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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만해의 마지막 유마경』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잡지 『불교』 1940년 2월호와 4월호에 실린 실우失牛(만해의 필명)의 「유마힐소설경강의」와 400자 원고지 총 148장 분량의 육필 원고를 모아 발간한 『한용운전집』 제3권(신구문화사, 1973년)에 실린 『유마힐소설경』을 저본으로 했다. 만해는 1933년부터 『유마힐소설경』 번역을 시작했고, 1940년에 『불교』지에 첫 연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2월호, 3~4월호(합본호)에 2회를 연재하다 중단된다. 만해가 생애 첫 완역을 시도한 경전이 왜 『유마경』이었는지, 또 왜 번역이 중단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 실린 번역본은 『불교』지에 연재된 내용(본경의 명칭, 본경의 번역, 본경의 주석, 본경의 과판, 제1 불국품 일부로 본문 38쪽까지)과 『한용운전집』에 실린 내용(제6 부사의품 일부까지)을 합한 것이다. 『불교』에 연재된 내용 중 해설 부분은 육필 원고지에 기록된 내용과 분량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육필 원고에는 ‘본경의 명칭’, ‘본경의 번역’, ‘본경의 주석’, ‘본경의 과판’ 등이 없는데, 『불교』 제1 불국품 해설 부분의 원고 분량은 육필 원고에 비해 거의 열 배가 넘는다. 그만큼 육필 원고 중 해설 부분은 초고에 가깝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만해가 1933년 『한글』(제2권 1호, 1933년 4월)지에 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보급방법’ 글에서 “우리 불교 기관에서는 이번에 나온 새 철자법을 실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유마힐소설경』은 1914년 발간된 『불교대전』과 달리 국한문 혼용임에도 한글의 어법이 두드러지게 많다. 때문에 『불교대전』은 현대어의 번역을 거쳐야 읽을 수 있지만, 『유마힐소설경』은 번역을 거치지 않고 꼼꼼히 정독하면 읽을 수 있다. 물론 불교 한문 읽기는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 수고로움이 독자들을 더 깊은 『유마경』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불교』와 『한용운전집』에 실린 오자와 맞춤법은 원문의 결이 훼손되지 않는 정도로 바로잡았고(예를 들면 ‘부리수’는 ‘보리수’로, ‘일찌기’를 ‘일찍이’로, ‘더부러’를 ‘더불어’로), 지나치게 긴 문장은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두세 개의 문장으로 나누었다. 또한 국한문 혼용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생경한 단어와 문투 등이 적지 않게 나오지만, 자료의 가치를 고려해 그대로 두거나, 별도의 각주로 해석을 달았다. 때문에 이 번역문은 쉽게 읽히지 않지만, 꼼꼼히 몇 번 정독하면, 만해가 그리고자 했던 유마거사의 이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는 만해가 밝힌 것처럼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본을 따랐다.
이 책은 잡지 『불교』 1940년 2월호와 4월호에 실린 실우失牛(만해의 필명)의 「유마힐소설경강의」와 400자 원고지 총 148장 분량의 육필 원고를 모아 발간한 『한용운전집』 제3권(신구문화사, 1973년)에 실린 『유마힐소설경』을 저본으로 했다. 만해는 1933년부터 『유마힐소설경』 번역을 시작했고, 1940년에 『불교』지에 첫 연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2월호, 3~4월호(합본호)에 2회를 연재하다 중단된다. 만해가 생애 첫 완역을 시도한 경전이 왜 『유마경』이었는지, 또 왜 번역이 중단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 실린 번역본은 『불교』지에 연재된 내용(본경의 명칭, 본경의 번역, 본경의 주석, 본경의 과판, 제1 불국품 일부로 본문 38쪽까지)과 『한용운전집』에 실린 내용(제6 부사의품 일부까지)을 합한 것이다. 『불교』에 연재된 내용 중 해설 부분은 육필 원고지에 기록된 내용과 분량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육필 원고에는 ‘본경의 명칭’, ‘본경의 번역’, ‘본경의 주석’, ‘본경의 과판’ 등이 없는데, 『불교』 제1 불국품 해설 부분의 원고 분량은 육필 원고에 비해 거의 열 배가 넘는다. 그만큼 육필 원고 중 해설 부분은 초고에 가깝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만해가 1933년 『한글』(제2권 1호, 1933년 4월)지에 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보급방법’ 글에서 “우리 불교 기관에서는 이번에 나온 새 철자법을 실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유마힐소설경』은 1914년 발간된 『불교대전』과 달리 국한문 혼용임에도 한글의 어법이 두드러지게 많다. 때문에 『불교대전』은 현대어의 번역을 거쳐야 읽을 수 있지만, 『유마힐소설경』은 번역을 거치지 않고 꼼꼼히 정독하면 읽을 수 있다. 물론 불교 한문 읽기는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 수고로움이 독자들을 더 깊은 『유마경』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불교』와 『한용운전집』에 실린 오자와 맞춤법은 원문의 결이 훼손되지 않는 정도로 바로잡았고(예를 들면 ‘부리수’는 ‘보리수’로, ‘일찌기’를 ‘일찍이’로, ‘더부러’를 ‘더불어’로), 지나치게 긴 문장은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두세 개의 문장으로 나누었다. 또한 국한문 혼용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생경한 단어와 문투 등이 적지 않게 나오지만, 자료의 가치를 고려해 그대로 두거나, 별도의 각주로 해석을 달았다. 때문에 이 번역문은 쉽게 읽히지 않지만, 꼼꼼히 몇 번 정독하면, 만해가 그리고자 했던 유마거사의 이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는 만해가 밝힌 것처럼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본을 따랐다.
목차
본경의 명칭 8
본경의 번역 14
본경의 주석 18
본경의 과판 22
제1 불국품佛國品 27
제2 방편품方便品 97
제3 제자품弟子品 121
제4 보살품菩薩品 177
제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211
제6 부사의품不思議品 269
원문原文 _ 제6 부사의품부터 제14 촉루품囑累品까지 278
해제 _ 유마로 살았던 만해의 유마경 역주 | 서재영 322
본경의 번역 14
본경의 주석 18
본경의 과판 22
제1 불국품佛國品 27
제2 방편품方便品 97
제3 제자품弟子品 121
제4 보살품菩薩品 177
제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211
제6 부사의품不思議品 269
원문原文 _ 제6 부사의품부터 제14 촉루품囑累品까지 278
해제 _ 유마로 살았던 만해의 유마경 역주 | 서재영 322
책 속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보적寶積아, 중생의 유類가 이 보살의 불토佛土니 무슨 까닭이겠느냐. 보살이 교화敎化하는 바 중생을 따라 불토를 취하며, 조복調伏하는 바 중생을 따라 불토를 취하며, 모든 중생이 응당 어떤 나라로써 불지혜佛智慧에 들어감에 따라 불토를 취하며, 모든 보살이 응당 어떤 나라로써 보살근菩薩根을 일으킴에 따라 불토를 취하느니 무슨 까닭이냐. 보살이 정국淨國을 취함은 다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있어 빈터에 집을 짓고자 하면 그 뜻에 따라 걸림이 없을지나, 만약 허공에 하면 능히 이루지 못할지니,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성취하려는 연고로 불국佛國을 취함을 원하느니 불국 취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공에 함이 아니니라. (「불국품」 한글 번역 부분. 68쪽)
이 이하는 불이 정토淨土의 뜻을 설하심이니, 중생을 떠나서는 따로 불이 없으며, 예토穢土를 떠나서는 따로 정토가 없음을 보임이다. 일체중생의 사는 곳이 정토 아님이 없느니, 양삼모옥兩三茅屋48의 산촌이 우자愚者를 변화시켜 철인哲人을 만들고, 완맹頑氓49을 조복調伏하여 선인을 만들면 일촌一村의 상마토석桑麻土石이 선수낙토仙樹樂土로 화할지니, 어떤 땅을 막론하고 그 땅에 사는 중생이 불지佛智에 들어가고, 선근善根을 일으키면 땅에 따라 정토淨土를 이룰지라. 만약 중생의 경계를 떠나서 따로 정토를 구하면 이는 허공에 궁실宮室을 건조함과 같아서 성취하지 못할지니라. (「불국품」 한글 해설 부분. 70쪽)
그때에 장자 유마힐維摩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들어 자리에 누웠으되 세존은 크게 자비로우신데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하니, 부처님께서 그 뜻을 아시고 곧 사리불舍利弗께 이르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나아가서 문병하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어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거기에 나아가 문병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건대 제가 일찍이 수풀 속 나무 밑에서 연좌宴坐1할 때에 유마힐이 와서 말씀하시되, 사리불아, 반드시 앉는 것만이 연좌가 아니며2 대저 연좌란 것은 삼계三界에 신의身意를 나타내지 않는 것3이 연좌이며, 멸정滅定4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위의威儀를 나타냄이 이 연좌가 되며...(「제자품」 한글 번역 부분. 122쪽)
부루나가 대승법을 공부하는 비구들에게 소승법을 설하는 고로 유마힐이 이를 꾸짖은 것이니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대승을 향하여 소승법을 설함은 보기寶器에 더러운 음식을 담고 유리를 수정水精으로 간주함과 같다. (「제자품」 한글 해설 부분. 149쪽)
이때 부처님이 미륵보살彌勒菩薩1에 이르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미륵이 부처님께 아뢰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저는 거기에 가서 문병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제가 옛적에 도솔천왕兜率天王과 그 권속을 위하여 불퇴전지不退轉地의 행行을 설할새 그때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일러 말씀하되, 미륵이여 세존이 그대(仁者)에게 기記2를 주어 일 생3에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하였으니, 어느 생生을 써서 수기受記를 얻으리오. 과거냐, 미래냐, 현재냐. 만약 과거생過去生이라 한다면 과거생은 이미 멸하고, 만약 미래생이라 한다면 미래생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 만약 현재생이라 한다면 현재생은 머무름이 없는지라. (「보살품」 한글 번역 부분. 178쪽)
전에는 일개一蓋의 가운데서 정토淨土를 나타내고, 지금에는 족지足指로 땅을 눌러서 삼천대천세계를 장엄莊嚴하니 부처님의 위신威神이 실로 그 단예端倪63를 보기 어렵도다. 그러나 이는 실로 부처님의 신화神化가 아니라 중생 심중心中의 환화幻化니라. 범부가 미迷를 고집하여 정淨 중에서 부정不淨을 보고, 부정 중에서 정을 보느니 불의 법안法眼 중에 어찌 정과 부정의 차이가 있으리오. 중생이 마음을 깨달으면 제불諸佛의 기량伎倆이 다하느니라. (「보살품」 한글 해설 부분. 206쪽)
그때에 부처님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이르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하되, 세존이여, 저 어른은 수대酬對하기 어렵습니다. 깊이 실상實相을 통달하여 잘 법요法要를 말하는데 변재가 막힘이 없고 지혜가 걸림이 없어 일체 보살의 법식法式을 다 알아서 모든 부처님의 깊은 법(秘藏)1에 들어가지 아니함이 없으며, 뭇 마魔를 항복받고 신통神通에 놀며 그 지혜의 방편이 다 이미 득도하였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마땅히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 거기 가서 병을 묻겠습니다. (「문수사리문질품」 한글 번역 부분. 212쪽)
이는 집착執着을 떠나 중도中道를 행하는 보살의 행을 설명함이다. (「문수사리문질품」 한글 해설 부분. 264쪽)
그때에 사리불舍利弗이 이 집 가운데 평상이 없음을 보고 이 생각을 짓되, 이 모든 보살과 큰 제자의 무리가 마땅히 어느 자리에 앉을고. 장자 유마힐維摩詰이 그 뜻을 알고 사리불에게 말씀하되, 어떤 까닭이뇨. 인자仁者여, 법을 위하여 왔느냐, 평상을 구함이냐. 사리불이 말씀하되, 나는 법을 위하여 온 것이지 평상을 위함이 아니로다. 유마힐이 말씀하되, 오직 사리불아, 대저 법을 구하는 자는 몸과 목숨을 탐하지 아니하거든 어찌 하물며 평상이리오. (「부사의품」 한글 번역 부분. 270쪽)
법은 공간적인 장광長廣을 떠났고 시간적인 수명을 떠났으며, 형체도 없고 성색聲色도 없는지라 구득求得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을 구함에 어로語路와 의정意程이 있으면 이는 법을 구함이 아니니 법을 구하는 자는 일체의 처소와 일체의 법에 집착하지 아니할지니 어단정진語斷情盡하여 일념一念도 움직이지 아니하는 곳에 만법萬法이 삼연森然하니라. (「부사의품」 한글 해설 부분. 273쪽)
이 이하는 불이 정토淨土의 뜻을 설하심이니, 중생을 떠나서는 따로 불이 없으며, 예토穢土를 떠나서는 따로 정토가 없음을 보임이다. 일체중생의 사는 곳이 정토 아님이 없느니, 양삼모옥兩三茅屋48의 산촌이 우자愚者를 변화시켜 철인哲人을 만들고, 완맹頑氓49을 조복調伏하여 선인을 만들면 일촌一村의 상마토석桑麻土石이 선수낙토仙樹樂土로 화할지니, 어떤 땅을 막론하고 그 땅에 사는 중생이 불지佛智에 들어가고, 선근善根을 일으키면 땅에 따라 정토淨土를 이룰지라. 만약 중생의 경계를 떠나서 따로 정토를 구하면 이는 허공에 궁실宮室을 건조함과 같아서 성취하지 못할지니라. (「불국품」 한글 해설 부분. 70쪽)
그때에 장자 유마힐維摩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들어 자리에 누웠으되 세존은 크게 자비로우신데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하니, 부처님께서 그 뜻을 아시고 곧 사리불舍利弗께 이르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나아가서 문병하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어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거기에 나아가 문병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건대 제가 일찍이 수풀 속 나무 밑에서 연좌宴坐1할 때에 유마힐이 와서 말씀하시되, 사리불아, 반드시 앉는 것만이 연좌가 아니며2 대저 연좌란 것은 삼계三界에 신의身意를 나타내지 않는 것3이 연좌이며, 멸정滅定4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위의威儀를 나타냄이 이 연좌가 되며...(「제자품」 한글 번역 부분. 122쪽)
부루나가 대승법을 공부하는 비구들에게 소승법을 설하는 고로 유마힐이 이를 꾸짖은 것이니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대승을 향하여 소승법을 설함은 보기寶器에 더러운 음식을 담고 유리를 수정水精으로 간주함과 같다. (「제자품」 한글 해설 부분. 149쪽)
이때 부처님이 미륵보살彌勒菩薩1에 이르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미륵이 부처님께 아뢰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저는 거기에 가서 문병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제가 옛적에 도솔천왕兜率天王과 그 권속을 위하여 불퇴전지不退轉地의 행行을 설할새 그때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일러 말씀하되, 미륵이여 세존이 그대(仁者)에게 기記2를 주어 일 생3에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하였으니, 어느 생生을 써서 수기受記를 얻으리오. 과거냐, 미래냐, 현재냐. 만약 과거생過去生이라 한다면 과거생은 이미 멸하고, 만약 미래생이라 한다면 미래생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 만약 현재생이라 한다면 현재생은 머무름이 없는지라. (「보살품」 한글 번역 부분. 178쪽)
전에는 일개一蓋의 가운데서 정토淨土를 나타내고, 지금에는 족지足指로 땅을 눌러서 삼천대천세계를 장엄莊嚴하니 부처님의 위신威神이 실로 그 단예端倪63를 보기 어렵도다. 그러나 이는 실로 부처님의 신화神化가 아니라 중생 심중心中의 환화幻化니라. 범부가 미迷를 고집하여 정淨 중에서 부정不淨을 보고, 부정 중에서 정을 보느니 불의 법안法眼 중에 어찌 정과 부정의 차이가 있으리오. 중생이 마음을 깨달으면 제불諸佛의 기량伎倆이 다하느니라. (「보살품」 한글 해설 부분. 206쪽)
그때에 부처님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이르시되,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하되, 세존이여, 저 어른은 수대酬對하기 어렵습니다. 깊이 실상實相을 통달하여 잘 법요法要를 말하는데 변재가 막힘이 없고 지혜가 걸림이 없어 일체 보살의 법식法式을 다 알아서 모든 부처님의 깊은 법(秘藏)1에 들어가지 아니함이 없으며, 뭇 마魔를 항복받고 신통神通에 놀며 그 지혜의 방편이 다 이미 득도하였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마땅히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 거기 가서 병을 묻겠습니다. (「문수사리문질품」 한글 번역 부분. 212쪽)
이는 집착執着을 떠나 중도中道를 행하는 보살의 행을 설명함이다. (「문수사리문질품」 한글 해설 부분. 264쪽)
그때에 사리불舍利弗이 이 집 가운데 평상이 없음을 보고 이 생각을 짓되, 이 모든 보살과 큰 제자의 무리가 마땅히 어느 자리에 앉을고. 장자 유마힐維摩詰이 그 뜻을 알고 사리불에게 말씀하되, 어떤 까닭이뇨. 인자仁者여, 법을 위하여 왔느냐, 평상을 구함이냐. 사리불이 말씀하되, 나는 법을 위하여 온 것이지 평상을 위함이 아니로다. 유마힐이 말씀하되, 오직 사리불아, 대저 법을 구하는 자는 몸과 목숨을 탐하지 아니하거든 어찌 하물며 평상이리오. (「부사의품」 한글 번역 부분. 270쪽)
법은 공간적인 장광長廣을 떠났고 시간적인 수명을 떠났으며, 형체도 없고 성색聲色도 없는지라 구득求得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을 구함에 어로語路와 의정意程이 있으면 이는 법을 구함이 아니니 법을 구하는 자는 일체의 처소와 일체의 법에 집착하지 아니할지니 어단정진語斷情盡하여 일념一念도 움직이지 아니하는 곳에 만법萬法이 삼연森然하니라. (「부사의품」 한글 해설 부분. 273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격동의 근대불교와 만해
한국 근대불교는 만해 한용운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만해는 스스로 근대불교의 시공을 개척해 왔고, 근대불교의 사상적 내용을 확립하고, 불교가 지향해야할 길을 제시해 온 인물이다. 시절은 엄혹하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아서 역사는 위기를 헤쳐 나갈 인재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할 민족지사를 기다렸고, 교단 내적으로는 억압을 혁파하고 불교 중흥을 이끌 걸출한 스승을 요구했다. 나아가 민초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사상가와 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역사의 기다림과 달리 당시는 그런 인재가 나기 힘든 시절이었다. 누가 되었든 세상에 먼저 눈 뜬 이가 그 모든 요구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해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민족지사로, 조선불교의 개혁을 선도하는 걸출한 승려로, 감미로운 시어로 대중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위대한 문인으로 활동했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며 의인걸사의 길에 발을 들였다. 무엇보다 만해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공약삼장」을 추가하는 등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관여했고, 당일 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 그 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렀지만 오히려 비타협적 투사의 삶은 더욱 확고해졌다. 많은 민족지사들이 독립의 꿈을 잃고 변절했지만 만해는 항일투사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의 나이 50세 전후에는 성북동 심우장에 기거하면서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맡는 등 그의 삶은 여전히 항일운동의 궤적을 밟아갔다. 그러나 한평생 몸 바쳐 치열하게 싸웠지만 아쉽게도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만해는 불세출의 민족지사로 평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또 다른 근간은 승려로서의 이력이다. 승려로서 만해의 삶을 돌아보면 출세간出世間의 공간에 안주하지 않고 불교계 내에서도 동분서주하며 전방위인적인 삶을 살았다.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한 만해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확립하는 데 앞장선 선지식이었다. 1910년 원종의 대종정 이회광은 일본의 조동종과 한국불교를 통합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동종 맹약’을 체결했다. 만해는 이에 맞서 1911년 박한영, 진진응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통해 한국불교의 법맥은 임제종풍임을 천명하고 한국불교를 병합하려는 음모를 좌절시켰다.
1913년에는 백담사에서 탈고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출판했다. 만해는 이 책을 통해 낙후한 조선불교의 개혁을 주창하며 근대불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론은 탈고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눈여겨 볼 내용을 담고 있다. 승려로서 만해의 삶은 이와 같은 실천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만해는 방대한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교의 정수를 뽑아내 『불교대전』을 편찬했고, 『유심』지와 『불교』지를 발간하여 불교청년운동과 대중화운동에 전념하며 민족세력을 규합하고, 궁극적으로 불교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유마의 삶을 산 만해와 『유마경』
만해의 행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선방에만 앉아 있지 않고 불교개혁, 나라의 독립, 사회정의를 위해 일평생 실천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조용한 숲속에 앉아 있는 가섭을 향해 호통 친 유마거사처럼 만해 역시 선외선禪外禪, 즉 ‘선 밖의 선’을 추구하며 활선活禪의 길을 지향했고,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대로 고통받는 중생들과 삶을 함께했다. 따라서 만해는 승려였지만 출세간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수행자였지만 선방에 안주하지 않는 생활선의 길을 지향했다.
출세간의 영역에 안주하지 않았던 만해에게 승려와 출세간이라는 형식과 승가僧伽라는 종교적 카테고리는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만해에게 『유마경』은 그의 삶을 대변하고, 실천적 삶에 대한 당위를 뒷받침하는 교학이자 성전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유마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출가자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중생의 삶 속에서 유마로 살았다.
『유마경』은 『승만경』과 더불어 대표적인 대승경전으로 평가받는다. 대부분의 대승경전이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 등 부처님이 설법의 주체로 등장한다. 하지만 『승만경』과 『유마경』은 승만부인과 유마거사라는 재가자가 설법의 주체로 등장한다. 단지 설법의 주체가 재가자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대제자들은 유마거사에게 한결같이 호통을 듣고 대승정신에 대한 설법을 듣고 배우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마경』 「제자품」에 따르면 유마거사는 일부러 병석에 눕는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유마거사에게 문병을 다녀오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결국 문병을 가게 된 이는 출가 제자가 아니라 대승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다. 출가중심주의에 도취되어 은둔을 수행으로 삼는 사람은 감히 유마와 대적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유마는 그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만해 역시 결혼도 하고 거사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오히려 출가자들을 향해 호통을 치는 당당한 삶을 살았다. 만해는 정신적으로 유마의 가르침을 받드는 차원을 넘어 역사적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과 함께 아파하는 삶을 살았다.
『유마경』에서 눈여겨 볼 대목 중에 하나가 유마거사가 병석에 누운 이유다. 「문수사리문질품」에 보면 유마거사는 “일체 중생이 병들고 이런 까닭으로 내가 병들었거니와 만약 일체 중생이 병들지 아니하면 곧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보살이 아프다는 것이다. 백성이 수탈당하는 고통 속에 있으니 승가가 아프고, 나라가 고통에 신음하니 불교가 아프다. 그래서 만해는 스스로 세간으로 뛰어드는 고달픈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만해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유마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고, 『유마경』의 역주譯註를 남겼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마경』을 해석하는 것은 그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며, 『유마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해가 번역한 『유마경』의 특징
만해의 『유마경』 번역은 1933년에 번역한 육필 원고가 전하고 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는 유마의 정신은 만해에게 경전 구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만해에게 『유마경』은 그의 삶을 떠받치고, 그의 실천을 변론하는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심우장에서 시작한 『유마경』 역주 작업은 전체 12품 중에 절반에 해당하는 제6 「부사의품」까지 진행되었다. 그 뒷부분은 한문 원문만 기재되어 있다. 안팎으로 분주한 삶을 살았기에 집필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단된 원고가 다시 빛을 본 것은 1940년 봄 『불교』지를 통해서였다. 『불교』지에서 만해는 ‘실우失牛’라는 필명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만해가 살았던 심우장尋牛莊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심우도尋牛圖에서 소는 인간의 자성自性을 의미하지만 만해에게 그 소는 다름 아닌 조국이었다. 그런데 그 조국이 강탈된 상태였으므로 그는 소를 찾는 집에 머물러야 했고, ‘잃어버린 소’를 뜻하는 실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이렇게 보면 그의 집필 행위 자체가 항일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불교』지의 연재는 2회뿐이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당시 만해는 매우 궁핍한 생활로 어려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연재를 시작하고 4년 뒤 중풍으로 타계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건강상의 문제도 연재를 멈춘 이유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중생과 함께 아파하면서 그 아픔은 그의 삶을 파고들었고, 뼛속 깊이 스며들어 그의 삶을 무너뜨렸다. 중생과 보살이 둘이 아니기에 중생이 무너져 내리면 보살의 삶도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중생에 대한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내재화하고, 그 아픔이 너무도 깊고 깊어 그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만해의 『유마경』은 그런 희생과 아픔 속에서 탄생한 진주 같은 결과물이다. 그의 번역은 오래된 번역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세련되었다. 만해는 1933년 『한글』지에 기고한 글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된 만큼 경전 번역도 이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그의 『유마경』 역시 그런 정신에 입각해 번역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만해가 남긴 『유마경』 번역이 갖는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근대의 대표적 문장가의 번역이다.
무엇보다 만해는 「님의 침묵」으로 대변되는 위대한 시인이자 문인이다. 주요환의 「불놀이」를 신체시의 효시라고 하지만 혹자는 「님의 침묵」이야말로 신체시의 효시라고 보기도 한다. 그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지만 문학적 여운이 있고, 행간에는 사색의 길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다. 『유마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으로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지만 만해의 번역은 유려한 문체로 인해 술술 읽혀지는 맛이 있다.
둘째, 한학에 조예가 깊은 대가의 번역이다.
만해는 유교적 전통이 살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한학을 익혀 이 분야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인정받는 대강백이기도 했다. 만해의 이런 이력은 그의 번역에 대한 신뢰를 더해준다. 창작이라면 스토리와 문장만 좋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번역이라면 좋은 문장 못지않게 원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고 이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해는 원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담아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 유마의 삶을 살아간 실증적 인물의 번역이다.
그의 번역은 단지 문리文理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그의 해석은 추상적 인식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장에서 체득된 지혜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을 호통치던 유마거사의 당찬 모습은 일제에 빌붙어 살던 주지들을 향해 호통치던 만해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넷째, 대강백의 안목으로 주석을 달고 내용을 풀이했다.
만해는 방대한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교대전』을 편집할 만큼 불교사상과 내전內典에 깊은 안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나아가 중앙불전을 졸업하고 일본 등지에서 일찍이 신학문을 접하면서 외전外典에도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인물이다. 그런 만해가 내외전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주석을 달고 강의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유마경』을 풍성하게 이해하게 해준다. 주석은 사전적 의미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혜원의 『유마경혜원소』 등을 인용하여 깊이를 더하고, 여러 경전을 예로 들어 품위를 더하고 있다.
다섯째, 만년의 삶과 경험이 녹아 있는 번역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나이 불과 30대 초반이던 1910년에 탈고되었다. 반면 『유마경』 역주는 1933년에 시작했고, 『불교』지에 연재했던 원고는 임종 직전까지 작업했던 만년의 저작이다. 위대한 삶을 살아간 한 인간이 축적한 일평생의 경험과 경륜이 배어 있는 역작이기에 단어 선택 하나라도 강한 진동을 준다.
여섯째, 미완의 번역은 우리들에게 완성의 책무를 일깨운다.
만해의 『유마경』 역주는 전체 14품 중에 거의 절반만 번역되었다. 분량으로만 보면 미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듯 만해의 미완의 『유마경』도 완결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유마경』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절반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중생의 아픔과 함께하는 유마의 삶은 결코 완성이 있을 수 없다. 중생의 삶은 역동적 현실 속에 있으며, 현재에도 끊임없이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유마경』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경전이다. 중생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마경』의 완성은 미래형이며, 이 경을 읽는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해의 『유마경』은 중생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보살의 삶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한국 근대불교는 만해 한용운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만해는 스스로 근대불교의 시공을 개척해 왔고, 근대불교의 사상적 내용을 확립하고, 불교가 지향해야할 길을 제시해 온 인물이다. 시절은 엄혹하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아서 역사는 위기를 헤쳐 나갈 인재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할 민족지사를 기다렸고, 교단 내적으로는 억압을 혁파하고 불교 중흥을 이끌 걸출한 스승을 요구했다. 나아가 민초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사상가와 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역사의 기다림과 달리 당시는 그런 인재가 나기 힘든 시절이었다. 누가 되었든 세상에 먼저 눈 뜬 이가 그 모든 요구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해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민족지사로, 조선불교의 개혁을 선도하는 걸출한 승려로, 감미로운 시어로 대중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위대한 문인으로 활동했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며 의인걸사의 길에 발을 들였다. 무엇보다 만해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공약삼장」을 추가하는 등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관여했고, 당일 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 그 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렀지만 오히려 비타협적 투사의 삶은 더욱 확고해졌다. 많은 민족지사들이 독립의 꿈을 잃고 변절했지만 만해는 항일투사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의 나이 50세 전후에는 성북동 심우장에 기거하면서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맡는 등 그의 삶은 여전히 항일운동의 궤적을 밟아갔다. 그러나 한평생 몸 바쳐 치열하게 싸웠지만 아쉽게도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만해는 불세출의 민족지사로 평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또 다른 근간은 승려로서의 이력이다. 승려로서 만해의 삶을 돌아보면 출세간出世間의 공간에 안주하지 않고 불교계 내에서도 동분서주하며 전방위인적인 삶을 살았다.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한 만해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확립하는 데 앞장선 선지식이었다. 1910년 원종의 대종정 이회광은 일본의 조동종과 한국불교를 통합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동종 맹약’을 체결했다. 만해는 이에 맞서 1911년 박한영, 진진응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통해 한국불교의 법맥은 임제종풍임을 천명하고 한국불교를 병합하려는 음모를 좌절시켰다.
1913년에는 백담사에서 탈고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출판했다. 만해는 이 책을 통해 낙후한 조선불교의 개혁을 주창하며 근대불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론은 탈고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눈여겨 볼 내용을 담고 있다. 승려로서 만해의 삶은 이와 같은 실천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만해는 방대한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교의 정수를 뽑아내 『불교대전』을 편찬했고, 『유심』지와 『불교』지를 발간하여 불교청년운동과 대중화운동에 전념하며 민족세력을 규합하고, 궁극적으로 불교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유마의 삶을 산 만해와 『유마경』
만해의 행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선방에만 앉아 있지 않고 불교개혁, 나라의 독립, 사회정의를 위해 일평생 실천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조용한 숲속에 앉아 있는 가섭을 향해 호통 친 유마거사처럼 만해 역시 선외선禪外禪, 즉 ‘선 밖의 선’을 추구하며 활선活禪의 길을 지향했고,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대로 고통받는 중생들과 삶을 함께했다. 따라서 만해는 승려였지만 출세간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수행자였지만 선방에 안주하지 않는 생활선의 길을 지향했다.
출세간의 영역에 안주하지 않았던 만해에게 승려와 출세간이라는 형식과 승가僧伽라는 종교적 카테고리는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만해에게 『유마경』은 그의 삶을 대변하고, 실천적 삶에 대한 당위를 뒷받침하는 교학이자 성전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유마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출가자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중생의 삶 속에서 유마로 살았다.
『유마경』은 『승만경』과 더불어 대표적인 대승경전으로 평가받는다. 대부분의 대승경전이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 등 부처님이 설법의 주체로 등장한다. 하지만 『승만경』과 『유마경』은 승만부인과 유마거사라는 재가자가 설법의 주체로 등장한다. 단지 설법의 주체가 재가자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대제자들은 유마거사에게 한결같이 호통을 듣고 대승정신에 대한 설법을 듣고 배우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마경』 「제자품」에 따르면 유마거사는 일부러 병석에 눕는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유마거사에게 문병을 다녀오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결국 문병을 가게 된 이는 출가 제자가 아니라 대승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다. 출가중심주의에 도취되어 은둔을 수행으로 삼는 사람은 감히 유마와 대적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유마는 그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만해 역시 결혼도 하고 거사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오히려 출가자들을 향해 호통을 치는 당당한 삶을 살았다. 만해는 정신적으로 유마의 가르침을 받드는 차원을 넘어 역사적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과 함께 아파하는 삶을 살았다.
『유마경』에서 눈여겨 볼 대목 중에 하나가 유마거사가 병석에 누운 이유다. 「문수사리문질품」에 보면 유마거사는 “일체 중생이 병들고 이런 까닭으로 내가 병들었거니와 만약 일체 중생이 병들지 아니하면 곧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보살이 아프다는 것이다. 백성이 수탈당하는 고통 속에 있으니 승가가 아프고, 나라가 고통에 신음하니 불교가 아프다. 그래서 만해는 스스로 세간으로 뛰어드는 고달픈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만해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유마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고, 『유마경』의 역주譯註를 남겼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마경』을 해석하는 것은 그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며, 『유마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해가 번역한 『유마경』의 특징
만해의 『유마경』 번역은 1933년에 번역한 육필 원고가 전하고 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는 유마의 정신은 만해에게 경전 구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만해에게 『유마경』은 그의 삶을 떠받치고, 그의 실천을 변론하는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심우장에서 시작한 『유마경』 역주 작업은 전체 12품 중에 절반에 해당하는 제6 「부사의품」까지 진행되었다. 그 뒷부분은 한문 원문만 기재되어 있다. 안팎으로 분주한 삶을 살았기에 집필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단된 원고가 다시 빛을 본 것은 1940년 봄 『불교』지를 통해서였다. 『불교』지에서 만해는 ‘실우失牛’라는 필명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만해가 살았던 심우장尋牛莊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심우도尋牛圖에서 소는 인간의 자성自性을 의미하지만 만해에게 그 소는 다름 아닌 조국이었다. 그런데 그 조국이 강탈된 상태였으므로 그는 소를 찾는 집에 머물러야 했고, ‘잃어버린 소’를 뜻하는 실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이렇게 보면 그의 집필 행위 자체가 항일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불교』지의 연재는 2회뿐이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당시 만해는 매우 궁핍한 생활로 어려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연재를 시작하고 4년 뒤 중풍으로 타계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건강상의 문제도 연재를 멈춘 이유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중생과 함께 아파하면서 그 아픔은 그의 삶을 파고들었고, 뼛속 깊이 스며들어 그의 삶을 무너뜨렸다. 중생과 보살이 둘이 아니기에 중생이 무너져 내리면 보살의 삶도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중생에 대한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내재화하고, 그 아픔이 너무도 깊고 깊어 그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만해의 『유마경』은 그런 희생과 아픔 속에서 탄생한 진주 같은 결과물이다. 그의 번역은 오래된 번역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세련되었다. 만해는 1933년 『한글』지에 기고한 글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된 만큼 경전 번역도 이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그의 『유마경』 역시 그런 정신에 입각해 번역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만해가 남긴 『유마경』 번역이 갖는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근대의 대표적 문장가의 번역이다.
무엇보다 만해는 「님의 침묵」으로 대변되는 위대한 시인이자 문인이다. 주요환의 「불놀이」를 신체시의 효시라고 하지만 혹자는 「님의 침묵」이야말로 신체시의 효시라고 보기도 한다. 그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지만 문학적 여운이 있고, 행간에는 사색의 길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다. 『유마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으로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지만 만해의 번역은 유려한 문체로 인해 술술 읽혀지는 맛이 있다.
둘째, 한학에 조예가 깊은 대가의 번역이다.
만해는 유교적 전통이 살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한학을 익혀 이 분야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인정받는 대강백이기도 했다. 만해의 이런 이력은 그의 번역에 대한 신뢰를 더해준다. 창작이라면 스토리와 문장만 좋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번역이라면 좋은 문장 못지않게 원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고 이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해는 원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담아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 유마의 삶을 살아간 실증적 인물의 번역이다.
그의 번역은 단지 문리文理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그의 해석은 추상적 인식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장에서 체득된 지혜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을 호통치던 유마거사의 당찬 모습은 일제에 빌붙어 살던 주지들을 향해 호통치던 만해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넷째, 대강백의 안목으로 주석을 달고 내용을 풀이했다.
만해는 방대한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교대전』을 편집할 만큼 불교사상과 내전內典에 깊은 안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나아가 중앙불전을 졸업하고 일본 등지에서 일찍이 신학문을 접하면서 외전外典에도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인물이다. 그런 만해가 내외전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주석을 달고 강의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유마경』을 풍성하게 이해하게 해준다. 주석은 사전적 의미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혜원의 『유마경혜원소』 등을 인용하여 깊이를 더하고, 여러 경전을 예로 들어 품위를 더하고 있다.
다섯째, 만년의 삶과 경험이 녹아 있는 번역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나이 불과 30대 초반이던 1910년에 탈고되었다. 반면 『유마경』 역주는 1933년에 시작했고, 『불교』지에 연재했던 원고는 임종 직전까지 작업했던 만년의 저작이다. 위대한 삶을 살아간 한 인간이 축적한 일평생의 경험과 경륜이 배어 있는 역작이기에 단어 선택 하나라도 강한 진동을 준다.
여섯째, 미완의 번역은 우리들에게 완성의 책무를 일깨운다.
만해의 『유마경』 역주는 전체 14품 중에 거의 절반만 번역되었다. 분량으로만 보면 미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듯 만해의 미완의 『유마경』도 완결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유마경』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절반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중생의 아픔과 함께하는 유마의 삶은 결코 완성이 있을 수 없다. 중생의 삶은 역동적 현실 속에 있으며, 현재에도 끊임없이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유마경』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경전이다. 중생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마경』의 완성은 미래형이며, 이 경을 읽는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해의 『유마경』은 중생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보살의 삶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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