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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알리스 셰르키(그녀가 2000년에 쓴 파농 전기의 한국어판은 2002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는 「2002년판 서문」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민족의식 및 정체성의 위축과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목차
2002년판 서문 -알리스 셰르키
1961년판 서문 -장 폴 사르트르
1. 폭력에 관하여
2. 자발성의 강점과 약점
3. 민족의식의 함정
4. 민족문화에 관하여
5.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
6. 결론
2002년판 후기 -모하메드 아르비
1961년판 서문 -장 폴 사르트르
1. 폭력에 관하여
2. 자발성의 강점과 약점
3. 민족의식의 함정
4. 민족문화에 관하여
5.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
6. 결론
2002년판 후기 -모하메드 아르비
책 속으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쓰인 역사적 한계를 넘어서, 오늘날의 시각에 비추어 이 책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지금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남반구만이 아니라 북반구에서도 성장을 이유로 내버려지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현대성이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없는 사람’이라 칭하는 사람들의 굴욕감과 자아상실도 더욱 깊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조국이 없는 사람과 영토가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집이 없는 사람, 일자리가 없는 사람, 신분증이 없는 사람, 말할 권리조차 없는 사람이 말이다. ―알리스 셰르키, 「2002년판 서문」 중에서
--- p.20
출판사 리뷰
2004년판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탈식민 논의의 재개를 촉구하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새롭게 태어났다. 이 책이 먼저 새롭게 태어난 곳은 프랑스다. 1961년 이 책 초판 출간 당시 사르트르가 쓴 서문 앞에, 2002년판에는 파농 전기(傳記)의 저자로 잘 알려진 정신과 의사 알리스 셰르키의 새로운 서문이 더해졌고, 파농의 결론 다음에 알제리 독립 운동의 첫 세대 투사인 무하메드 아르비의 후기가 덧붙여져 프랑스판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 Paris : La Decouverte)이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판본이 다시 다른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국가는 한국이다. 2004년,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또 한국을 비롯해 독립과 자립에 목말라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의 지식인들이 파농의 이 책 속에서 그들 투쟁의 정당성을 찾았다지만, 지금 더이상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고, 제3세계란 말이 낡은 냄새를 피우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말도 식상해진 21세기에, 새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새로운 서문과 후기까지 붙여 다시 출간한 의도는 무엇일까?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키는 경제적·문화적 식민화를 자각하기 위하여
알리스 셰르키(그녀가 2000년에 쓴 파농 전기의 한국어판은 2002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는 「2002년판 서문」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민족의식 및 정체성의 위축과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탈식민화를 말하기에 앞서 식민화의 정의부터 들어보자.
“식민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 정치권력이 강제력에 의거하여 특정 지역의 주민들을 복속시켜서 노예화한 다음, 그 지역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적이고 독점적으로 동원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고, 피식민지의 주민들로 하여금 그러한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식민화란 정치적·개인적 주권의 상실과 동일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식민화된 민족 혹은 지역의 주민은 자신의 재산권의 행사, 운명의 설정, 그리고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데 주인이 되지 못한다. …… 따라서 식민화란 일차적으로 정치경제적 지배가 관철되는 상황인 동시에 피지배자가 자신의 모습이나 주장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김동춘, 「한국 사회과학에서의 탈식민의 과제」)
파농이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의 식민화는 경찰과 군대 등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근대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 아래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이른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화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 미국의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정보의 주도하에 전세계 민중들의 물질적 재생산과 정신의 영역이 지구적 자본주의 논리에 완전히 흡수되어 자신의 문화와 전통,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그에 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제적·문화적 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전지구적 경제·문화의 지배자는, 파농이 말했듯 “2세기 전 유럽의 식민지는 유럽을 따라잡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어 나타난 유럽의 오점, 병, 비인간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괴물”, 미국이다.
유럽의 오점과 비인간성이 증폭된 괴물은 전지구의 민중을 사물로 전락시켰다. 그들은 더이상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 FDA(미국식품의약국)의 마크는 우리 건강의 보증이며, 영어―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식민지]모국(母國) 언어―구사 능력은 한국어 구사 능력보다 중요하고, 무디스의 평가가 우리 경제 상황을 대표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위축되고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 즉 ‘식민화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식민지 원주민은 사물로 전락하거나 동물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악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원주민, 즉 피억압자는 늘 이주민(억압자)에 의해 열등하게 취급되지만, 그 자신의 열등함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주민이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의 근육은 늘 긴장 상태이며, 이런 긴장은 이따금 유혈적인 폭발로 배출된다. 부족 전쟁, 씨족 갈등, 개인들 간의 다툼이 그런 예이다. “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본문 p.75)
우리는 이 21세기의 식민화 시대에 파농이 말한 것처럼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폭력을 너무나 자주 목도한다. 가난한 집의 가장이 아내와 아이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척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이 일어나고…….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새롭게 태어났다. 이 책이 먼저 새롭게 태어난 곳은 프랑스다. 1961년 이 책 초판 출간 당시 사르트르가 쓴 서문 앞에, 2002년판에는 파농 전기(傳記)의 저자로 잘 알려진 정신과 의사 알리스 셰르키의 새로운 서문이 더해졌고, 파농의 결론 다음에 알제리 독립 운동의 첫 세대 투사인 무하메드 아르비의 후기가 덧붙여져 프랑스판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 Paris : La Decouverte)이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판본이 다시 다른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국가는 한국이다. 2004년,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또 한국을 비롯해 독립과 자립에 목말라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의 지식인들이 파농의 이 책 속에서 그들 투쟁의 정당성을 찾았다지만, 지금 더이상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고, 제3세계란 말이 낡은 냄새를 피우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말도 식상해진 21세기에, 새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새로운 서문과 후기까지 붙여 다시 출간한 의도는 무엇일까?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키는 경제적·문화적 식민화를 자각하기 위하여
알리스 셰르키(그녀가 2000년에 쓴 파농 전기의 한국어판은 2002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는 「2002년판 서문」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민족의식 및 정체성의 위축과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탈식민화를 말하기에 앞서 식민화의 정의부터 들어보자.
“식민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 정치권력이 강제력에 의거하여 특정 지역의 주민들을 복속시켜서 노예화한 다음, 그 지역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적이고 독점적으로 동원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고, 피식민지의 주민들로 하여금 그러한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식민화란 정치적·개인적 주권의 상실과 동일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식민화된 민족 혹은 지역의 주민은 자신의 재산권의 행사, 운명의 설정, 그리고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데 주인이 되지 못한다. …… 따라서 식민화란 일차적으로 정치경제적 지배가 관철되는 상황인 동시에 피지배자가 자신의 모습이나 주장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김동춘, 「한국 사회과학에서의 탈식민의 과제」)
파농이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의 식민화는 경찰과 군대 등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근대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 아래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이른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화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 미국의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정보의 주도하에 전세계 민중들의 물질적 재생산과 정신의 영역이 지구적 자본주의 논리에 완전히 흡수되어 자신의 문화와 전통,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그에 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제적·문화적 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전지구적 경제·문화의 지배자는, 파농이 말했듯 “2세기 전 유럽의 식민지는 유럽을 따라잡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어 나타난 유럽의 오점, 병, 비인간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괴물”, 미국이다.
유럽의 오점과 비인간성이 증폭된 괴물은 전지구의 민중을 사물로 전락시켰다. 그들은 더이상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 FDA(미국식품의약국)의 마크는 우리 건강의 보증이며, 영어―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식민지]모국(母國) 언어―구사 능력은 한국어 구사 능력보다 중요하고, 무디스의 평가가 우리 경제 상황을 대표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위축되고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 즉 ‘식민화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식민지 원주민은 사물로 전락하거나 동물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악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원주민, 즉 피억압자는 늘 이주민(억압자)에 의해 열등하게 취급되지만, 그 자신의 열등함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주민이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의 근육은 늘 긴장 상태이며, 이런 긴장은 이따금 유혈적인 폭발로 배출된다. 부족 전쟁, 씨족 갈등, 개인들 간의 다툼이 그런 예이다. “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본문 p.75)
우리는 이 21세기의 식민화 시대에 파농이 말한 것처럼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폭력을 너무나 자주 목도한다. 가난한 집의 가장이 아내와 아이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척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이 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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