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씨의 묘
덕양구 대자동 산기슭에는 명나라 마지막 궁녀의 한 맺힌 사연이 있답니다. 17세기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던 명나라 마지막 궁년 굴씨는 소현세자가 귀국할때 함께 따라 왔는데,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도 중구으로 돌아가지 않았답니다. 이유는 조국을 멸망시킨 청에 분노하여 오랑케 청을 저주하면서 끝까지 조선에 남았던 불굴의 여인 굴씨가 묘가 대자동 산기슭에 아직도 붉은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鍾路區) 옥인동(玉仁洞)에 위치한 중부시립병원 자리에 위치했던 자수궁터는 원래 태조 때 관립학교인 북학(北學)을 ㅅ설립하려고 터 딱아 놓았던 곳이 광해군이 이궁(離宮)으로 세운 것 이었는데, 궁의 기능은 별로 하지 못하고 나이들어 자식없는 늙은 궁녀들이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자수궁의은 남감리교 모교회 중의 하나인 자교교회에서 길을 건너 인왕산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안쪽 옥인동45번지, 지금의 효자동 동사무소와 종로보건소가 들어 있는건물 (엣 순화병원)자리에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멀리 중국에서 건너와 생을 마가했던 한 중국인 궁녀 굴(屈)씨 이야기가 서려 있다.
굴씨는 본래 명황실의 마지막 궁녀였다. 일곱 살 때 궁녀로 들어 갔으나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주황후를 따라 피했다. 이 후 청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주황후를 따라 피했다. 이 후 청나라가 이자성의 군대를 몰아내고 베이징(북경)을 점령 하자 굴씨는 다시 정 태종의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은 명나라를 치기 전 조선을 먼저 쳤으니 바로 병자호란 이었다
이때 후금의 누르하치는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고, 조서 왕자 소현세자 (소현세자 1612~1645)와 봉림대군 을 볼모로 붙잡아 왔다.조선왕자들은 북경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명나라 때부터 북경에서 활동 중이던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에수회 신부 아담샬 (1591~1666) 은 조선의 왕위 승게자인 소현세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서양문물과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고 교류하게 되었다. 아담샬은 소현세자의 전도를 통해 조선의 선교를 꾀했던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간 유배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북겨의 예수회 신부들은 소현세자 편으로 기독교신앙도 함께 들여보내고자 했다. 그래서 왕자들은 수행자 들 중에서 기독교인들을 일부 포함시켰다.왕자들이 북경에서 생활할 때 시중을 들던 궁녀와 환관들이었는데, 이들 중에 조선의 기독교 선교에 필요한 이들이 선발되었던 것이다. 이때 소현세자를 쫓아 함께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인 궁녀가 바로 굴씨였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던 소현새자는 돌아온지 두 달만에 급서하게 되었다. 결국 소현세자를 따라온 청나라 수행원들은 모두 청으로 돌려 보내졌지만, 원래 명나라 궁녀 출신으로 반청의식이 강했던 굴씨는 조선에 남기를 원했다. 새롭게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 (효종)은 그녀를 자수궁에 살게 했고 조선에 남은 굴씨는 명 황실에서 익힌 여러가지 법도를 우리궁궐에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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