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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지구라는 주어를 통해 인간을, 나아가 인간의 경제와 정치를 다룬다. 그리고 오이코스와 자연의 정치, 화폐에 포섭된 허무주의 경제학과 대비되는 오이코노믹스, 인간이라는 범주를 따로 가정하지 않은 정치인 오이코폴리틱스를 구성하려 한다.
동시에 현행의 기후위기와 멸종의 상응성을 특이점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 도래한 멸종을 ‘감히’ 종말이란 개념으로 포착하려 한다. 이때 종말이란 종교적인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참혹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답이 사라지고 물음만 남는 어두운 심연이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이란 그런 심연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을 사유하는 법, 공포 속에서 밀쳐 내는 게 아니라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을 찾자고 제안할 것이다. 죽음의 이중 긍정. 그것은 죽음이나 종말, 절망이란 말만 나오면 인간들이 보여 주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답 없이 도래한 그리고 도래할 파국적 상황을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 그 파국을 살아 내는 길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동시에 현행의 기후위기와 멸종의 상응성을 특이점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 도래한 멸종을 ‘감히’ 종말이란 개념으로 포착하려 한다. 이때 종말이란 종교적인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참혹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답이 사라지고 물음만 남는 어두운 심연이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이란 그런 심연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을 사유하는 법, 공포 속에서 밀쳐 내는 게 아니라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을 찾자고 제안할 것이다. 죽음의 이중 긍정. 그것은 죽음이나 종말, 절망이란 말만 나오면 인간들이 보여 주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답 없이 도래한 그리고 도래할 파국적 상황을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 그 파국을 살아 내는 길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목차
서문을 겸한 서론
지구의 철학, 지구에 의한 철학을 위하여 ● 5
제1장 ‘인류세’와 지구의 철학
- 두 가지 속임수와 철학적 배신
1. ‘인류세’ 혹은 인간의 그늘 ● 21
2. 노모스의 대지에서 자본의 노모스로 ● 26
3. 지구, 자연의 외부 ● 33
4.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어머니와 사신 ● 45
5. 인간의 외부, 외부의 사유 ● 52
6. 인류세와 자본세, 혹은 속임수와 배신에 대하여 ● 60
제2장 폴리스의 경제학, 오이코스의 정치학
- 가장 없는 ‘가정’과 ‘정치’ 이전의 정치
1. 기원의 향수와 그리스 ● 73
2. ‘자연’의 정치학과 자연-권 ● 81
3. ‘폴리스’ 이전의 정치와 ‘가장’의 첫째 문턱 ● 90
4. 경제 이전의 오이코스와 잉여의 경제 ● 100
5. 폴리스의 경제화와 오이코스의 정치화 ● 112
제3장 허무주의 경제와 오이코노믹스
- 경제학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1. 오이코스와 화폐, 혹은 허무주의 경제 ● 131
2. 화폐가 오이코스를 장악할 때 ● 138
3. 경제학과 생태학: 오이코스의 사생아들 ● 143
4. 경제학의 공리들 ● 151
5. 이코노믹스의 데코노미와 오이코노믹스 ● 161
6. 경제학적 식민주의를 거슬러 ● 173
제4장 오이코폴리틱스
- 인간과 인간도 아닌 것들 간의 치안과 정치에 대하여
1. 기후 격변과 비인간의 정치 ● 183
2. 폴리스의 정치에서 오이코스의 정치로 ● 187
3. 로고스의 정치와 포네의 정치 ● 194
4. 인간의 정치에서 비인간의 정치로 ● 200
4.1 포식의 정치 ● 205
4.2 증여의 정치 ● 210
4.3 회복의 정치와 증식의 치안 ● 213
5. 네크로폴리스와 조에폴리틱스 ● 223
제5장 오이코페미니즘 혹은 마녀들의 정치학
1. 오이코스와 가부장 ● 243
2. 국가와 가부장의 동맹 ● 254
3. 혈족의 치안과 마녀의 정치 ● 260
4. 네크로폴리스, 마녀재판 ● 269
5. 오이코페미니즘, 혹은 대지-되기 ● 288
제6장 기후 특이점과 멸종의 여백
- 출구 특이점과 파국 특이점 사이에서
1. 기술 특이점 기후 특이점! ● 303
2. 기술과 시장의 이인무 ● 312
3. 세 개의 기후 특이점 ● 322
4. 기술주의의 기계-신과 악마-기계 ● 331
5. 필경 도래할 특이점 ● 346
6. 멸종, 혹은 장기지속적 종말 ● 353
7. 살의 없는 대량 살상과 멸종의 특이점들 ● 360
8. 멸종의 여백에서 ● 365
제7장 유물론적 종말론과 미토콘드리아의 철학
- 종말의 이중 긍정을 위하여
1. 구멍은 있어도 구원은 없는 종말 ● 375
2. 유전자의 주체철학과 미시적 혈통주의 ● 381
3. 미토콘드리아의 철학 ● 389
4. 기후 원리주의와 도덕주의 ● 396
5. 출구 없는 종말을 위한 유머레스크 ● 403
지구의 철학, 지구에 의한 철학을 위하여 ● 5
제1장 ‘인류세’와 지구의 철학
- 두 가지 속임수와 철학적 배신
1. ‘인류세’ 혹은 인간의 그늘 ● 21
2. 노모스의 대지에서 자본의 노모스로 ● 26
3. 지구, 자연의 외부 ● 33
4.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어머니와 사신 ● 45
5. 인간의 외부, 외부의 사유 ● 52
6. 인류세와 자본세, 혹은 속임수와 배신에 대하여 ● 60
제2장 폴리스의 경제학, 오이코스의 정치학
- 가장 없는 ‘가정’과 ‘정치’ 이전의 정치
1. 기원의 향수와 그리스 ● 73
2. ‘자연’의 정치학과 자연-권 ● 81
3. ‘폴리스’ 이전의 정치와 ‘가장’의 첫째 문턱 ● 90
4. 경제 이전의 오이코스와 잉여의 경제 ● 100
5. 폴리스의 경제화와 오이코스의 정치화 ● 112
제3장 허무주의 경제와 오이코노믹스
- 경제학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1. 오이코스와 화폐, 혹은 허무주의 경제 ● 131
2. 화폐가 오이코스를 장악할 때 ● 138
3. 경제학과 생태학: 오이코스의 사생아들 ● 143
4. 경제학의 공리들 ● 151
5. 이코노믹스의 데코노미와 오이코노믹스 ● 161
6. 경제학적 식민주의를 거슬러 ● 173
제4장 오이코폴리틱스
- 인간과 인간도 아닌 것들 간의 치안과 정치에 대하여
1. 기후 격변과 비인간의 정치 ● 183
2. 폴리스의 정치에서 오이코스의 정치로 ● 187
3. 로고스의 정치와 포네의 정치 ● 194
4. 인간의 정치에서 비인간의 정치로 ● 200
4.1 포식의 정치 ● 205
4.2 증여의 정치 ● 210
4.3 회복의 정치와 증식의 치안 ● 213
5. 네크로폴리스와 조에폴리틱스 ● 223
제5장 오이코페미니즘 혹은 마녀들의 정치학
1. 오이코스와 가부장 ● 243
2. 국가와 가부장의 동맹 ● 254
3. 혈족의 치안과 마녀의 정치 ● 260
4. 네크로폴리스, 마녀재판 ● 269
5. 오이코페미니즘, 혹은 대지-되기 ● 288
제6장 기후 특이점과 멸종의 여백
- 출구 특이점과 파국 특이점 사이에서
1. 기술 특이점 기후 특이점! ● 303
2. 기술과 시장의 이인무 ● 312
3. 세 개의 기후 특이점 ● 322
4. 기술주의의 기계-신과 악마-기계 ● 331
5. 필경 도래할 특이점 ● 346
6. 멸종, 혹은 장기지속적 종말 ● 353
7. 살의 없는 대량 살상과 멸종의 특이점들 ● 360
8. 멸종의 여백에서 ● 365
제7장 유물론적 종말론과 미토콘드리아의 철학
- 종말의 이중 긍정을 위하여
1. 구멍은 있어도 구원은 없는 종말 ● 375
2. 유전자의 주체철학과 미시적 혈통주의 ● 381
3. 미토콘드리아의 철학 ● 389
4. 기후 원리주의와 도덕주의 ● 396
5. 출구 없는 종말을 위한 유머레스크 ● 403
저자 소개
책 속으로
캄보디아의 오래된 사원 벽을 가르며 거대하게 자란 나무는, 톱질에 그저 리그닌(lignin)의 단단한 목질로 버티는 수동적 저항 이상으로 나무가 강력한 주어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목이 잘린 채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닭은, 그렇게 도망치고 생존하려는 힘만큼의 주어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목이 잘리기 전부터 닭은 그런 주어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도, 대기도, 흙도, 물도, 빙하도, 바람도, 돌도, 나무도 모두 그 나름의 힘을 갖고 행동하는 주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작용하는 힘만큼 어떤 행동의 주어다. 인간 혹은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행동이라 하는 것은 이동이 곧 운동이라 믿는 소박한 동물 중심적 단견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이 주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모습대로만 세상을 보는 인간 중심적 고질병이다.
--- p.8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은 인간이 장악했다고 믿었던 ‘자연’조차 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에 입혀 놓은 헐렁한 옷이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재봉한 옷이 찢어지며 그 안의 속살이 일부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자로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후쿠시마 원전의 연료봉과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거대한 양의 오염수는, 어떤 핑계로 어떻게 ‘처리’하든 사실은 인간이 끝내 제거할 수 없는, 결국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부 아닌가. ‘희석’해 처리한다 하지만 그건 물에 타서 바다에 버린다는 말 아닌가? 굳이 지구의 관점에 서지 않아도 바닷물을 타서 바다에 버리는 게 그냥 바다에 버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 p.38
분명한 것은 정치(폴리스, polis)에 참여할 ‘자격’을 묻는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와는 반대 방향으로 정치를 돌려놓는다는 사실이다. 자격 없는 자들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강조하듯이 데모크라시의 데모스는 ‘자격 없는 자들’이다.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란 자격 없는 자들의 정치다. 자격을 문제 삼지 않는 정치, 자격이란 게 따로 없었던 시절의 정치다. 따라서 그것은 분명 ‘정치’라는 말이 따로 출현하기 이전에 있었던 것일 게다. 그런 말들이 따로 존재한다 함은 정치라는 테두리 안팎을 가르는 경계와 자격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애초에 거기 참여할 자격이 따로 없던 시기에 이미 시작된다는 것, 그것이 기원의 향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도 민주주의도 아렌트가 강조하듯 참여할 자격이 명확하게 제한되어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나 데모크라티아를 모델로 삼아선 안 된다. 전제정이나 귀족정과 대비되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오히려 자격 이전의 정치로 밀고 가야 한다. ‘폴리스’ 이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국가권력이 출현하기 이전, ‘정치’라는 말도 없이 작동했던 정치로.
--- p.81
먹이를 요구하는 고양이의 몸짓과 소리, 낯선 누군가 왔으니 조심하자는 개의 소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과 눈빛, 아무리 헤엄쳐도 기어 올라갈 얼음이 보이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 북극곰의 동작, 물이 필요하다며 잎의 일부를 변색시키는 식물의 행위 등은 모두 어떤 사안에 대해 그들이 인간을 ‘토론’으로, 정치의 장으로 불러내려는 행동이다. 인간들 또한 그들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어떤 동물과 동맹해 어떤 동물과 ‘전쟁’을 할 것인지, 어떤 식물과 동맹해 어떤 식물들을 제거하는 전쟁을 할 것인지, 또 어떤 목표를 위해 어떤 사물의 협조를 구할 것인지 등등. 이 모든 일이 자연의 정치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이런 활동을 굳이 그리스의 폴리스와 구별해 ‘오이코스’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치란 폴리스라는 별도의 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상의 오이코스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 오이코스야말로 ‘정치’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의 장이었다고 해야 한다. 정치는 폴리스가 아니라 오이코스를 기원으로 한다고. 오이코스란 자연의 정치가 말없이 시작되는 정치의 기원이다.
--- p.86~87
“노예를 지배하는 것은 필연성을 지배하는 인간적 방식이고 따라서 자연에 반하지 않는다”라는 그리스인의 말에서 ‘노예’ 대신 ‘비인간’을 쓴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대를 사는 우리가 노예제에 대한 이 정당화 논리를 순순히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노예가 아니라 비인간이라면 그리 낯선 논리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노예도 없고 여성과 어린이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지만, 식물, 동물, 기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에 노예와 아이, 여성이 속했던 오이코스와 그들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폴리스 구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구분은 인간들만의 좋은 삶을 위해 인간 아닌 것들을 인간의 노예로 삼는 정치적 경계선이다. 기후 격변은 어쩌면 인간이란 이름으로 자명하다 간주되는 이러한 ‘기만’의 정치학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징표 아닐까?
--- p.190
인류세는 인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증식의 치안이 지구적 수준에서 네크로폴리스의 문턱을 넘은 시대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는 네크로폴리스의 시대다. 인간에 의한 증식의 치안이 지구적 수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장을 만들어 낸 시대다. 네크로폴리스라는 개념이 표현하는 인류세의 치명적 역설은 증식의 주어인 우리 인간이 그 거대한 네크로폴리스의 장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네크로폴리스가 인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인간 아닌 것들을 수단으로 삼을 뿐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특권적 권력을 가진 자라는 인간학적 자명성 속에 있는 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턱을 넘어선 네크로폴리스의 권력이 자신 또한 겨누고 있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까지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인간’이란 관념이 문제화됨에 따라, 인간 아닌 것의 눈으로 인간 자신을 보게 됨에 따라 그러한 사태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문턱을 넘은 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기후위기의 원인도 알고 해결책도 알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네크로폴리스의 힘은 이미 우리 인간의 손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고 가속시킨 네크로폴리스의 장 안에 있는 것이다.
--- p.8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은 인간이 장악했다고 믿었던 ‘자연’조차 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에 입혀 놓은 헐렁한 옷이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재봉한 옷이 찢어지며 그 안의 속살이 일부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자로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후쿠시마 원전의 연료봉과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거대한 양의 오염수는, 어떤 핑계로 어떻게 ‘처리’하든 사실은 인간이 끝내 제거할 수 없는, 결국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부 아닌가. ‘희석’해 처리한다 하지만 그건 물에 타서 바다에 버린다는 말 아닌가? 굳이 지구의 관점에 서지 않아도 바닷물을 타서 바다에 버리는 게 그냥 바다에 버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 p.38
분명한 것은 정치(폴리스, polis)에 참여할 ‘자격’을 묻는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와는 반대 방향으로 정치를 돌려놓는다는 사실이다. 자격 없는 자들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강조하듯이 데모크라시의 데모스는 ‘자격 없는 자들’이다.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란 자격 없는 자들의 정치다. 자격을 문제 삼지 않는 정치, 자격이란 게 따로 없었던 시절의 정치다. 따라서 그것은 분명 ‘정치’라는 말이 따로 출현하기 이전에 있었던 것일 게다. 그런 말들이 따로 존재한다 함은 정치라는 테두리 안팎을 가르는 경계와 자격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애초에 거기 참여할 자격이 따로 없던 시기에 이미 시작된다는 것, 그것이 기원의 향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도 민주주의도 아렌트가 강조하듯 참여할 자격이 명확하게 제한되어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나 데모크라티아를 모델로 삼아선 안 된다. 전제정이나 귀족정과 대비되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오히려 자격 이전의 정치로 밀고 가야 한다. ‘폴리스’ 이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국가권력이 출현하기 이전, ‘정치’라는 말도 없이 작동했던 정치로.
--- p.81
먹이를 요구하는 고양이의 몸짓과 소리, 낯선 누군가 왔으니 조심하자는 개의 소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과 눈빛, 아무리 헤엄쳐도 기어 올라갈 얼음이 보이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 북극곰의 동작, 물이 필요하다며 잎의 일부를 변색시키는 식물의 행위 등은 모두 어떤 사안에 대해 그들이 인간을 ‘토론’으로, 정치의 장으로 불러내려는 행동이다. 인간들 또한 그들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어떤 동물과 동맹해 어떤 동물과 ‘전쟁’을 할 것인지, 어떤 식물과 동맹해 어떤 식물들을 제거하는 전쟁을 할 것인지, 또 어떤 목표를 위해 어떤 사물의 협조를 구할 것인지 등등. 이 모든 일이 자연의 정치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이런 활동을 굳이 그리스의 폴리스와 구별해 ‘오이코스’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치란 폴리스라는 별도의 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상의 오이코스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 오이코스야말로 ‘정치’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의 장이었다고 해야 한다. 정치는 폴리스가 아니라 오이코스를 기원으로 한다고. 오이코스란 자연의 정치가 말없이 시작되는 정치의 기원이다.
--- p.86~87
“노예를 지배하는 것은 필연성을 지배하는 인간적 방식이고 따라서 자연에 반하지 않는다”라는 그리스인의 말에서 ‘노예’ 대신 ‘비인간’을 쓴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대를 사는 우리가 노예제에 대한 이 정당화 논리를 순순히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노예가 아니라 비인간이라면 그리 낯선 논리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노예도 없고 여성과 어린이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지만, 식물, 동물, 기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에 노예와 아이, 여성이 속했던 오이코스와 그들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폴리스 구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구분은 인간들만의 좋은 삶을 위해 인간 아닌 것들을 인간의 노예로 삼는 정치적 경계선이다. 기후 격변은 어쩌면 인간이란 이름으로 자명하다 간주되는 이러한 ‘기만’의 정치학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징표 아닐까?
--- p.190
인류세는 인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증식의 치안이 지구적 수준에서 네크로폴리스의 문턱을 넘은 시대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는 네크로폴리스의 시대다. 인간에 의한 증식의 치안이 지구적 수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장을 만들어 낸 시대다. 네크로폴리스라는 개념이 표현하는 인류세의 치명적 역설은 증식의 주어인 우리 인간이 그 거대한 네크로폴리스의 장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네크로폴리스가 인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인간 아닌 것들을 수단으로 삼을 뿐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특권적 권력을 가진 자라는 인간학적 자명성 속에 있는 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턱을 넘어선 네크로폴리스의 권력이 자신 또한 겨누고 있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까지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인간’이란 관념이 문제화됨에 따라, 인간 아닌 것의 눈으로 인간 자신을 보게 됨에 따라 그러한 사태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문턱을 넘은 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기후위기의 원인도 알고 해결책도 알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네크로폴리스의 힘은 이미 우리 인간의 손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고 가속시킨 네크로폴리스의 장 안에 있는 것이다.
--- p.226~227
출판사 리뷰
지구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지구에 의한 철학을 해야 할 때!
도래한 기후위기 앞에서 지구가 묻는다
인간은 이 위기를 과연 어떻게 살아 내려는가?
『지구의 철학』은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지구를 주어로 하는 철학을 말한다. 그러나 기후위기로 요약되는 지구적 상황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지구의 철학』은 인간을 주어로 하는 철학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두 개의 다른 주체를 주어로 하는 이 철학은 지구에 의한 사유와 지구에 의해 인간 삶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가동된다. 그러므로 ‘지구의 철학’은 즉 지구에 의한 철학이다. 하지만 『지구의 철학』은 기후위기를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긴급한 위기에 대한 행동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이미 충분하다. 진정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들이 기후위기가 불러올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은 그 답을, 해결책을 모르지 않는다.
다시 말하겠다. 우리는 기후위기와 관련한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해결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제기상기구의 진단대로 위기는 코앞에 닥쳐왔으나 그러한 급박한 경고조차 소용이 없다. 머지않아 티핑 포인트라고 부르는 ‘기후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고, 이른바 ‘멸종’이나 ‘종말’ 같은 낱말로 서술되는 상황이 닥쳐올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런 상황을 어떻게 연기하거나 저지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거나 무력해 보인다. 사태가 이미 이러하다면, 위기 상황이 도래했을 때 던져야 할 중요한 물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위기의 지구를 어떻게 살아 내야 하는지일 것이다. 이제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계속 밀쳐 냈던 물음을 던져야만 할 때다. 이 책은 그런 물음을 던지며 그간 미루어 두었던 문제를 함께 사고해 보려 한다. 적어도 그런 사고의 촉발이 되고자 한다.
지금의 기후위기는 비인간들의 항의이자 저항이다!
‘인간’이라는 덫에서 벗어나라
지구에 의한 사유를 가동시키려는 물음은 사유의 장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삶에 대한 근심 못지않게 인간 아닌 것들, 그리고 인간이 못 되었기에 죽더라도 숫자로 세어지지 않고, 사라져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새로이 사유해야 한다. 그런 비인간들과 인간들의 관계를 인간 중심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유해야 한다. 인간만큼이나 그들을 주어로 사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의 기후위기를 그들 비인간의 행위나 인간을 향해 외치는 항의, 나아가 정치적 저항으로 볼 것이며, 사물이나 자연이라 불리는 것과 인간의 관계를 정치, 즉 ‘자연의 정치’로 불러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과 새로운 동맹을 사유할 사고의 단서들을 찾고 제안하려 한다. 인간을 등지고 배신하려는 이런 사유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포스트휴먼’ 담론은 어쩌면 아직도 인간이란 덫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라는 말을 유기체나 인격을 실체화하는 일인칭 단수가 아니라 수많은 미생물의 복합체로, 일인칭 복수로 바꾸어 사유해야 한다. 나 자신이기도 한 미생물의 관점에 섬으로써 우리는 ‘인간’이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의 삶과 운명을 사유할 수 있다.
폴리스 이전의 ‘오이코스’로 돌아가라
훼손의 권리가 아닌 돌봄의 의무로서의 정치를 위해
생존과 필연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정치, ‘폴리스’라는 말을 기원으로 삼는 정치적 사고를 넘어서 인간 아닌 것과 인간의 정치를 사고하려면, 우리는 경제학과 생태학의 어원이 되었던 생존의 장(오이코스)과 정치(폴리스)의 분리를 넘어서서 정치와 생존을 동시에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오이코스야말로 인간을 특권화하는 정치를 넘어 자연의 정치가 가동되는 정치의 장이다. 생존의 장에서 발생하는 이 자연의 정치는 그리스를 넘어, 그 이전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을 요구한다. 즉 인류학자들의 ‘원시사회’와 비인간과 인간의 자연학적 ‘원시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인디언’ 사회는 폴리스 이전의 정치야말로 진정한 정치, 민주주의라는 말에 값하는 정치였음을 보여 준다. 역으로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먹고 먹히는 장이 증여와 포식의 정치로 포착되고, 증식과 회복이라는 상반되는 힘들이 충돌하는 장으로 포착될 때, 자연의 정치는 단지 은유가 아닌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반면 가장이라는 자격을 가진 자들, 오이코스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자들만의 폴리스라는 그리스적 정치는 자연적 정치의 장에 어떤 치명적 문턱을 도입한다. ‘가장’이라는 관념이 세금과 부역을 책임지는 대가로 자신의 가족을 ‘소유물’로 삼는 지위를 얻는 거래가 그 문턱에서 발생한다. 더불어 소유라는 관념에 함축된 ‘돌봄’의 의무라는 ‘원시적’ 관념을, ‘훼손’의 권리라는 그리스-로마의 문명화된 관념이 대체하게 된 과정도 보아야 한다. 오이코스와 분리된 폴리스란 단지 인간만의 영역으로 정치가 제한된 것뿐 아니라 이러한 치명적 변환의 문턱들을 거치며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 아닌 것과 인간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 사이의 관계조차 충분히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오이코스와 분리된 정치 개념을 넘어서서 정치는 물론 오이코스, 생존의 개념 자체까지도 다시 사유하지 않는 한 정치도, 생존도, 비인간의 삶도, 인간의 삶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목소리 아닌 소리, 로고스 없는 포네를 정치적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인간 없는 정치뿐 아니라 인간 없는 치안, 인간 없는 권력의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학에 식민화된 주류 생태학뿐 아니라, 포괄적 생태학도 생명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대지는 생명체 간 동맹의 장이었다!
파국을 살아 내기 위한 죽음에 대한 이중 긍정
이 책은 지구라는 주어를 통해 인간을, 나아가 인간의 경제와 정치를 다룬다. 그리고 오이코스와 자연의 정치, 화폐에 포섭된 허무주의 경제학과 대비되는 오이코노믹스, 인간이라는 범주를 따로 가정하지 않은 정치인 오이코폴리틱스를 구성하려 한다. 대지라고 불리는 투쟁의 장은 생명체 간 동맹의 장이었다. 이 경우 폴리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 오이코스조차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동맹의 장이었음이 드러난다. 오이코페미니즘은 소유물이 된 인간,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 그리고 인간 아닌 것들과 동맹하는 전략이다.
동시에 현행의 기후위기와 멸종의 상응성을 특이점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 도래한 멸종을 ‘감히’ 종말이란 개념으로 포착하려 한다. 이때 종말이란 종교적인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참혹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답이 사라지고 물음만 남는 어두운 심연이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이란 그런 심연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을 사유하는 법, 공포 속에서 밀쳐 내는 게 아니라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을 찾자고 제안할 것이다. 죽음의 이중 긍정. 그것은 죽음이나 종말, 절망이란 말만 나오면 인간들이 보여 주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답 없이 도래한 그리고 도래할 파국적 상황을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 그 파국을 살아 내는 길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도래할 위기는 지금까지의 삶을
어떻게든 바꿀 것이니
『지구의 철학』은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진 이들, 기후위기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저지하러 나선 이들에게 기후위기를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할 것이다. 또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사유와 행동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벽들에 맞선 우회로를 찾는 하나의 제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 관심이나 의지, 행동과는 거리가 있지만 도래할 기후위기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려는 이라면 꼭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을 얘기하고 있기도 하다. 도래할 위기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든 바꿀 것을 요구할 터인데, 그저 에너지를 절약하며 살면 되겠지 하며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기를 그치는 시대에 일상의 소박한 삶을 지속하려면, 그리고 그나마 좋은 삶을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할 자원이 되리라.
동시에 이 책은 정치와 경제, 자연과 생태, 인간과 비인간, 가부장제와 페미니즘 등 기후위기와 독립적인 주제에 대한 독자적인 주장들을 제안하고 있으며, 문명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서구적 관점이나 그리스주의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 비판도 담고 있다. 이는 최근의 인류학 연구가 갖는 비판적 함축을 밀고 가는 데 유용한 자원이 되어줄 것이다. 이론이나 철학, 사상사 등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유용한 사유 자원이 될 것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랑시에르, 도나 해러웨이, 애너 칭, 데이비드 그레이버·데이비드 웬그로우, 제임스 스콧, 카를 마르크스, 미셸 아글리에타, 마셜 살린즈, 피에르 클라스트르, 한나 아렌트, 실비아 페데리치, 린 마굴리스, 제임스 러브록, 리차드 도킨스, 티머시 모턴, 안드레아스 말름 등 다양한 이론가들을 하나의 연결망으로 엮어, 이들의 사유가 수렴하는 지점이나 분기하는 지점, 충돌하거나 합류하는 지점들에 그려지는 하나의 지도는 그러한 관심이 길을 찾는 데 유용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지구에 의한 철학을 해야 할 때!
도래한 기후위기 앞에서 지구가 묻는다
인간은 이 위기를 과연 어떻게 살아 내려는가?
『지구의 철학』은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지구를 주어로 하는 철학을 말한다. 그러나 기후위기로 요약되는 지구적 상황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지구의 철학』은 인간을 주어로 하는 철학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두 개의 다른 주체를 주어로 하는 이 철학은 지구에 의한 사유와 지구에 의해 인간 삶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가동된다. 그러므로 ‘지구의 철학’은 즉 지구에 의한 철학이다. 하지만 『지구의 철학』은 기후위기를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긴급한 위기에 대한 행동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이미 충분하다. 진정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들이 기후위기가 불러올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은 그 답을, 해결책을 모르지 않는다.
다시 말하겠다. 우리는 기후위기와 관련한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해결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제기상기구의 진단대로 위기는 코앞에 닥쳐왔으나 그러한 급박한 경고조차 소용이 없다. 머지않아 티핑 포인트라고 부르는 ‘기후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고, 이른바 ‘멸종’이나 ‘종말’ 같은 낱말로 서술되는 상황이 닥쳐올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런 상황을 어떻게 연기하거나 저지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거나 무력해 보인다. 사태가 이미 이러하다면, 위기 상황이 도래했을 때 던져야 할 중요한 물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위기의 지구를 어떻게 살아 내야 하는지일 것이다. 이제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계속 밀쳐 냈던 물음을 던져야만 할 때다. 이 책은 그런 물음을 던지며 그간 미루어 두었던 문제를 함께 사고해 보려 한다. 적어도 그런 사고의 촉발이 되고자 한다.
지금의 기후위기는 비인간들의 항의이자 저항이다!
‘인간’이라는 덫에서 벗어나라
지구에 의한 사유를 가동시키려는 물음은 사유의 장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삶에 대한 근심 못지않게 인간 아닌 것들, 그리고 인간이 못 되었기에 죽더라도 숫자로 세어지지 않고, 사라져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새로이 사유해야 한다. 그런 비인간들과 인간들의 관계를 인간 중심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유해야 한다. 인간만큼이나 그들을 주어로 사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의 기후위기를 그들 비인간의 행위나 인간을 향해 외치는 항의, 나아가 정치적 저항으로 볼 것이며, 사물이나 자연이라 불리는 것과 인간의 관계를 정치, 즉 ‘자연의 정치’로 불러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과 새로운 동맹을 사유할 사고의 단서들을 찾고 제안하려 한다. 인간을 등지고 배신하려는 이런 사유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포스트휴먼’ 담론은 어쩌면 아직도 인간이란 덫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라는 말을 유기체나 인격을 실체화하는 일인칭 단수가 아니라 수많은 미생물의 복합체로, 일인칭 복수로 바꾸어 사유해야 한다. 나 자신이기도 한 미생물의 관점에 섬으로써 우리는 ‘인간’이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의 삶과 운명을 사유할 수 있다.
폴리스 이전의 ‘오이코스’로 돌아가라
훼손의 권리가 아닌 돌봄의 의무로서의 정치를 위해
생존과 필연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정치, ‘폴리스’라는 말을 기원으로 삼는 정치적 사고를 넘어서 인간 아닌 것과 인간의 정치를 사고하려면, 우리는 경제학과 생태학의 어원이 되었던 생존의 장(오이코스)과 정치(폴리스)의 분리를 넘어서서 정치와 생존을 동시에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오이코스야말로 인간을 특권화하는 정치를 넘어 자연의 정치가 가동되는 정치의 장이다. 생존의 장에서 발생하는 이 자연의 정치는 그리스를 넘어, 그 이전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을 요구한다. 즉 인류학자들의 ‘원시사회’와 비인간과 인간의 자연학적 ‘원시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인디언’ 사회는 폴리스 이전의 정치야말로 진정한 정치, 민주주의라는 말에 값하는 정치였음을 보여 준다. 역으로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먹고 먹히는 장이 증여와 포식의 정치로 포착되고, 증식과 회복이라는 상반되는 힘들이 충돌하는 장으로 포착될 때, 자연의 정치는 단지 은유가 아닌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반면 가장이라는 자격을 가진 자들, 오이코스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자들만의 폴리스라는 그리스적 정치는 자연적 정치의 장에 어떤 치명적 문턱을 도입한다. ‘가장’이라는 관념이 세금과 부역을 책임지는 대가로 자신의 가족을 ‘소유물’로 삼는 지위를 얻는 거래가 그 문턱에서 발생한다. 더불어 소유라는 관념에 함축된 ‘돌봄’의 의무라는 ‘원시적’ 관념을, ‘훼손’의 권리라는 그리스-로마의 문명화된 관념이 대체하게 된 과정도 보아야 한다. 오이코스와 분리된 폴리스란 단지 인간만의 영역으로 정치가 제한된 것뿐 아니라 이러한 치명적 변환의 문턱들을 거치며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 아닌 것과 인간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 사이의 관계조차 충분히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오이코스와 분리된 정치 개념을 넘어서서 정치는 물론 오이코스, 생존의 개념 자체까지도 다시 사유하지 않는 한 정치도, 생존도, 비인간의 삶도, 인간의 삶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목소리 아닌 소리, 로고스 없는 포네를 정치적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인간 없는 정치뿐 아니라 인간 없는 치안, 인간 없는 권력의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학에 식민화된 주류 생태학뿐 아니라, 포괄적 생태학도 생명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대지는 생명체 간 동맹의 장이었다!
파국을 살아 내기 위한 죽음에 대한 이중 긍정
이 책은 지구라는 주어를 통해 인간을, 나아가 인간의 경제와 정치를 다룬다. 그리고 오이코스와 자연의 정치, 화폐에 포섭된 허무주의 경제학과 대비되는 오이코노믹스, 인간이라는 범주를 따로 가정하지 않은 정치인 오이코폴리틱스를 구성하려 한다. 대지라고 불리는 투쟁의 장은 생명체 간 동맹의 장이었다. 이 경우 폴리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 오이코스조차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동맹의 장이었음이 드러난다. 오이코페미니즘은 소유물이 된 인간,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 그리고 인간 아닌 것들과 동맹하는 전략이다.
동시에 현행의 기후위기와 멸종의 상응성을 특이점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 도래한 멸종을 ‘감히’ 종말이란 개념으로 포착하려 한다. 이때 종말이란 종교적인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참혹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답이 사라지고 물음만 남는 어두운 심연이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이란 그런 심연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을 사유하는 법, 공포 속에서 밀쳐 내는 게 아니라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을 찾자고 제안할 것이다. 죽음의 이중 긍정. 그것은 죽음이나 종말, 절망이란 말만 나오면 인간들이 보여 주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답 없이 도래한 그리고 도래할 파국적 상황을 긍정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길, 그 파국을 살아 내는 길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도래할 위기는 지금까지의 삶을
어떻게든 바꿀 것이니
『지구의 철학』은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진 이들, 기후위기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저지하러 나선 이들에게 기후위기를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할 것이다. 또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사유와 행동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벽들에 맞선 우회로를 찾는 하나의 제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 관심이나 의지, 행동과는 거리가 있지만 도래할 기후위기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려는 이라면 꼭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을 얘기하고 있기도 하다. 도래할 위기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든 바꿀 것을 요구할 터인데, 그저 에너지를 절약하며 살면 되겠지 하며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기를 그치는 시대에 일상의 소박한 삶을 지속하려면, 그리고 그나마 좋은 삶을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할 자원이 되리라.
동시에 이 책은 정치와 경제, 자연과 생태, 인간과 비인간, 가부장제와 페미니즘 등 기후위기와 독립적인 주제에 대한 독자적인 주장들을 제안하고 있으며, 문명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서구적 관점이나 그리스주의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 비판도 담고 있다. 이는 최근의 인류학 연구가 갖는 비판적 함축을 밀고 가는 데 유용한 자원이 되어줄 것이다. 이론이나 철학, 사상사 등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유용한 사유 자원이 될 것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랑시에르, 도나 해러웨이, 애너 칭, 데이비드 그레이버·데이비드 웬그로우, 제임스 스콧, 카를 마르크스, 미셸 아글리에타, 마셜 살린즈, 피에르 클라스트르, 한나 아렌트, 실비아 페데리치, 린 마굴리스, 제임스 러브록, 리차드 도킨스, 티머시 모턴, 안드레아스 말름 등 다양한 이론가들을 하나의 연결망으로 엮어, 이들의 사유가 수렴하는 지점이나 분기하는 지점, 충돌하거나 합류하는 지점들에 그려지는 하나의 지도는 그러한 관심이 길을 찾는 데 유용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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