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쟁박물관은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역사의 고비 때마다 국방상 요충지 역할을 수행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콜로라도호의 미군 장교들
1871년 미국의 조선원정 (5월 16일~7월 6일)을 위하여 5월 초 일본 나가사키 항에 집결한 아시아 함대는 기함 콜로라도 함을 비롯하여 알래스카. 베니시아. 모노카시. 팔로스 등 전함 5척에 함재대포 85문, 수병 및 해병 1230명으로 구성되었다. 5월 16일 조선을으로 출발하여 5월 30일 마침내 작약도 근해에 정박하게 된다.
5월 30일 인천부의 관원이 의주에서 온 통역관 3명을 대동하고 미국 함대의 콜로라도호를 방문함으로써 조. 미 양측 사이에 비로소 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콜로라도호를 방문한 조선 관리
5월 31일 조정에서 파견한 3명의 대표가 콜로라도호를 방문하여 로우 공사와 회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로우 공사는 그들이 하급 관원이라는 이유로 회담을 기피하여 서신만 수교하였다.
초지 돈대
미군은 6월 10일 약 2시간 동안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조선군 진지를 파괴시킨 후에 상륙하였다.
초지 돈대를 점령한 미군
사진 왼쪽에 면 갑을 입고 전사한 조선군 한 명과 조선군이 사용하던 불량 기포 1문이 놓여 있다.
덕진 돈대를 점령한 미군
6월 11일 새벽 무터 모노 카 시호로부터 맹렬한 포격을 받자 덕진 돈대를 수비하고 있던 조선군은 제대로 전투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오전 7시 30분 미굼에게 진지를 내주고 말았다. 미군은 점령 즉시 덕진 돈대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60여 문의 대포들을 모조리 해협으로 던져버렸다.
손돌목돈대의 전사한 조선군들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서 미군 측에서 맥키 (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 측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용두돈대 원경
6월 11일 손돌목돈대의 함락과 더불어 광성돈대와 용두돈대도 곧 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함락 직후 미군들은 광성보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군사시설 글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6월 12일 오전 소속 함정을 타고 작약도의 기함 정박지로 철수하였다.
탈취당한 수자기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 후 수자기를 탈취하였다.
형제에서 군신의 관계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강화는 독자적으로 청군과 싸워야 했다. 청군이 강화성 일대를 점령하자, 봉림대군(후에 제17대 왕 효종)은 청군의 항복 요구를 수락하였다, 1월26일 청군은 세자빈.왕자. 종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강화를 떠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므른 지 한 달이 조금 지난,1월28일. 조선 조정은 청이 보내온 태종의 외교문서를 받아들이면서 전쟁은 끝이 났으며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인조는 항복을 표시하는 의미로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다.
연미정 편액 燕尾亭 扁頟
김영수(金永壽, 1829~1899), 김이익(金履瀷, 1743-1830)이 강화유수를 지내면서 연미정의 아름다움과 풍광을 시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바다에 돈대가 있네 그 돈대 위에는 정자가 있다네
고성 강도의 풀과 나무 가을에도 푸르구나.
광할한 압록 강물 흘러흘러 층층히 조수가 되었고
연미정에서 압록 강물 흘러 흘러 층 층히 조수가 되었고
연미정에서 나뉜 바다 길 섬 하나 떠 있네.
오래 된 헛된 탄식 다소의 진루가 알고
끊이지 않은 세상걱정은 오고 가는 배에 실어 보네.
자욱이 깔린 구름 안개 속으로 물새 들이 오락가락하니
이곳이 강남의 두약주 이네
(생략)
장녕전 편액 長寧殿 扁額
연미정의 아름다움과 강화의 중요성을 표현한 글이다.
강도의 아름다운 경치라면 모두 다 이 정자라네
하늘 끝 멀리서 청포입은 전령 학 타는 꿈을 꾼 다네
흐르는 물 함께 갈려 나가니 마치 등왕각의 띠 같구나
늘어선 봉우리들 마치 초산의 병풍을 대하듯하고
크고 작은 배들 바다를 이루고 센 강물 바다로 흘러가네
해안 진과 병영들 적들을 막고 보호하는 형국을 이루었네
지형의 이로움과 사람들의 화합을 이 섬이 담고 있다네
우리 삼한의 세세의 보고이며 영원히 새겨질 기록이라네.
무오년 가을 (음력8월)에 장녕년 전령 한용우
철제환도. 철궁 ㅣ 鐵製環刀 . 鐵弓 ㅣ17세기
정묘호란 당시 인조를 수행한 황효원 (黃孝元) 장군이 생전에 사용했던 무기류이다.
호란, 전쟁을 기록하다.
'기록의 나라'라고 불리는 조선은 호란의 발생과정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와 함께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鄭瀁,1699~1668)이 쓴 강도피화기사江都詖禍記事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에 거주한 '청주 한씨淸州 韓氏' 일가의 참상을 담은 글 이외에도 강도일기江都日記 강도몽유록江都夢䢟錄 등 호란과 관련된 강화의 기록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강도피화기사 江都被禍記事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 (鄭撤)의 손자 정양(鄭瀁, 1600~1668)이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겪은 참상을 기록한 글이다.
강홍립전 姜弘立專
조선 중기 무신 강홍립(姜弘笠, 1560~1627)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담은 책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중립정책에 따라 후금에 투항했다가, 정묘호란 때 강화에서 후금과 조선의 화의를 주선한 뒤 역신으로몰려 관직을 박탈 당했다.
한씨경란기 韓氏經亂記
병자호란 당시 강화에 거주한 청주 한씨(淸州韓氏) 일가의 참상을 기록한 글이다.
정족산성 접전사실
양헌수 장군이 손돌목을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병인일기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이 출전한 1866년 9월3일부터 10월 26일까지 52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어재연 교지
조선 ㅣ 1867년 11월5일 어재연魚在淵을 가선대부 해회령도호부사로 임명하는 교지.
윤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
미국의 무력에 굴복해 1854년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1867년 무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천황을 앞세운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1868년 부국강병책인 메이지유시늘 추진하였으며, 1873년부터 국민징병제를 실시하고 서양식 장비와 훈련을 통해 신식군대를 양성하였다. 특히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양으로부터 최신식 중대형 군함을 수입하고 이를 통해 자체 군함 건조기술을 개발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외교문서 접수 거부 및 일본의 부산왜관점거사건 등으로 인해 양국간 공식접촉이 단절되자 무력을 동원하여 1875년 윤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강화연안을 멋대로 탐색하며 한강 하구로 진입하려는 윤요호를 향해 초지진 포대가 포격을 가하자 윤요호는 함포를 사격하여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으로 이동하며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일본은 윤요호 사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였으며, 1876년 강화도 안무당에 일본의 요구대로 불평긍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불랑기포 佛狼機砲
조선 중기에 도입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는 '프랑크(Feank)'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16세기 초에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전해져 조선 후기까지 주력 화포로 사용되었다.
뇌홍식 권총 ㅣ 1900년대 초
조선 후기 유럽에서 들여온 총이다. 화약(뇌홍)을 발화물질로 하여 공이 때림으로써 점화시키는 총이다.
군인과 의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전쟁과 강화
북한군은 개전 다음날 국군 병력이 전혀 배치되지 않았던 강화로 병력을 침투시켜 국군의 퇴로를 막으려 했다. 결국 김포지구의 국군도 28일 퇴각할 수밨에 없었다. 서울 수복 때 해방되었던 강화도는 1951년 1.4후퇴때 다시 북한군에 빼았겼다 탈환되었다. 당시 반공 청년들과 북한지역에서 탈출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강화도 유격대는 적 후방 지역에서 북한 정규군에 대한 기습, 보급로 차단, 민심교란 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7월 주한 극동부 울프백지가 창설 되면서 울프백 제1부대로 활동을 이어 갔다.
강화를 지킨 해병대
삼면이 바다이며 섬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륙 양면 잣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년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1950년 9월 수도칠환 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제3대대는 적 2개 대대를 격파하고 강화의 김포지역을 장악하였다. 1.4후퇴 이후 재반격 작전이 진행되자 해병대는 1951년 2월부터 전략도서 확보작전을 수행하였고, 4월2일 독립 제41중대를 편성하여 교동도를 탈환 하였다.
강화의 지킴이 청룡부대
인천 강화 및 김포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제2사단 청룡부대는 1965년 제 2여단으로 창설되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전쟁에 참여 하였으며, 귀국과 동시에 제5여단으로부터 서부 전선과 서울의 방위임무를 인수받았다. 오늘날 강화도 및 그 부속도서에는 제2사단 5연대와 8연대가 주둔하여 북한의 수중 침투에 대비해 철통같은 경게를 펴고 있으며, 특히 해상. 강상기동대를 운여하여 한강하구와 서해연안을 24시간 수색하고 있다.
오늘날의 호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아직도 세계 각지에서 종파와 이념, 정치적 이해에 따른 갈등으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래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세게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민족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 특히 강화는 북한과 거리가 불과 1.8Km 밖에 되지 않으며 개풍군과 연백 군에 접해 있어, 강화 평화전망대 (양사면 철산리 산 6-1)에서 북한을 바라보면 가깝고 또렷하게 북한 땅을 볼 수 있어 많은 이산가족들이 방문하고 있는지 역이다.
반만년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우리 선조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왔다. 그러한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평화로운 오늘이 있음을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또한 세계평화와 화해를 위해 우리나라가 제 몫을 해낼 수 있도록 국민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응 다해 국력을 키워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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