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4.일본군함도 31

식민지역사박물관 "강제동원증언전" 참관

코로나와 무더운 더위의 오늘이지만 마음먹고 식민지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강제동원 증언 전 를 참관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과 공동 주최하는 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노동 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한다.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2015)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래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사랑 특집호 회보 201908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강제동원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징용공 아닌 한반도 출신 노동자다?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아베 정부는 '징용공'이라고 불렀던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 구..

다카시마 & 미쯔비시

타카시마 탄광의시작 [일본측설명] 개국이 시작된이후, 외국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높아지자 사가번의 스코틀랜드 출신 상인 글로버와 함께 1868년 사가번 (담당 :마쓰바야시겐조)과 글로버는 타카시마 탄광의 공동경영 계약을 맺고 합병회사를 설립하여 탄광개발을 시작 하였습니다. 영국인 기술자 모리스를 초빙하여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차에 의한 수직갱도인 타카시마 탄갱 (홋케이정갱)을 만들엇습니다. 타카시마 탄갱은 1881년부터 미쓰비시가 소유하게 되었고, 타카시마 탄갱의 석탄기술은 일본 근대탄광산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시마 (군함도) 모형

하시마 (군함도) 모형 하시마에서는 이미 19세기 초에 사가번에 소규모의 채탄을 하고 있었으며, 1890년에 미쓰비시 합자 회사가 경영하게되면서 본격적으로 해저탄광으로서 조업이 시작되엇습니다. 석탄의 생산량이 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1916년에 좁은 섬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골조의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고 ,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층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좁은 섬에 빾빽이 서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어 그 특징적인 섬의 모습이 군함을 닮았다하여 "군함도"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이름도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전성기에는 약 5,300명이 살앗으며, 인구밀도가 당시 도쿄도의 약9배로 세게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 수요..

다카시마 석탄자료관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항구에서 18.5km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밑 수백미터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갗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탄광이자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 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첬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및 그 가족의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최악의 지옥섬 (하시마탄광)

최악의 지옥섬 (하시마탄광) 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외관상으로는 극도의 황량함이 섬 전체를 감돌고 있다.보통 섬을 둘러싸고 자라는 울창한 숲이 이 주변에는 없다. 모래갈린 해변 조차 볼수 가 없었다.수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의섬 오직 시멘트로 싸바른 10m높이의 방파제가 섬과 바다의 경계를 두루고 있어 자연이 아닌 인공섬의 분위기를 물씬 퐁겼다. 섬전체가 탄광으로 개발된곳 , 바다속 지하 곳곳으로 수백 미터씩 갱도를 파내려간 전형적인 해저 탄광이다. 미쓰비시 광업은 다카시마 탄광에이어 1890년 하시마탄광을 인수 했다. 이곳 석탄은 순탄 발열량이 높고 유황과 인의 함유량이 적은 최고급탄으로 , 주로 제철이나 선박용으로 쓰였다가 .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면서 하시마탄광은 채탄량을 증가시키라는 심한 압박을 받았..

하시마탄광.군함도모형

하시마탄광의 흔적 하시마는 원래 사암바위가 가파른 작은 섬으로 남북320m 동서 110m 정도였다고 생각되며, 현재의3분의1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석탄채굴의 발전에 따라 해면의 매립에 의한 섬의 확장이 반복되며 1931년 즈음에는 현재의 모습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크기는 남북으로480m, 동서로160m 면적 63,000제곱미터 입니다. 하시마가 해저탄광의 섬으로 알려져, 1890년에 미쓰비시사가 경영하기 시작하여 1974년에 폐광하기 까지 85년간 조업이 이루어 졌습니다. 하시마는 동쪽으로 생산시설이 있었으며 서쪽에는 주거지역 이었습니다. 주거구역은 좁은 입지에 낞은 주거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 최첨단기술을 사용한 고층아파트가 많이 지어졌습니다. 석탄의채굴 미쓰비시가 경영을 시작한 1890년부..

나가사키 군함도 가는길에 다카시마 도착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항구에서 18.5km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밑 수백미터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갗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탄광이자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 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첬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및 그 가족의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타카시마 탄광의시작 [일본측설명] 개국이 시작된이후, 외국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미이케탄광(이야노하라겡)

미이케탄광(이야노하라겡) [일본리프렛번역] 메이지31년 (1898) ~쇼와6년 (1931년)에 활약한 미이케 탄광의 주력 갱 이었습니다 철강제의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와 벽돌의 권양기실 건물에 남는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사적이며 세계유산 일람표에 기재된 "메이지일본산업혁명유산 . 제철.제강.조선. 석탄산업"의 구성자산 입니다 매일 10시부터 17시까지 공개 (2015년 8월현재) Tel 0944-41-2539 (미야노갱 가이드휴계실 . 가이드연락이 불가능경우도 있습니다)

미이케탄광 (만다겡)

미이케 탄광의 역사 [일본리플렛 내용] 미이케 탄광은 1496년에 한 농부가 석탄을 발견 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1860년대부터 근대국가를 지향한 일본은 1873년 미이케탄광을 국영탄광으로 하였습니다. 이후 신규갱도를 조영하여, 석탄의 인양에 증기동력이 사용되는 동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어 근대화의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동시에 산출된 석탄은 증기동력이나 제철에 사용되어 근대산업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1889년 미이케탄광은 미츠이가 경영을 시작하여 국영탄광시대부터 기술자였던 타쿠마의 진두지휘하에 한층 더 근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유럽의 최신기술을 도입하여 캇타치갱, 미야노하라갱이 개갱되고 그 집대성으로 개갱된 것이 만다갱 입니다. 미이케 탄광과 만다갱 만다갱은 미이케탄광 시스템의 하나로서 가능해 졌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