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4.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평전 : 독립운동의 선구자

동방박사님 2022. 7. 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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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정의가 짓밟힌 우리 시대
이상설의 정도정신을 아로새기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보재 이상설의 삶과 업적을 이야기한다. 이상설의 유언에 의해 유품과 저작 대부분이 불태워져 공훈에 비해 전해지는 자료가 많지 않음에도, 저자는 그의 작은 흔적마저 놓치지 않고 살피고 있으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평론을 덧붙이고 있다. 남은 자료의 부족함 탓에 이상설 전기는 윤병석 교수의 “이상설전”을 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이 평전은 하나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상설을 잘 모를 것이다. 안다고 하여도 헤이그특사의 일원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던, 독립운동사에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선명히 기록해야 할 독립운동의 독보적인 선구자이다. 무도(無道)의 세상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에, 이 책이 홀연히 국권회복투쟁에 나서 치열하게 적과 싸운 이상설의 정도정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목차

여는 말_ 이상설 선생, 그는 누구인가?
추천하는 말_ 보재 이상설, 그분을 다시 광장에서 만납시다

1장 출생과 학문 연구 시기
2장 학문 연찬과 출사 시기
3장 벼슬을 버리고 구국운동에 나서
4장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선정
5장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 당해
6장 구미순방하며 을사늑약 반대 활동
7장 연해주에 독립운동의 둥지를 틀어
8장 국권회복투쟁에 선구적 역할
9장 권업회 창설과 『권업신문』 발행
10장 국권회복운동의 마지막 투혼
11장 비통한 서거와 추모

닫는 말_ 보재 선생의 큰 업적
 

저자 소개

저자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
 

책 속으로

이상설은 국망에 처하여 울고만 있지 않았다. 즉각 행동에 나섰다. 조약은 매국 오적만이 찬성했을 뿐 황제의 비준절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즉각 상소를 통해 고종이 이를 폐기할 것을 주청했다.

이상설이 행한 미주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제국주의화된 열강들의 거대한 장벽 앞에 성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크로렌스 위임스가 『헐버트전기』에서 “당시 광무황제와 헐버트박사, 이상설·이준·이위종은 멸망하는 국가를 위하여 모두 최선의 노력을 바쳤고 더 말할 여지도 없이 훌륭한 솜씨로 수행하였다.”라고 평한 그대로였다.

이상설은 1910년 8월 국망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병탄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반대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는 국망을 계기로 십삼도의군의 활동이 전이된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상설은 성명회의 활동내용 가운데 핵심되는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나아가 대규모 병탄반대 서명록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혁명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몇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한성정부와 상하이 임시정부가 대표적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한 대한광복군정부는 이들보다 5년 앞서 노령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수립된 국망 이후 최초의 임시정부(망명정부)인 셈이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기록되어야 할, 하지만 기억조차 못하는
보재 이상설의 큰 업적

보재 이상설은 교육자·독립운동가임과 더불어 절세의 경륜가였다. 국치를 당하지 않았거나 생존하여 광복을 맞아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다면 새 국가 건설에 큰 경륜을 펼쳐, 이 나라의 기틀을 좀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역사에 선명히 기록되어야 할 독립운동의 독보적인 선구자였지만, 우리는 그의 업적은 물론 이름 석 자조차 잊고 살아간다.
그럼 이상설은 도대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얼마만큼, 어떤 기여를 하였을까? 관련 자료는 많이 소실되었지만, 작은 흔적들을 모은 저자 덕분에 우리는 이 책에서 보재 이상설의 업적과 사상을 충분히 살펴볼 수가 있다. 저자는 이상설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막고자, 고종에게 ‘순사직’하여 조약을 파기하고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둘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서숙을 만들고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셋째,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어 건너가,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세계 언론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밝혔으며 미주에서 애국동지대표회와 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넷째, 13도의군을 편성하고 무력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독립운동단체 성명회를 조직하고 8,624명의 서명을 받아 성명회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섯째, 한인 독립운단체 권업회를 창설하였다. 일곱째, 국치 후,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5년 앞선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여덟째, 신한혁명단을 창단하고 본부장에 추대되어 마지막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였지만, 그의 행보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한 걸음 한 걸음이었다.

무도의 시대,
이상설의 정도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덧 보재 이상설 선생이 서거한 지도 100년이 되어간다.

25세에 조선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한 자질과 능력으로 보아 시대와 적당히 타협하고 이에 따라 처신하면서 살았으면 일생 평안하게 권부를 누리면서 지낼 수 있을 인물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의 후손들은 선대가 남긴 유산으로 대대로 권문세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늘 정도(正道)를 지키며 끝까지 치열하게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싸웠다. 그런데 이상설을 비롯한 여러 독립투사들이 지킨 이 나라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소위 말하는 흙수저를, 친일파의 후손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남이 세습되는 세상이다. 교과서 속 역사는 정통사가 아닌 식민지근대화론을 공인하고 친일파들의 죄상을 면탈하는 변통사로 전락하게 할 뿐이다. 이상설의 글 중에서 정치하는 사람의 병폐를 지적한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정계에 대입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어, 그가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다면 이런 무도(無道)의 세상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의 신념과 사상은 늘 바른 길 위에 있었다.
역사정의가 짓밟히는 어지러운 시국, 시대와 적당히 타협하여 편히 권부를 누리지 않고 홀연히 국권회복투쟁에 나서 해외를 떠돌여 치열하게 적과 싸워온 이상설의 정도정신(正道精神)을 되새겨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