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전쟁박물관은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역사의 고비때 마다 국방상 요충지역활을 수행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제 1전시실
스펙터클한 복합영상을 통해 건국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외세 침략에 맞서 지켜온 강화의 호국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주제관 입니다. 또한 선사시대부터 남북국시대 까지 강화지역의 전쟁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주제관입니다. 또한 선사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강화지역의 전쟁역사를 각종 무기류를 통해 엿볼수 있습니다.
대몽항쟁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오자 무신정권은 강화를 임시수도로 삼고 몽골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삼별초 (1270~1273)가 강화에서 봉기하여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 몽골에 대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정묘.병자호란
1627년 (인조5)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묘호란이후 강화는 군사적 중요성을 인정 받아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1636년 (인조14) 청나라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과 대신등은 강화로,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군에 대한 항ㅇ쟁을 전개하였다. 강화방어의 책임을 맡은 관리들의 태만으로 강화는 곧 청군에게 함락 되었다. 남문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김상용을 비롯하여 많은 관리들과 여인들이 청군에 항거해 순절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결국 국왕은 청에 항복하게 되었다.
천혜의 요새 강화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교차하는 경기만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물자와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곳이다. 또한 토양이 비옥하여 생산성이 높은 반면 갯벌이 넓고 물살이 세서 접근이 어려운 천혜의 요새였다. 특히 고려~조선시대에는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보루의 역활을 수행하였다.
병인. 신미양요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강화도는 19세기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에 상륙하여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는데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과 정족산성에서 치열한 전툴르 벌여 승리 하였다. 1871(고종8)에는 제너럴 셔먼호의 전소사건을 빌미로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강화를 침략하여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는데 광성보에서 이재연장군의 결사항전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냈다.
삼국.남북국시대의 강화
중국으로의 진출과 선진문물의 주요 이동통로였던 강화는 삼국시대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던 장소였다. 3세기 전에 강화는 백제의 영토였으며,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편입되어 혈구군이 설치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통일신라에 편입되었는데 757년 (경덕왕16)에 해구군 844년(문성왕6)에 혈구진이 설치 되었다.
삼국시대의 무기(아래)
철제 갑주: 얇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갑옷과 투구. 기명은 말에게도 갑옷을 입혀 방어력을 극대화 했다.
일제침략
1875년 강화 연안을 멋대로 탐색하며 한강 하구로 진입하려는 일본 윤요호를 초지진에서 포격한 것을 빌미로 일본이 배상을 요구, 이듬해 강화도 연무당에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 하였으며, 강화 사람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의병활동 및 3.1운동을 전개 하였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호국 영웅이다. 강화도의 향토지인 <강도지>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강화도 북쪽에 위치한 시루미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시루봉 중턱에 연개소문이 살던 집터가 있었고, 치마대에서 연개소문이 말을 달렸으며, 오정(우물)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전해진다.
유목제국 몽골과 맞선 고려
13세기 초 몽골에서는 징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징기츠칸은 1214년 금나라를 공격했는데, 이때 금나라에 속해 있던 거란족이 고려 북부에 침입하였다. 몽골과 고려는 함께 거란족을 토벌하였으나, 몽골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당하자 몽골은 1231년 고려를 침공하였다. 3개월 만에 개경이 포위당하자 고려가 화의를 청해 몽골의 1차침입은 일 단락 되었다.
고려의 주권을 지켜낸 강화천도
몽골은 고려와 화의를 맺은 뒤 고려에 다루가치를 파견하고 과중한 공물과 노동력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를 다스리던 무신정권의 최우? ~1249는 몽골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도읍을 강화로 옮겼다. 강화가 임시수도(1232~1270)로 선택된 것은 바다로 둘러싸여 몽골군이 접근하기 어렵고 해로로 조세를 운송하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몽골은 총 6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는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남송과 동맹을 맺고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몽고는 39년간 항전을 계속하다가 무신정권이 붕괴하자 1270년 개경으로 환도 하였다.
강화성곽의 건설
1232년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조성하였다. 천도를 전후하여 궁궐을 둘러싼 내성을, 1233년부터 1237년까지 강화도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았고 1250년에는 도읍을 둘러싼 중성을 쌓았다. 내.외. 중성 모두 토성으로 축조 되었는데 강화중성의 경우 기저부에 석렬시설을 조성한 후 그 위에 팜목시설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흙을 겹겹이 다져 쌓는 과정으로 축조되었다. 강화 성곽은 1259년 몽골과의 화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몽골의 요구에 의해 모두 헐렸는데, 이후 무너진 채 방치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강화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1618년 9광해군10)부터 수많은 개축과정을 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군의 생각
우리 고려군은 대부분이 농민 출신이다 보니 말 타고 활 쏘는 것이 생활인 몽골군에 비하면 개개인의 전투력은 떨어질 수 빡에 없네. 또 기병을 양성하려 해도 초원이 많지 않으니 말을 많이 기를 수가 없지 하지만 고려는 산이 많아 성을 쌓고 충분한 병력을 갖춘다면 방어하가 쉬운 장점이 있다네. 또 적이 닥쳐오면 백성들도 자기 땅을 위해 힘을 모아 병사들과 함께 싸우지.
몽골 장군의 생각
우리 몽골군의 힘은 바로 말에서 나오지. 몽골말은 아랍말이나 유럽말에 비하면 체국가 작고 속도도 느리지만, 사람을 태우고 하루에 100km 이상을 달릴 수 있는 지구력돠 어디에서나 스스로 먹이를 찿아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어. 또 말의 젖과 피, 고기는 우리에게 영양을 보충해주고 말의 뼈로는 화살촉도 만들 수 있지. 덕분에 우리 몽골군은 원정을 떠날때 1인당 5~10마리의 몽골말에 말린 고기만 가볍게 휴대하고 별도의 보급 없이 진군할 수 있다네. 여기에 말을 달리면서 등 뒤로 활을 쏘는 궁술, 마상전투에 최적화된 만곡도, 후퇴와 진격을 반복하는 진술은 우리 몽골 기마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강의 군대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다.
몽골의 고려침략
고려 사회가 무신들이 집권하여 혼란이 지속되는 사이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진이라는 사람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고 , 1206년에는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제국을 건설하였다. 1216년 거란인들이 고려를 공격하여 문제를 일으키자 고려와 몽골이 연합하여 거란인을 제압한 것을 게기로 몽골은 고려에 매년 많은 양의 공물을 요구하였다. 그러던중 1255년 몽골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 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몽골은 교류가 단절되었다. 1231년 몽골은 고려에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냈고 고려와 몽골 제국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강화의 대몽항쟁기
고려정부는 1232년 당시 무인잡정자 최우의 주도아래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1270년까지 약 39년 간 강화는 몽골침략에 대항하는 항쟁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시라는 상황 때문에 규모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강화는 도성으로서 모든 요소를 갖춘 도시였다. 강화천도가 결정된 직후 고려정부는 군대를 동우너하여 궁궐 공사와 3874척에 이르는 내성공사를 착수하였다 천도 이듬해는 외성을 쌓기 시작했고 이 외에도 관청과 각종 건물들을 짓고 중성을 쌓는 등 꾸준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시설을 보강해 나갔다. 그리고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한 고급청자를 사용하였으며 금속활자로 서적을 편찬하였고,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였다. 이처럼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강화는 건축, 공예, 출판등의 분야에서 수준 높은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팔만대장경 (고려시대) 복제품
고려시대무기 (아래)
대장군포
(고려말~조선전기) ㅣ길이 124.5cm ㅣ복제품
대형 총통으로 포신은 철 주물로 제작되었으며 마디의 크기가 크고 포를 운반하는데 사용하는 둥근 쇠고리가 2개 달려 있다.
신포
고려말리기 ㅣ 길이 40cm l 복제품
고려시개부터 사용하던 신호용 화포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올때 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철제 갑옷편
삼별초의 출발지, 강화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이루어진 특수부대이다. 원종(1219~1274)이 몽고와 화의를 맺고 1270년 개경환도를 선포하자, 이에 반발한 삼별초의 배중손. 노영희 등이 6월1일 왕족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여 반몽정권을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6월3일 강화를 출발하여 두 달 후 진도에 정착, 이를 거점으로 개경정부와 몽골에 저항 하였다. 1271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배중손이 전사하자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에 옮겨 1273년까지 항전을 계속하다가 결국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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