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문화예술 입문 (독서>책소개)/1.건축세계

민주와 인권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 (2019)

동방박사님 2024. 8. 2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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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남영동 대공분실
1970~198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인사들의 고문 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10월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운영자 이름을 달고 지어졌다. 조형성이나 공간 구성 면에서 당시 지어진 어느 건물에도 뒤지지 않는 세련된 잘 지은 검은 벽돌 건물이다. 정초석에는 ‘내무부장관 김치열’이라는 이름이 새겨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지은 유사 성격의 다른 건물과 달리 정초석에 이름을 새긴 것에 대해 안창모(근대도시건축연구재단 이사장,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를 통해서 최고의 건축을 만들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열의가 가득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42쪽)고 해석한다.
“내가 처음 서울갔을 때 ‘탁하니 억했다’는 식의 설명을 하더니 그후 그건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종철이 부검을 지켜본 동생의 얘기가 잊혀지지 않아요.”([동아일보] 1987년 5월 22일자) 이 말도 되지 않는 사건은 최근 영화 [1987]에서 박처장으로 분한 김윤석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되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민주와 인권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은 지난 6월에 있었던 “2019 근대 도시건축 Re-Birth 디자인 공모전” 수상작을 소개하는 일종의 수상 작품집이다. 그러나 기존 수상 작품집처럼 공모전 개요, 심사평, 수상작 패널만 담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의 도시와 건축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안창모 교수는 당시 정권은 건축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석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과 도면”을 쓴 강성원과 함태호(건축사사무소 강희재)는 1976년 원도면과 1983년 증축 도면을 층별, 주요 공간별로 분석하고 건축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목차

책머리에 / 안창모

i. 남영동 대공분실

박정희 시대의 도시와 건축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기념관을 위하여 / 안창모
히틀러와 알베르트 슈페어 ? 박정희 시대의 도시와 건축 유산 ? 민족문화 보화와 전통 그리고 건축 ? 우리 시대의 과제, 사회적 존재로서의 건축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과 도면 / 강성원·함태호
남영동 대공분실 ? 건축프로그램과 공간 ? 설계도면 ? 만초천변 저습지 위 검은 벽돌 건물 ?
남영동 대공분실의 변화와 가치


ii. 민주화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화적 재생

2019 근대 도시건축 Re-Birth 디자인 공모전
질의 응답
심사 총평 / 김광수
입상작

저자 소개 

동근대도시건축연구재단은 우리 근대 도시와 건축의 연구와 보존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자임하고 실천하는 전문가 모임입니다.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장이 중요해진 현시점에서 삶과 기억이 품고 있는 도시와 건축의 보존은 시대적 화두이자 후속세대를 위한 우리의 최소한의 책임입니다. 근대도시건축연구재단은 도시와 건축에 부여된 사회적 책무에 당당히 응하며 후속세대가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출판사 리뷰

도면으로 본 남영동 대공분실

3층까지는 AMD동의 계단실 외벽과 한 몸이 되어 구조 역할을 하지만 4층부터는 AMD동 계단실 외벽 중 한 면이 기둥 역할을 하면서 회의실 한가운데에 노출된다. 1983년 증축 이후에는 6층 외근반이 실내 중앙에 노출되게 된다. … 이처럼 구조가 실내공간에 노출되는 것은 건물의 조형성을 중요시한 결과이다.
_72쪽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은 대공 용의자 조사를 담당하는 분실동과 통신 정보 분석업무를 담당하는 AMD동, 식당 및 기계보일러실이 있는 부속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변의 약한 지반 때문에 부속동에만 지하층을 두었다. 5층 규모로 지어진 분실동은 1983년 7층으로 2개 층이 증축되었다.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분실동 왼쪽에 2층 규모의 AMD동을 연결하고 그 남측에 부속동을 배치했다. 처음에는 정면성이 강조될 수 있도록 AMD동 자리에 분실동을 배치했으나 서쪽에 있는 남영역에서 지나치게 노출되는 점과 남영역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지금처럼 남향으로 분실동을 배치했다고 한다.
원도면과 증축도면을 분석한 강성원과 함태호는 발주자의 요구에 따라 도면과 달리 현장에서 부분적으로 바뀐 부분이 있는데 얼마나 다르게 시공되었는지, 사용하면서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1976년 신축 당시 도면과 1983년 2개 층 증축 도면의 각 공간과 마감재, 구조를 꼼꼼히 비교하고 분석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현재 모습을 기록했다.
서쪽에 있는 남영역으로부터의 시선과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건물의 배치와 창을 최소화한 서쪽 입면, 사용자의 특수성을 고려한 진입 동선, 조사실이 있는 분실동 5층 각 실의 배치와 각 실 내부의 마감과 구성, 피의자용 출입문과 조사실까지 바로 연결되는 철제 원형 계단 등 도면 분석을 통해 용도에 맞춤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음을 확인해 준다.
곳곳에서 김수근 건축의 특징을 읽어내기도 했는데, 내구성이 낮은 편인 검은 벽돌의 사용, 입면을 장식하고 있는 출창과 수직창, 개념적 공간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도시를 담고자 한 주출입구 방식 등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지어진 땅의 역사, 미군기지, 남영역에 둘러싸여 접근이 쉽지 않은 땅이라는 입지, 입지를 최대한 활용한 건물의 배치와 외부공간 구성, 검은 벽돌로 마감한 외관과 각 공간에 사용된 재료, 기능에 충실한 공간 구성 등 건축적으로 찬찬히 살펴야 할 요소가 많은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_95쪽에서


도시와 건축의 정치적 이용

우리는 건축은 사회를 향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사회를 향한 건축을 만들어 본 경험은 거의 없다. 사회가 아파할 때 사회와 함께한 건축이 있었는가? 그래서 이 땅에는 유명한 건축가는 있어도, 존경받는 건축가를 찾기란 정말 힘들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민주인권기념관’화 프로젝트가 ‘건축인’들에게 더욱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_19~20쪽에서

안창모 교수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쿠데타의 당위성 확보와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책’과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책’을 펴고 건축을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보고 그런 관점에서 당시의 도시와 건축 유산을 분석한다.
무엇보다 급한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다양한 사업을 벌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자유센터 건립이다. 안창모 교수는 자유센터 건립에 대해 “자신의 좌익 활동 경력을 의심하는 미국으로부터 미국의 아시아판 마샬플랜의 충실한 실천자이자 반공의 전위부대라는 역할을 통해 미국의 정치적 지지를 얻어내겠다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25쪽)고 이야기한다.
“나라를 외침으로부터 구한 위인들의 동상은 박정희의 취약점인 정통성 부재의 문제를 극복하고, 나라를 외침으로부터 구한 위인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구할 인물로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체제 유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의 산물”(28쪽)로 분석한 애국선열 동상 건립, “친일 이력을 지우기 위해 민족문화를 보호 육성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표명”(28쪽)하며 실시한 ‘남대문 중수 작업과 민족문화센터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국립종합박물관(현 민속박물관) 건립, 자유센터와 길을 사이에 두고 지은 국립극장 등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밖에도 “일제에 의해 무너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작업인 동시에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흉인 북이 도발한 전쟁으로 파괴된 문화유산을 바로 세우는 일석이조의 효과”(34쪽)를 노린 광화문 복원과 전통건축 양식으로 지은 능동 어린이회관, 화랑교육원과 신사임당교육원 등도 정치적 이용 사례로 제시한다. 이들은 모두 콘크리트로 지었는데 민주주의 이념의 한국적 재해석, “우리의 전통가치가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보호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사회적 명분을 갖기에 충분했다.”(38쪽)면서 “그 이면에는 국가(=박정희)와 부모에 순종하는 후속세대를 꿈꾼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들 프로젝트를 통해서 자신의 집권이 정당하고 자신은 이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 나갈 능력이 있음을 국민에게 확인시켜주고자 했다.
그러나 남영동 대공분실은 목적이 달랐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자신의 종신 집권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힘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누르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남영동 대공분실은 보여주기 위한 건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땅이 선택되었다.
_44쪽에서

정권의 당위성 확보와 정권 안정화를 위해 건축을 이용한 것과 달리 남영동 대공분실은 억압의 수단으로 건축을 이용한 사례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가장 무서운 역할을 맡았던 건물이 바로 나의 삶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44쪽)고 하면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라고 말한다.
안창모 교수는 ‘찬란한 문화유산’ 프레임에서 벗어나 부정적 유산이지만 우리 모두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후속세대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전해줄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될 남영동 대공분실을 통해 고민해보자며 글을 맺는다.


민주화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화적 재생

기존의 담장과 대공분실 건물이 상징하는 ‘은폐와 밀실’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조하며 도시건축적 접근을 취하는 안이 있는가 하면, 차폐된 공간을 개방해 과거 국가가 사유화시킨 이곳을 더욱 도시의 활동적 영역으로 편입시키려는 안도 있었습니다.
_113쪽에서

194점이 접수된 ‘2019 근대 도시건축 Re-Birth 디자인 공모전’에서는 대상 2팀, 우수상 3팀, 특별상 2팀, 특선 7팀을 비롯해 50팀의 입선작이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김광수(스튜디오 케이웍스) 대표는 “어떠한 주제의식과 해볍을 통해서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장소를 해석하고 도시 및 건축적 접근을 취하고 있는가”(113쪽)를 중심에 두고 5명의 심사위원이 열띤 토론을 하고 심사했다고 한다. 대상으로 선정된 두 팀은 각각 “대공분실 건물과 그를 둘러싼 도시장소적 맥락 간의 밀도 있는 상호 해석, 분명한 주제의식과 구체화 과정을 견지한 훌륭한 안”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