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기독교역사 [역사지식여행]/1.한국교회사 (천주교.개신교)

[웹북] 경신박해 (1860)

동방박사님 2025. 3.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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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박해

1849년에 즉위한 철종은 성품이 온건하였고 당시의 집권세력인 안동김씨 가문도 유화정책을 썼으므로, 천주교는 점차 교세가 성장하였다.

한 해에 약 1,200명 이상의 새신자들이 입교하였고 전국의 신자수는 약 16,700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기해박해(1839, 헌종 4)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의 아들인 좌포도장 김태영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우포도장 신명순과 함께 천주교 박해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명의 신자들을 체포한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러나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약탈, 방화, 부녀자 겁탈 등 불미스러운 만행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정에서도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와 병조판서 김병운(金炳雲) 등이, 과거 수차례 천주교도 박해로 인해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불행한 죽음을 가져오는 등 그 동안 왕실과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왔다는 점을 거론하며 천주교인 체포에 반대하였다.

결국, 두 포도대장은 문책후 파면되고 교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박해기간중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피신하였고, 최양업 신부도 경상도 죽림이라는 곳에서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우촌들이 황폐화되어 신자들은 생계수단을 잃고 유랑하는 자가 많아져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