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4.인천시 관광 46

자유공원내 (송학동 옛 시장관사) 02-12

송학동 옛 시장관사 중구 응봉산 기슭에 있는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1883년 인천 개항 후 한세기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경관과 정원으로 이름이 나 있다.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1900년쯤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일본식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1965년 인천시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한옥 건물을 신축하고 1966년부터 35년간 인천 시장공관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총17명의 시장이 생활했다. 2001년부터는 인천직할시 승격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재단장하여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탄생 하였다.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02-12

구) 제물포 구락부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도시였다. 다른 개항장과 달리 서양 각국의 외교력과 경제활동이 청.일을 압도적으로 견제하면서 자주적인 개항장으로써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해준 도시였으며, 1901년 6월 응봉산 자락에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 상징적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 지난 한 근현대사를 시민과 함께 해왓으며, 건축 당시의 외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와 러시아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근대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1953년 4월부터 1990년 5월까지는 시립 박물관으로 활용되며 인천 시민의 사랑을 한껏 받기도 했었다.2020년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시의 문화재 활용정책 제1호 사업으로 재개관을 했으며, 자주적 개항의 꿈..

자유공원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 한미수호 100주년기념탑.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02-12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영어: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1882년(고종 19년) 조선과 미국 간에 조인된 조약이다.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 간에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처음에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수호 조약을 맺으려고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領事) 곤토(近藤眞鋤)로 하여금 동래부사를 방문하고..

차이나타운 (공화춘 : 짜장면 박물관) 02-12

인천 선린동 공화춘 共和春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으로 중국인 전용 주거지인 청국 조계지에서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로 시작하였다. 1911년 산동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 (于希光)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개업하였다가 이듬해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 이라는 의미의 공화춘으로 개명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래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으로 70여 년간 그 명성을 이어왔고, 6.25전쟁 이후에는 짜장면 등 대중 음식을 보급 하였다. 공화춘은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 건물로 화교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다. 연안부두 신축으로 인천역 일대 상가가 쇠락하면서 18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의선당) 02-12

의선당 (義善堂) 1883년 청나라 영사관이 인천 선린동에 설립됨에 따라 선린과 북성 두 동은 화교들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점차 차이나타운(청관)거리가 되었다.. 그해 인천에 체류하던 화교들은 후에 고향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작은 묘당을 건립하였고 '의선당' 이라고 불렀다. 정전은 부처님의 광명이 비추는 과세음보살, 용왕신, 의를 중하게 여기기를 천년에 이어 간다는 관공(관우), 마조선, 호삼할아버지등 다수소상을 모시는 것 외에도 다양한 민간 신앙신을 모신다. 의선당은 중국인들이 현지에 거주하고 바다에서 향해하며 무역의 교류나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평안과 화합하기를 기원하고 더욱 화교가 단결하고 정의가 가득하도록 살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차이나타운 / 인천역 / 동화마을 02-12

착공과 개통 1897년 3월 22일 대한제국은 주한미국전권공사 겸 기업가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사업을 맡겨 기공하였다. 미국이 기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철도규칙’(1896. 7. 15)을 반포하면서 철도규격을 표준궤로 채택하였는데, 미국 철도가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업권을 가져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 조직이 매우 불안정하여 조만간에 나라로서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경술국치) 대놓고 소문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미국의 대한반도 투자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리고 1898년에 자금난을 겪어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당해 5월 10일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5] 1899(광무 3)년 9월 18일에 완공시킨다(철도의 날). 당시 ..

인천 영종역사관

조선 초기 자연도(현재: 영종도)의 삶자연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자 조운수로 (漕運水路)의 역할을 수행하여 송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객관 '경원정'이 있었다. 다라서 자연도에 주둔하던 수군과 말 목장 관리인, 소금을 생산하여 수익을 얻던 주민까지 적지 않은 수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한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후 조선초기까지 유배지로 쓰였다.당시 섬 주민들은 주로 막집(幕室)이나 초가집에 거주했다. 그러나 조선초,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략으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고, 국영 말 목장을 설치하는 정책에 다라 적은 수의 주민들만이 살게 되었다.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등의 집이 30여 호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리지에 전한다.  병인양요고..

월미도 --> 영종도 유람선 (구읍뱃터)

영종진 화포영종진(永宗鎭)은 국가 보장처였던 강화도의 방비를 목적으로 1653년 남양도호부의 영종진에서 자연도(紫燕島)로 이전 설치 되었다. 그리고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자연도가 영종진이 되었고,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에 포대가 배치되었다.영종진 포대에는 자연도로 이설 할 당시의 화포와 1869년 훈련도감에서 보내준 지자총통, 대포, 불랑기 그리고 1874년 운현궁에서 별도 제작하여 강화, 김ㅁ포, 영종에 나눠 준 대포,중포, 소포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그러나 1875년 일본의 포격에 의해 영종진이 파괴되고 화포 36문을 약탈 당하면서 현재는 그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종진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위해 이 곳에 목원하여 전시된 화포는 김포 덕포진 대포를 복제한..

인천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 구락부1891년 조직된 제믈포 구락부는 각국조계를 미롯한 개항장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친교를 위한 공간이었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이다. 189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에 거주하는 구미인은 해관이나 세창양행의 근무자들과 소수의 미국인 선교사에 불과 했는데,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수가 급증했다. 1900년 지금의 자리에 2층 조적조 건물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6월에 회관준공식을 거행했다. 회원은 60명까지 증가 했으며 매월 두 차례 친목 모임과 댄스파티를 열었다. 1914년 조계제도가 폐지되면서 구락부 회관은 여러차례 용도가 바귀었는데, 해방후에는 인천 사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07년 ..

인천 자유공원 (시민애 집) : 고노주택 터, 구)인천시장 공관

(현) 시민애 집 : (구)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제물포구락부 맞은편에 있는 인천역사관 자리에는 잡화상과 석유상을 운영하여 부를 쌓았던 일본인 고노다케노스케의 주택이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평양에서 잡화상을 열었던 고노는 1896년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조선에서 행상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연락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계림장업단을 조직하고 평양에 지점을 두었다. 그가 조직한 계림장업단은 사실상  일본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며 활동한 무장행상단이었다. 이후 고노는 석유판매조합 조합장, 수입상 조합장 인천미두취인소 이사, 아사히 양조 이가, 월미도유원회사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경제 침탈의 선두에서 활동 했다.고노주택은 풍광이 좋아 해방이후 송학장 이라는 사교홀로 사용되다가 1966년 인천시가 매..

인천 개항장 (아트 플랫폼)

조형물의 공간개입이 의미하는 볼거리와 공공성 : '개항장 역사 시계탑''시계탑'은 개항장의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시계의 탑은 그 형식에서 애꿎게도 이 자리에 와 있을 뿐이다. 아니다 굳이 시계탑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가 바로 개항장의 역사를 몸서리게 간직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탑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계와 탑이 필요했다. 개항장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는 장소다. 역사에 대한왜곡을 반성케 하는 장소다. 역사를 역사로 바라보게 하는 장소다. 시계는 역사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이다.개항장의 에피소드를 애니메이션으로 담았다. 비 연속적인 내용들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함으로 정보전달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다. 정보를 모아 감상자들이 '역사'와 한데뭉처 제..

인천 개항장 (일본 조계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조계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산이다. 약 130년의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조계지 경계게단은 중앙에 석조계단이 형성되어 있고양단을 중심으로 급한 경사인 점을 감안 하여 계단참을 두고 있다.  이곳에 조경 식재 공간을 마련하여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검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변화하게 들어서 있다. 청 일조계지 경계 계단은계단 자체의 가치보다 역사성 및 장소의 측면적 가치가 높다. 구) 일천 일본제1은행지점인천..

인천 차이나타운

선린동 1- 5주택 청일조계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눈에 모아도 오랜 세월를 머금고 있는 2층 벽돌집이 있다 . 일명 '전서경 주택' 으로 불리는 이 주택은 현재 차이나 타운 내에서 중국 전통양식의 원형을 거의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이처럼 본래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구의 저장성 출신의 점금근, 전신인, 그리고 전 서경에 이르기 까지 한 집안이 삼대째 거주하며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금근은 1903년부터 "순태"라는 양복점을 경영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내벽을 맞댄 형태로 3세대가 거주하도록 지은 연립 주택으로 1.2층 모두 생활공간으로 사용한다. 건물 1층 전면에는 거실이 있고 중앙에는 부엌과 2층으로 연결되는 게단. 후면에는 방..

인천 답동성당

인천 답동 성당 (仁川 沓洞聖堂) 답동성당은 인천지역 천주교회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했다. 1899년 프랑스 외방전교회 빌렘 (J Wihelm)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언덕에 성당의 초석을 놓는 정초식을 가졌다. 이후 (E Coste)신부의 설게로 1897년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 양식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기존 건물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개축 공사를 완공하면서 아치형태가 많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형한 것이다.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중요한 곳에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있,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곷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는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 부분에 장식..

인천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 영화학교.싸리재.애관극장.신포시장

영화초등학교 본관동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신식 교육 실시와 선교의 목적으로 1892년에 설립된 영화초등학교의 본관동 건물은 1910년에 착공하여 1911년에 완공하였다. 반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된 맞배지붕 구조의 건물로 재래식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현관 부분은 돌출되어 '십(十)'자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1954년 건물 입구쪽의 돌출 부분을 증축하여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증축된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인천 수도국산 박물관 & 송현배수지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송현배수지는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 계획 시설로 1906년 11월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다. 1910년 노량진에 수원지 정수 시설이 준공되자 노량진과 인천 사이에 32.62km의 수도관을 부설하여 1910년 12월10일부터 급수를 시작하였다. 배수지 시설로는 제수변실과 화강석으로 된 23단의 계단과 철제 정문이 있다. 제 수변실은 배수지에서 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 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물로서 원통형이며 철근을 넣치 않고 굳힌 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다. 1994년 재건축 이후 현재 제수변실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송현배수지의 부지 면적은 38.845제곱미터이고 7,000제곱미터의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다. 저수능력은 20,000톤이며 이곳에서 급..

강화산성.에버리치.이건창생가

강화산성 남장대 장재는 전쟁시 군사지휘에 용이한 곳에 지은 장군의 지휘소이다. 규모가 크고 중요한 성곽에 두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을 수행하였다.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시대 몽골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최우가 1234년 각 도의 도민과 장정을 징발해 내성.중성.외성으로 구분해 축조하고 그 안에 궁궐과 백사의 건물을 개성의 것과 비슷하게 건립하였다. 둘레는 7.1km의 강화산성에는남산과 북산에 각각 남장대와 북장대 그리고 서문안에 서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 진것을 2010년 남장대만 복원 하였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이 나무는 4월니면 잎보다 지름 3~5cm의 흰꽃이 먼저피고 열매 맺는 가을이면 노랗게 익는다. 나이는 400년이고 높이는 3.8m 땅위 2.8m높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용트..

강화 산업조합

, 산업조합의 역사는 지워졌고 조양방직의 역사는 지금도 흐르고 있을까요? 역사는 승자기록의 역사일까요? 강화의 가난한 서민들의 생존기반이었던곳 집에서 직물을 짜던 8천명의 농민들 여성에게 직물 짜는 법을 가르치다가 한글을 가르쳐야 했던 청년들 8도를 다니며 직물을 팔던 사람들 노동자.농민과 함께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던 조합장과 직원들 이들에 대한 기억도 그렇게 흘러 사라진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마음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본가들과 소위 지역 유지들의 악날한 행동과 함께 흘러갔다. 그렇게, 그렇게 사라진 기억이 되었다. 조양방직과 심도직물만 남았다. 얼마나 교묘한 역사 왜곡인가! (최태육페이스북에서)> "황우천(1894~1953)은 부근리에서 출생하여 경성중앙학교와 일본 경응慶應 대학을 졸업하고 19..

강화도 교동 대륭시장

강화도 교동 대륭시장 대륭시장은 6.25 때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주민들이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고향에 다시 돌아갈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따 만든 골목시장이다. 50여년간 교동도 경제발전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시장을 만든 실향어르신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인국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시장의 규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2014년 7월 교동대교 개통과 함께 1960년대의 영화세트장같은 모습의 대륭시장을 카메라에 담기위한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강화전쟁기념관 (3.4관 전시실)

강화 전쟁박물관은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역사의 고비 때마다 국방상 요충지 역할을 수행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콜로라도호의 미군 장교들 1871년 미국의 조선원정 (5월 16일~7월 6일)을 위하여 5월 초 일본 나가사키 항에 집결한 아시아 함대는 기함 콜로라도 함을 비롯하여 알래스카. 베니시아. 모노카시. 팔로스 등 전함 5척에 함재대포 85문, 수병 및 해병 1230명으로 구성되었다. 5월 16일 조선을으로 출발하여 5월 30일 마침내 작약도 근해에 정박하게 된다. 5월 30일 인천부의 관원이 의주에서 온 통역관 3명을 대동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