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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 7 : 제2의 혁명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동방박사님 2022. 2. 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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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로 개헌을 촉발한 ‘제2의 혁명’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적용해서 민주적 선거로 뽑은 입법의회는 1791년 10월 1일부터 법을 만들면서 국내외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종교인들은 헌법에서 공무원의 지위를 얻었으며, 헌법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지만 거부하거나 철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주의자들은 단원제 국회를 영국식 양원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종교인과 귀족주의자들은 나라 안팎에서 헌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내전을 부추기는 동시에 외국으로 망명한 왕족들과 내통하고 외국 군주들의 지원을 얻어 대외전쟁까지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고전하면서 국내의 불만세력이 국회와 왕을 더욱 압박했다. 결국 왕과 그 지지자들의 비협조적인 처신에 불만을 품은 상퀼로트 계층이 1792년 8월 10일에 왕의 폐위를 부르짖으면서 봉기했다. 왕은 가족과 함께 튈르리 궁에서 나와 입법의회로 피신했다. 입법의회는 상황을 보면서 개각을 단행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제2의 혁명’이 일어났다.

문화혁명을 이룰 여건과 가능성은 이미 나타났다. 우리는 1792년에 프랑스에서 ‘제2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냉전체제의 사고방식에 젖은 사람들이 남북분단을 고착화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틈만 나면 국민을 억압하고 정권을 잡아 연장할 궁리만 하기 때문이다. 국군과 정보기관들을 이용해 민간인과 정치인들의 약점을 캐고, 여론을 조작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국민의 세금을 정권안보와 사리사욕을 위해 마구 남용한 사례가 지난 1년 동안 하나둘씩 드러났다. (……) 신상필벌의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촛불혁명’을 ‘문화혁명’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목차

시작하면서

제1부 입법의회
1. 입법의회 개원과 초기 활동
2. 망명자들에 관한 법
3. 비선서 사제들
4. 국가 안전과 방어를 위한 대책
의용국방군 / 국립헌병대
5. 바이이와 라파예트의 사임과 선거
6. 1791년 말의 정세
7. 전쟁에 대한 토론

제2부 전쟁과 ‘제2의 혁명’
1. 민중협회들의 활동
2. 여성도 창을 들게 하라
3. 루이종이냐, 기요틴이냐?
4. 새로운 내각
5. 평화냐, 전쟁이냐?
6. 샤토비외 병사들을 위한 잔치
7. 선전포고
8. 튈르리 궁 침입
9. “조국이 위험하다”
라파예트의 파리 출현 / 조국이 위험하다 1 / 라무레트의 포옹 / 페티옹의 직무정지 /
조국이 위험하다 2 / 페티옹의 복권 / 제3회 전국연맹제
10. ‘제2의 혁명’
포병들의 잔치 / 전방 소식 / 파리 시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다 /
루이 16세를 폐위하라 / 샹젤리제 사건 / 브룬스비크 공의 선언 /
라파예트 혐의 없음 / ‘제2의 혁명’

연표
 

저자 소개

저 : 주명철
 
한국전쟁기라는 엄혹한 시절에 태어나 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역사공부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보고자 무모하게 프랑스로 떠나 파리 1대학에서 알베르 소불 교수에게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그분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니엘 로슈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불 교수에게 프랑스 혁명사를 배우지 못한 것은 큰 한이겠으나, 로슈 교수에게 앙시앵레짐의 사회와 문화를 배운 것이 오히려 ...
 

책 속으로

그[라파예트]는 파리 시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조국의 병사로 만들더니 곧바로 전제정의 앞잡이로 둔갑시켰다. 게다가 미라보와 공모해서 왕에게 봉사했다. 낭시의 현실을 호소하려고 파리에 온 군인들을 옥에 가두었으며, 낭시 군사반란을 진압하는 데 일조했다. 뱅센을 제2의 바스티유로 만들지 못하게 노력한 시민들을 붙잡아 가두었다. 루이 16세가 바렌에서 잡혀온 뒤 튈르리 궁을 감시해야 한다는 핑계로 대중을 튈르리 궁은 물론 국회의사당에도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바르나브, 당드레, 르샤플리에 같은 의원들이 헌법을 마음대로 주물러 왕을 복권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p.66

레옹Leon이라는 아가씨가 대표로 서명하고 아낙네 300여 명의 서명부를 첨부한 이 청원은 여성이 공식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한다. 여성은 남성만이 헌법을 지키는 막중한 과업을 수행하기 벅찰 테니 자신들도 무기를 들고 적들과 싸우겠다고 주장한다. (중략)
그들의 청원을 들으면서 의원들은 박수를 쳐서 그들의 애국심을 칭찬했지만, 그들이 연병장에서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하겠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웃기도 한다. 물론 여성의 애국심을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에게도 무기를 허용한다면 질서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걱정할 남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었는지, 청원서에서는 치안규칙을 잘 따르고, 남성의 지휘를 받을 것이며, 파리 시장이 부과하는 규칙도 충실히 따르겠다고 약속한다. 1789년 가을비를 맞으면서 대포를 끌고 베르사유 궁을 향해 가던 파리의 아낙네들은 특별히 허락을 받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뒤, 그들은 창, 권총이나 소총, 칼을 허용하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한다. 그들은 정치무대에서 더욱 큰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p.130~131

기요틴은 혁명이 급진화하면서 더욱 많이 쓰였다. 앞으로 보겠지만, 8월 10일의 ‘제2의 혁명’이 일어난 뒤 21일부터 카루젤 광장에서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데 쓰였다. 1793년 1월 21일에는 혁명광장(처음에는 루이 15세 광장, 오늘날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카페를 처형하는 데 쓰였다. 형 집행자는 늘 상송 부자였다. 공포정 시기에 특히 활용도가 높았으며, 1982년 미테랑 대통령이 사형제를 폐지하기 전까지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데 쓰였다. 프랑스의 마지막 형 집행관은 마르셀 슈발리에Marcel Chevalier(1921~2008)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즈음해 잡지에 실린 대담에서 “목이 잘린 사람이 되살아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요틴’은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기계였다. 오늘날까지도 손재주habilete는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낳지만, 산업화 이후의 과학기술technologie은 규격화한 결과를 낳는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조작하는 방법만 제대로 따르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요틴’은 사형의 대량화요, 기계화다. ---p.136~137

4월 9일 월요일에 샤토비외 병사 40명은 베르사유를 거쳐 파리에 들어가면서 국회에 들러 인사를 하겠다고 전했다. 의원들 가운데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부류도 있었다. 특히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라파예트의 부관 노릇을 하다가 입법의원이 된 구비옹은 자기 피붙이가 애국자로서 명령을 수행하다가 낭시의 반도들에게 총격을 받고 죽었다고 강조했다. 결국 호명투표를 실시했다. 참가자 546명 가운데 281명이 찬성해서 반대자 265명을 겨우 누르고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찬성자와 반대자의 수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다수결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주도권이 입법의회에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과반수가 이기는 원칙 뒤에는 그에 조금 못 미치기 때문에 승복해야 하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에는 찬성자가 이겼지만, 앞으로 혁명을 이끄는 세력이 변화를 싫어하는 세력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볼 것이다. 그래서 입법의회를 다그쳐 혁명을 급진화할 수 있는 원동력은 국회의 바깥에 있었다. 대의민주주의만으로 혁명이 추진력을 얻기는 어려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p.183~184

파리 도는 전날 밤에 명령한 대로 질서유지를 위해 지난해에 발동했던 것처럼 계엄령까지 고려했다. 궁 앞으로 진입하는 문 뒤에는 헌병 200명과 스위스 수비대 100여 명이 파리 도의 정규군 사령관의 명령을 받으면서 대기했다.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총기에 장전하라고 명령하고, 스위스 병사들에게도 임무를 다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스위스 병사들은 대부분 뇌관을 던졌고, 사령관은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대치상태가 깨지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진압군 병사들에게 청원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대기하게 하는 한, 주도권은 청원자들에게 있었다. 상테르와 르장드르는 대포 2문을 입구에 놓고 위협했다. 수비대가 문을 열고 물러났다. 8,000명이 큰 파도처럼 궁을 향해 밀려갔다. 물론 그들이 모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수비병력은 두려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궁 앞마당으로 옷차림과 무기가 각양각색인 민중이 궁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현관의 철책 앞까지 대포도 끌어다놓았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들을 지키는 병사들이 버텼지만, 상퀼로트들이 어깨에 대포를 얹고 문을 향해 나아가니 더는 버티지 못했다. 시위대는 왕의 처소 문을 도끼로 내리쳤다. ---p.257~258

제헌의원들이 힘들게 만들어낸 헌법을 지키는 것이 모든 의원의 바람인지 당장 확인하자는 라무레트의 제안대로 의장이 말하자마자,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청석에서 일제히 환호와 박수가 터지고, 의원들이 서로 격려하며 공중에 모자를 흔들면서 라무레트의 연설에 열광적으로 공감했다. “네, 우리는 그렇게 맹세합니다!”라는 함성이 지붕을 들썩이게 했다. 곧 우파와 좌파가 서로 뒤엉켜 얼싸안았다. 공공의 행복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진정한 뜻의 통일을 이루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방금 전까지 철천지원수처럼 굴던 의원들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중략) 방청객들도 의원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이 맹세하고 서로 얼싸안았다. 한순간일지언정 진정한 화합과 평화의 순간, 사람들은 이 순간을 ‘라무레트의 포옹baiser d'amourette’이라 부른다.
---p.276
 

출판사 리뷰

◆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한 혁명

2015년 12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 2권 출간을 시작으로 매해 두 권씩 시리즈를 이어온 주명철 교수의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제7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침 30년 만에 맞이한 개헌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채 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둔 우리의 사회 상황과 절묘하게 겹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전 세계 혁명의 맏형 격이자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헌법을 기초로 정치체제, 사회구조, 문화의 근간을 뿌리부터 바꾼 데 있다. 오랜 세월 절대왕정을 이어온 프랑스가 제헌의회와 입법의회를 거치며 끊임없는 논란과 갈등 속에서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의 정신을 바탕으로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이에 따라 정치사회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가 빚어진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갈등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고, 민중의 삶이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 대외전쟁에까지 휩쓸리게 되자 국회 안에서는 날마다 전쟁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한편 사회적으로도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자유를 맛보며 점차 정치의식이 깨이기 시작한 여성들이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 절실한 요구는 남성 의원들의 야유 속에 묻혀버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시민의 아내나 딸’로만 살아갈 것을 강요받게 된다. 또한 죄인의 사형마저 신분에 따라 차등하는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처단기계 ‘루이종Louison’(의사 루이의 이름을 딴 것)이 인도주의를 강조한 의사 기요탱의 이름에서 비롯된 ‘기요틴’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고 혁명이 급진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자주 쓰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혁명의 확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입소문과 함께 인쇄물을 꼽을 수 있는데, 당시에도 ‘가짜뉴스’가 어마어마하게 판을 쳤으며 이를 규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 붉은색 프리기아 모자가 혁명의 상징으로 굳어지고, 급기야 1972년 6월 20일에 상퀼로트 계층(민중)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튈르리 궁으로 몰려가 왕의 처소 문을 도끼로 내리친 뒤 왕에게 그 모자를 씌우고 함께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형제애를 확인했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해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 8월 10일에 왕정을 폐지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는 한 달 뒤에 있을 ‘공화국 선포’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자 앞으로 벌어질 더 큰 학살의 예고편이었다. 그날 상퀼로트 계급이 폭력을 휘둘러 혁명의 적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고, 이로써 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했다.

◆ 밀실에서 광장으로

광장은 본디 실내에서 탄생했다. 서구 계몽주의 시대에 실내에서 신분을 뛰어넘은 인간관계가 ‘대화의 광장’을 만들었고, 그 광장을 외부로 끌고 나왔다. 엄혹한 독재권력 시절,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묵직한 화두가 생생히 되살아난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의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광장이 차벽으로 막힌 ‘밀실’이던 때가 엊그제였지만 2016년 가을부터 촛불의 물결이 넘실대는 진정한 광장이 되었음을 보면서, 1792년 프랑스 샹드마르스 광장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789년 7월 14일 샹드마르스 광장에는 왕이 소집한 군대가 주둔했다. 1년 뒤에는 거기서 국민화합의 대잔치인 전국연맹제를 열었다(제3권 참조). 다시 1년 뒤에는 학살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제6권 참조), 1792년 봄에는 민중의 힘으로 화합의 잔치를 열게 되었다. 광장의 진화가 곧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함을 잘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광장은 권력자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백성에게 주는 공간이었다. 왕은 광장을 조성하고 한가운데 자기의 기마상을 세웠다. 자기가 직접 나가지 않아도 기마상이 대신 백성을 굽어 살피고 왕국의 질서를 유지했다. 교회나 시청 앞에도 광장이 있었지만 오롯이 권력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찾은 시민들이 광장을 만들었다. 바스티유 요새를 정복하고 허문 뒤에 생긴 광장은 자유시민들이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쓰던 샹드마르스 광장도 새 세상을 만든 시민들이 중요한 잔치를 벌이는 곳으로 바뀌었다. (중략)
이러한 광장을 하버마스J. Habermas는 “부르주아적 공론영역”이라 규정했다. (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