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2.독립운동기억

안중근의사 순국

동방박사님 2016. 5. 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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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의거계획

1909년 10월 이토오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약침략 정책을 협상 하기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중근은 이를 나라와 겨례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유덕순, 우동하 등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10월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신중하게 의거계획을 세웠다.

거사에 만전을 세우기 위해 채가구역은 우덕순과 조도순이 하얼빈역은 안중근이 맡아 의거하기로 하였다

23일밤, 안중근은 의거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의거가를 짓고 이에 화답하였다.

24일에는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여 25일 채가구역에서 의거를 맡은 우덕순과 조도순이 남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역사를 뒤흔든 여섯발을 총성

단지동맹이후 블라디보스토와 엔치아를 오가며 몰두하던 안중근은 그해10월 중순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

으로부터 조선침략의 원횽 이토오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토가 제발로 만주에 오다니! 이것은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  라고 여긴 안중근의사는 10월21일 의병동지 우덕순과함께 하얼빈을 떠난다.그곳에서 조도선 동지를 영입한 안중근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우덕순과 조도순을 채가구역에 대기토록 하고 자신은 홀로 하얼빈역에 와서  거사를 준비한다.

마침내 1909년 10월26일 오전9시경 이토가 탄 열차가 플랫홈에 멈추고 마중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지 20여분 후 이토와 수행원이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기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위장대를 사열하고  출영객들로 부터 인사를 받던 순간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가슴과 흉복부에 3발을 맞은 이토가 무어라 몇마디 중얼거리며 쓰러지자 안의사는  혹시 다른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행 중 일본인으로 보이는 3명에게 다시 3발을 쏘았다. 이토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비서모리, 만주철도이사 이사다나카가가 차례로쓰러졌다. 이때가 오전 9시30분 저격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처 넘어졌던 안의사는 곧징디시 일어나 "코레아우라" (대한민국만세) 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안중근의 총탄을 받은 이토는 수행의사 고야마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곧 절명한다.


이토의 죽음은 온 세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일본에서는 주요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하여 청청 병력과 같은 그의 죽음을 전했고 , 국내에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은 환호와 찬사를 보냈다.중국은 흡사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국냉의 일부 친일파들은 통감부를 방문하여 조문하고 사죄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

안의사는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하얼빈연 헌병분파소로 끌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고 당일로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된다. 거사가 이루어진 곳은 러시아 관할 구역 이었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외  조선인에 대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뤼순옥중에서의 투쟁

안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 지하실에서 7박8일 동안 심문을 받은후 11월3일 별도로 잡혀온 우덕순, 조도순, 유동하 등 동지들과 함께 뤼순 형무소로 이송 되었다. 뤼순으로 온 뒤 안의사는 미조부치 검찰관으로 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는다. 이토를 살해한 이유를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안중근은


첫째 .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 . 한국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넷째. 무고한 한구인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 정권르 강제로 빼앗은 죄요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린.천택을 빼앗은 죄요

일곱째 . 제일은행 권 지페를 강제로 사용케한 죄요

여덟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죄요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버린 죄요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죄요

열세째. 현재 한국과 일본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 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네째.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요

열다섯째. 일본의 태황제를 죽인 죄 이다


라고 15개 항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심문하던 검찰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안의사에 대한 심문은 처음에는 비교적 온순한 분위기에서 이루어 졌던 것 같다. 안의사 자신도 자서전에서

"검찰관은 항시 나를 심문한 후 담배를 권하며 공정한 토론을 했고, 전옥 구리하라와 그밖의 일본 관리들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어 고마웠다. 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심문이 거듭될수록 검찰관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변해가자 안의사는 "일본이 비록 100만의 군사를 가졌고, 도 천만문의 대포를 가졌다 한들 이 안응칠의 

목숨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무었이 더 있을 것인가?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것은 당연한 이치, 한번 죽으면 그만인 목숨인데 이미 죽기를 각오한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 고 의연하게 검찰관을 꾸짖기도 하였다.

하얼빈 의거의 이유

나의(의거)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 이토히로부미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다.

  

소식을 듣고 고국에 달려온 정근과, 공근 두 동생이 한국인 변호사를 불러올 일을 논의하자 "한 번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나다. 변호사보다 내게 성사를 배풀어줄 신부님이 더 간절하다.고 말하며 초연의 모습을 보였다. 1910년 2월7일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4명의 피고는 뤼순 관동도독부 법정에서 모두 다섯 차례의 공판을 받는다. 외국인과 많은신문기자등 300여명의 방청객이  빼곡히 들어찬 마지막 공판에서 안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것은 한국 독립전쟁ㅇ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고 의거의 성격을 당당히 밝힌다.  


















순국, 영웅의 최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형이 선고 되었다. 일젱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국제법을 무시한 부당한 재판의 결과 였다. "사형" 이라는 선고를 받자, 안의사는 " 일본에서 사형이상의 형벌은 없느냐  

?" 고 미소를 지었다 한다. 안의사는  상고를 할 수 있었음에도 공소권을 포기한다. 안중근의사는 의병장 다운 기품을 잃지않고 공소권을 포기 하는데는 아머니의 성원이 있었다. 면회를 가는 두 동생 편에"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라는 말을 전함으로써 모친보다 먼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의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사형이 확정된 이후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  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은 많은 붓글씨를 써서 주변에 나누어 주었다. 공소를 포기하면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시간을 주겠다던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3월26일 사형이 집행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유고로 남게 된다. 3월10일 조국에서 온 빌렘 신부로 부터 고해성서와 영성체 종부성사를 함으로서 종교인 으로써의 의식을 마친 안의사는 형 집행 하루 전인 3월25일 마지막으로 두 동생을 면회 하였다.

안의사는 모친, 처, 빌렘신부 등에게 보내는 여섯 통의 유서를 전달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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