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자유테마여행 (2006~) <여행지>/6.인물기념관 24

셋이서 문학관

셋이서 문학관 은평한옥마을을 대표하는 문학관이라는 느낌이 바로 든다. 은평한옥마을을 처음방문하는 분들도 주차장에서 100m 걸어서 한옥마을 입구를 들어서다보면 바로 찿을수 있다. 우리시대의 거장 천상병시인. 이외수작가. 중광스님 세분의 모습을 간단히 볼수 있는 전시공간이 2층 한옥 전시장에 마련되어 있다. 2층계단을 올라가면 2층거실에 처음 맞이하는 곳이 천상병시인의 전시물 들이 있다. 작은복도 옆으로 3평 정도의 이외수작가의 방이 있고. 바로 구석으로 중광스님의 화실이 작게 꾸며져 있어 볼만하다. 한옥마을 을 관광하기전에 유명한 예술인들의 고뇌외 찬 지성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이봉창의 역사 울림관

이봉창 의사 (1901~1932) 효령대군 후손으로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전주 이 씨와 모친 밀양 손 씨의 아들로 출생하여 용산 문창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1월 중순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투쟁에 투신할 것을 맹약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본 국왕 폭살을 계획하였다. 1932년 일본에 도착한 뒤 상품은 일본에 꼭 팔아 버리겠으니 안심하소서 라는 안착 신호를 보내고,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를 저격하였으나 폭발시키지 못했지만 일본인에게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일본 이치가야 형부 소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46년 7월..

백범 기념관

백범기념관 건립자 :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고 효창동 255번지 백범 (白凡) 김구(金九) 선생 (1876~1949)은 그 생애를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바치신 우리 겨레의 영원한 스승이시고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이시다. 백범기념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민주.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분투하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0년 6월에 기공하여 2002년 10월 22일 개관하였다. 근. 현대사 전문 역사박물관인 백범 기념관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대한민구 임시정부의 역사와 한국 근. 현대사를 이해하고 조국의 자주. 민주평화 통일..

우당 이회영 기념관 방문

이회영 기념관 남산 기슭은 우당 이회영 가문과는 인연과 내력이 깊은 곳이다. 경주 이 씨 백사 공파 으뜸이 되는 백사 이항복이 남산 북쪽에 살았다. 백사 9대손 귤산 이유원은 백사사에 살던 집터를 수습하여 당시 쌍희정으로 희복 하였다. 이곳에서 우당과 6형제 등 가솔들은 시련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모모 하였다. 쌍희정에서 몇 백 걸음에 이를 수 있는 곳에 상동교회를 세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산자락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작은 능선을 이루는 곳에 종현 성당(명동성당)이 있고 그 앞쪽 일대를 저동이라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서 온 위안스카이는 이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숙소로 정했다. 이희영네 집이었다. 이희영 가문이 남산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

남한산성 만해 한용운 기념관

만해 한용운은 누구인가? 만해 한용운 선생 (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불교계 의 개혁과 재중 화를 위해 조선불교 유신론 (1913)과 불교 대전(1914)을 차례로 저술하였으며,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언론 활동을 통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만해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인간의 기본정신인 자유. 평등. 평화사상에 입각한 독립은 당연한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민족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1926년에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들의 염원을 "님"이라는 동양적 정신과 한글의 운율로 표현하여 시문학사, 사상사에 있어..

양주 독립운동가 조소앙 기념관

청년기 수학과 일본 유학시기조소앙은 1887년 4월 8일(음력) 경기도 쇼하군 (현파주시) 월롱면에서 부친 조정규(趙精奎)와 모친 박필양의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2년 7월 만15세의 나이로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하여 사서삼경들의 유교경전, 만국역사, 각국지리, 작문, 산술 등을 익혔다. 성균과 재학중인 1903년 이하영등 친일정부관료들이 산림등의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기려하자, 신채호, 유인식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선생은 이것이 자신이 참여한 최초의 학생운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과 더불어 일본군의 대한제국 영토 내에서의 행동과 군사기지 설치자유를 강요한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자, 성균관을 그만두고 황실 유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합..

부산 박차정의사 생가

박차정의사 생가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319-1번지에 위치한 박차정의사 생가는 1944년 34세의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항일 운동가 (박차정 1910.7.7.~1945.27)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출생한 박차정의사는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현 동래여자고등학교)을 입학하여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동래지부 회원. 동래 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졸업한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사연구부장, 상무위원, 선전부장, 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항일 운동에 이바지 하는 한편, 그 해 12얼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

충남 심훈기념관

심훈 (1901~1936)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挺)의 3잠 1녀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도, 1917년 왕족 이해영(李海暎) 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토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에 입학 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 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관심을 기울였다.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長恨夢)이 영화화 될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영화 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유관순기념관

유관순 (1902~1920)유관순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으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압박에 저항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추모의 염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작은 의문이 따른다. 박은식의 [대한독립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만세독립 당시 무려 7천여명의 생령이 일제 총칼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수많은 애국지사들 가운데 유관순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경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면서 부터였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서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고, 황도..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는 대한제국기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참담한 종말을 맞고 있을때 불타는 애국심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의 영웅이시다.2010년 새로히 건립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안의사의 단지동맹을 상징하는 12기둥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시실에는 안중근의사의 출생에서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 전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이태석신부 생가 송도성당

이태석신부 생가 이태석 신부는 1962년 9월 부산시 서구 남부민2동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나 성직자와 의사로서 사랑과 봉사의 참된 삶을 살아 왔습니다. 2001년 사제의 품을 받자마자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tonj)에 가서 선교, 의료. 교육,문화등 전 분야에서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펼처 열악한 톤즈마을을 부흥시키고 톤즈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으나, 2010년 1월 대장암으로 4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나눔의 시작은 내가 가진 것을 배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며, 가난한 이와 아픈 이들, 나약한 이들을 위해 사랑의 다리가 되고자 하셨던 신부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25:40) 하신 예수닌의 ..

부산개항 안용복 기념관

조선 세종 때 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 본영(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을 부산포에 두었다.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이름이 바뀐 것과 울산의 개운포(開雲浦)로 영을 옮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부산포로 다시 옮긴 것은 1635년(인조 13)이었다. 그 뒤 1652년(효종 3)에 영을 다시 개운포로 옮겼다. 부산포는 왜국(倭國)과 가까워 일찍부터 군사시설을 강화하였는데, 이곳에는 부산진(釜山鎭)이 함께 있었다. 부산포진은 군사체제상 동래도호부사의 지휘를 받았으며 부산포진 첨사(僉使)가 다스리는 부산진성은 주위가 5,356척이고 높이가 13척이나 되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鄭公壇) 터가 성의 남문이 된다. 성 안에는 130여 명의 상주군(常駐軍)이 있었고 6척의 군선(軍船)이 있었다...

부산 요산 (김정한) 문학관

요산 김정한 선생 요산 김정한 선생 (1908~1996) 은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민족문학의 눈부신 성취를 이끈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분이다. 1936년 단편소설 '사하촌" 으로 등단한 뒤 선생은 민족사의 질곡을 민중과 더불어 견더 내면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주변부 인간의 현실을 양심적인 시선으로 고발 하였으며 , 분단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자신의 문학과제로 삼았다. 선생은 불의의 부자유에 맞서 싸운 양심적 지사 였으며, 평생 부산 경남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삶의 텃밭을 지켜낸 파수군 이었다. 요산이 세상을 떠나신 뒤 금정산 자락에 앵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지어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요산선생이 태어난 동래구 북면 남산리는 에부터 김씨 (삼현파) 집성촌이었다. ..

나카라이 토스이 문학관

나카라이 토스이 문학관 니카라이 토스이는 1860년, 대대로 쓰시마 번주의 주치의를 지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왜관에서 의사로 상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내면서 한국어를 배웠고, 1882년에는 특파원1호로 서울로 파견되어 활동하였으며, "춘향전" 을 번역하여 신문에 연재한 기자겸 소설가이다. 일본의 5천엔 지폐의 주인공인 여류작가 "하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니카라이의 이즈하라 생가 자리에 있는 기념관은 니카라이의 자료전시와 지역주민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통영 박경리 기념관

소설가 박경리박경리 (朴景利) 1926년 12월2일 ~2008년 5월5일 는 대한민국 소설가이다 대하소설 가 대표작이며 이외에도 등 많은 작품이 있다.1926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결혼 하였으나 부군은 좌익으로 몰려 한국전쟁 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 하였다. 19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1956년단편 이 현대문학에 발표되면서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다. 2007년 7월 페암이 발견 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 하였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2008년 4월4일 뇌졸증 증세가 나타나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후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2008년 5월5일 오후2시45분 경 향년 83세에 세..

전북 전주"혼불" 최명희문학관

최명희 崔明姬 (1947년 ~1998)1947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1972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1981년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와 서울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80년 신춘문예에 단편 이 당선되어 등단 하였고 이듬해 창간 60주년 기념장편소설 공모전에서 이 당선 (~~ 진행중 중략)

엄홍길전시관 (9월8일)

엄홍길 (嚴弘吉)1960년 9월14일 ~ 대한민국산악인겸 탐험가이다등정1985년 9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8,848m)남서벽 원정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1988년9월에 다시도전하여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시샤팡마 (8,027)등정에 성공하여 13년만에 14좌 등정을 모두 성공했다.2004년 5월5일에는 14좌에 속하지 않는 위성봉 알룽캉 (8,505m)등정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