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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살다 (2024) - 한국 근대의 인물과 사상

동방박사님 2024. 8. 13.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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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대를 살다”
사회학자 김경일 교수의
『한국 사회사』 가운데 첫 번째 ‘근대’ 편

근대성×식민성이란 불가분의 문제의식 속에
구한말·일제 강점기의 근대를 살아간
11인의 비범한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시간

식민 지배를 경험한 여러 나라들에서 근대성은 흔히 식민성을 동반했고, 양자의 병존·교차가 이뤄지는 가운데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알다시피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다. 또한 근대성이 서구의 식민주의 기획과 불가피하게 얽혀 있으며, 근대성의 발전에 식민성은 필수불가결했으므로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도 자리를 잡았다. 보편을 표방하는 서구의 근대성 기획 자체가 식민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근대성 서사는 애당초 식민주의를 내장한다는 의미다. 서구가 식민지와 무관한 듯 보이는 실체라기보다 양자가 한 몸으로 근대를 만들어갔다는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의 세계사를 상당 부분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이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붙어 있는 근대성과 식민성의 관점에서 근대화 시기 몇몇 근대인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본 결과다. 저자가 소환한 이들은 유길준, 윤치호, 안중근, 한상룡, 여운형, 안재홍, 김마리아, 박인덕, 허정숙, 나혜석, 미야케 시카노스케까지 모두 11인. 그리고 식민 지배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징후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체제 유지에 기여한, 일제 강점기 전향 제도와 식민 정책으로서 동화주의에 별도의 장이 할애되어 위 주인공들의 생애 무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진 근대의 삶을 살았던 이 주인공들은 근대성과 식민성의 좌표에서 과연 어떠한 궤적을 그려나갔을까. 저자는 근대성과 식민성이 뒤얽힌 시공에서 분투한 비범했던 인간들의 사상과 실천을 재평가하면서 오늘날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민중은 이야기한다: 20세기 한국 민중 서사』와 함께 『한국 사회사』 2부작을 구성하는, 성균관대학교 학술기획총서 ‘知의회랑’의 마흔세 번째 책이다.

목차

책머리에
일러두기

|제1장|

문명론과 인종주의: 아시아연대론
지리, 인종과 문명|유길준, 문명의 단계론|윤치호, 인종과 본질론|전체와 개체, 국가주의와 개인주의|두 개의 길

|제2장|

열린 민족주의와 동양평화론: 보편주의로의 지평
기억과 이해|안중근 민족주의의 성격과 의의|동아시아의 아시아주의|동양평화론|열린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를 향하여

|제3장|

한상룡을 말한다: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
친일파 문제의 현재성|출생과 성장|한성은행과 식민지 경제기구의 설립|예속 자본가로의 성장과 좌절|전시 체제 아래서|근대성과 식민성, 식민의 길

|제4장|

여운형의 사상 노선: 노동 인식과 마르크스주의
여운형의 이념과 사상|노동ㆍ노동자 인식|객관화된 대상으로서의 노동|주체와 능동으로서의 노동|마르크스주의의 수용과 영향|마르크스주의 비판과 적용|서구 이념과 한국의 현실, 여운형주의

|제5장|

좌절된 중용: 지식 생산에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과학과 지식에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학문의 토착화와 조선학의 대두|보편주의와 특수주의|시간과 공간|좌절된 중용

|제6장|

신여성의 미국 체험과 자아 정체성
신여성과 미국 유학|왜, 어떻게 가게 되었는가|무엇을 보았는가, 서양 문명에 대한 인식과 평가|무엇을 할 것인가, 교육 대 혁명|나는 누구인가, 조선인으로서의 나|나는 누구인가, 여성으로서의 나|같은 유학, 서로 다른 길

|제7장|

차이와 구별로서의 신여성
근대성과 신여성의 출현|1920년대 신여성의 주장과 이념|신여성 나혜석, 구별과 차이|신여성, 같음과 다름

|제8장|

지배와 연대 사이에서
잊힌 존재, 재조 일본인|재조 일본인의 규모와 내부 구성|1930년대 서울의 혁명 노동운동과 미야케 시카노스케|실천과 연대 이후|역사의 교훈과 남은 과제

|제9장|

사상 전향과 식민지 근대
식민자의 전향, 피식민자의 전향|전향과 일본 근대의 독특성|식민지 조선의 현실|민족 정체성과 동화 정책|동양과 서양, 아시아주의

|제10장|

식민주의와 동화주의: 복합과 균열
식민 지배와 동화주의|동화주의의 역사적 궤적|식민지의 비판과 저항|대립과 투쟁의 장으로서의 동화주의

주|참고문헌|각 장 출전|찾아보기
수록 도판 크레디트
총서 ‘知의회랑’을 기획하며
총서 ‘知의회랑’ 총목록

저자 소개 

저 : 김경일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덕성여대 교수, 미국의 뉴욕주립대 Binghamton와 프랑스의 파리 인간과학연구소Maison des Sciences de L'Homme에서 후기박사과정, 일본 동경대학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미국 버클리대학, 워싱턴대학 교류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사회사와 사회사상, 역사사회학, 동아시아론...

책 속으로

필자는 동양 평화에 대한 안중근의 방책을 적극 평가하는 일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는 해도, 마치 그것을 안중근의 고유한 제안으로 부각하려는 시도는 결국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칫 동양 평화에 관한 일련의 실천적 제안들을 안중근에게 독점 귀속시킴으로써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하려는 의도로 이끈다. 나아가 안중근의 민족주의에 대한 왜곡과 연동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에 폐쇄와 고립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신화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낳는다.
--- 「제2장 열린 민족주의와 동양평화론」 중에서

요컨대 여운형의 사상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같은 다양한 사조들의 요소와 이념의 편린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사상을 특정 이념이나 노선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무엇보다 민중이 있었다. 반복하지만 그의 민주주의에서 민주는 민중을 지향하고 민중으로 수렴되며, 그의 민족주의에서 민족은 생존권을 주장하는 민중이 배후에서 어른거린다는 점에서 결국 민중을 통해 민주와 민족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여운형 사상에서 민주, 민족, 민중은 동일한 것의 각기 다른 양상으로서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조선 해방의 첩경으로 제시한 여운형주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 「제4장 여운형의 사상 노선」 중에서

당시 안재홍은 드물게도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중 어느 한 극단으로의 편향이 지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양 극단의 종합과 조화를 모색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보편 역사 발전의 법칙을 그는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지니는 특유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민족주의 우파의 입장을 수용하지도 않았다. 세계 차원에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영향력 확장, 소비에트 체제의 공고화 그리고 특히 1930년대 이후 자국 전통을 보편화하기 위한 일본의 시도 등을 배경으로, 그는 민족의 특수성과 독자성에 대한 식민지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일본과 소연방 및 서구의 보편주의 공세 앞에서 식민지 약소민족이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제5장 좌절된 중용」 중에서

나혜석의 다양한 제안들은 근대의 외양을 띤 가부장제의 전통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상황에서 근대의 개척자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고, 사적 영역에서의 경험과 실천이라는 점에서 남성 주도의 근대 기획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으며, 거대 서사의 주요 주제인 민족중심주의와 제국 지배의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성이 지배해온 기존의 사회 질서를 침범했으므로 그녀의 제안과 주장에서 위기감을 느낀 기성 사회가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당연히 ‘순교’였다. 하지만 무릇 모든 순교가 그러하듯이 그녀의 비참하고 고독한 죽음은 세월이 지나 부활하고 영광을 되찾았다. 역사의 엄정함은 대안 근대성을 추구하기 위해 나혜석이 치러야 했던 가혹한 대가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제7장 차이와 구별로서의 신여성」 중에서

동화주의라는 거대 담론은 여러 지역과 민족 그리고 여러 사회집단과 계급 간의 이해와 관심사의 차이를 무시한 채 오직 일방적인 지배와 수탈을 위해 고안된 이론이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당연히 이에 대한 강력한 저항들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끊임없이 활기차게 추진되었던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이 있었고, 의회 개설 운동이 저항의 주류를 이뤘던 식민지 대만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근대 일본이 거의 일관된 대외 정책 아래 아시아 민족들의 자립 요구를 짓밟아왔지만, 일본 내에서도 식민 지배 자체를 비판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존재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이 비판의 흐름들을 각기 고립된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역사 경험의 공유 차원에서 이해하기 시작할 때, 동아시아 공동의 상호 교류와 연대에 대한 전망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제10장 식민주의와 동화주의」 중에서
 

출판사 리뷰

두 개화론자, 유길준과 윤치호

19세기 후반의 근대를 가장 먼저 살아간 유길준(兪吉濬, 1856~1914)과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문명개화를 추구하면서도 점진 개혁을 지향하는 온건한 근대화를 선호했다. 유길준은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발달한 자본주의를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체제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미국은 문명의 극치에 서 있는 부강과 풍요의 나라였다.

윤치호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을 최선이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같은 맥락에서 그는 근대성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물론 근대성에 대한 이해와 지향에서 양자 간 차이도 있었다. 유길준이 근대성을 서구에 바로 등치시키기보다 그 기저에 유교적 세계관을 깔고 있었던 반면, 윤치호는 당대 서구를 추상화하고 탈맥락화하여 근대성에 대한 자기 이해에 투사한 혐의가 있다. 또한 문명과 제도 도입을 통해 근대성을 전망한 유길준과 달리, 윤치호는 근대성의 담지자로서 민족과 인종에 주목했으며, 인종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구의 문명 단계를 절대화했다는 점에서 그 반영으로서 식민성을 설정할 수도 있겠지만, 유길준은 서구 제국의 식민성에 대해서는 짐짓 무심했다. 윤치호의 식민성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인종 차별과 도덕의 타락이라는 미국 문명에 대한 회의에서 그는 서구 문명이 표방한 ‘고귀한 이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추악한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표방과 실제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힘의 논리와 그것을 구현하는 행위자로서 민족과 인종을 통해 해소하려 했다. 그리하여 서구 문명의 근대성과 식민성을 넘어 아시아 차원의 문명 세계 건설을 전망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서구 패권주의와 인종주의를 넘어서지 않는, 서구가 표방한 보편 거울상에 비친 허상이었다.

안중근ㆍ한상룡ㆍ여운형의 근대 인식

안중근(安重根, 1879~1910)에게서는 유길준이나 윤치호에게 나타나는 근대성에 대한 열망을 찾아볼 수 없다. 현실 서구 문명을 직접 체험한 두 사람과 달리, 안중근에게 서구는 지식과 이론 영역에 속해 있었다. 즉, 그의 근대성은 일종의 배경으로서 당위와 주장 차원에서 기능했다. 관념으로서의 서구와 달리, 그는 윤치호와 비슷하게 동아시아라는 지역과 동일 인종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서 세계 건설을 전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윤치호나 대부분의 아시아주의자처럼 인종주의나 닫힌 민족주의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다. 인종을 초월한 민중에 대한 헌신, 보편의 세계주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는 식민성에 대한 도전의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바침으로써 세계 차원은 아니더라도 동아시아 단위에서 서구의 근대성이 내포했던 식민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근대를 꿈꿨다.

주권은 상실되고 근대화가 식민지화에서 시작되어버린 현실 속 자본가이자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 1880~?)에게 근대성은 일본이 받아들였던 서구 문명을 준거로 한다는 점에서 이중의 굴절을 겪었다. 그의 근대성 인식에는 서구 문명의 영향과 일본식 정조의 편린이 병존한다. 그는 스스로 근대성을 향유, 소비, 대상화하기보다는 그 실행자이자 구현자로 자임하는 생애를 구가했다. 물론 일본식 근대를 모델로 식민지 통치 기구의 경제와 실업 부문에서 식민지 근대를 추구하면서 한때 좌절과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겐 식민성 탈피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기보다 애당초 시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근대성에 부합하는 식민성을 철저히 구현하며 그는 안중근이 꿈꾼 세계의 대척점에서 예속과 굴종의 삶을 살았다. 자민족과 국가를 소거하고 일본식 근대로의 철저한 귀일을 선택한 그는 근대성과 식민성의 본질과 그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희귀한 사례를 역사에 남겼다.

한상룡의 근대에 일본식 서구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면,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중국을 준거 삼은 근대성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한상룡이나 안중근 등 윗세대와 달리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 등장했던 마르크스주의 진보 이념과 조우했다. 그의 근대 개념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동학사상 그리고 전통 유교와 농촌의 정조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 성격을 띠었다. 안중근과 비슷하게 그는 민족과 계급을 매개로 설정된 동양 평화의 개념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근대성을 꿈꿨다. 그러나 민족을 명시화해서 구현한 안중근과 달리, 그는 민족에 정박하면서도 궁극에는 계급을 지향함으로써 식민성에 도전하고 그를 돌파하려 했다. 그 결과가 비록 개인의 절멸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해도, 그는 식민성의 유혹을 경계하고 보편의 시각에서 계급과 민중을 조망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근대성 영역을 제시했다.

좌절된 중용, 안재홍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근대 개념은 복합적 성격을 지닌 보편주의와 이에 대응하는 특수주의에 대한 성찰을 포괄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이 주도해 국제화ㆍ세계화 추세로 진행되었던 단일화의 양식과 마르크스주의 발전 단계의 임박한 이행이라는 근대성이 표방한 보편주의 너머를 조망하면서, 그는 식민지 현실의 문화적 중층성을 통해 보편의 근대성과 특수한 지역/민족 간의 상호 결합을 모색했다. 보편의 근대성을 자동적ㆍ필연적으로 인식하는 만큼, 그는 지역과 민족의 특수성을 보편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탐구하고 노력했다.

그에게 근대성은 극복이나 도전 대상이라기보다 경쟁을 통해 따라잡아 궁극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이는 비록 방도와 수단 차원에서는 다르다 해도 근대성 자체를 열렬히 추구했던 민족 부르주아지 특정 분파와의 차별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근대성에 내포된 계급 지배와 억압의 실상을 직시하면서 반제와 진보를 옹호했기에, 그는 안중근과 여운형처럼 식민성에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처럼 근대성 자체를 넘어서는 전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서구식 근대는 요원했고, 일본의 근대는 경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근대에는 거부감을 지닌 그가 보편주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고 민족과 전통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편과 특수의 종합을 시도한 그의 비극이었다.

세 신여성, 김마리아ㆍ박인덕ㆍ허정숙

일본의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김마리아(金마리아, 1892~1944)의 근대는 토착의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미국과 기독교가 주요한 준거로 작용했다. 근대성의 주요 준거가 미국이라는 점에서는 박인덕과 비슷하지만, 그녀에게 미국은 이중의 의미였다. 즉, 그녀에게 미국의 근대는 한편으로는 동경과 경의로써 적응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불평등과 (인종) 차별로 갈등과 고통을 초래한 실체였다. 불안과 소외가 작동하는 이 근대의 시공간 안에서 그녀는 기독교라는 신에 대한 믿음과 가족과 민족에 대한 헌신에 정박하고자 했다. 민족을 향한 대의는 근대성 안에 식민성 자체가 들어설 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온전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혜석처럼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근대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길로 이끌리지는 않았다.

유럽과 러시아 경험이 있긴 했지만, 박인덕(朴仁德, 1897~1980)에게도 근대성은 김마리아처럼 영어와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으로 표상되었다. 미국 문명에 찬사를 보내긴 했으되 본원적 호감은 없는 김마리아나 그에 비판적 태도를 분명히 한 허정숙과 달리, 박인덕은 동경과 경이 그리고 찬사로써 미국의 근대를 이상화했다. 타자(미국)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는 자신(조선)에 대한 또 다른 부정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전자의 근대성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지향했던 근대성마저 관념화하고 식민화해버리고 말았다. 직접 봉건 가부장제와 결혼제도의 모순을 고통스럽게 체험함으로써 김마리아보다 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문제에 앞장섰지만, 제한되고 유보된 그녀의 젠더 인식은 근대성에 대한 도전이나 균열이 아니라 보완과 강화의 차원이었다.

일정 부분 긍정적 평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허정숙(許貞淑, 1908~1991)은 미국 문명을 물질과 금전 추구로 요약하고 비판했다. 미국과 일본, 중국의 근대를 두루 경험한 그녀는 미국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근대성을 금전만능, 퇴폐, 타락의 현실로 인식했다. 마르크스주의라는 대안 근대성의 가르침에 따라, 그녀는 합리화 기제와 자기 방어론을 갖춘 미국의 근대에 도전하고 나아가 그를 극복하는 길은 사회운동과 계급투쟁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박인덕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판과 통찰로써 미국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이해했음에도, 그녀의 인식 가운데서 여성성이나 여성주의를 통해 근대성에 도전하는, 나혜석과 같은 방식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리고 나혜석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근대의 표상을 선취하고 전유하여 근대 역사에서 신여성의 이름을 남긴 운동과 사상의 조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유학과 여행을 통해 이 시기 그 어떤 여성들보다 더 많이 일본, 유럽, 미국 등지의 근대 문명을 체험했으며, 여성성, 친밀성, 여성해방 등의 주제로 표상되는 근대와 근대성의 영역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성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했다.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사랑의 방식과 결혼제도, 모성애 신화 등에 도전해 이를 해체하면서 성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고, 성과 사랑에 대한 본원의 이해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성과 성 해방을 지향하는 실천의 삶을 살았다.

다양한 여성성의 차원에 대한 인정, 독신 생활과 남자 공창, 여성 주도의 대안 결혼, 이성간 우정과 시험 결혼, 원초의 대안 가족에 대한 모색도 근대 비판의 새로운 목록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녀의 이러한 제안과 시도는 사회의식과 정치 성향에서의 식민성을 초월할 정도로 강렬하고 담대했다. 하지만 남성 근대주의자들의 근대 기획에 대한 도전이었던 그녀의 대안 근대성 추구는 그녀에게 끝내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재조 일본인, 미야케 시카노스케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서 식민 통치 집단에 위치하면서도 식민 지배의 기획을 부정하고 식민지 피억압 민족과 연대를 추구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다. 인도주의 관점에서 동정과 연민의 발로였건 이념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연대감의 표출이었건 간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가 뚜렷한 식민지 사회에서 그는 지배 영역에 속하면서도 스스로 피지배 진영의 편에 서고자 했다.

그는 대만과 일본에서 배웠고 조선에서 가르쳤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근대성을 경험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준거한 근대성을 추구했으며 지배 기획에 균열을 야기하고 저항하면서 피지배 진영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향했다. 이를 통해 근대성에 내포된 식민성을 극복하는 차원으로 다가갔지만,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는 사상 전향과 함께 그의 시도는 끝내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