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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2020) - 페미니즘 국제정치학 입문

동방박사님 2024. 4. 10.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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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평화학·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기획으로 선보이는 새로운 시리즈 ‘메두사의 시선’(Medusa’s Perspective)의 첫 번째 책이다. 그간 페미니즘이 선보인 하나의 기획이 삭제되고 왜곡된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면, 또 다른 하나의 기획은 여성의 관점으로 인간사를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이번 시리즈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류의 관점으로는 보이지 않는 동시대를 구성하는 견고한 토대들을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인간을 돌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 자신도 운명에 갇혀 있던 존재, 메두사. 그녀의 시선으로 그간 가려져왔던 세계의 모습을 만나보자.

목차

추천사│퍼트리샤 슈로더
해제│페미니스트 평화 연구의 시작 _정희진

1장 성차별주의와 전쟁의 뿌리는 하나다
페미니즘과 평화 연구가 통합되는 자리를 찾아서
2장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란 무엇인가
핵심 개념의 정의, 그 개념에 담긴 가정에 대하여
3장 그들에게는 적과 희생자가 필요하다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에 물든 사회의 공모에 대하여
4장 우리는 그 무언가를 넘어서야만 한다
페미니즘, 평화운동, 국제정치학의 한계에 대하여
5장 페미니즘은 또 다른 미래를 꿈꾼다
세계의 변혁과 이행을 모색하며

끝머리에│감사의 말│한국의 독자들에게│옮긴이의 말
부록 1 유엔 안보리의 여성 평화와 안보에 관한 결의 1325호
부록 2 이 책과 함께 토론하기 좋은 자료 목록 _정희진
참고 문헌│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베티 리어든 (Betty A. Reardon)

수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목되었던 페미니즘 연구자이자 평화 교육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교육대학에서 평화교육 교수로 재직 중에 1982년 국제평화교육연구소를 설립했다. 교사로서 시작하여 학자로서 그리고 평화교육운동가로서 평화교육에 변혁적이고 다문화적인 관점을 가져다준 평화교육자들의 초국가적 네트워크에 활발히 참여했다. 그녀의 연구는 전쟁, 정치적 탄압 및 환경 파괴에 성차별적 억압이 결합되어 있음을 밝혀 주...

역 : 황미요조

여성주의 영화 연구자. 대한민국 서울, 인도 벵갈루루, 미국 뉴욕, 일본 도쿄에서 영화 이론, 문화 연구, 동아시아학,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지역 영화에서 관찰되는 재현과 관객 현상을 젠더적 관점으로 살피고, 모든 불안정한 순간들의 형상에 주목한다. 다수의 한국 영화 관련 글, 영화 자막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옮긴 책으로는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

기획 :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서평가. 월간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다학제적 관점에서 공부와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사회학을 공부했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전 5권), 『페미니즘의 도전』, 『아주 친밀한 폭력』,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처럼 읽기』, 『낯선 시선』 등을 썼으며,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미투의 정치학』 ...

책 속으로

성차별주의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와 문화 어디에나 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머리 여럿 달린 괴물이다. 이는 하나의 신념 체계로, 남녀의 신체적 차이가 너무나도 확연해서 성별에 따라 모든 사회적·경제적 역할이 결정된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성차별주의는 성별이 재생산 기능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 국가 및 공적 기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 전반을 결정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미묘한 몸짓과 언어에서부터 착취와 억압을 만들어내는 모든 행동, 가족 및 다국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제도에 나타난다. 성차별주의는 전쟁 체제만큼이나 복합적이고 구석구석 스며 있는 신념 체계이다. 극소수의 인간만이 전쟁 체제와 성차별주의라는 사회적 조건을 초월했을 뿐, 이를 벗어난 인간은 거의 없다.
--- p.51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봐야 할 두 가지 사안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충동을 금지시키는 반면 남성에게는 마음껏 공격성을 펼치도록 허락해준다는 것, 그리고 여성 사이의 경쟁 관계는 좌절시키는 반면 남성에게는 폭력을 써서라도 성공할 수만 있다면 경쟁해보라고 독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을 “차지하고” 남성에게 “매달리도록” 여성 사이의 경쟁을 독려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여성에게는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고 하지만, 남성에게는 분노를 행사하고 표출하는 것 또한 허용된다. 남성성과 남성 정체성의 발현으로서의 폭력을 독려하고, 심지어 승인해주는 행동들은 우리 사회의 에토스 전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폭력은 “위대한 자질”로 칭찬받을 만하며, 심지어 미덕을 지닌 공적 행동이라고 여겨졌다.
--- p.56~57

내가 이 책에서 전하려는 페미니즘의 개념은, 여성에게 대단한 감수성의 내재적 역량이 있다거나 여성이 더 도덕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적 특성이 남성적 특성보다 더 인간적이거나 인도주의적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은 억압의 반대항으로 인식되는 광의의 인본주의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성차별주의의 모든 형식과 그 발현된 모습에 반대하고, 그것을 해소하려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여성을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 완전하고 공정하게 통합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신념 체계이다. 더불어 그러한 통합은 전쟁 체제를 해소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라는 믿음 역시 품고 있다.
--- p.69

세계질서의 가치 중 하나인 평화는, 일반적으로 평화 연구에서는 부정의 의미, 즉 전쟁의 부재로 정의되곤 한다. 그렇게 정의할 경우, 평화의 가치에 대항하며 작동하는 주요한 힘은 군비경쟁이다. 군비경쟁 가운데서도 핵 군비경쟁은 성차별주의와 군사주의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 p.86

강간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개인 혹은 개인들을 위협하거나 힘과 폭력을 사용해서 그들을 복종시키고 순종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적과 피지배국 시민들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성폭력 사이의 관계는 서로 견주어볼 만하다. 이 관계는 전쟁 체제와 성차별주의 모두 생존을 위해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여성들이 성차별적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어떤 체제도 영속될 수 없다. 전쟁 체제와 성차별주의는 둘 다 대개의 인간이 물리적 생존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p.97

국민국가는 자국 국민에게 국가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 대한 폭력을 수용하도록 격려하지만, 그 경계 내부에 있는 이들에 대한 폭력은 금지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자기가 책임져야 할 여성은 보호하고 아끼지만, 그 외의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학습받는다. 이러한 심리적 길들이기로 여성은 취약해지면서 남성에게 의존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길들이기 때문에 남성은 인간 집단 전체를 더욱 손쉽게 대상화하게 되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도 훨씬 덜 어려워하게 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여성은 남성보다 평화에 대한 염려와 전쟁에 대한 공포를 드러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여성의 호르몬 체계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인간과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 p.119~120

우리 안의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원초적 상처를 치유하고 공존하는 인간화 과정을 마련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명령이 품은 메시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진정 공포를 불러오는 이가 우리 내부에 있다면, 그 모든 복잡성과 약함을 지닌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의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측면 모두를 사랑하는 치유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적(타자)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확대의 행위는 성차별주의를 넘어서고, 상존하는 강간의 가능성에서 여성을 해방시킨다. 또한 전쟁 체제에 속박된 상태로부터, 핵무기 경쟁이 초래한 멸절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데 필요한 근본적 요건이다.
--- p.136

개별 인간의 발전은 순환적이며, 때로는 나아가지 못한 채 물러서기도 한다. 페미니즘적 이행의 시각 또한 일보씩 내딛는 선형적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유기적이고, 흐르고,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개념이다. 여성들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삶과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은, 그 반복되는 회귀에 대한 기대와 이해에 더해진 유기적 변화라는 개념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단선적인 단계별 이행 개념은 깊은 실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군사주의의 부정적 영향이 커지고 그 속도가 빨라질수록 수많은 이들을 집어삼키는 절망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
--- p.191~192

만약 우리가 군비 철폐를 통해 진정 비폭력적인 세계로, 참된 평화와 정의로 나아가려 한다면,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안의 타자는 우리의 남성적 속성일 수도 있고, 여성적 속성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가 적과 범죄자에게, 혹은 영웅과 성자에게 투사해온 특성이자 성격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만인에 대한 평등의 가치와 존엄성을 옹호한다면, 그들의 재능과 능력은 물론이고 단점도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동기부여가 될 것인지 여부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동기부여가 주로 교육, 특히 평화 교육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남성 우월주의의 토대에서나, 참호로 둘러싸인 군사주의 사회 체제에서는 변화를 불러일으킬 동기부여의 증거를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면, 전쟁 체제의 덫에서 빠져나갈 희망 역시 거의 없다. 교육은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에 기초한 사업이다.
--- p.206

출판사 리뷰

성차별 제도와 전쟁의 원리를 본격적으로 논한
첫 번째 지도이자 페미니스트 페다고지의 고전


이 책은 전쟁의 작동 원리가 인간의 특성을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분리하고 위계화하는 성차별주의에 있다고 논증한다. ‘남성’ 정치학자들은 대개 사회적 모순으로서의 젠더에 무지하거나 이를 사소한 이슈라고 여긴다. 리어든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젠더는 전쟁의 가장 강력한 작동 원리이며, 남성성에 대한 이해 없이 국제정치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

1985년에 출간된 이 책이 이미 현재 페미니즘의 이론적 쟁점들을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영원한 고전은 이런 책이 아닐까. 여성들 간의 차이, 돌봄 윤리학에 대한 논쟁, 평등 개념의 한계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나 전 지구적 페미니즘 이론에서나 첨예한 쟁점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변화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기술 중심의 전쟁 방식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첫 번째 이정표인 이유다.
_정희진의 ‘해제’ 중에서

이 책은 전쟁에 페미니즘적 관점을 개입시킨 도전적 저서다. 남성적 대결의 장으로 묘사되곤 하는 전쟁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표면을 뚫고 깊이 파고들어간다. 페미니스트 연구자이자 평화학자인 베티 리어든은 전쟁의 작동 원리 자체에 인간의 특성을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누고 위계화하는 성차별주의가 자리한다는 것, 그렇기에 성차별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쳐나간다. 1985년 출간 당시 이 주장은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 이 책은 평화학의 교과서이자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을 집필하기 전, 필자는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이 이어지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두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평화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평화운동과 담론에 여성적 관점이 개입되지 못하고 여성의 활동 또한 가려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과 여성운동 진영이 어떻게 협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그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

그렇다면 전쟁은 어떻게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필자가 말하는 전쟁이란 무력을 이용해 국가들이 벌이는 싸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경쟁적인 사회질서로, 인간관계에서부터 구조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전쟁의 기저에는 폭력이 있다. 그런데 성차별주의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이다. 성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규정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니 말이다. 즉 전쟁과 성차별주의는 사회적 폭력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괴물이며, 그 뿌리를 뽑지 않는 한 하나의 머리를 잘라도 다른 머리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것이 베티 리어든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기본적인 가정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평화란 과연 가능한가

사실 전쟁, 국가 안보, 국방 정책 등을 다루는 국제정치학은 근대 학문 분과 가운데서 페미니즘의 개입이 가장 늦은 영역이었다. 이는 소수 엘리트 남성들이 독점해온 분야로, 사적인 것, 감정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대립하는 의미로서 소위 ‘상급 정치(high politics)’를 다루어왔다. 그동안 이 분야는 담론의 남성 중심성이 거의 인식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남성=보편적 인간”이라는 전제가 가장 오래 남아 있는 분과였다. 이는 근대 체제가 공/사, 국내/국제의 분리를 기반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인데, 남성과 여성을 가르면서 젠더가 만들어지는 방식 역시 이와 유사한 이원적 대립에 근거한다. 결국 국제정치학에서는 가정, 여성, 재생산과 관련된 삶은 국내 영역에 할당되고, 국내적인 것과 상징적으로 가장 먼 최극단에 전쟁과 외교를 다루는 ‘국제’라는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이때 국가/공동체를 지킨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보호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는 권력이 주어진다. 그것이 배제, 타자화, 혐오이다. 성차별과 젠더 정치의 핵심은 ‘정상 남성’인 보호자가 남성 문화가 규정한 남성 이외의 사람들을 타자로, 피보호자로, 비국민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평화는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이 된다. 이처럼 평화가 성취의 목표가 되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수많은 전쟁들이 ‘정의(justice)’를 명분으로 내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언제나 적과 희생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줄곧 목도해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일상이 손쉽게 통제되어버리지 않았나.
필자는 여기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평화는 과연 가능한가? 전쟁은 침략자와 희생자를 필요로 하는 경쟁적 행위로, 반드시 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패자가 된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이분법은 가부장제에 의해 학습된다.

권위를 가진 이들이 그들에게 종속된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체제, 그것이 가부장제이니 말이다. 결국 평화는 ‘지킨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나 ‘가부장제에서 권위를 가진 이들’을 넘어서서 상호 돌봄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이러한 논의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자는 여타의 학술, 운동 진영에 대한 문제제기를 더해 나간다. 앞서 언급했듯 평화 연구 및 운동 진영이 여성들의 작업과 이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지점을 비판한다. 기존의 사회과학이 페미니즘 연구들이 보여준 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지적한다. 한편 필자는 당시에 페미니즘 진영이 보여준 노력과 성과에 대해 기술하면서도 더 나은 한 걸음을 위해 고민해야 할 지점들 역시 살피고 있다. 페미니즘 연구에 구조 분석이 다소 결여된 점, 그리고 정치 및 사회 문제에서 여성 문제를 분리해낸 뒤 그것만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비판의 과정에는 현재까지 페미니즘에서 이론적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 여럿 녹아 있다. 제3세계 식민지 국가인 아랍 여성과 제1세계 국가인 이스라엘 여성의 차이는 어떻게 볼 것인가. 여성의 군 입대는 여성의 권리 확장으로 볼 것인가, 여성의 남성화 현상으로 볼 것인가. 페미니스트들이 종종 취하는 여타의 사회운동과의 분리주의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변주된 형태로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사안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현재의 생각거리일 것이다.

이번 한국어판에서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필자의 글을 수록하여 현재적 시점에서 다시금 필자의 문제의식을 되짚어보았다.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록으로 세계 평화 구축을 위한 여성들의 기여를 담은 ‘유엔 안보리의 여성 평화와 안보를 위한 결의 1325호’와 정희진이 정리한 ‘이 책과 함께 토론하기 좋은 자료 목록’을 수록했다. 전쟁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넘어서서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책이 좋은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