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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당대 조선인의 시선에서 다시 본 병자호란
이 책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이 취한 군사적 대응과 한계를 분석하고, 전쟁과 관련된 주화·척화 담론의 특징과 성격, 전쟁이 초래한 국내외적 질서의 변동을 '예禮의 실천'이라는 시각을 통해 살펴보았다. 당대인들이 전력의 열세를 분명하게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병자호란이란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이 취한 군사적 대응과 한계를 분석하고, 전쟁과 관련된 주화·척화 담론의 특징과 성격, 전쟁이 초래한 국내외적 질서의 변동을 '예禮의 실천'이라는 시각을 통해 살펴보았다. 당대인들이 전력의 열세를 분명하게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병자호란이란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 3
제1장 병자호란 연구의 성과와 한계 11
1. 문제의 제기 11
2. 연구 동향 검토 21
3. 책의 구성과 논점 28
제2장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국방 태세 33
1. 병력 확보와 군량 공급의 문제점 33
2. 조·명 군사 협력의 실상 57
3. 청야입보淸野入保 전술의 추진과 한계 89
제3장 병자호란의 발발과 강화講和 협상의 추이 119
1. 대청체제大淸體制의 수립과 조·청 간의 의례 논쟁 119
2. 청군의 군사력과 개전 초기의 전황 152
3. 남한산성 농성과 강화 협상의 쟁점 173
제4장 전후처리와 척화론斥和論의 함의 217
1. 삼전도 항례降禮의 이행과 대청對淸 관계의 재설정 217
2. 패전 책임자 처벌을 둘러싼 주화·척화론의 재격돌 239
3. 조선시대 중화中華 인식의 성격과 척화론 296
제5장 ‘두 개의 대명인식’과 병자호란 345
참고문헌 / 363
찾아보기 / 378
제1장 병자호란 연구의 성과와 한계 11
1. 문제의 제기 11
2. 연구 동향 검토 21
3. 책의 구성과 논점 28
제2장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국방 태세 33
1. 병력 확보와 군량 공급의 문제점 33
2. 조·명 군사 협력의 실상 57
3. 청야입보淸野入保 전술의 추진과 한계 89
제3장 병자호란의 발발과 강화講和 협상의 추이 119
1. 대청체제大淸體制의 수립과 조·청 간의 의례 논쟁 119
2. 청군의 군사력과 개전 초기의 전황 152
3. 남한산성 농성과 강화 협상의 쟁점 173
제4장 전후처리와 척화론斥和論의 함의 217
1. 삼전도 항례降禮의 이행과 대청對淸 관계의 재설정 217
2. 패전 책임자 처벌을 둘러싼 주화·척화론의 재격돌 239
3. 조선시대 중화中華 인식의 성격과 척화론 296
제5장 ‘두 개의 대명인식’과 병자호란 345
참고문헌 / 363
찾아보기 / 378
출판사 리뷰
당대의 맥락에서 병자호란 다시 보기
병자호란은 흔히 굴욕의 역사, 치욕의 역사로 인식되며, 전쟁의 발발과 참패가 당시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능과 한계, 즉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이나 국방 태세의 해이에서 초래되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적 해석은 그것과 상이한 사실을 전해주는 당대의 또 다른 기록들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인조반정의 집권 세력 역시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후금·청의 군사적 위협과 조선의 전력 열세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책을 집권 초기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예측과 대비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일방적 패배를 당하며 끝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1592∼1598년의 임진왜란, 1619년의 심하 전투, 1627년 정묘호란의 연이은 시련을 겪은 후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반복된 병자호란의 참패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른바 대명의리對明義理라는 당대의 보편적·절대적 가치를 고수하려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성心性과 내면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면, 17세기 전반의 컨텍스트로 돌아가야 하며,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사료와 현상에 눈길을 돌려야만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창窓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는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이 취한 군사적 대응과 한계를 분석하고, 전쟁과 관련된 주화·척화 담론의 특징과 성격, 전쟁이 초래한 국내외적 질서의 변동을 ‘예禮의 실천’이라는 시각을 통해 살펴본 연구이다. 이를 통해 ‘당대인들이 전력의 열세를 분명하게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병자호란이란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해명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이다. 척화론자들의 심성을 자주와 사대의 이분법에서 탈피하여 해석하려고 한 이 책은 병자호란과 관련된 정치사, 외교사, 군사사 분야의 최신 연구도 집대성하여 반영하였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병자호란 전후 조선사회 전반에 널리 퍼졌던 대명의리對明義理와 대명사대對明事大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기 위해 당대인의 대명인식對明認識에 두 가지 차원의 인식이 혼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이것을 분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하나는 ‘특정 국가로서의 명明에 대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 문명인 중화中華를 상징하는 명明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에 따르면, 척화론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종속 의식이나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명明이란 한자로 상징되는 중화문명의 보편적 가치를 당대의 조선 군신君臣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척화론자들이 진정 우려한 것은 대명의리의 포기가 상징하는 윤리와 문명의 붕괴이자 천하 사람들과 후대인의 비판이었다.
이 밖에도 인조 대 군비 강화책의 추진과 좌절, 조·명 군사 협력의 실상과 양국의 상호 인식, 청야입보 전술의 실패 원인, 예禮를 둘러싼 조·청 간의 여러 갈등, 병자호란 강화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삼전도 항례降禮의 이행과 함의, 최명길의 주화론의 본질, 김류?김경징 부자의 패전 책임론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였다. 이 책은 앞으로 병자호란 연구에 입문하려는 초심자나 관심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병자호란은 흔히 굴욕의 역사, 치욕의 역사로 인식되며, 전쟁의 발발과 참패가 당시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능과 한계, 즉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이나 국방 태세의 해이에서 초래되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적 해석은 그것과 상이한 사실을 전해주는 당대의 또 다른 기록들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인조반정의 집권 세력 역시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후금·청의 군사적 위협과 조선의 전력 열세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책을 집권 초기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예측과 대비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일방적 패배를 당하며 끝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1592∼1598년의 임진왜란, 1619년의 심하 전투, 1627년 정묘호란의 연이은 시련을 겪은 후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반복된 병자호란의 참패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른바 대명의리對明義理라는 당대의 보편적·절대적 가치를 고수하려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성心性과 내면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면, 17세기 전반의 컨텍스트로 돌아가야 하며,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사료와 현상에 눈길을 돌려야만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창窓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는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이 취한 군사적 대응과 한계를 분석하고, 전쟁과 관련된 주화·척화 담론의 특징과 성격, 전쟁이 초래한 국내외적 질서의 변동을 ‘예禮의 실천’이라는 시각을 통해 살펴본 연구이다. 이를 통해 ‘당대인들이 전력의 열세를 분명하게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병자호란이란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해명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이다. 척화론자들의 심성을 자주와 사대의 이분법에서 탈피하여 해석하려고 한 이 책은 병자호란과 관련된 정치사, 외교사, 군사사 분야의 최신 연구도 집대성하여 반영하였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병자호란 전후 조선사회 전반에 널리 퍼졌던 대명의리對明義理와 대명사대對明事大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기 위해 당대인의 대명인식對明認識에 두 가지 차원의 인식이 혼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이것을 분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하나는 ‘특정 국가로서의 명明에 대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 문명인 중화中華를 상징하는 명明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에 따르면, 척화론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종속 의식이나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명明이란 한자로 상징되는 중화문명의 보편적 가치를 당대의 조선 군신君臣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척화론자들이 진정 우려한 것은 대명의리의 포기가 상징하는 윤리와 문명의 붕괴이자 천하 사람들과 후대인의 비판이었다.
이 밖에도 인조 대 군비 강화책의 추진과 좌절, 조·명 군사 협력의 실상과 양국의 상호 인식, 청야입보 전술의 실패 원인, 예禮를 둘러싼 조·청 간의 여러 갈등, 병자호란 강화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삼전도 항례降禮의 이행과 함의, 최명길의 주화론의 본질, 김류?김경징 부자의 패전 책임론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였다. 이 책은 앞으로 병자호란 연구에 입문하려는 초심자나 관심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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