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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 강우규 (2010)

동방박사님 2024. 9. 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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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강우규: 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는 최고령 의열 투쟁가 강우규의 삶을 다룬다. 그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의 여파로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폭살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919년 9월 2일 부산을 거쳐 남대문역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폭탄을 던져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힌다. 이 책은 강우규가 3·1운동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향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을 실천했다는 점과,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투척의거라는 독특한 역사적 의의에 집중하여 그의 일생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

1. 남대문역에 울린 폭탄의 굉음
신임 총독 부임을 앞둔 서울
천지를 뒤흔든 폭탄 소리
콜레라에 폭풍우 피해까지

2. 사건의 범인은 백발의 투사
폭탄사건의 범인은 백발의 강우규
'공범' 인의 신상명세와 행적

3. 재판정에서도 꺾이지 않는 기개
변호인 없이 진행된 재판
당당한 기개로 자신의 뜻을 밝히다

4. 공범의 재판이 시작되다
최자남·허형·오태영 심문
공범의 심문이 끝나고

5. 사형 선고를 받다
심 재판에서 사형 선고
최자남 변호를 위해 공소 제기

6. 우국충절로 가득한 상고취지서
직접 준비한 '상고취지서'
낙심하는 아들을 위로하는 강우규
고등법원에서 사형 판결 최종 확정

7. 친일경찰 김태석의 반민특위 재판
김태석의 친일 행적
심판대에서 김태석의 거짓 증언

8. 의거를 도운 동지들의 체포
한흥근·안돈후·조병철 재판

9. 생애와 독립사상
교육 및 선교사업에 헌신
노인동맹단 요하현 지부장 맡아
기독교 정신과 동양평화론
국립현충원에 영원히 잠들다
의열투쟁가 강우규의 삶과 자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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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정운현
경남 함양 출생으로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와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중앙일보 기자,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차장, 오마이뉴스 초대 편집국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친일파』, 『창씨개명』, 『증언 반민특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군인 박정희』, 『임종국평전』, 『풀어 쓴 반민특위 재판기록』 등 편·저서가 다수 있다.

출판사 리뷰

최고령 의열투쟁가 강우규

항일투쟁은 조직적·집단적인 형태와 함께, 개인 차원의 '특공작전' 방식인 의열투쟁이 하나의 독립운동방략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약소(弱小)세력들의 대표적인 투쟁방략 가운데 하나였다.

강우규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3·1만세운동 여파로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폭살키로 결심했다. 그리고 1919년 9월 2일 사이토가 부산을 거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폭탄을 던져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총독 폭살의거는 우리 독립투쟁사에서 두 가지 독특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을 실천한 점이다. 이것은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일과, 이듬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맥을 강우규 의사가 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만세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에 저항한 무수한 항일투사들이 있었지만 식민통치의 최고책임자인 조선총독 제거를 목표로 거사를 준비한 사람은 드물었다. 강 의사는 의거 처음부터 목표를 조선총독으로 잡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해 거사를 결행했다. 비록 총독을 척살하지는 못했지만 강 의사의 의거가 항일투쟁사와 동양사에 끼친 영향을 감안하면 소기의 성과는 충분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투척의거라는 점이다. 의열투쟁에 나선 대부분의 의·열사는 20~30대 청장년층이었다. 반면 의거 당시 강 의사는 만 64세였다. 당시 평균수명이 50세도 채 안된 점을 감안하면 강 의사의 의거는 당시로선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 의사가 의거 후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이유 역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 의사의 의거는 이후 여러 청년에게 영향을 미쳤다. 강 의사의 의거 후 민족진영의 청장년들이 의열투쟁 대열에 대거 동참하였는데, 약산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의사는 의열단원이었으며,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강 의사의 뒤를 이은 청년 의·열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