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4.독립운동가

강우규 평전 (2015)

동방박사님 2024. 9. 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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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으로
일제총독 재등실에게 폭탄을 던진 65세 노혁명가 강우규!
1919년 9월 2일 이후 그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내가 평생에 세상에 대하여 너무 한 일이 없음이 오히려 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민족을 위하여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쓴대야 내가 죽느니만 같지 못할 것 같다. 즉 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게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제 내가 이만큼 애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조선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배긴다면 그만이다. 내가 죽을지라도 나의 가슴에 한 되는 것은 나 죽은 후에 조선청년들의 교육이다. 지금은 조선사람 가운데 매우 사람 같은 사람이 많아서 청년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아니 하겠지만은 그저 그래도 눈을 감고 앉았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십삼도에 널려 있는 조선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일러 주고 싶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 강우규 의사의 옥중 유언

…원래 의술을 잘 아시니까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만은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아니하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십니다. …사형선고가 되니까 내가 낙심할까 보아 일부러 웃으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하등배이니라. 너, 조금도 애비 죽는다고 어찌 알지 말고, 아무쪼록 잘 살아가거라” 하시면서 울지도 못하게 하시옵니다. “내가 죽더라도 육체의 애비가 죽는 것이니까 영혼의 애비는 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하시면서 아무렇지도 않으십디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에 실린 강의사 아들 강중건의 말

목차

들어가며 7

제1장 조선 후기와 일제 점령기 역사적 상황
1. 망국 군주 고종의 부족한 리더십
2. 일제의 무단 통치
·재등실 총독 취임사
·재등실의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1920)
3. 일제의 문화 통치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조선교육조서
4. 역대 조선 총독과 그들의 만행

제2장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투쟁
1. 3?1운동
2. 독립운동의 주인공이 된 모든 민중들
3. 3?1운동 이후 개인이 일으킨 최초의 항일의거

제3장 강우규의 생애와 독립사상 형성
1. 강우규의 젊은 시절
2. 우리 의학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쇠퇴
·조선시대 의학의 발전
·조선 후기 한의학 - 개항과 서양의학의 쇄도
·조선 후기 의사규칙과 개혁 시도
·국운쇠퇴와 한의학의 수난
·일제 강점기 한의학 - 일제의 식민지 의료정책
·의생규칙과 신분 격하
·학술지 발간과 의학강습
·한의학에 일기 시작한 새 기운
3. 민족운동가로의 변화?교육 및 선교 사업 시작
·이동휘와의 만남
·교육 및 선교 사업 시작
4. 강우규, 민족운동에 뛰어들다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강우규, 노인동맹단에 참여
·노인동맹단의 대표적인 활동

제4장 백발노인의 독립운동
1. 강우규 의거의 서막
·신임 총독을 맞이하는 불행했던 경성의 풍경
·강우규 의거와 사상자 명단
·어수선했던 1919년의 조선
·남대문 역에 퍼진 폭탄의 울림:
노인이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다 .
2. 거사 준비 과정과 탄생
3. 의거 후 재판 과정
·악덕 친일 경찰 김태석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숙청
(임기상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중에서, 2014 )
·제1회 공판
·제2회 공판
4. 애국정신이 담긴 상고취지서 요약
·의열투쟁의 배경: 재등실 총독 폭탄 투척 이유
·최자남에 대한 변론
·상고이유와 1심과 2심 판결에 대한 비판
·동양 삼국의 ‘동양평화론’을 거듭 강조하다
5. 사형 선고 후 강우규의 태도와 순국

제5장 강우규 의거가 남긴 의의

참고문헌
중요자료 1〈매일신보〉에 실린 강우규 의사 관련기사
중요자료 2 상고 취지서
연보 - 강우규가 걸어온 인생
저자후기

저자 소개

저자 : 은예린
중앙대학교 문리대학에서 인문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유한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평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유사한 상황에 처한 역사 인물에 대한 비교를 통한 교훈과 처세를 남기는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공저)를 집필하였다.
독립기념관 정기간행물에 독립 운동가들에 관한 원고를 게재하면서 잊혔던 독립운동가 강우규의 활동에 대해 평전을 집필하게 되었다.

책 속으로

우리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친숙하게 기억되고 있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탄생하도록 자극적인 계기를 안겨 준 인물도 실상은 강우규라 할 수 있다. 20대에 의거를 감행한 이들에 비해 노인이 약한 몸을 이끌고 민족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는 것은 감히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용기였고, 위대한 사건이었다. 강우규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들에게 생소하고 낯선 이름이지만, 그가 한의사로서 교육자로서 민족운동가로서 전반적으로 남겨준 삶의 방식과 역할은 우리에게 민족의 자부심으로 추앙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p.15

강우규의 손녀 강영재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휘가 국권회복과 기독교 선교를 위해 고향인 함경도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고향에 방문한 이동휘를 존경하는 마음에 극진히 대접했고, 그러던 중에 강우규의 집에도 방문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친분을 쌓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동휘는 종교와 교육 활동에 이미 뼈를 태운 상태였고, 강우규는 이러한 사회 활동을 통해 민족혼을 되살리려는 열정을 가진 이동휘에게 매혹되어 새로운 인생의 노선을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 같다.
--- p.76

당시 1920년 5월 8일 〈동아일보〉에 ‘강우규의 상고문은 자기 손으로 직접 쓴 비분강개한 긴 글’이란 기사가 보도되었다. 강우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상고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재등실 총독을 처단한 배경을 비롯해 최자남에 대한 변호, 상고 이유와 1심과 2심 재판에 대한 판결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동양평화를 위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작성하였다.
그 누구의 손과 두뇌를 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만큼, 강우규의 애국심과 독립을 염원하는 우국충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상고취지서에서 자신이 우리 민족 2,000만 동포를 대신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는 거사 목적을 밝히고 있다.
--- p.130

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강우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또한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그는 재판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독립에 대한 염원에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꺾일 줄 모르는 강인한 기개로 당당하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재판정에서 고함을 지르며 호통을 쳤다. 또한 아들 강중건이 변호사를 선임할 것을 권했지만 확고하게 거절하고 나섰다.
손녀 강영재의 증언에 따르면, 사형 구형에 대한 판결이 확정된 후 강우규는 재판장에게 무섭게 호통을 치며 노여운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재판정에 있던 의자를 검사에게 던지며 “고얀 놈들”이라 소리를 질렀다. 또 재판소 구치소로 가는 길에서도 재판정을 하나 둘씩 빠져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 p.136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한 청년 의사 윤봉길은 모두 기억하면서 정작 윤봉길 의거가 탄생하는 데 초석을 다져 준 강우규는 뇌리에서 잊혀져 갔던 사실이 안타까운 우리 역사였다. 이렇게 강우규 의거가 많은 젊은 의사들의 의거가 탄생하도록 자극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이들이 10대, 20대, 30대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나이에 비하면 강우규의 의거는 당시 65세로 노인이 이룬 최초의 의거였던 사실에 민족사적 의의가 있으며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모범이 되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이었던 셈이다.
--- p.150

출판사 리뷰

애국투사 강우규(姜宇奎: 1855~1920)

한의사, 교육자, 독립운동가. 혁명가. 평안남도 덕천군의 빈한한 농가에서 출생.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습득하여 한의사로 활동하였으며, 의술이 뛰어나 30대 초반에 이미 거금을 모았고 1885년경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주, 상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경 단천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17년 만주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을 개척하고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신흥동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한인독립운동단체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러시아인에게서 구입한 폭탄을 지닌 채 원산을 거쳐 서울로 잠입,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일제 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완수했다. 불행히도 재등실은 폭살시키지 못했으나, 37명의 일제주구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일제의 만행과 강압통치에 대해 민족의 강력한 의열항거로 맞섰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거사 당시 강우규 의사는 65세 고령의 노인이었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으며, 1962년 3월 정부는 강우규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1401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