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가톨릭-천주교 (독서)/9.천주교문화산책

수도원에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2024) - 한 청년 수도자의 12년 수행기

동방박사님 2024. 1. 2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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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수도 생활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걸 의식하지 못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열아홉에 수도원에 입회해, 신도 자신도 모른 채 진리를 찾아 헤맨 한 청년 수도자의 수도원 생활과 그곳에서의 성장을 담고 있다. 자기와의 직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존재에 대한 인식 등, 진지한 사유를 기본 바탕으로 마치 시트콤처럼 유머러스하게 펼쳐지는 수도원 생활의 에피소드들이 읽는 이에게 재미를 안긴다. 수도원 형제들의 우애가 느껴지는 이야기, 혹독하고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수련 이야기, 필리핀과 티베트에서 펼쳐지는 저자의 순례기 등, 12년의 수도 생활에서 저자가 겪은 각종 체험이 이어지며 읽는 이를 몰입하게 하고, 새로운 사유의 기회와 감동을 준다.

목차

여는 글: 나는 수도원에서 어른이 되었다.

1 지원기·청원기: 헤맴의 시간

수도자가 뭔지 몰랐다
애연가들을 위한 수호성인
첫 라틴어 수업은 하얬다
감사합니다. 3층입니다
노숙자가 되다
첫 번째 무전여행
두 번째 무전여행
수도원 까마귀
꿈의 해석1
비겁해도 괜찮아

2 수련기: 마주침의 시간

똥 푸는 걸로 시작했다
꿈의 해석2
일주일 단식기도
동지를 만나다

3 유기서원기: 바라봄의 시간

지복의 장학생
수해복구와 현실 직면
‘밥그릇’을 훔친 수도자
아빠가 되다
미리 알았다면 하지 못했을 일
빈 칠판에 숨은 ‘존재’
‘있음’이 훅 들어왔다
죽음을 응시하다
비교체험 극과 극
전갈 형제의 죽음
밀림을 헤매다
체체와 춤을
차라리 뒤통수를 치십시오

4 성대서약: 존재의 시간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찰나의 무게모두 제자리
순례를 떠나다
동굴에서 기도하기
죽음과의 키스
만년설의 깨달음
새로운 세상으로

닫는 글: 내면의 소리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저자 소개 

저 : 김선호
 
열아홉, 서울 성북동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수도자로 살았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 중세에 멈춘 수도원에서 전통을 배우고 익혔다. 젊은이의 내적 역동, 진리에 대한 근원 질문, 현실 삶의 혼동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수도원에 있을 때는 단순했다. ‘수도자’라는 하나의 페르소나로 살았다. 지금은 많은 이름을 달고 산다. 남편, 아빠, 6학년 2반 담임교...

책 속으로

밤사이 마시려고 떠놓은 물 위에 부서질 듯 말 듯 살얼음이 끼었다. 분명 잠들기 전, 라디에이터 온수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침 5시 30분, 일어나야 했지만 머뭇거렸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수도원 북쪽 창문, 얼음꽃이 환상적인 수를 놓았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조차 추웠다. 숨을 내뱉는 순간 뿌연 담배 연기마냥 침대 주변이 입김으로 가득 찼다. 두툼한 솜이불은 묵직하게 몸을 누르며, 조금 더 있다가 일어나도 된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내가 왜 마음껏 늦잠 자도 되는 대학 생활을 보내지 않고 여기 있는지 참 기가 막혔다. 나의 ‘응답하라 1994’는 추운 수도원 북쪽, 냉동실 같은 작은 방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저 이불을 끌어당겨 꼭 쥐고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기도보다 욕이 먼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 p.19,「수도자가 뭔지 몰랐다」 중에서

수도원에 들어온 첫해, 원장 이 아오스딩 형제님은 아침 미사 후 거룩한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형제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하루 세끼를 굶든지 아니면 얻어먹든지 알아서 해야 했다. 형제들은 이날을 ‘사막 체험’이라 불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사막 체험이라는 이름은 참 의미가 깊다. 심리적으로 해석하자면 사막에 홀로 있듯 나와 직면한다는 뜻이고, 가톨릭 신앙적으로는 온전히 신을 향한 시선을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냉혹했다. 심리적이든 신앙적이든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인간적으로 배가 고팠다.
--- p.53-54,「노숙자가 되다」 중에서

‘바라봄’에는 참 신비한 힘이 있었다. 어떤 것을 해결하거나 바꾼 것이 아니었음에도, 단지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호 소통이 되었다. 인간 심리는 파헤치고 뒤집어 뜯어고치는 것이 아닌 바라봄의 문제였음을 안 게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실제로 정신분석을 통해 내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거나 없앤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저 문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믿음만으로 해결된다는 맹목적 신앙이나 기복의 굴 레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신앙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바라보지 못하던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순간 더욱 성숙할 수 있음을 알았다.
--- p.94,「꿈의 해석1」 중에서

좌관의 기본은 ‘숨쉬기’다. 아주 천천히 숨을 쉬고 더 천천히 숨을 내쉰다. 오직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한다. 보통 가부좌를 틀고 앉지만 초보자는 의자에 앉아서 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이나 기억의 잔상을 따라가지 않고, 그저 천천히 숨을 쉰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가도 그런 자기를 인식하고는 다시 숨 쉬는 일에 집중한다. 그렇게 생각을 멈추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에만 천천히 집중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있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 p.212,「‘있음’이 훅 들어왔다」 중에서

가재에게서 또 다른 나를 보았다. 다른 학생들처럼 입시의 무게감을 견디며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지만, 수도원은 세상에서 보호된 좋은 공간이었다. 가재와 내가 다른 점은 가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나는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재가 드럼통 속에서 안전하게 머무르기를 원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진짜 골짜기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정을 마치고 하산하는 날 너를 데리고 내려가 골짜기 시냇가에 풀어주겠다고 말을 건넸다.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골짜기의 시냇가는 지금껏 네가 머문 드럼통 속 세계와는 천지 차이라고 일러줬다. 내 말을 들은 가재는 두려운 듯 더 웅크린 채 드럼통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 p.292,「모두 제자리」 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침 5시 30분, 일어나야 했지만 머뭇거렸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수도원 북쪽 창문, 얼음꽃이 환상적인 수를 놓았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조차 추웠다. 숨을 내뱉는 순간 뿌연 담배
연기마냥 침대 주변이 입김으로 가득 찼다. 두툼한 솜이불은 묵직하게
몸을 누르며, 조금 더 있다가 일어나도 된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내가 왜 마음껏 늦잠 자도 되는 대학 생활을 보내지 않고 여기 있는지
참 기가 막혔다. 나의 ‘응답하라 1994’는 추운 수도원 북쪽, 냉동실 같은
작은 방에서 시작되었다.
― 책 속에서

삶의 한 시절에 바치는 작별 인사

저자 김선호는 ‘작은형제회’라는 프란치스코회의 수사로 12년을 산 전직 수사이자 현 초등학교 교사다. 『수도원에서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저자가 긴 수도 생활을 마무리하며, 뜨겁게 정진했던 삶의 한 시절에 바치는 작별 인사다. 미숙했으나 순수했던 청년 시절을 수도자로 보내면서 어른이 된 과정을 기록한 성장문학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수도 생활이라고 하면, 세속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특수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별난 체험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세간의 인상이 부분적으로는 맞기도 하다. 가령 걸인 차림으로 노숙 체험을 하거나, 땡전 한 푼 없이 무전여행을 떠나서 구걸과 걸식으로 며칠을 버티거나, 피정을 떠나서 아무도 없는 암자에서 좌관하는 일을 누구나 하는 일반적인 경험이라고 할 순 없다.
반면 음주와 흡연, 방황과 갈등, 평가(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존재한다는 점은 수도원과 세속의 공통점이다. 저자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란, 진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한데 모여 오직 진리만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으며, 다양한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겪는 각종 문제는 세속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수도원을 기행한 책은 많지만 수도원을 살아낸 이야기를 담은 책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수도원에서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독자에게 수도원이라는 비밀 공간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안긴다.

‘오직 하나’에 정진하는 기쁨

이야기는 수도원 입회에서 시작해 수도원을 떠나며 끝난다. 그 사이 수도자가 거쳐야 하는 각 수행의 과정에서 그토록 참 존재를 찾으려 했던 저자가 고뇌와 방황을 겪으며 문득문득 ‘존재’와 조우하는 장면이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지점이다. 또 그 와중에 세속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수도원의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무엇보다 ‘오직 하나’에 정진하는 일의 기쁨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수도원에서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오늘날 온갖 매체에 정신을 빼앗긴 채 사는 우리가 진정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