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남감리교회 고양읍교회
먼 엣날 미국이 남북전쟁을 치른뒤, 미국의 교회도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에 선교를 온 교회들도 남감리교회, 북감리교회같이 따로따로 선교를 왔다. 남쪽교회는 전쟁을 패했기 때문에 돈보다 10~15년씩 늦게 한국에 들어 왔다. 그런데 한국최초의 남감리교회가 세워진 땅은 서울이 아닌 근교에 있는 작은농촌마을 고양이었다.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서 미국남부의 에모리 대학과 벤더필트에서 공부했던 윤치호 선생이 바로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방적인 선교를 당했던 북감리교(아펜젤러), 북장로교 (언더우드)와 달리 남장로교의 선교는 한국인 윤치호의 촉구와 주선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미국교회의 분열이 조선 땅에서도 이어져 있는것을 바로 잡기 위해 남감리교 소속의 양주삼 목사와 윤치호 선생등이 노력하여 1931년 통합된 <조선감리교회>를 탄생시킨 것만 보아도, 한국의 남감리교 전통은 매우 주체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하튼 1896년 8월, 리드선교사가 내한하여, 윤치호와 함께 개성을 중심으로 선교의 열의를 불태웠다. 그러던 중 1897년 5월 2일, 이곳 고양읍에 남감리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매서인들의 연락을 받고 즉시 달려온 리드와 콜리건은 곧바로 세레식을 집례하고 속장을 선출해 완벽한 조직을 갗춘 감리교회를 세운것이다. 선교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다가 결국 한국인들의 노력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 무임승차한 교회가 마로 이곳 고양지역 감리교회의 역사이다. 그 한 달 후에는 파주집회, 용머리. 마천,적성, 연천 등에 교회가 설립되어갔다. 그런데 이것은 리드나 콜리어등의 선교사들이 전혀 에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넋놓고 앉아 있었지만, 남감리교 최초의 매서인 이었던 김주현과 김흥순이 선교사들의 무기력을 박차고 스스로 전도활동하며 교회를 세워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다 양반출신에 서울상동감리교회 출신 이었고, 스크랜턴을 돕던 자들이었다.
벽제에서도 소문났던 깡패, 불량배였던 윤성근이라는 사람이 이 두사람에 이끌려 주막거리에서 전도되었고
이후 유명한 맹인 점쟁이 이었던 백사겸선생을 김주현이 전도했다.그는 모든 복술업(卜術業)을 정리한 뒤, 자신의 전재산을 내놓고 교회에 기부하고, 전도자로 나서 고양과 개성지역까지 "맹인전도자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렇듯 고양지역의 초대 기독교인들은 맹인 (盲人)이나 불량배, 주막집주인 같은 "민중계층" 출신이었고, 부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봉건사회 내의 소외계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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