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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인가? (2024) - 역사의 대척점에 선 형제, 부여융과 부여풍

동방박사님 2024. 8. 17.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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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백제 왕자로 태어났지만, 당나라 편에 선 형 부여융과
왜의 편에서 백제를 되살리려 한 동생 부여풍의 굴곡진 운명과 7세기 국제정세

격동하는 동아시아의 거친 파고 속에서,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과 풍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폐태자 되거나 왜로 보내졌었다. 이후 나라의 멸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은 다시 융과 풍을 시대의 깊은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었다.

당에 의해, 그리고 또 왜에 의해 두 사람은 백제의 마지막 운명을 걸머진 채로 굴곡진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폐태자 되었지만, 체념한 채로 왕자로서 평범하게 살았던 융이었다. 일본열도의 미와산에서 벌통을 갖다 놓고 기르는 등 유유자적하던 풍이었다. 융과 풍 모두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재편 속에서 스러진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융왕과 풍왕의 고뇌는 신냉전체제로 재편되는 21세기의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화두이다.

목차

머리말

1. 무왕 시대의 융과 풍

부여융의 출생과 백제 기년법
부여풍의 출생
무왕은 누구인가
국제 결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익산 왕도
익산에 소재한 ‘궁남지’
미륵의 세상, 그리고 낙토로 가는 이상향

2. 의자왕 시대의 융과 풍

의자왕의 등장
부여융의 등장
「부여융 묘지」
정변과 부여융
비운의 폐태자 융
의자왕의 남은 5년, 음황과 탐락의 세월
패망과 의자왕의 책임
백제 최후의 날, 공산성과 예씨?氏 일가의 동향
예식과 예식진은 동일 인물인가?
백제 멸망 당시 예식진·예군 행적
의자왕이 항복한 이유

3. 멸망을 막으려는 공주

미녀 공주의 등장
여성 전사戰士의 전형
계산 공주 설화는 구전인가?

4. 국가 회복을 위한 융과 풍

거인, 세상을 건너 가다
의자왕대에 대한 평가
‘부흥운동’ 용어
융과 풍왕 정권의 성격
구국의 영웅 복신
승려 출신 의병장 도침
풍왕의 환국
풍과 융 사이에서 고뇌하는 흑치상지
「흑치상지 묘지」
백제 지원 위한 왜의 동향
고구려는 백제를 지원했는가?
내분의 폭발
흑치상지의 향배

5. 백강과 주류성 위치

연구사 백강 비정
연구사 주류성 비정
주류성 위치
백강과 주류성 위치 비정의 관건

6. 지자체의 지역 정체성 확인

홍성군
당진시
서천군
청양군
세종시
정읍시
부안군

7. 동아시아 대전大戰, 백강 전투

백강 전투가 지닌 의미
백강 해전과 백제군·왜군의 참담한 패배
백강구 전투의 승패 요인
행방이 묘연했던 풍왕
백제인들 최후의 항전

8. 백제 옛 땅의 융왕과 고구려에서의 풍왕

웅진도독부의 귀속 문제
한반도 내 웅진도독부의 해체 시점

9. 당에서 재건된 백제

‘내번內蕃 백제’
풍왕의 마지막 모습과 유배지 기원설 …… 219

10. 한반도 백제 유민들의 동향, 그리고 에필로그

세종시 연기 지역 유민들의 동향
만들어진 제의祭儀, 은산별신제

저자 소개

저 : 이도학 (李道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명예교수.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산대학 학장과 일반대학원 원장 역임. 고조선단군학회 회장, 동아시아고대학회 회장, 동국사학회 회장,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문화재청 고도보존 중앙심의위원회 위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부설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성백제문화제 추진위원회 위원장, 충청남도 문화재 위원, 부여군 지역혁신협의회 의장, 연세대와 한양대 강사 등 역임. 대통령 표창(제1...

출판사 리뷰

융을 수반으로 한 친당 정권과 풍을 왕으로 한 친왜 정권이 백강 전투에서 맞붙었다.
주류성마저 함락된 후 형제의 운명은 끝내 승자와 패자로 갈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로 라이벌’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거나 듣고 있다. 라이벌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분야에서 또는 같은 목적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사상의 라이벌’이라는 용어도 흔하게 사용해 왔다. 동일한 목적을 지녔지만 서로 대척점에 섰던 백제 의자왕의 두 아들만 한 라이벌이 있었을까?

부여융과 부여풍은 모두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치 질서가 재편되는 급변기를 맞아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던 두 왕자의 인생행로는 굴곡 그 자체였다. 백제 사신단의 수석인 23세 미남 청년 융은 ‘대당大唐’의 궁정을 밟았다. 압도하는 제궐帝闕의 웅위한 모습, 천하의 영걸이자 노회한 태종 알현과 휘황한 채색 비단 3천 단을 하사받고 득의에 차서 귀국선에 몸을 실었던 순간은, 환희와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영광스러운 장면이었음이 분명했다. 융이 친당親唐의 길을 걸었고, 당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대척되는 삶을 살았던 자신의 아우가 풍이었다. 풍은 어린 시절 왜로 파견되었다. 풍은 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631년에서 661년까지 어언 30년, 한 세대 동안 왜에서 체류하였다.

백제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책봉을 요청해야 할 주체요 영향력이 극대한 중원의 당 제국, 그리고 전통 우방이 왜였다. 융과 풍은 백제가 절대 홀시할 수 없는 두 나라 체험을 각각 한 것이다. 풍의 경우는 귀국하지 못하고 왜에서 한 세대를 내리 살았다. 풍은 왜에 체류하는 중에 딸을 낳았다. 이때가 647년이었으니, 풍의 배우자는 왜녀倭女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위와 관련해 그가 661년 환국할 때 왜녀를 왕비로 맞아들였었다. 660년 7월, 신라와 당의 합공合攻이라는 사변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백제 왕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었다. 사비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폐태자 되어 정치적으로 영락해 있던 융은, 훗날 신라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 태자로부터 침 세례를 받았다. 신라의 백제 정벌 직접 동기인 대야성 참극에 대한 복수였다. 법민 태자는 한때 백제 2인자였던 융에게 묵은 원한을 뱉은 것이다. 이때의 처참한 상황은 신라 트라우마를 융의 가슴에 깊이 새겨놓았다.

당군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廢假立眞’를 침공 명분으로 삼았던 것 같다. 당군은 의자왕의 실정失政 대신, 두번 째 왕후 은고를 ‘요녀妖女’로 규정하면서 악마화했다. 그 소생인 ‘태자 효’를 축출하고 폐태자였던 융을 복권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 興亡繼絶’는 명분으로 백제 재건을 약속하였다. 융을 수반으로 한 친당 정권을 수립하고 철수할 계획이었다. 그랬기에 백제 지방관들은 선선히 관款 즉 관인官印을 일제히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에 대한 모욕과 당군의 만행이 발단이 되어 도도하게 항쟁의 불길이 번져갔다. 당군의 구상이 흔들리는 상황과 연동해 항전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번져나갔다. 백제인들은 웅진성과 사비도성을 제외한 백제 전역의 200여 개 성을 회복했다. 백제 영역을 거의 회복한 것이다. 이와 연계해 왜의 지원을 받은 풍이 환국하였다. 그는 백제 왕으로서 신라군과 당군을 축출하고 영토를 수복해 예전의 백제를 복구하는 일에 진력했다. 무력을 통한 국가 회복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백제 땅에는 풍과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융을 수반으로 한 친당 정권과 풍을 왕으로 한 친왜 정권이 대치하였다. 신라인들은 풍을 ‘가짜 왕’으로 일컬으면서 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신라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당의 중재로 융은 신라 상대 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663년 8월 처절한 백강 전투 현장에서 융과 풍은 맞대치하였다. 이 싸움에서 풍은 구사일생으로 고구려로 탈출했다. 주류성에 남아 있던 풍의 일족들은 당군에 넘겨졌다. 풍왕이 사라진 백제 땅은 융의 통치권이 되었다. 융은 당의 선의를 믿고 또 대안으로 당과 손을 잡아 국가 회복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웅진도독 융은 신라에 대한 포비아가 극심했다. 신라의 압박을 받고 있던 그는 결국 당으로 돌아갔다. 백강 전투를 겪고 5년 후 고구려 평양성이 무너지던 날 풍은 당으로 압송되었다. 융과 풍, 이 두 사람은 모두 당으로 들어갔다. 친당 정권의 수반이었던 융은 일정한 대우를 받았지만, 당과 대척점에 섰던 풍은 중국 최남단으로 유배 보내졌다. 그렇지만 주류성 함락 때 16세였던 풍의 딸은 당의 고관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영예를 누렸다.

역사의 대척점에 섰던 두 형제, 이 주제는 필자가 저서를 비롯해 논문으로 자주 발표했던 사안이었지만, 본서를 집필하면서 예전에 간과했던 쟁점 관련 자료를 재해석해 보완할 수 있었다. 가령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 유민 묘지墓誌를 집중 분석함으로써, 의자왕의 항복과 관련한 예식?植과 예식진?寔進은 동일 인물일 수 없는 이유를 보완했다. 그리고 예식이 웅진성의 의자왕을 꽁꽁 묶어 사비성으로 끌고 갔다는 주장은 허구에 불과했다. 「예군 묘지」에 보이는 “참제가 하루 아침에 신하를 칭하였고 僭帝一旦稱臣”의 ‘참제’는, 의자왕이 아니라 왜 왕임을 밝혔다. 백강 전투에서 ‘왜선 1천 척’은 신라측의 과장으로 단정하지만, “1천 척이나 되는 배가 물결을 가로질러 들뱀을 도우려고 늘어져서 가득했다”는 「예군 묘지」의 ‘1천 척’과 부합했다. 중국 측에서도, 그것도 『구당서』와 같은 중국 사서보다 앞선 당대의 금석문에서 증언한 것이다. 이 점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들뱀’은 백제를 가리킨다.

백강 전투와 관련해 당군의 승리 요인에 대한 많은 추정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백강 전투는 준비된 싸움이 아니었다. 앞서간 육군을 따라 군량을 가득 적재하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진입해 주류성으로 이동하려는 당의 수송선과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실은 왜의 수송선이 백강 어구에서 갑자기 맞닥뜨려 벌어진 우발적인 전투였다. 군량과 병력 수송선 간의 전투에서, 당군은 군량선을 호위하는 수군이 탑승한 전함이 따라왔기에 단연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점을 역시 간과한 것이다. 연구사가 조선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강의 소재지는 주류성 위치 파악의 관건이었다. 백강이라는 강 주변에서 주류성의 위치를 찾는 게 기본전제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전제를 홀시한 경향이 많지만, 백강과 연계되지 않은 주류성 위치 추적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 점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의병 운동 발상지로서 의미 부여가 가능한 전적지가 임존성이었다. 백제 의병들을 위한 사당을 충절의 고장인 예산에 건립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게 된다. 실현되는 날이 반드시 오기를 바랄 뿐이다. 더러는 임존성에서 백제 때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기에 그 위치를 다른 곳으로 모색하기도 한다. 현재의 임존성에는 통일신라 때 유물만 집중 출토되었다. 그러나 예산 봉수산의 임존성(둘레 약 2.5km)은 항전 관련 첫 기록에서 ‘임사기산任射岐山’으로 적혀 있었다. 임존성을 ‘성’이 아니라 ‘산’이라고 했고, 책柵을 설치한 기록이 보인다. 이것을 일러 ‘임존에 보堡를 쌓아’라고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임존성은 당초 봉수산에 책을 설치해 항전의 기지로 삼은 게 된다. 주류성의 위치 파악과 관련해 물증 제시만이 능사가 아님을 환기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