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1917년 12월 30일 동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동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광명중학교와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 (同志社大學)에 입학하였다.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종사촌형인 송몽규 (宋夢奎)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童柱)와 윤주(尹柱)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
소년 시절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화룡현립 제일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 崇實活泉 )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35년 12월, 숭실학교 학생들이 '등불참배'를 거부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듬해 1936년 1월 18일 학교장 '조지 S. 맥퀸'( 한국명 윤산온 )이 신사참배를 최종적으로 거부함으로써 1월20일 교장직에서 파면된 후 미국으로 추방될 뻔 했다. 이후 숭실중학교가 무기휴교로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졸업사진 (1941년)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숙사와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벗과 담론을 하였다. 명동촌에서 같이 자란 문익환 목사에 의하면 윤동주 시인은 신학을 공부하는 자신보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해박했다고 한다.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다양한 인문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기에 윤동주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겨레어린이에서 펴낸 윤동주 시인 전기에 의하면, 언어학자이신 고 최현배 선생이 한국어 과목에 만점을 주실 정도였고,문학동네에서 펴낸 《처럼》(김응교 지음)에 따르면 불어, 중국어, 한국어(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어)등 다양한 나라의 말을 공부했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과 시를 발표하고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또한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는 《달을 쏘다》같은 수필, 슬픈 족속 같은 시들을 쓰는 등 학교 생활을 소재로 정한 글을 썼다. 1940년 일제 경찰의 학생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자 후배 정병욱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나와 북아현동 누상동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함께 하며 시작에 몰두하였다. 그 후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무렵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로, 자세히 말한다면 영문학자 윤양하 교수의 만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원고를 정병욱에게 증정한 후 일본 대학으로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도쿄 릿쿄 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 대학교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도시샤대학교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개신교 학교였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하여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 히라누마 ' 로 창씨하였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후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일제가 한민족의 전통을 말살하려고 우리말과 글이 아닌, 일본의 말과 글을 강요하는 식민주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창씨 개명을 하지 않으면 유학에 필요한 입출국 서류를 만들 수 없는 즉, 유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투옥과 최후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지린성 룽징시에 유해가 묻혔다(향년 27세).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
같은 해 2월 26일,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1948년 2월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임시로 발간하였고, 같은 해 3월 정식으로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작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1948.2.)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새 명동》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쉽게 씌어진 시》
경향 및 평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14]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상훈 경력
서울 숭실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국민훈장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학력
명동소학교 졸업
은진중학교 수료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길림광명중학교 졸업
경성 연희전문학교 등업사
일본 릿쿄 대학 영어영문학과 중퇴
일본 도시샤 대학 영어영문학과 제적
윤동주 기념물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세대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1985년부터 《월간문학지》에서 그를 기념한 「윤동주문학상」 수상자를 매년 선정, 수상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2년 9월, 모교인 용정 중학교에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
1995년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2005년에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그 옆에 건립되었다. 또한 교토 대학 부근 그가 머물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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