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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의 표지 사진에는 독도의 동도에 한반도 지도가 나타나 있는데 이 모양이 보란 듯이 일본 쪽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설명이 실려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독도의 영유권 주장 논리는 한일 양국 간에 더할 나위 없이 미묘한 갈등 유발 요인이다. 최근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 간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지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 3월 25일 한국국립해양조사연구원(KHOA)이 바다 위를 항해하는 드론인 ‘자율형해양관측장치(AOV)’를 독도에 투입해 무인 해양조사를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파악한 일본 외무성이 외교 루트를 통해 공식 항의했다. 이어 하루 뒤인 지난 3월 26일에는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담은 일본 국정 초등학교 3~6학년 사회 교과서가 검정 통과된 데 대해 우리 정부가 강력 규탄하며 철회를 촉구했으며,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한 바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독도는 한국 고유 영토”라는 사실을 활발한 집필 및 방송 출연과 연구, 강의를 통해 독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널리 알리고 있는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가 10년 만에 개정해 내놓은 [대한민국 독도] 개정판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번 개정판(4쇄에 해당)에서는 책의 전체 골격은 유지된 반면 본문 자료들을 보충하고 2010년 이후의 독도에 대한 사항들 약 30면 정도가 새롭게 집필되었다. 특히 미국 지명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독도가 한국의 실효 지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인정한 화면 등 의미 있는 자료를 보충했으며, 1965년 한일 양국 간 교환공문에 대해 문제가 되었던 2012년 이후 상황들을 논리적으로 재점검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 정부는 독도가 분쟁 지역이 아니라고 못 박기 위해 일본 측 독도 영유 논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분석하여 비판과 극복을 요약해 항상 대외적으로 정확히 발신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결론을 맺는다. 국민 정서에 기댄 감정이 앞선 독도 문제이기 이전에 이성과 논리로 냉정하게 대응하면서 독도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데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독도는 한국 고유 영토”라는 사실을 활발한 집필 및 방송 출연과 연구, 강의를 통해 독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널리 알리고 있는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가 10년 만에 개정해 내놓은 [대한민국 독도] 개정판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번 개정판(4쇄에 해당)에서는 책의 전체 골격은 유지된 반면 본문 자료들을 보충하고 2010년 이후의 독도에 대한 사항들 약 30면 정도가 새롭게 집필되었다. 특히 미국 지명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독도가 한국의 실효 지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인정한 화면 등 의미 있는 자료를 보충했으며, 1965년 한일 양국 간 교환공문에 대해 문제가 되었던 2012년 이후 상황들을 논리적으로 재점검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 정부는 독도가 분쟁 지역이 아니라고 못 박기 위해 일본 측 독도 영유 논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분석하여 비판과 극복을 요약해 항상 대외적으로 정확히 발신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결론을 맺는다. 국민 정서에 기댄 감정이 앞선 독도 문제이기 이전에 이성과 논리로 냉정하게 대응하면서 독도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데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목차
저자의 말|새로운 판으로 인사드리며
축사|대한민국 독도의 출판을 축하하며
추천사|근현대의 독도 문제에 새로운 발견과 전략으로 접근한 책
서문|경술국치 100년째 되는 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죽었다
제1부 경술국치까지의 독도
1장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2장 메이지 정부와 독도
3장 서양인의 울릉도·독도 발견
칼럼1|시볼트와 일본
4장 ‘수로지’와 1880년 이후의 독도
칼럼2|전통적인 명칭이 기재된 지도들
5장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과 고종
제2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도 문제
6장 독도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7장 한일 간 독도 논쟁 본격화와 평화선
8장 한일협정에 나타난 독도
9장 독도에 대한 전략적 고찰
축사|대한민국 독도의 출판을 축하하며
추천사|근현대의 독도 문제에 새로운 발견과 전략으로 접근한 책
서문|경술국치 100년째 되는 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죽었다
제1부 경술국치까지의 독도
1장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2장 메이지 정부와 독도
3장 서양인의 울릉도·독도 발견
칼럼1|시볼트와 일본
4장 ‘수로지’와 1880년 이후의 독도
칼럼2|전통적인 명칭이 기재된 지도들
5장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과 고종
제2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도 문제
6장 독도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7장 한일 간 독도 논쟁 본격화와 평화선
8장 한일협정에 나타난 독도
9장 독도에 대한 전략적 고찰
책 속으로
본서『대한민국 독도』의 2010년 9월 초판 출판 이후 독도 문제로 인해 한일 관계가 크게 요동치는 사건들이 있었다. 독도 문제로 인해 한일관계가 크게 악화된 계기는 2011년 3월 17일 일본에서 일어난 동북대지진이었다. 한국 측은 당시 일본의 지진과 해일 피해 복구를 위해 관민을 막론하고 일본을 지원했다. 그런데 3월말 일본 정부 문부과학성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재한 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를 대거 검정 통과시켰다. (중략) 이런 일본에 대한 반발의 일환으로 2011년 5월 한국 국회에서 독도 앞바다 1km 지점에 해양과학 기지를 건설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중략) 그뿐만이 아니라 같은 5월 대한항공이 비행기의 신기종을 테스트 비행시킨다고 하여 인천~독도 간을 테스트 비행했다. 이에 일본 외무성이 산하 직원들에게 한 달 간 대한항공을 이용하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한국 측에 항의를 표시했다.
(중략) 이어서 2011년 8월 1일 더욱 결정적인 독도 갈등이 일어났다. 일본 자민당 영토특위 소속 국회의원 3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 입국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중략) 2012년 8월 10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새로운 계기가 되어 일본 측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회부하자고 한국측을 압박했으나 한국 정부는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당시)의 요청서를 수령하지 않았다. (중략)
이후 일본은 2012년 12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여 3년 반 만에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고 역사 수정주의자이자 강경 우파로 알려진 아베 신조가 다시 일본 총리로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위와 같은 일본 측 움직임을 담았고 초판에서 잘못되어 있었거나 부족했던 부분을 수정·보완했다. 본서를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들이 독도를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 무엇을 하면 되는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신다면 저자로서 무한한 기쁨이다. ---「저자의 말」중에서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 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
-『고종실록』19권, 19년(1882년) 6월 5일조
(중략)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조일양국통어규칙’ 체결로 인해 불법 행위를 해도 기본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졌다. 이 규칙은 주로 일본인을 위한 규칙이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연해까지 어로 활동을 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89년에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일양국통어규칙’은 결국 일본인들의 불법 어로 활동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불평등 규칙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인 줄 알면서도 대한제국에 통보하지 않은 채 독도에서 강치 잡이를 계속한 나카이 요자부로와 같은 사람들을 등장시켰고, 1905년에 일본은 나카이 요자부로의 불법 행위를 오히려 무인도에 대한 선점 행위로 둔갑시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그러므로 1905년에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은 ‘조일양국통어규칙’의 치외법권 조항을 악용한 불법행위다.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중에서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 군도를 울도군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이규원과의 대화에서는 독도를 우산도 혹은 송도로 불렀지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독도의 명칭을 석도(石島)로 표기했다.
(중략) 울릉도 이주 정책으로 인해 새로 울릉도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이 독도를 돌섬으로 불렀고 돌섬을 한자로 표기하면 석도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1880년 이후 우산도라는 독도의 명칭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돌섬이 독섬으로 변했고 결국 독도로 정착되었다.
(중략) 이렇게 하여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관보에 실어 석도, 즉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중에서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 제76조 제1항
법률, 규칙, 명령 또는 어떤 명칭을 사용했건 간에 본 헌법과 모순되지 않는 현행 법령(태정관 법령)은 모두 따라야 한다.
(중략) 일본의 현행 ‘일본국헌법’(1946년 시행)은 태정관이 반포한 법령의 효력에 관해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현행 ‘일본국헌법’에는 이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다. 하지만 일본이 내린 해석을 보면, ‘메이지헌법’에서 명령사항으로 되어 있던 것들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일본국헌법’에서도 명령의 효력이 있다고 되어 있다.
(중략) 1877년에 태정관은 동해 내 ‘다케시마(竹島) 외 일도(外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중략) 태정관이 “다케시마 외 일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못 박았으니, ‘울릉도와 독도’는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태정관의 명령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이 일본 내의 법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와 독도」중에서
사실 2005년쯤에는「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편찬방사」문서도 마이크로 필름자료로 공개되어 있었지만, 화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국립공문서관을 직접 방문해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화상자료 공개를 아예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2005년에 필자가 일본 국립공문서관을 찾아 화상자료가 아닌 원본을 열람하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공문서관 직원이 원본이라고 말하면서 가져온 책은 사실 원본이 아니었다. 그 가짜 원본은 원본을 읽기 어려운 초서체로 바꿔 쓴 의도적인 필사본이었다.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편찬방사」가 들어 있는『공문록』전체를 ‘읽기 어려운 초서체’로 일부러 필사했다는 사실과, 일본 측이 그렇게 한 이유를 필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본에는 태정관이 ‘일본 영토 밖에 있다고 정한 두 섬’이 바로 ‘울릉도와 독도임을 나타내는 부도가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와 독도」중에서
일본 내무성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나카이 요자부로의 ‘랸코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을 각하했지만, 외무성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러일전쟁이라는 긴박한 시국상황을 강조하면서 독도를 무주지로 간주했고 다른 성청을 설득해 1905년에 결국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1905년에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사건은, 자국민들이 전통적으로 독도를 마쓰시마라고 부르면서 조선땅으로 인정해 온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해군성 수로부가 불법행위를 자행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수로지와 1880년 이후의 독도」중에서
『조선수로지』를 발행한 지 3개원 뒤인 1907년 6월,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별도로『일본수로지』를 발행한다. 이때 수로부는 독도가 3개월 전에『조선수로지』에 기재된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독도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일본수로지』(1907년 6월)로 완전히 옮겼다. 이런 사실들은 일본이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에서 일본의 영토로 이전시켰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독도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조선수로지』에서『일본수로지』로 의도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1905년 이전까지는 독도가 대한제국(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수로지와 1880년 이후의 독도」중에서
‘한일의정서’에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및 황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한국 영토에서 일본군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고, 군사전략에 필요한 토지 사용을 허가한다는 규정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한일의정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중략) 그러므로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첫 번째 조약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을 때, 즉 1904년 2월 23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본격적인 한국침략의 시작을 을사늑약 강제체결(1905년 10월)로 보는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과 고종」중에서
일본 측은 당시 대한제국 내각이 고종 황제 퇴위를 결정했다고 왜곡하지만, 다음 자료를 보면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이온지 총리대신의 서한]
(전략) 대한제국 황제로 하여금 태자에게 양위하도록 해야 한다.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려면 그런 수단을 쓰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본건은 대한제국 정부가 실행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후략)
이 문서의 계획대로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내각에 의해 양위라는 형태로 퇴위당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일제의 음모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이 문서는 1907년 7월 12일에 당시 사이온지 일본 수상이 한국의 이토 히로부미 통감 등에게 보낸 문서다.
(중략) 대한제국이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묵인’한 셈이므로 독도는 일본땅이 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첫째, 당시는 고종 황제가 각국에 밀사를 보내야 할 정도로 일본에 직접 항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 고종 황제는 밀사와 밀서를 통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고발했는데, 특히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야욕을 우회적으로 규탄했다. 그렇기 때문에 ‘묵인’이라는 국제법상의 논리를 적용할 수 없으므로,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다.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과 고종」중에서
미국은 독도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주미 한국대사관의 실수를 이용하면서, 한국에게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도록 1951년 8월 10일자로 ‘러스크 서한’을 보냈다.
(중략) 정리하자면, 미국은 단독으로 8월 10일에 한국 정부에만 ‘러스크 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요구에 대해 미국이 답변을 보냈으니 그것으로 ‘러스크 서한’은 법적 효력을 가졌다는 의견이 있지만, 한국이 미국의 견해를 수용했다는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
(중략) 결국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된다는 이야기를 다른 연합국들의 합의 없이 비공식적으로 일본에 전달하고 있었다. 1951년 8월 10일에는 이에 더해 미국은 ‘러스크 서한’을 한국으로 발송했다. 당시 미국은 ‘연합국과 합의하지 않고, 즉 연합국을 속이면서’ 일본에게 독도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독도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중에서
일본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해 왔던 미군이 자국의 요청에 따라 사용을 중지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2년 4월)이 발효된 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중략) 일본 외무성 웹사이트의 ‘다케시마 문제’ 웹페이지에는 ‘미군 역시 같은 해 겨울(1953년 1월) 다케시마(독도)를 폭격훈련구역으로 사용하기를 중지하였기 때문에’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만 읽으면 마치 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독자적으로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외무성 사이트는 이 중대한 사실을 일부러 누락시켜서 일본 국민과 전 세계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미군은 1953년 1월 20일자 서한을 통해, 앞으로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국에 통보해 왔다.
(중략) 만약에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정했었다면, 한국 측의 항의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미국이 한국의 항의를 수용해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장 중지를 결정한 것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한일 간 독도논쟁 본격화와 평화선」중에서
일본 외무성의 아토미야[後宮] 아시아국장이 ‘한일교섭에 관한 약간의 회상(回想)’이라는 글에서 한일 간의 독도 문제 교섭 과정을 썼다고 나와 있지만, 이 부분의 문서에도 먹칠이 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일본 정부가 은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5일, 조인식을 일주일 앞두고 브라운스 주한 미국대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했을 때, 두 사람이 나눈 독도 문제에 관한 대화문서에도 일본 정부는 먹칠을 하여 읽을 수 없는 상태로 공개했다. 이런 내용은 문서 15-216, 15-217, 15-218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에 관해 자국에 불리한 내용은 모두 먹칠하는 식으로 은폐해, 역사의 진실을 숨기려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 확실히 확인된 부분은,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한다는 주장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점이다. ---「한일협정에 나타난 독도」중에서
이동원 장관은 훗날 사토 정권이 아닌 다른 일본 정권이, 교환공문에 독도 문제가 포함된다고 하여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한다고 해도, 양국 정부가 합의하지 않는 한 조정 절차는 시작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교환공문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해결한다’고 명기하지 않았고 해결을 ‘도모한다’고만 했기 때문에, 독도는 영원히 한국땅으로 영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조건을 다 갖췄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일 간에 합의했던 양보(포기)사항들을 알면서도, 그것을 대폭 어기면서 독도 도발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에 나타난 독도」중에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상 독도는 한국 영토로 결론이 났다. 미국의 견해는 합의가 없는 미국만의 견해라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덜레스도 인정한 사실이다. 한국이 독도를 지배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과 일본은 한일 국교 정상화 때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를 토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때도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데서 법적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대한 한일 양국의 조인이 끝난 이후, 일본정부는 일본국회에서 독도 문제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환공문’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된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독도는 한국의 고유 영토이므로 독도 문제는 한일회담에서 제외되었으며 ‘교환공문’에는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성명을 냈다. 이에 한일 협정을 국회에서 심의하는 과정에서 일본 야당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야당 의원들은 ‘교환공문’에는 그 문서 내용에 의해 독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합의’가 없다고 주장하여 일본 정부는 독도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가 교환 공문으로 해결된다고 한국 측과 완전히 합의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 공세가 이어지자 당시의 사토 총리가 “한일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즉 독도 문제가 분쟁인지 여부에 대해 의견 일치가 없다는 것 자체가 바로 분쟁”이라는 비이성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중략)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가 분쟁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별단의 합의’가 없는 한 ‘교환공문’이 말하는 조정에 의해 독도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는 공식 문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중략) 그런데 한국은 분쟁이 없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객관적으로 보아 분쟁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두 나라에 의견 차이가 있어 바로 이런 것이 분쟁이니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논의하자라는 일본의 논리는 논리성 자체가 파탄 나 있다. 교환공문의 조정이든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사법처리든 간에 한국이 독도가 분쟁지역임을 인정한 후에 의논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분쟁의 유무로 대립되는 양국의 의견 차이를 분쟁으로 본다는 일본 정부의 논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독도가 분쟁 지역이 아니라고 못 박기 위해 일본 측 독도 영유 논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분석하여 비판과 극복을 요약해 항상 대외적으로 정확히 발신해 나가야 한다.
(중략) 이어서 2011년 8월 1일 더욱 결정적인 독도 갈등이 일어났다. 일본 자민당 영토특위 소속 국회의원 3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 입국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중략) 2012년 8월 10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새로운 계기가 되어 일본 측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회부하자고 한국측을 압박했으나 한국 정부는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당시)의 요청서를 수령하지 않았다. (중략)
이후 일본은 2012년 12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여 3년 반 만에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고 역사 수정주의자이자 강경 우파로 알려진 아베 신조가 다시 일본 총리로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위와 같은 일본 측 움직임을 담았고 초판에서 잘못되어 있었거나 부족했던 부분을 수정·보완했다. 본서를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들이 독도를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 무엇을 하면 되는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신다면 저자로서 무한한 기쁨이다. ---「저자의 말」중에서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 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
-『고종실록』19권, 19년(1882년) 6월 5일조
(중략)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조일양국통어규칙’ 체결로 인해 불법 행위를 해도 기본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졌다. 이 규칙은 주로 일본인을 위한 규칙이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연해까지 어로 활동을 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89년에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일양국통어규칙’은 결국 일본인들의 불법 어로 활동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불평등 규칙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인 줄 알면서도 대한제국에 통보하지 않은 채 독도에서 강치 잡이를 계속한 나카이 요자부로와 같은 사람들을 등장시켰고, 1905년에 일본은 나카이 요자부로의 불법 행위를 오히려 무인도에 대한 선점 행위로 둔갑시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그러므로 1905년에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은 ‘조일양국통어규칙’의 치외법권 조항을 악용한 불법행위다.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중에서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 군도를 울도군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이규원과의 대화에서는 독도를 우산도 혹은 송도로 불렀지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독도의 명칭을 석도(石島)로 표기했다.
(중략) 울릉도 이주 정책으로 인해 새로 울릉도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이 독도를 돌섬으로 불렀고 돌섬을 한자로 표기하면 석도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1880년 이후 우산도라는 독도의 명칭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돌섬이 독섬으로 변했고 결국 독도로 정착되었다.
(중략) 이렇게 하여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관보에 실어 석도, 즉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중에서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 제76조 제1항
법률, 규칙, 명령 또는 어떤 명칭을 사용했건 간에 본 헌법과 모순되지 않는 현행 법령(태정관 법령)은 모두 따라야 한다.
(중략) 일본의 현행 ‘일본국헌법’(1946년 시행)은 태정관이 반포한 법령의 효력에 관해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현행 ‘일본국헌법’에는 이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다. 하지만 일본이 내린 해석을 보면, ‘메이지헌법’에서 명령사항으로 되어 있던 것들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일본국헌법’에서도 명령의 효력이 있다고 되어 있다.
(중략) 1877년에 태정관은 동해 내 ‘다케시마(竹島) 외 일도(外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중략) 태정관이 “다케시마 외 일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못 박았으니, ‘울릉도와 독도’는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태정관의 명령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이 일본 내의 법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와 독도」중에서
사실 2005년쯤에는「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편찬방사」문서도 마이크로 필름자료로 공개되어 있었지만, 화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국립공문서관을 직접 방문해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화상자료 공개를 아예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2005년에 필자가 일본 국립공문서관을 찾아 화상자료가 아닌 원본을 열람하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공문서관 직원이 원본이라고 말하면서 가져온 책은 사실 원본이 아니었다. 그 가짜 원본은 원본을 읽기 어려운 초서체로 바꿔 쓴 의도적인 필사본이었다.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편찬방사」가 들어 있는『공문록』전체를 ‘읽기 어려운 초서체’로 일부러 필사했다는 사실과, 일본 측이 그렇게 한 이유를 필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본에는 태정관이 ‘일본 영토 밖에 있다고 정한 두 섬’이 바로 ‘울릉도와 독도임을 나타내는 부도가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와 독도」중에서
일본 내무성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나카이 요자부로의 ‘랸코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을 각하했지만, 외무성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러일전쟁이라는 긴박한 시국상황을 강조하면서 독도를 무주지로 간주했고 다른 성청을 설득해 1905년에 결국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1905년에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사건은, 자국민들이 전통적으로 독도를 마쓰시마라고 부르면서 조선땅으로 인정해 온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해군성 수로부가 불법행위를 자행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수로지와 1880년 이후의 독도」중에서
『조선수로지』를 발행한 지 3개원 뒤인 1907년 6월,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별도로『일본수로지』를 발행한다. 이때 수로부는 독도가 3개월 전에『조선수로지』에 기재된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독도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일본수로지』(1907년 6월)로 완전히 옮겼다. 이런 사실들은 일본이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에서 일본의 영토로 이전시켰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독도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조선수로지』에서『일본수로지』로 의도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1905년 이전까지는 독도가 대한제국(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수로지와 1880년 이후의 독도」중에서
‘한일의정서’에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및 황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한국 영토에서 일본군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고, 군사전략에 필요한 토지 사용을 허가한다는 규정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한일의정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중략) 그러므로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첫 번째 조약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을 때, 즉 1904년 2월 23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본격적인 한국침략의 시작을 을사늑약 강제체결(1905년 10월)로 보는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과 고종」중에서
일본 측은 당시 대한제국 내각이 고종 황제 퇴위를 결정했다고 왜곡하지만, 다음 자료를 보면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이온지 총리대신의 서한]
(전략) 대한제국 황제로 하여금 태자에게 양위하도록 해야 한다.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려면 그런 수단을 쓰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본건은 대한제국 정부가 실행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후략)
이 문서의 계획대로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내각에 의해 양위라는 형태로 퇴위당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일제의 음모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이 문서는 1907년 7월 12일에 당시 사이온지 일본 수상이 한국의 이토 히로부미 통감 등에게 보낸 문서다.
(중략) 대한제국이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묵인’한 셈이므로 독도는 일본땅이 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첫째, 당시는 고종 황제가 각국에 밀사를 보내야 할 정도로 일본에 직접 항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 고종 황제는 밀사와 밀서를 통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고발했는데, 특히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야욕을 우회적으로 규탄했다. 그렇기 때문에 ‘묵인’이라는 국제법상의 논리를 적용할 수 없으므로,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다.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과 고종」중에서
미국은 독도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주미 한국대사관의 실수를 이용하면서, 한국에게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도록 1951년 8월 10일자로 ‘러스크 서한’을 보냈다.
(중략) 정리하자면, 미국은 단독으로 8월 10일에 한국 정부에만 ‘러스크 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요구에 대해 미국이 답변을 보냈으니 그것으로 ‘러스크 서한’은 법적 효력을 가졌다는 의견이 있지만, 한국이 미국의 견해를 수용했다는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
(중략) 결국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된다는 이야기를 다른 연합국들의 합의 없이 비공식적으로 일본에 전달하고 있었다. 1951년 8월 10일에는 이에 더해 미국은 ‘러스크 서한’을 한국으로 발송했다. 당시 미국은 ‘연합국과 합의하지 않고, 즉 연합국을 속이면서’ 일본에게 독도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독도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중에서
일본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해 왔던 미군이 자국의 요청에 따라 사용을 중지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2년 4월)이 발효된 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중략) 일본 외무성 웹사이트의 ‘다케시마 문제’ 웹페이지에는 ‘미군 역시 같은 해 겨울(1953년 1월) 다케시마(독도)를 폭격훈련구역으로 사용하기를 중지하였기 때문에’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만 읽으면 마치 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독자적으로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외무성 사이트는 이 중대한 사실을 일부러 누락시켜서 일본 국민과 전 세계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미군은 1953년 1월 20일자 서한을 통해, 앞으로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국에 통보해 왔다.
(중략) 만약에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정했었다면, 한국 측의 항의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미국이 한국의 항의를 수용해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장 중지를 결정한 것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한일 간 독도논쟁 본격화와 평화선」중에서
일본 외무성의 아토미야[後宮] 아시아국장이 ‘한일교섭에 관한 약간의 회상(回想)’이라는 글에서 한일 간의 독도 문제 교섭 과정을 썼다고 나와 있지만, 이 부분의 문서에도 먹칠이 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일본 정부가 은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5일, 조인식을 일주일 앞두고 브라운스 주한 미국대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했을 때, 두 사람이 나눈 독도 문제에 관한 대화문서에도 일본 정부는 먹칠을 하여 읽을 수 없는 상태로 공개했다. 이런 내용은 문서 15-216, 15-217, 15-218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에 관해 자국에 불리한 내용은 모두 먹칠하는 식으로 은폐해, 역사의 진실을 숨기려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 확실히 확인된 부분은,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한다는 주장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점이다. ---「한일협정에 나타난 독도」중에서
이동원 장관은 훗날 사토 정권이 아닌 다른 일본 정권이, 교환공문에 독도 문제가 포함된다고 하여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한다고 해도, 양국 정부가 합의하지 않는 한 조정 절차는 시작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교환공문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해결한다’고 명기하지 않았고 해결을 ‘도모한다’고만 했기 때문에, 독도는 영원히 한국땅으로 영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조건을 다 갖췄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일 간에 합의했던 양보(포기)사항들을 알면서도, 그것을 대폭 어기면서 독도 도발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에 나타난 독도」중에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상 독도는 한국 영토로 결론이 났다. 미국의 견해는 합의가 없는 미국만의 견해라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덜레스도 인정한 사실이다. 한국이 독도를 지배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과 일본은 한일 국교 정상화 때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를 토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때도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데서 법적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대한 한일 양국의 조인이 끝난 이후, 일본정부는 일본국회에서 독도 문제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환공문’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된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독도는 한국의 고유 영토이므로 독도 문제는 한일회담에서 제외되었으며 ‘교환공문’에는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성명을 냈다. 이에 한일 협정을 국회에서 심의하는 과정에서 일본 야당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야당 의원들은 ‘교환공문’에는 그 문서 내용에 의해 독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합의’가 없다고 주장하여 일본 정부는 독도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가 교환 공문으로 해결된다고 한국 측과 완전히 합의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 공세가 이어지자 당시의 사토 총리가 “한일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즉 독도 문제가 분쟁인지 여부에 대해 의견 일치가 없다는 것 자체가 바로 분쟁”이라는 비이성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중략)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가 분쟁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별단의 합의’가 없는 한 ‘교환공문’이 말하는 조정에 의해 독도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는 공식 문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중략) 그런데 한국은 분쟁이 없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객관적으로 보아 분쟁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두 나라에 의견 차이가 있어 바로 이런 것이 분쟁이니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논의하자라는 일본의 논리는 논리성 자체가 파탄 나 있다. 교환공문의 조정이든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사법처리든 간에 한국이 독도가 분쟁지역임을 인정한 후에 의논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분쟁의 유무로 대립되는 양국의 의견 차이를 분쟁으로 본다는 일본 정부의 논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독도가 분쟁 지역이 아니라고 못 박기 위해 일본 측 독도 영유 논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분석하여 비판과 극복을 요약해 항상 대외적으로 정확히 발신해 나가야 한다.
---「독도에 대한 전략적 고찰」중에서
출판사 리뷰
일본의 독도 논리를 거의 100퍼센트 극복해낸 책
역사적 흐름과 쟁점에 따라 2부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일본 스스로가 독도 영유권을 부정했음을 보여 주는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인 ‘태정관 지령문’ 등에 대해 새롭게 조명했고, 그 문서가 지금까지도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 일본은 당시 미국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확정했다는 것을 근거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미국이 견해가 다른 연합국과 합의하지 않고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한국 정부에게만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의 핵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또한 일본 정부가 공개한 1965년 한일협정 문서들 가운데 최근에 비밀이 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일본이 이승만 라인을 일부 수용했으며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독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했다는 사실까지 상세히 다루었다.
경술국치 109년째 되는 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죽었다
경술국치 109년이 되는 해를 맞아 한일관계에 대한 발전적 관계를 모색하는 시도가 정치와 학술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제 강점이라는 수난을 겪은 동아시아 각국은 해마다 일본의 진정성 있는 반성을 촉구한다.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중에서도 한일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책에서 다룬 독도 문제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일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 국면을 보이고 있는 독도 문제에 대해, 19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철저한 자료조사와 논리로 접근했다. 신라가 우산국을 합병한 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한일관계사를 통해 독도의 역사를 살펴본 『우리 역사 독도』(2009, 책문)에 이어, 이 책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가면서 독도를 침탈하는 과정과 현재 일본 정부의 입장과 전략까지 세밀하게 고증하고 분석했다.
그는 독도 문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침묵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되며, 역사적 사료와 검증된 자료를 치열하게 연구해 당사자는 물론 제3자까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도가 과연 어느 나라의 땅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제시하는 독도 관련 입장과 주장의 근거들을 비교분석하면서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1부 1장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하기 5년 전에 대한제국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관보에 실어 석도, 즉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선포했음을 밝혔다. 1부 2장 ‘메이지 정부와 독도’에서는 과거 일본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이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 뒤를 계승한 일본 정부는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1부 5장에서는 일본이 독도를 편입할 때 대한제국이 항의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묵인’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 논리를 담았다. 다시 말해서, 당시 계속된 군사적 협박으로 일본에게 직접 항의할 수 없었던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으니 ‘묵인’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이렇게 볼 때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라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2부 6장에서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독도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증명했다. 현재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일부 내용과 ‘러스크 서한’ 등을 근거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독도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라’는 내용이 담긴 ‘러스크 서한’을 1951년 8월 10일자로 한국 정부에게만 보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미국이 연합국과 합의하지 않은 채 일본에게 독도를 주려고 했던 것이며, 한국이 미국의 견해를 수용했다는 문서도 없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저자는 독도에 한국인이 거주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마치 자국의 땅인 것처럼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허가한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 사건은 사실상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미군이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여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장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이 책에는 일본이 한일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독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했으며,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 또한 1965년에 한일 간 합의 하에 독도 문제 해결 방법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저자는 ‘독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기본 입장’은 일본 정부 측 독도 견해에 비해 미흡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독도 논쟁을 끝내려면 논리와 자료는 완벽히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측 주장이 미흡하면 결국 일본 측 논리에 밀릴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해 놓지 않으면 ‘묵인’했다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독도에 대해 ‘차분하고 단호한 외교’를 펼치려면, 일본 정부의 주장을 빈틈없이 논박하고 한국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확실히 보여 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우리의 대표 사이트를 보면 일본 정부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일본과 제3국을 모두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거기서 독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논리와 자료를 철저히 준비한다면, 경술국치 109년째 되는 해는 독도 문제 해결의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적 흐름과 쟁점에 따라 2부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일본 스스로가 독도 영유권을 부정했음을 보여 주는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인 ‘태정관 지령문’ 등에 대해 새롭게 조명했고, 그 문서가 지금까지도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 일본은 당시 미국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확정했다는 것을 근거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미국이 견해가 다른 연합국과 합의하지 않고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한국 정부에게만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의 핵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또한 일본 정부가 공개한 1965년 한일협정 문서들 가운데 최근에 비밀이 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일본이 이승만 라인을 일부 수용했으며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독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했다는 사실까지 상세히 다루었다.
경술국치 109년째 되는 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죽었다
경술국치 109년이 되는 해를 맞아 한일관계에 대한 발전적 관계를 모색하는 시도가 정치와 학술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제 강점이라는 수난을 겪은 동아시아 각국은 해마다 일본의 진정성 있는 반성을 촉구한다.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중에서도 한일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책에서 다룬 독도 문제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일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 국면을 보이고 있는 독도 문제에 대해, 19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철저한 자료조사와 논리로 접근했다. 신라가 우산국을 합병한 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한일관계사를 통해 독도의 역사를 살펴본 『우리 역사 독도』(2009, 책문)에 이어, 이 책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가면서 독도를 침탈하는 과정과 현재 일본 정부의 입장과 전략까지 세밀하게 고증하고 분석했다.
그는 독도 문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침묵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되며, 역사적 사료와 검증된 자료를 치열하게 연구해 당사자는 물론 제3자까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도가 과연 어느 나라의 땅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제시하는 독도 관련 입장과 주장의 근거들을 비교분석하면서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1부 1장 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하기 5년 전에 대한제국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관보에 실어 석도, 즉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선포했음을 밝혔다. 1부 2장 ‘메이지 정부와 독도’에서는 과거 일본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이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 뒤를 계승한 일본 정부는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1부 5장에서는 일본이 독도를 편입할 때 대한제국이 항의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묵인’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 논리를 담았다. 다시 말해서, 당시 계속된 군사적 협박으로 일본에게 직접 항의할 수 없었던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으니 ‘묵인’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이렇게 볼 때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라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2부 6장에서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독도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증명했다. 현재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일부 내용과 ‘러스크 서한’ 등을 근거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독도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라’는 내용이 담긴 ‘러스크 서한’을 1951년 8월 10일자로 한국 정부에게만 보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미국이 연합국과 합의하지 않은 채 일본에게 독도를 주려고 했던 것이며, 한국이 미국의 견해를 수용했다는 문서도 없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저자는 독도에 한국인이 거주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마치 자국의 땅인 것처럼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허가한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 사건은 사실상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미군이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여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장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이 책에는 일본이 한일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독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했으며,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 또한 1965년에 한일 간 합의 하에 독도 문제 해결 방법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저자는 ‘독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기본 입장’은 일본 정부 측 독도 견해에 비해 미흡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독도 논쟁을 끝내려면 논리와 자료는 완벽히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측 주장이 미흡하면 결국 일본 측 논리에 밀릴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해 놓지 않으면 ‘묵인’했다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독도에 대해 ‘차분하고 단호한 외교’를 펼치려면, 일본 정부의 주장을 빈틈없이 논박하고 한국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확실히 보여 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우리의 대표 사이트를 보면 일본 정부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일본과 제3국을 모두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거기서 독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논리와 자료를 철저히 준비한다면, 경술국치 109년째 되는 해는 독도 문제 해결의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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