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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는 저명한 봉쇄 수도원인 카르투시오회의 침묵과 고독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90개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글들은 영적인 삶의 정점에 도달하여 끊임없이 거기에 머문 한 수도승의 단상을 편지 형식으로 담고 있다. 이 글들은 저자의 사후에 발견되어 순차적으로 출간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영적 보화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카르투시오회 수도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삶의 목표로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단상들은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은 카르투시오회 수도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삶의 목표로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단상들은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목차
추천사 · 4
추천사 · 6
머리말 · 8
1. 카르투시안의 침묵
카르투시안의 침묵 · 20
우리는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 22
침묵은 망각이 아닙니다 · 25
우리의 성소 전체가 그곳에 · 27
멀리 보는 안목 · 29
카르투시안의 기쁨 · 31
기뻐할 수 있는 능력 · 33
겸손 · 35
천상의 꽃 · 37
기도의 안식처 · 38
‘늘 오래되고 늘 새로운’ 영원 · 39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방식 · 41
나는 생명입니다 · 43
어둠이, 빛이 됩니다 · 45
높은 곳에서 오는 빛 · 49
믿음의 빛 · 52
공간 · 54
선택의 자유 · 56
신비 · 59
그리스도인의 무심함 · 60
육체적인 금욕 · 63
하느님의 시간 · 65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 · 68
영혼의 생명 · 70
그 어떤 것도 희생만큼 · 71
민감한 감성 · 73
매일의 십자가 · 79
고통 · 81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십시오 · 84
자기 봉헌 · 86
대조의 법칙 · 88
인간의 전 존재가 의지에 달려 있어 · 90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는 영혼 · 92
내적인 삶 · 94
만족해야 합니다 · 97
참된 은총 · 99
두려움(1) · 101
평화 · 103
완전한 사랑 · 105
활동과 동요 · 106
두려움(2) · 108
내적 평화의 비결 · 109
‘잠들다’와 ‘쉬다’ · 110
평화로운 안식 · 11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 · 115
지식과 사랑 · 116
천재성과 거룩함 · 119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망 · 122
삶은 조화입니다 · 125
영적인 시간 · 128
“우슬초로 저를 씻어 주소서.” · 130
2. 카르투시안의 음성
주님의 계획 · 136
이 거룩한 계획을 받아들여야 · 139
왜 고통을 겪어야 할까요? · 142
섭리의 쓴맛 · 144
우리의 슬픔 · 145
모든 것의 근저에 계신 하느님 · 14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2) · 152
믿음과 의지 · 155
하느님의 능력은 그분의 사랑 · 157
숭고한 진실 · 161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 163
영혼의 힘 · 164
믿음의 삶 · 166
단순한 삶 · 169
믿는다는 것 · 171
기쁨의 자녀 · 174
정당한 애정 · 177
자연적인 애정 · 179
영혼의 피난처 · 181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위대한 비밀 · 185
하느님의 자녀들이 지니는 자유 · 189
믿음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 193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 · 197
우리의 능력 · 201
우리의 불행에 대한 치료법 · 205
무한에 대한 우리의 소망 · 206
참된 지혜 · 208
어려움 · 209
어려움은 왜 필요할까요? · 212
기쁨과 슬픔 · 21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216
‘피앗’ · 218
잘못을 범한 후의 염려 · 219
괴로움 · 221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 · 225
우리의 피난처 · 230
거룩한 피난처 · 233
침묵 · 235
카르투시오 수도원 · 237
부록
카르투시오 수도회 · 240
옮긴이의 말 · 245
추천사 · 6
머리말 · 8
1. 카르투시안의 침묵
카르투시안의 침묵 · 20
우리는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 22
침묵은 망각이 아닙니다 · 25
우리의 성소 전체가 그곳에 · 27
멀리 보는 안목 · 29
카르투시안의 기쁨 · 31
기뻐할 수 있는 능력 · 33
겸손 · 35
천상의 꽃 · 37
기도의 안식처 · 38
‘늘 오래되고 늘 새로운’ 영원 · 39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방식 · 41
나는 생명입니다 · 43
어둠이, 빛이 됩니다 · 45
높은 곳에서 오는 빛 · 49
믿음의 빛 · 52
공간 · 54
선택의 자유 · 56
신비 · 59
그리스도인의 무심함 · 60
육체적인 금욕 · 63
하느님의 시간 · 65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 · 68
영혼의 생명 · 70
그 어떤 것도 희생만큼 · 71
민감한 감성 · 73
매일의 십자가 · 79
고통 · 81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십시오 · 84
자기 봉헌 · 86
대조의 법칙 · 88
인간의 전 존재가 의지에 달려 있어 · 90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는 영혼 · 92
내적인 삶 · 94
만족해야 합니다 · 97
참된 은총 · 99
두려움(1) · 101
평화 · 103
완전한 사랑 · 105
활동과 동요 · 106
두려움(2) · 108
내적 평화의 비결 · 109
‘잠들다’와 ‘쉬다’ · 110
평화로운 안식 · 11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 · 115
지식과 사랑 · 116
천재성과 거룩함 · 119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망 · 122
삶은 조화입니다 · 125
영적인 시간 · 128
“우슬초로 저를 씻어 주소서.” · 130
2. 카르투시안의 음성
주님의 계획 · 136
이 거룩한 계획을 받아들여야 · 139
왜 고통을 겪어야 할까요? · 142
섭리의 쓴맛 · 144
우리의 슬픔 · 145
모든 것의 근저에 계신 하느님 · 14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2) · 152
믿음과 의지 · 155
하느님의 능력은 그분의 사랑 · 157
숭고한 진실 · 161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 163
영혼의 힘 · 164
믿음의 삶 · 166
단순한 삶 · 169
믿는다는 것 · 171
기쁨의 자녀 · 174
정당한 애정 · 177
자연적인 애정 · 179
영혼의 피난처 · 181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위대한 비밀 · 185
하느님의 자녀들이 지니는 자유 · 189
믿음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 193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 · 197
우리의 능력 · 201
우리의 불행에 대한 치료법 · 205
무한에 대한 우리의 소망 · 206
참된 지혜 · 208
어려움 · 209
어려움은 왜 필요할까요? · 212
기쁨과 슬픔 · 21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216
‘피앗’ · 218
잘못을 범한 후의 염려 · 219
괴로움 · 221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 · 225
우리의 피난처 · 230
거룩한 피난처 · 233
침묵 · 235
카르투시오 수도원 · 237
부록
카르투시오 수도회 · 240
옮긴이의 말 · 245
책 속으로
우리의 침묵은 그저 공허와 죽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침묵은 우리를 충만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이끌고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우리는 침묵합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 내고자 하는 말씀이,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르투시안의 침묵」중에서
우리 카르투시안이 입술로 말하지 않고 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 대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선하신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침묵은 죽음의 침묵이 아닙니다. 우리의 침묵은 성소의 거룩한 평화이고, 우리의 작은 수가는 우리 영혼처럼 어떤 분이 차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고 있는 것보다, 그리고 우리가 되돌려 갚아 드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약함은 사랑에 있어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 안에서는, 약함이 무한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함 안에서, 기도 안에서,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고자 하는 소망 안에서, 일치된 상태로 머물도록 합시다.
---「'늘 오래되고 늘 새로운’ 영원」중에서
우리가 거룩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 특히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마치 눈이 색채와 형태를 인식하듯이, 그리고 정신이 우리가 관념이라고 부르는 어떤 대상의 인식 가능한 측면을 인식하듯이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더 높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 하느님의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믿음은 그곳을 알아보게 해 주는 빛입니다.
---「믿음의 빛」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무심함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 사랑,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소통하는 사랑이며,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무심함입니다. 따라서, 무심함은 사랑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무심함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이치이며, 내 안의 사랑에 질서를 부여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무심함」중에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사람과 사물을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섭리 안에서, 위대한 것들이 작은 것들과 대조를 이루며 돋보이게 만드십니다. 넓은 시야 안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런 시각은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참된 자리를 찾아 줍니다. 우리는 거대한 합창단에서 하나의 파트를 맡고 있으며, 그것이 아름답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중에서
일상에서 오는 사소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너무 산란해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 영혼은 그 모든 것보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더 위대합니다. 영혼이 지니고 있는 이 위대함에는 덧없는 모든 산란함을 넘어서게 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저 지나가는 무상한 것을 통해서도 영원한 것에 손을 뻗어 닿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나 상황은 단지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것을 해결하시는 분, ‘사랑의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통은 고요하게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보다 더 큰 기쁨 안에 잠겨야 합니다. 고통은 우리의 비참에서 오고, 기쁨은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악한 것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선하십니다. 기쁨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배경이고 최종 목표이지만, 고통은 단지 그 길이 갖고 있는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십시오」중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깊이 새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진정한 형태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느님, 저는 저의 약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제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제게 더 많이 베푸실 때, 저도 당신께 더 많이 드릴 것입니다.”
---「내적인 삶」중에서
우리가 대체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지니지 못한 것’과, ‘평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감성이 폭풍처럼 크게 요동칠 때, 우리는 폭풍 외의 다른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합니다. 폭풍이 우리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평화」중에서
나는 ‘잠들다’와 ‘쉬다’, 이 두 단어에 대해 묵상하기를 그대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함께 연결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아시다시피, 쉼이 되지 않는 잠이 있는 반면에, 존재에 쉼이 되어 주는 잠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잠은 모든 근심과 염려를 온전히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리는 영혼의 잠이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쉼이 되는 잠입니다.
---「‘잠들다’와 ‘쉬다’」중에서
늘 사랑 때문인 오직 그분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평화를 맛보지 않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평화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과 실제로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들은 그분에게서 오는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의지」중에서
하느님은 성인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생명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분주한 순간에도 말입니다. 교회나 그 외의 기도 장소에서 고요하게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때때로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움직임, 삶은 그런 것입니다.
---「단순한 삶」중에서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 이 두 삶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이 둘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삶을 분리된 채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이들이 서로 어우러지게 해야 합니다. 성령이 사시는 삶이 스며들고 깊이 퍼져서 일상의 삶을 비옥하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동시에 가장 무난한 비결은, 우리 존재의 전반적인 리듬 안으로 하느님을 모셔 오는 법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을 몸에 익힌 사람은 불행히도 정말 드뭅니다.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중에서
우리가 겪는 덧없는 불행에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외에 다른 치료법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광대함에 비해 너무나 편협하고 덧없는 쾌락과 소유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카르투시안의 침묵」중에서
우리 카르투시안이 입술로 말하지 않고 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 대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선하신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침묵은 죽음의 침묵이 아닙니다. 우리의 침묵은 성소의 거룩한 평화이고, 우리의 작은 수가는 우리 영혼처럼 어떤 분이 차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고 있는 것보다, 그리고 우리가 되돌려 갚아 드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약함은 사랑에 있어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 안에서는, 약함이 무한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함 안에서, 기도 안에서,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고자 하는 소망 안에서, 일치된 상태로 머물도록 합시다.
---「'늘 오래되고 늘 새로운’ 영원」중에서
우리가 거룩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 특히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마치 눈이 색채와 형태를 인식하듯이, 그리고 정신이 우리가 관념이라고 부르는 어떤 대상의 인식 가능한 측면을 인식하듯이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더 높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 하느님의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믿음은 그곳을 알아보게 해 주는 빛입니다.
---「믿음의 빛」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무심함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 사랑,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소통하는 사랑이며,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무심함입니다. 따라서, 무심함은 사랑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무심함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이치이며, 내 안의 사랑에 질서를 부여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무심함」중에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사람과 사물을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섭리 안에서, 위대한 것들이 작은 것들과 대조를 이루며 돋보이게 만드십니다. 넓은 시야 안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런 시각은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참된 자리를 찾아 줍니다. 우리는 거대한 합창단에서 하나의 파트를 맡고 있으며, 그것이 아름답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중에서
일상에서 오는 사소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너무 산란해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 영혼은 그 모든 것보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더 위대합니다. 영혼이 지니고 있는 이 위대함에는 덧없는 모든 산란함을 넘어서게 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저 지나가는 무상한 것을 통해서도 영원한 것에 손을 뻗어 닿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나 상황은 단지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것을 해결하시는 분, ‘사랑의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통은 고요하게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보다 더 큰 기쁨 안에 잠겨야 합니다. 고통은 우리의 비참에서 오고, 기쁨은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악한 것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선하십니다. 기쁨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배경이고 최종 목표이지만, 고통은 단지 그 길이 갖고 있는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십시오」중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깊이 새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진정한 형태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느님, 저는 저의 약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제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제게 더 많이 베푸실 때, 저도 당신께 더 많이 드릴 것입니다.”
---「내적인 삶」중에서
우리가 대체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지니지 못한 것’과, ‘평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감성이 폭풍처럼 크게 요동칠 때, 우리는 폭풍 외의 다른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합니다. 폭풍이 우리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평화」중에서
나는 ‘잠들다’와 ‘쉬다’, 이 두 단어에 대해 묵상하기를 그대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함께 연결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아시다시피, 쉼이 되지 않는 잠이 있는 반면에, 존재에 쉼이 되어 주는 잠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잠은 모든 근심과 염려를 온전히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리는 영혼의 잠이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쉼이 되는 잠입니다.
---「‘잠들다’와 ‘쉬다’」중에서
늘 사랑 때문인 오직 그분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평화를 맛보지 않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평화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과 실제로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들은 그분에게서 오는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의지」중에서
하느님은 성인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생명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분주한 순간에도 말입니다. 교회나 그 외의 기도 장소에서 고요하게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때때로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움직임, 삶은 그런 것입니다.
---「단순한 삶」중에서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 이 두 삶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이 둘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삶을 분리된 채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이들이 서로 어우러지게 해야 합니다. 성령이 사시는 삶이 스며들고 깊이 퍼져서 일상의 삶을 비옥하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동시에 가장 무난한 비결은, 우리 존재의 전반적인 리듬 안으로 하느님을 모셔 오는 법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을 몸에 익힌 사람은 불행히도 정말 드뭅니다.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중에서
우리가 겪는 덧없는 불행에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외에 다른 치료법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광대함에 비해 너무나 편협하고 덧없는 쾌락과 소유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불행에 대한 치료법」중에서
출판사 리뷰
카르투시안의 침묵이 갖는
의미와 가치
이 세상에는 온갖 소음이 넘친다. 인간이 내는 소리, 인간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소리, 그 외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발생하는 소리 등.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소음으로 넘치고 또 넘치는데, 그런 세상을 살면서도 인간은 내부적으로도 소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침묵과 고독’을 삶의 근본으로 삼는 카르투시오회 수도승들은 그 침묵과 고독을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동화되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침묵이 그토록 세상의 소음과 그토록 다른 것이므로, 그에 대한 단상이 세상의 언어와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침묵은 그저 공허空虛와 죽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침묵은 우리를 충만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이끌고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우리는 침묵합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 내고자 하는 말씀이,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르투시안의 침묵, 20쪽)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의 단상들이 저자의 사후에야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세상의 숱한 소리가 그 주인 혹은 주체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소음이라면, 이 책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자기 자신을 잊고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자기 비움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침묵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근원에서 그분을 찾으려 애씁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침묵은 ‘공허’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넘치는 충만함을 지닌 ‘실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기원인 이유이고 우리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나는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책은, 그것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성소 전체가 그곳에, 27-28쪽)
영적인 삶의 경지에 이른 저자의 ‘침묵과 고독의 샘’에서 솟아 나온 편지들을 읽다 보면, 읽는 이의 마음 밭에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씨앗이 뿌려지는 듯하다. 그런 까닭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침묵의 고요 속에 머무르는 한 수도승을 만나고, 그 수도승과 함께 조금 더 깊은 영성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길 축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무심함과
내적인 평화
조용한 곳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듯이, 침묵 안이라고 고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침묵 속에서 영적 여정을 가는 이들이 흔히 내적 소음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외적 침묵 안에서는 작은 내적 소음이 큰 문제로 인식될 수 있고, 그래서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의 여정에서 영적으로 단련된 저자는 묵직한 평화의 담론을 펼친다.
우리가 대체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지니지 못한 것’과, ‘평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감성이 폭풍처럼 크게 요동칠 때, 우리는 폭풍 외의 다른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합니다. 폭풍이 우리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 어떤 심각한 죄를 자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신뢰하는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결국, 평화라는 것이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평화, 103-104쪽)
말하자면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곧 평화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상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신뢰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카르투시안의 영적 수행일 것이다.
하느님의 불변성에 대해 우리가 나누었던 유쾌한 대화를, 나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니신 바로 그 완전함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속성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모습들을 조금씩 조금씩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무심無心의 근본적인 이유이며 진정한 면모面貌입니다. … 우리는 현존하시는 그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가는 것들을 버립니다. 이것이 내적인 평화의 비결입니다. (내적인 평화의 비결, 109쪽)
조화로운 삶이란, 그리스도교적 무심함으로 내적인 평화 안에 머무를 때 가능해진다. 감성이 이성에 동화되고, 육신이 영혼에 동화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산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께 동화될 때 완전한 질서를 이루며 충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선하신 하느님 안에서의
단순한 삶
실제로는 그토록 단순한 것인데도 우리가 삶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곧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서,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단순한 삶, 169쪽)
우리의 모든 문제는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아무리 기억해도 부족한 영적 삶의 지침이 아닐까. 그분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셨는데도 우리는 그분을 너무나 멀리에서 찾으며 헤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하느님은 변함없이 선하신 분이셔서 우리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하고, 그분을 발견해야 하고, 살아 계신 그분 앞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길, 영적 여정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그렇게 많이 바라보지 맙시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를 맥빠지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변화하는 국면들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기초한 계획과 일치되게 하시며 왕의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유일하게 이치에 맞고 참된 이 신앙의 관점에 더 빠져 들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사물을 보시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그분이 행하시고 허락하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사랑만을 바라보며 소망하십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합시다. (믿는다는 것, 171-172쪽)
의미와 가치
이 세상에는 온갖 소음이 넘친다. 인간이 내는 소리, 인간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소리, 그 외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발생하는 소리 등.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소음으로 넘치고 또 넘치는데, 그런 세상을 살면서도 인간은 내부적으로도 소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침묵과 고독’을 삶의 근본으로 삼는 카르투시오회 수도승들은 그 침묵과 고독을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동화되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침묵이 그토록 세상의 소음과 그토록 다른 것이므로, 그에 대한 단상이 세상의 언어와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침묵은 그저 공허空虛와 죽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침묵은 우리를 충만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이끌고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우리는 침묵합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 내고자 하는 말씀이,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르투시안의 침묵, 20쪽)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의 단상들이 저자의 사후에야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세상의 숱한 소리가 그 주인 혹은 주체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소음이라면, 이 책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자기 자신을 잊고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자기 비움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침묵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근원에서 그분을 찾으려 애씁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침묵은 ‘공허’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넘치는 충만함을 지닌 ‘실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기원인 이유이고 우리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나는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책은, 그것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성소 전체가 그곳에, 27-28쪽)
영적인 삶의 경지에 이른 저자의 ‘침묵과 고독의 샘’에서 솟아 나온 편지들을 읽다 보면, 읽는 이의 마음 밭에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씨앗이 뿌려지는 듯하다. 그런 까닭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침묵의 고요 속에 머무르는 한 수도승을 만나고, 그 수도승과 함께 조금 더 깊은 영성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길 축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무심함과
내적인 평화
조용한 곳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듯이, 침묵 안이라고 고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침묵 속에서 영적 여정을 가는 이들이 흔히 내적 소음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외적 침묵 안에서는 작은 내적 소음이 큰 문제로 인식될 수 있고, 그래서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의 여정에서 영적으로 단련된 저자는 묵직한 평화의 담론을 펼친다.
우리가 대체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지니지 못한 것’과, ‘평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감성이 폭풍처럼 크게 요동칠 때, 우리는 폭풍 외의 다른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합니다. 폭풍이 우리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 어떤 심각한 죄를 자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신뢰하는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결국, 평화라는 것이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평화, 103-104쪽)
말하자면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곧 평화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상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신뢰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카르투시안의 영적 수행일 것이다.
하느님의 불변성에 대해 우리가 나누었던 유쾌한 대화를, 나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니신 바로 그 완전함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속성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모습들을 조금씩 조금씩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무심無心의 근본적인 이유이며 진정한 면모面貌입니다. … 우리는 현존하시는 그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가는 것들을 버립니다. 이것이 내적인 평화의 비결입니다. (내적인 평화의 비결, 109쪽)
조화로운 삶이란, 그리스도교적 무심함으로 내적인 평화 안에 머무를 때 가능해진다. 감성이 이성에 동화되고, 육신이 영혼에 동화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산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께 동화될 때 완전한 질서를 이루며 충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선하신 하느님 안에서의
단순한 삶
실제로는 그토록 단순한 것인데도 우리가 삶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곧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서,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단순한 삶, 169쪽)
우리의 모든 문제는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아무리 기억해도 부족한 영적 삶의 지침이 아닐까. 그분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셨는데도 우리는 그분을 너무나 멀리에서 찾으며 헤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하느님은 변함없이 선하신 분이셔서 우리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하고, 그분을 발견해야 하고, 살아 계신 그분 앞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길, 영적 여정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그렇게 많이 바라보지 맙시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를 맥빠지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변화하는 국면들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기초한 계획과 일치되게 하시며 왕의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유일하게 이치에 맞고 참된 이 신앙의 관점에 더 빠져 들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사물을 보시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그분이 행하시고 허락하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사랑만을 바라보며 소망하십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합시다. (믿는다는 것,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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