다. 하지만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며느리 강빈을 사사하고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죽게 내버려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포로였지만, 명의 멸망을 직접 경험했고 청 제국의 복잡한 정세와 아담 샬을 통해 발전한 서양의 과학 문명을 학습했다. 그는 혼군의 시선으로 정권 안위에 급급했던 아버지 인조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수 있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기록과 사실은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의 냉대 속에서 귀국 2달 만에 세상을 떠난 이유가 그의 건강에 있든, 소현세자가 친청파로 돌아섰다는 오해와 청나라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저지른 독살이든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수입해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역사는 멈추지 않고 해석되고 해석된다. 소현세자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어리석은 왕이자 아버지 인조의 비정함의 결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혼군, 즉 어리석은 왕의 광기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