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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재산 (2024) - 친일이라는 이름 뒤의 ‘돈’과 ‘땅’, 그들은 과연 자산을 얼마나 불렸을까

동방박사님 2024. 8. 13.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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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라를 팔아먹은 대한제국 왕족과 친일 엘리트의 민낯,
‘수지맞는 장사’였던 친일 행위로 그들을 과연 얼마나 벌었을까?
최악의 친일파 30인의 죄상과 그들이 불린 재산을 분석하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근대사’를 다시 읽는다!

- ‘매국의 아이콘’ 이완용은 경성 최고의 ‘현금왕’이었다?
- 군부대신 이근택은 30만 원의 기밀비를 받고 궁궐의 모든 기밀을 빼돌렸다?
- 고종 황제의 형님 이재면은 은사공채를 이완용보다 무려 5배나 많이 받았다?
- ‘정미칠적’ 송병준은 1925년에 홋카이도에 560만 평 이상의 땅을 소유했다?
- 외부대신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 10만 원을 받고 도박판에서 하룻밤에 11만 원을 던졌다?

‘친일파’. 태어난 지 100년도 넘은 이 단어는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불편하다. 정확한 학술적 개념까지도 필요없이, 상식적으로 친일파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을 피 빨아먹고 살았던 부역자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그들은 왜 친일을 했을까? ‘친일파’들은 ‘부득이하게 친일을 했다’고 변명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를 『친일파의 재산』은 낱낱이 알려준다. 친일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얼마나 이익을 얻었을까?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 『친일파의 재산』은 대표적인 친일파 30명의 ‘친일 재산’과 ‘친일 연대기’를 사료와 당시의 신문기사, 증언과 회고록 등을 토대로 알려주는 동시에 당시 평범한 이들의 평균 소득이나 월급을 비교 제시하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근현대사’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목차

머리말 - ‘친일’이라는 이름 뒤의 ‘이득’과 ‘소득’

01. 임금의 형, 나라 팔아 이완용보다 5배 더 받았다
- 백성들을 넘긴 대가로 83만 원이라는 거액의 국채증서를 받은 이재면
02. “‘만세’가 아니라 ‘반자이’라 불렀나이다”
- 일왕 생일 파티에서 ‘만세’를 외친 이재극의 황당한 변명
03. “새야 새야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
- 동학혁명을 진압하고 ‘을사오적’에 ‘경술국적’까지, ‘친일 2관왕’ 박제순
04. 매국의 아이콘,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가 되다
- 1925년 한국인 부자 2위로 기록된 이완용
05. 그 남자의 ‘통 큰’ 친일 재테크, 일제의 산림 착취는 ‘투자 찬스’였다
- 동척 감사, 조선산림회 임원으로 조선 수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진태
06. 완용과 윤용, 의붓 형제는 ‘친일’도 경쟁했다?
- 이완용에 이어 두 번째로 일제의 훈장을 많이 받은 이윤용
07. 신선한 생선은 황후에게, 죽은 황후의 유품은 황제에게
- 아부와 처세술로 일관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일생
08. ‘을사오적’의 부인은 왜 혀가 깨물렸나
- 고종 황제의 5촌 조카인 황족 이지용의 도박 중독과 파탄 난 개인사
09. 도박으로 알거지가 된 친일 귀족의 초상
- 줄소송, 작위 박탈, 파산으로 이어지는 조민희의 몰락사
10. 조선의 금을 일본으로 밀반출한 ‘쩐의 전쟁’ 뒤의 남자
- 일제의 금융침략을 도운 친일파 김종한
11. ‘후작’ 박영효, ‘백작’ 이완용보다 많이 받아먹었다
- 일본이 이완용보다 쓰임새를 높이 평가했던 박영효
12. 칼을 뽑아 고종을 위협하다
-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하고 의병운동을 진압한 친일 군인 이병무
13. 황족 여성이 받는 훈장을 첩이 받았던 이유는?
- 한국인 지주들의 땅을 강탈하는 데 ‘조폭’ 역할도 마다않은 박의병
14. 일본에 대한 충성이 부동산으로 돌아오다
- 홋카이도에 560만 평의 땅을 소유했던 송병준
15. 일본의 충견, 한국인을 향해 총을 쏘다
- ‘이토 히로부미 키즈’로 의병운동과 3.1운동 진압에 동원된 헌병보조원 조성엽
16. 조선총독부가 조선귀족들에게 공짜 일본 관광을 시켜준 이유는?
- 작위, 술병, 은사공채도 받고 일왕의 “끔찍한 총애”도 받은 이기용
17. 조봉암, 박헌영, 안창호를 체포한 악독한 친일 경찰
-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김덕기
18. 일제의 떡고물이 참 좋았던, 어느 친일파의 50년
- 일본이 굳이 권하지 않았지만 자청해서 친일을 한 박영철
19. 고급 밀정의 절규, “조선총독부는 내 돈 내놔라!”
- 시베리아, 사할린, 도쿄를 무대로 오로지 돈을 위해 친일을 한 박병일
20. 친일 조폭, 일본 국회의원까지 해먹다
- 깡패에서 기업인으로, 반일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을 탄압한 박춘금
21. 교회의 종을 일본에 바치다
- 예수를 팔아치운 ‘친일 목사’ 김응순
22. 오늘은 또 누구의 초상집을 찾아가볼까
- 도쿄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경술국적’ 민병석
23. 충남 갑부의 스케일, 뇌물은 순금으로?· 207
- 단군 할아버지를 팔아 친일한 김갑순의 이상한 행운 뒤의 검은 거래
24. ‘고문왕’, 독립투사들을 사냥하고 살해하다
-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강우규 선생을 체포해 승승장구한 친일 경찰 김태석
25. 이토 히로부미가 총애한, 못 말리는 친일파
- ‘친일파 거두’이자 ‘반민 거물’이었던 박중양과 대구 동성로의 비밀
26. 공자님을 팔아 친일한, ‘좀 더 높이 나는 친일파’
- 학벌도 문벌도 없지만 ‘대일 충성도’는 최고였던 박상준
27. 독립투사를 죽여 압록강 얼음물에 던진 잔혹함
- 임시정부가 반드시 처단해야 할 인물로 지목한 ‘공작 수사의 달인’ 김극일
28.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일러바친 이토 히로부미의 ‘요녀’
- 친일이 ‘수지맞는 장사’였던 일본의 비밀 첩자 배정자
29. 식민지 조선 1호 부자,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를 돌보다
-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용서받지 못할 과거
30. 심청이 공양미의 10배나 되는 쌀을 거둬들이다
- 하동군수 이항녕의 공출미 3,000석 수탈 대작전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저자 소개

저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구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을, 「민족 21」과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으며,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

책 속으로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재산을 축적하는 모습은 ‘알뜰살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거수일투족이 역사에 기록될 위치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명분’보다 ‘수입’을 상당히 우선시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이 무너트린 대한제국 관직을 그만둘 때 퇴직금도 따박따박 챙겨갔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해 잔무를 처리해준 것에 대한 대가 역시 수령해갔다. 그는 (1910년) 10월 3일 퇴직금으로 1,458원 33전을 받았고, 합병 전후 3일간(28일~30일)의 잔무처리수당으로 60원도 받아 챙겼다.

국권 침탈의 잔무를 사흘간 처리해준 대가로 군수 월급 수준의 수당을 받아 간 것이다. 자신의 조국인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회한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매국노라는 이유로 그 전해 겨울인 1909년 12월에 가톨릭 성당 앞에서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온 그였다. 그런 일까지 겪은 사람이 바로 그 이듬해 여름에 대한제국 퇴직금을 수령하고 사흘치 잔무처리수당까지 받아 갔다. 훗날의 역사적 평가에 개의치 않는 파렴치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퇴직금에 잔무수당까지 ‘알뜰살뜰’ 모은 결과, 이완용은 식민지 한국인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갑부 반열에 올랐다. 김윤희 교수의 『이완용 평전』에 따르면 그는 68세에 죽었는데 죽기 1년 전인 1925년에는 친일파 민영휘에 이어 한국인 부자 2위로 기록됐다. 현금 보유액은 그가 최고였다.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이완용」중에서

이지용은 친일 중독자인 동시에 도박 중독자였다. 이 점은 친일 귀족 상당수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도박으로 인해 몰락 직전에 내몰린 친일파들을 위해 일제는 1929년에 창복회(昌福會)라는 구제단체까지 만들었다.

“한일합병 이후에는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밤을 지샜다. ……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양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이지용은 나라를 판 대가로 일본 백작이 되면서 10만 원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하룻밤 도박에 11만 원을 쓰곤 했다. 나라 판 돈을 하룻밤에 탕진하곤 했던 셈이다. 1912년 12월에는 도박죄로 검거되어 2월에 태형 100대를 선고받았고 3월에는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었다. 이로써 13년의 공백기가 설명된다. 도박죄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13년간 중추원 연봉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지용」중에서

일본은 박영효를 우호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완용 때문에 잠시 ‘탈선’했던 그를 관대하게 대했다. 일본은 그의 위상을 이완용보다 높게 설정했다. 1910년 한국 강점 뒤에 이완용에게는 백작 작위를 줬다가 1920년에 후작으로 높인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처음부터 후작 작위를 부여했다. 또 1911년에 이완용에게는 은사공채 15만 원어치를 준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28만 원어치를 줬다. 이들은 은행에 예금되는 이 돈의 이자를 받아 곳간에 채웠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이 1910년에 받은 월급은 50원이다. 이완용에게는 이 월급의 3,000배, 박영효에게는 5,600배가 일왕 하사금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일본이 볼 때 한국 강점 이전에는 이완용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박영효가 더 필요했다. 대한제국을 헐값에 넘겨받는 데는 매국노 이완용의 역할이 절실했지만, 일단 넘겨받은 뒤에는 한국의 민심을 억누르는 게 급선무였다. 왕실 일원인 박영효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전하는 것이 일본에 더 유용했다.
---「박영효」중에서

출판사 리뷰

‘대한제국, 얼마면 돼?’

생각해보면 ‘친일파’라 불릴 만큼의 행적이 기록된 이들은 왕족 또는 당대의 ‘엘리트’였던 고위관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왕족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났거나, 능력 있고 똑똑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대한제국’의 국정을 운영하고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일제에 부역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자기만 잘 먹고 잘산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매국의 한길로 내달렸다. 심지어 ‘경술국적’ 중 한 명인 무관 이병무는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임금에게 칼을 뽑아들기까지 했다.

일본은 전쟁으로 대한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정면으로 무장하고 맞대결하여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몇몇 ‘친일’ 관료들과 왕족들이 글자 그대로 ‘헐값에 팔아넘겼다’. 을사오적, 경술국적, 정미칠적 등으로 대표되는 친일파들은 모두 왕족과 고관대작들, 오늘날로 치면 총리와 장관급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종이 몇 장에 도장을 찍어준 대가로 그들은 원하던 대로 평생 ‘호의호식’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충성을 맹세한 일제로부터 돈도 받고 땅도 받고 술병도 받고 훈장도 받았다. 공짜로 일본 관광도 다녀왔다. 그렇게 나라와 백성을 팔아서 그들은 과연 얼마나 많이 벌었을까? ‘대한제국, 얼마면 돼?’라고 묻는다면 답은 당시 돈으로 ‘600만 원 정도면 된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일본은 2명의 왕족 이재면과 이강 외에 76명의 조선 귀족에게 은사공채를 지급했는데, 지급한 총액은 600만 원(현재 가치로 1,500억 원~6,000억 원) 정도다.

임금의 형, 이완용보다 5배나 많이 받다

전쟁 없이 대한제국을 야금야금 무너뜨린 일본 입장에서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대한제국 왕족들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거액의 돈과 작위를 주어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였다. 고종의 형인 이재면, 고종의 5촌 조카인 이지용, 고종의 8촌 동생인 이재극,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 등이 거기에 편승한 자들이다. 그러다가 왕족들이 효용이 떨어지자 그들을 버리고 이번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에 손길을 내밀었다. 식민 통치를 위해 똑똑한 조선인 엘리트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대표적인 이들이 이완용, 박제순 등이다.

『친일파의 재산』은 30명의 친일파와 그들의 행적, 그들이 축재한 방식을 보여준다. 시작은 고종의 형이자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 이야기다. 어쩌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이재면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밀려 ‘왕(고종)의 형님’으로 살았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4개월 보름 뒤에 은사공채를 받았다. 조카인 이강(고종의 다섯째 아들)과 더불어 그의 증서에 적힌 금액은 ‘단연 톱’이었다. ‘백작’ 이완용이 15만 원을 받은 데 비해 이재면과 이강은 83만 원을 받았다. 이완용보다 무려 5배나 많이 받은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2009)에 따르면, 당시 이재면이 받은 83만 원은 현재 가치로는 “166억에서 830억 원 정도”로 평가된다고 한다. 해마다 발생하는 이자만 8억 3,000만에서 41억 5,000만 원 정도였던 것이다.

‘매국의 아이콘’ 이완용은 현금을 사랑한 남자였다?

누구나 아는 ‘매국의 아이콘’ 이완용도 알아보자. 그는 참으로 꼼꼼하고 치밀하게 돈을 모았다. 그리고 죽기 전해인 1925년에는 마침내 친일파 민영환에 이어 한국인 부자 2위에 오르고, 현금 보유액은 1위를 찍었다. 월급쟁이 관료가 ‘경성 제일가는 현금 부자’가 된 것이다. 현금을 사랑한 ‘백작’ 이완용의 현금 축적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이완용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자신이 며칠 전까지 재직하던 대한제국 관직에서 퇴직하고 일본을 위해 사흘 동안 합병 관련 잔업을 해주었다. 그리고나서 퇴직금 1,458원 33전을 깔끔하게 챙기고 합병 전후로 사흘 동안 잔무를 처리해준 수당 60원까지 챙겨갔다. 60원은 당시 군수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다. 또한 중추원(오늘날 국회에 해당) 고문으로 2년을 일하면서 연봉 1,600원을 받았고, 중추원 부의장으로 부역한 14년 동안 연봉 2,000원~3,500원을 받았다. 중추원 관직으로만 3만~5만여 원에 이르는 거액을 받은 것이다.

일제의 스파이가 된 외부대신, 신문사 논설위원 250명 분의 정보비를 받다

이완용의 초상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왜 그토록 친일의 한길로 달려갔는지를 알려주는 전형적인 예다. 그 밖에도 친일파들이 받아먹은 구체적인 액수를 알게 되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파의 재산』은 ‘비교체험 극과 극’처럼 당시의 물가와 평범한 백성들의 월급 액수 등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몇 가지 예를 보자.

- 친일로 번 돈을 도박으로 다 날리고 고위 관직에서도 잘리고 인생까지 말아먹은 ‘친일 백작’ 이지용은 1904년 외부대신 시절에 일제에 궁궐의 상황을 보고하는 스파이짓을 하고 활동비 1만 원을 받았다. 1905년에 「황성신문」 논설위원 월급이 30원에서 40원 정도였다. 40원으로 계산하면, 이지용이 ‘첩자짓’을 하고 받아먹은 1만 원은 논설위원 250명의 월급에 해당했다.

- 1934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 도쿄에서 한 달에 드는 생활비는 등록금을 제외하고 하숙비 · 점심값 · 책값 ·교통비 ·오락비 · 잡비 등을 합쳐서 대략 40엔이었다. 3.1운동이 한창이던 시대에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도쿄 등에서 사업을 하면 일제의 고급 밀정 노릇도 하던 박병일은 일제와 벌이던 사업에 개인 자금을 투입했다. 무려 2만 엔이었다. 박병일은 심지어 1930년대에 그 돈을 보상해달라며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벌였다. 유학생 생활비 40엔 vs 일제에게 투입한 개인 자금 2만 엔. 스케일이 거의 대륙급이다.

-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사망하자 도쿄로 건너가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친일파 민병석은 1933년에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가 되었다. 1927년에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은 50원 수준이었다. 민병석은 단순 계산하면 당시 초등 교사가 500년을 일해야만 벌 수 있는 돈을 깔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100년 전 이야기로 되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 근현대사를 뒤틀어버린 몇 명, 아니 몇 십 명의 사람들은 역사 앞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래서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인 ‘재산’에 주목한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둔다. “이 책이 굳이 ‘친일파의 재산’이라는 콘셉트를 앞세운 것은 친일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였음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친일파의 재산』은 100년 전 친일파들의 이야기다.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 30명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일제에 빌붙어 오욕의 삶을 살던 이들도, 빼앗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던 독립투사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와서 100년 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다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명언을 생각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우리 세대의 책무다. 『친일파의 재산』은 100년 전 친일파의 뒤틀린 초상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날카롭게 되묻는 역사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