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 揚武
KIS Yangmu
함명 양무 揚武 KIS Yangmu
함종 코르벳
자매함 없음
제작 레이튼 딕슨 앤 컴퍼니
운용 대한제국 해군, 이후 일본제국 해군
진수 1881년
취역 1881년
배치 1903년 4월 15일
퇴역 1907년
최후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해 러일 전쟁 기간 해군 신병의 연습함으로 사용
가격 1,100,000원
배수량 3,432 장톤 / (3,487t) (보통 적재)
전장 105m
선폭12.5m
흘수 4.2m / 7.3 m (만재)
설치동력 1,750 shp (1,300 kW)
추진 증기 기관
속력13.5 노트 (25 km/h; 15.5 mph)
승조원 72명
무장 4문 80mm 함포 / 2정 5mm 기관총
양무호(揚武號)는 대한제국의 첫 번째 근대식 군함이었다.
배경
1866년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한반도를 공격해온 서양의 근대식 군함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대식 군함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이 당시 고종의 생각이었다.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양무호를 구입하려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양무호는 대한제국의 부국강병과 자주국방 정책의 상징이었다.
근대식 군함의 구입에 대한 준비는 1881년(고종 18년)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공채를 모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원래 이 선박은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하여,1894년에 일본 미쓰이 물산이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사용한 석탄 운반선인 팰러스(Pallas)호인데, 이를 1903년에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총 판매가 55만엔(대한제국 돈 110만원)에 구입하였다.
미쓰이 물산은 현재 미쓰이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중역 회의록에 위와 같이 밝히고 있으며, "배가 워낙 커서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석탄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 정부에 판매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10만원은 전체 400만원이 조금 넘는 군예산의 약 30%였고, 1903년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총 예산이 1,000만원이 약간 넘었던 것에 비하면 구매가가 정부 예산의 10%가 넘으니 고종이 무리수를 두어 구매를 강행했다고 볼 수 있다.
동년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석탄 운반선에 대포(80mm) 4문과 기관총(5mm) 2정을 장착하는 등 전투용으로 개조하여 군함으로 사용하였다.
1903년 9월 8일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순성(愼順晟)을 초대 함장으로 임명하여 이 양무호를 운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양무호는 군함으로써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워낙 낡아 운영비만 많이 들어갈 뿐 재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해군을 모집해 훈련을 하는 도중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 군사행위금지령이 내려졌고,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사실상 일제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양무호는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실제 국방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함장
신순성 : 1903년 4월 1일 - 1904년 2월 27일
참고 하기
광제호(廣濟號, KIS Guangjae) - 대한제국의 두 번째의 군함.
고종, 최초군함 양무호 명명·신순성 함장 임명
신순성 愼順晟
본명 신순성
로마자 표기 Shin Sun-seong 출생 1878년 1월 27일 한성부
사망 1944년 2월 7일 인천
성별 남성
국적 대한제국
학력 한성일어학교, 구마모토 상업학교, 도쿄고등상선학교
경력 양무호 함장, 광제호 함장, 광제호 실습교관
직업 항해사, 군인, 교관
활동 기간 1903년 ~ 1938년
소속 대한제국 해군
병역 대한제국 해군
신순성(愼順晟, 1878년 1월 27일 ~ 1944년 2월 7일)은 한국 최초의 근대 항해사 중 한 명으로, 대한제국 해군의 양무호와 광제호의 함장으로 있었다.
1878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한성일어학교를 수료하고 박영효의 추천으로 1895년 일본에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했다.
그는 구마모토 상업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예비 항해사 자격을 얻어 1897년 도쿄고등상선학교에 입학하였고, 4년간 이수 후 1901년 한국인 최초로 항해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903년 대한제국군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를 도입하자 고종황제의 임명에 의해 신순성이 함장으로 임명된다. 1904년 새로 군함 광제호가 건조되어 다시 그가 함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제국이 대한제국군을 해산할 때까지 군함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한일합병 이후에도 상선으로 전환된 광제호의 선장으로 있었고, 1920년 광제호가 인천 해원양성소의 실습선이 되자 실습교관으로 근무하다가 1938년 퇴직했다. 1944년 인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술국치 전날, 신순성 함장은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보관하고 있었다.
해방을 1년 앞두고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광복 이후 열린 한국 기선 취항식에서 일본으로부터 인수받은 기선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이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304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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