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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반도 중심의 반도사관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북한 평양에 있었고 중국과의 국경선은 청천강이었다는 것이 반도사관의 핵심이다. 학자에 따라 다소의 견해차는 있지만, 큰 틀에서 고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동일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연燕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시대에 압록강 서쪽은 모두 중국 영토였고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한사군은 한반도 주변에 있었다는 논리가 된다.
2000년 전에 한무제가 한나라의 식민지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치했다면 시진핑이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 말은 망언이 아니라 진실이다. 한국의 반도사학이 시진핑의 망언을 듣고도 말 한마디 못한 채 쥐죽은 듯이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주장이 시진핑의 망언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북한 평양에 있었고 중국과의 국경선은 청천강이었다는 것이 반도사관의 핵심이다. 학자에 따라 다소의 견해차는 있지만, 큰 틀에서 고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동일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연燕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시대에 압록강 서쪽은 모두 중국 영토였고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한사군은 한반도 주변에 있었다는 논리가 된다.
2000년 전에 한무제가 한나라의 식민지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치했다면 시진핑이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 말은 망언이 아니라 진실이다. 한국의 반도사학이 시진핑의 망언을 듣고도 말 한마디 못한 채 쥐죽은 듯이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주장이 시진핑의 망언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목차
서문
01 서양의 로마시대에, 동양의 발해 2천년 왕조 있었다
02 “발해의 모퉁이에 조선이 있다” 「산해경」에 고조선의 위치와 위상 담겨
03 발해만 부근 단군조선을역사로 기록한 「산해경」
04 자랑스러운 발해조선 역사, 감추고 왜곡하는 반도사학
05 밝달민족 산동, 요동, 한반도 누비며 천하경영
06 천년 전 북경 위의 조선하朝鮮河, 북경이 발해조선의 일부였다는 증거
07 북경 코앞 ‘조선하’ 심기 불편, 한 글자 슬쩍 빼 조하潮河로 변경
08 북경의 조선하, 「왕기공행정록」 「석진지」에도 나온다
09 황폐한 조선성朝鮮城, 왜 천년전 하북성 노룡현에 남아 있었나
10 1400년 만에 들통난 하북성 노룡현에 감춰진 조선성의 비밀
11 진시황 진나라 동쪽 끝은 산동반도, 북쪽은 고조선 땅
12 고조선 땅에 세워진 진시황 유적의 모순
13 하북성 노룡현엔 왜 조선성, 고죽성, 요서성 유적이 있었는가
14 발해조선 입증하는 모용선비족 두로공 신도비문
15 한양조선은 발해조선을 계승했는가
16 발해조선 없는 한국사가 동북공정 불렀다
17 평양의 단군 무덤 고조선 때 것일까
18 발해만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가 고조선 수도 ‘평양’
19 “조선 재상 북경 어양현 사람”, 사마천 「사기」 발해조선 입증
20 만리장성 연장 시도는 중국의 영토야욕이 빚어낸 저질 코미디
21 위환魏煥의 「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 선비족, 고죽국 등을 발해조선 민족으로 간주했다
22 「주역」의 ‘명이明夷’는 발해조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23 아리랑, 장독대에도 남아 있는 발해조선의 건국이념 홍익인간 정신
24 비열한 수법 동원한 한무제의 발해조선 침략, 실패한 전쟁이었다
25 발해조선, 상나라, 고죽국이 숭배한 세발 달린 검은 새 삼족오三足烏
26 지금의 광활한 중국 만든 청나라, 발해조선의 후손이다
27 발해조선의 수도와 서쪽 경계는 어디일까?
28 북경 넘어 하북성 남쪽 보정시 일대까지 고조선 영토였다
01 서양의 로마시대에, 동양의 발해 2천년 왕조 있었다
02 “발해의 모퉁이에 조선이 있다” 「산해경」에 고조선의 위치와 위상 담겨
03 발해만 부근 단군조선을역사로 기록한 「산해경」
04 자랑스러운 발해조선 역사, 감추고 왜곡하는 반도사학
05 밝달민족 산동, 요동, 한반도 누비며 천하경영
06 천년 전 북경 위의 조선하朝鮮河, 북경이 발해조선의 일부였다는 증거
07 북경 코앞 ‘조선하’ 심기 불편, 한 글자 슬쩍 빼 조하潮河로 변경
08 북경의 조선하, 「왕기공행정록」 「석진지」에도 나온다
09 황폐한 조선성朝鮮城, 왜 천년전 하북성 노룡현에 남아 있었나
10 1400년 만에 들통난 하북성 노룡현에 감춰진 조선성의 비밀
11 진시황 진나라 동쪽 끝은 산동반도, 북쪽은 고조선 땅
12 고조선 땅에 세워진 진시황 유적의 모순
13 하북성 노룡현엔 왜 조선성, 고죽성, 요서성 유적이 있었는가
14 발해조선 입증하는 모용선비족 두로공 신도비문
15 한양조선은 발해조선을 계승했는가
16 발해조선 없는 한국사가 동북공정 불렀다
17 평양의 단군 무덤 고조선 때 것일까
18 발해만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가 고조선 수도 ‘평양’
19 “조선 재상 북경 어양현 사람”, 사마천 「사기」 발해조선 입증
20 만리장성 연장 시도는 중국의 영토야욕이 빚어낸 저질 코미디
21 위환魏煥의 「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 선비족, 고죽국 등을 발해조선 민족으로 간주했다
22 「주역」의 ‘명이明夷’는 발해조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23 아리랑, 장독대에도 남아 있는 발해조선의 건국이념 홍익인간 정신
24 비열한 수법 동원한 한무제의 발해조선 침략, 실패한 전쟁이었다
25 발해조선, 상나라, 고죽국이 숭배한 세발 달린 검은 새 삼족오三足烏
26 지금의 광활한 중국 만든 청나라, 발해조선의 후손이다
27 발해조선의 수도와 서쪽 경계는 어디일까?
28 북경 넘어 하북성 남쪽 보정시 일대까지 고조선 영토였다
책 속으로
압록강이나 청천강이 아닌 하북성 남쪽 보정시의 백석산과 역수가 고조선, 고구려시대 서쪽 국경선으로서, 밝달족은 지난날 중국 대륙의 역사 문화를 창조한 조연이 아니라 주역이었다. 이와 같은 밝달민족의 위대한 역사가 「사고전서」라는 세계가 공인하는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사실에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도 세계인도 깜짝 놀랄 것이다.
--- p.8
「무경총요」는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1044년에 편찬된 책이다. 이 책의 편간 연대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보다 350년을 앞선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조선하’는 600여 년 전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한양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조선하’의 조선은 어떤 조선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선하’가 북송시기에 어째서 오늘의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후기의 한양 조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고조선에서 유래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조선하가 압록강 이남의 평양이나 서울 일대가 아닌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가 주 무대가 아니라 대륙 깊숙이 발해유역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오늘의 북경이 발해조선의 일부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사고전서」에서 찾아내 최초로 세상에 선보인 이 자료는 우리의 고조선사를 반도를 넘어 새롭게 재정립하는 데 초석이 될,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본다.
--- p.62~63
하북성 노룡현은 주나라 이전에는 고조선의 도성이 있었고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의 국도였으며 한나라 시기에는 요서군 땅이었고 한무제 이후에는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다. 북제시기에 조선현이 신창현으로 통폐합되었고 수나라 때 노룡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북성 노룡현은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건국한 우리 한민족의 성스러운 나라 고조선과 만난다. 그래서 거기에 천 년 전 송나라 때까지 조선성 유적이 남아서 여기가 조선인의 요람이라고 발해조선의 역사를 증언했던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한민족의 새로운 웅비시대를 맞아 필자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되게 된 것이다.
--- p.89
「두로공신도비문」의 명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조선이 건국을 하였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朝鮮建國 孤竹爲君)” 이는 앞에서 언급한 조선국과 고죽국에 관한 내용, 즉 선비족 모용황이 발해유역에서 전연을 건국하기 앞서 고조선이 최초로 건국했고 고죽국이 이어서 임금이 된 역사적 사실을 여덟 글자로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발해유역의 하북성 창려군 출신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문」에 등장하는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여덟 글자는 고대 조선이 발해유역, 발해유역 중에서도 특히 고죽국이 있던 발해만의 하북성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일대에서 건국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금석문 자료라고 본다.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국前燕國은 발해유역에서 건국했고 조양朝陽에 도읍을 정했다. 전연국의 역사를 설명하기 앞서 “조선이 그 지역에서 최초로 건국했다”고 잘라 말한 「두로공신도비문」은 조선의 발해만 건국을 간접적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을 통해 언급했고 심증적으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134
왕포王褒(513~576)는 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고구려」라는 제목으로 쓴 시에서 “스산한 역수에는 물결이 일렁이고, 연나라와 조나라의 가인들이 많구나.(蕭蕭易水生波 燕趙佳人自多)”라고 말했다. 「고구려」라는 제목으로 쓴 왕포의 시에 왜 북한의 압록강이나 청천강이 아닌 하북성 남쪽의 역수가 등장하는가. 이는 남북조시대에 하북성 남쪽 보정시에 있는 오늘의 역수가 고구려의 서쪽 경계였음을 반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라고 본다.
왕포가 살았던 남북조시대는 중국의 한족은 약화되어 장강 남쪽으로 쫓겨 가 동진東晉을 세워 겨우 명맥만을 유지했고 동북방의 선비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북위를 건국했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태왕이 출현하여 한무제가 북경 일대에 설치한 한사군을 모두 축출하고 고조선의 서쪽 고토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에 의해 회복된 한사군의 고토가 하북성 역수까지였다는 것은 한편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역수유역까지였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p.8
「무경총요」는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1044년에 편찬된 책이다. 이 책의 편간 연대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보다 350년을 앞선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조선하’는 600여 년 전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한양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조선하’의 조선은 어떤 조선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선하’가 북송시기에 어째서 오늘의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후기의 한양 조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고조선에서 유래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조선하가 압록강 이남의 평양이나 서울 일대가 아닌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가 주 무대가 아니라 대륙 깊숙이 발해유역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오늘의 북경이 발해조선의 일부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사고전서」에서 찾아내 최초로 세상에 선보인 이 자료는 우리의 고조선사를 반도를 넘어 새롭게 재정립하는 데 초석이 될,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본다.
--- p.62~63
하북성 노룡현은 주나라 이전에는 고조선의 도성이 있었고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의 국도였으며 한나라 시기에는 요서군 땅이었고 한무제 이후에는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다. 북제시기에 조선현이 신창현으로 통폐합되었고 수나라 때 노룡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북성 노룡현은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건국한 우리 한민족의 성스러운 나라 고조선과 만난다. 그래서 거기에 천 년 전 송나라 때까지 조선성 유적이 남아서 여기가 조선인의 요람이라고 발해조선의 역사를 증언했던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한민족의 새로운 웅비시대를 맞아 필자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되게 된 것이다.
--- p.89
「두로공신도비문」의 명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조선이 건국을 하였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朝鮮建國 孤竹爲君)” 이는 앞에서 언급한 조선국과 고죽국에 관한 내용, 즉 선비족 모용황이 발해유역에서 전연을 건국하기 앞서 고조선이 최초로 건국했고 고죽국이 이어서 임금이 된 역사적 사실을 여덟 글자로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발해유역의 하북성 창려군 출신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문」에 등장하는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여덟 글자는 고대 조선이 발해유역, 발해유역 중에서도 특히 고죽국이 있던 발해만의 하북성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일대에서 건국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금석문 자료라고 본다.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국前燕國은 발해유역에서 건국했고 조양朝陽에 도읍을 정했다. 전연국의 역사를 설명하기 앞서 “조선이 그 지역에서 최초로 건국했다”고 잘라 말한 「두로공신도비문」은 조선의 발해만 건국을 간접적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을 통해 언급했고 심증적으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134
왕포王褒(513~576)는 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고구려」라는 제목으로 쓴 시에서 “스산한 역수에는 물결이 일렁이고, 연나라와 조나라의 가인들이 많구나.(蕭蕭易水生波 燕趙佳人自多)”라고 말했다. 「고구려」라는 제목으로 쓴 왕포의 시에 왜 북한의 압록강이나 청천강이 아닌 하북성 남쪽의 역수가 등장하는가. 이는 남북조시대에 하북성 남쪽 보정시에 있는 오늘의 역수가 고구려의 서쪽 경계였음을 반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라고 본다.
왕포가 살았던 남북조시대는 중국의 한족은 약화되어 장강 남쪽으로 쫓겨 가 동진東晉을 세워 겨우 명맥만을 유지했고 동북방의 선비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북위를 건국했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태왕이 출현하여 한무제가 북경 일대에 설치한 한사군을 모두 축출하고 고조선의 서쪽 고토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에 의해 회복된 한사군의 고토가 하북성 역수까지였다는 것은 한편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역수유역까지였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p.246~248
출판사 리뷰
중국 대륙 난하 중심의 리지린 민족사관
대동강 평양, 한반도 한사군 설을 배격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압록강에서 하북성 동쪽 난하?河 유역으로 확장하는 대륙사관의 기치를 든 것은 북한의 리지린이다. 요동군과 요서군의 기준이 된 고대의 요수를 현재의 요녕성 요하가 아닌 하북성 동쪽의 난하로 보고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선인 패수를 현재의 북한 청천강이 아닌 요녕성 대능하로 본 것이 리지린 민족사관의 핵심이다.
북한 리지린의 관점은 남한의 윤내현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윤내현은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다. 지금의 난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그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말하였다.(『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북한 리지린 민족사학의 한계
하북성 난하가 고대의 요수이고 난하가 중국과 고조선의 경계였다는 리지린의 주장은 고조선의 영토를 대륙으로 대폭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식민사학에 찌든 한국 반도사학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만 리지린의 주장은 다음 몇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첫째 하북성 동쪽의 난하를 고대의 요하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리지린의 추정일 뿐 난하가 요하라고 직접 언급한 고대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하북성 남쪽 보정시保定市 역수易水는 역수의 다른 이름이 요수라고 남북조시대 대표적인 학자 유신庾信(513~681)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가 아닌 역수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둘째 리지린이 난하를 고대의 요수로 비정하는데 주요한 근거로 작용한 것이 갈석산이다. 현재의 갈석산은 바로 난하 부근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어 리지린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리지린은 『사기』 소진열전의 “연나라 남쪽에 갈석산과 안문산의 풍요로움이 있다(燕南有碣石雁門之饒)”라는 기록을 간과했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하북성 쪽에 있었는데 현재 갈석산은 하북성 동쪽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과 다른 갈석산이 연나라 때 하북성 남쪽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셋째 『회남자』의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경유한다.(自碣石山 過朝鮮)”라는 기록이나 『전한서』에 한무제가 “갈석산을 지나서 낙랑군, 현도군을 설치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갈석산은 조선의 서쪽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의 갈석산은 조선의 수도였던 노룡현의 서쪽이 아닌 동쪽에 있어 조선을 지나서 갈석산이 나온다. 위치가 뒤바뀌었다.
넷째 『진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다.”고 말했는데 하북성 동쪽 갈석산이 있는 현재의 창려현은 역사상에서 한번도 수성현으로 된 적이 없다. 그러나 남북조시대에 유신이 요수라고 언급한 하북성 남쪽 보정시 역수유역에는 지금도 수성진이 있다. 『진태강지리지』에 말한 낙랑군 수성현은 현재의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이고 갈석산은 수성진 부근의 백석산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섯째 『태평환우기』 하북도 역주易州 역현易縣 조항에 연나라 소왕昭王이 현자 곽외를 예우하기 위해 역현에 갈석관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郭?謂燕王 禮賢請從?始 乃爲碣石館於臺前) 하북성 보정시 역수유역에 갈석산이 없었다면 왜 여기에 멋진 건물을 지어 갈석관이란 명칭을 붙였겠는가. 이는 갈석산이 역수유역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연나라 시대 연과 고조선의 국경은 압록강이나 난하가 아니라 역수였다. 현재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백석산과 역수가 연나라 진나라 한나라시대의 갈석산과 요수이고 시대에 따라서 다소의 변동은 있었지만 이곳이 고조선의 서쪽 경계, 즉 중국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다. 리지린이 고조선의 서쪽 강역을 난하 이동 요서지역으로 간주한 것은 청천강을 중국과 조선의 경계로 인식한 반도사관에 비하면 크게 진전된 견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북성 남쪽의 백석산과 역수유역까지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다면 이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보다 훨씬 더 큰 민족의 역사영토를 중국에 떼어주는 격이다.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우리 강역을 축소시키는 우를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이 책은 『사고전서』에 나타난 새로운 고조선 자료에 근거, 북경이 한국의 고대영토임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밝혔다.
리지린은 생전에 『사고전서』에 실려 있는 고조선 관련 자료들을 섭렵할 기회를 갖지 못하여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 고조선의 수도였고 고조선이 옛 고죽국 땅 노룡현에서 건국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하를 고조선의 서쪽 경계로 설정함으로써 한국인의 고대 영토 북경을 모조리 중국 영토에 편입시키는 한계를 드러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의 건륭황제가 청나라 이전의 중국 5000년 역사상의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약 8만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는 한국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귀중한 고조선 자료들이 담겨 있다.
예컨대 『무경총요』의 북경 조선하朝鮮河, 『태평환우기』의 하북성 노룡현 조선성朝鮮城,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명』의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 관련 기록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쪽같은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북경이 한국인의 고대영토이며 역사주권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사고전서』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지금 중국의 수도 북경은 본래 발해조선의 강역으로서 한국인의 고대영토였고 따라서 북경의 역사주권은 우리 한국에 있다. 한국인이 북경의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사고전서』라는 세계가 공인하는 자료에 담겨 있다.
발해조선을 『사고전서』로 되살려 아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이 책은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시진핑의 한국사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에 경종을 울려서 역사테러의 재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한 짓인가를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될 것이다.
대동강 평양, 한반도 한사군 설을 배격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압록강에서 하북성 동쪽 난하?河 유역으로 확장하는 대륙사관의 기치를 든 것은 북한의 리지린이다. 요동군과 요서군의 기준이 된 고대의 요수를 현재의 요녕성 요하가 아닌 하북성 동쪽의 난하로 보고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선인 패수를 현재의 북한 청천강이 아닌 요녕성 대능하로 본 것이 리지린 민족사관의 핵심이다.
북한 리지린의 관점은 남한의 윤내현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윤내현은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다. 지금의 난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그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말하였다.(『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북한 리지린 민족사학의 한계
하북성 난하가 고대의 요수이고 난하가 중국과 고조선의 경계였다는 리지린의 주장은 고조선의 영토를 대륙으로 대폭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식민사학에 찌든 한국 반도사학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만 리지린의 주장은 다음 몇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첫째 하북성 동쪽의 난하를 고대의 요하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리지린의 추정일 뿐 난하가 요하라고 직접 언급한 고대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하북성 남쪽 보정시保定市 역수易水는 역수의 다른 이름이 요수라고 남북조시대 대표적인 학자 유신庾信(513~681)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가 아닌 역수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둘째 리지린이 난하를 고대의 요수로 비정하는데 주요한 근거로 작용한 것이 갈석산이다. 현재의 갈석산은 바로 난하 부근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어 리지린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리지린은 『사기』 소진열전의 “연나라 남쪽에 갈석산과 안문산의 풍요로움이 있다(燕南有碣石雁門之饒)”라는 기록을 간과했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하북성 쪽에 있었는데 현재 갈석산은 하북성 동쪽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과 다른 갈석산이 연나라 때 하북성 남쪽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셋째 『회남자』의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경유한다.(自碣石山 過朝鮮)”라는 기록이나 『전한서』에 한무제가 “갈석산을 지나서 낙랑군, 현도군을 설치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갈석산은 조선의 서쪽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의 갈석산은 조선의 수도였던 노룡현의 서쪽이 아닌 동쪽에 있어 조선을 지나서 갈석산이 나온다. 위치가 뒤바뀌었다.
넷째 『진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다.”고 말했는데 하북성 동쪽 갈석산이 있는 현재의 창려현은 역사상에서 한번도 수성현으로 된 적이 없다. 그러나 남북조시대에 유신이 요수라고 언급한 하북성 남쪽 보정시 역수유역에는 지금도 수성진이 있다. 『진태강지리지』에 말한 낙랑군 수성현은 현재의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이고 갈석산은 수성진 부근의 백석산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섯째 『태평환우기』 하북도 역주易州 역현易縣 조항에 연나라 소왕昭王이 현자 곽외를 예우하기 위해 역현에 갈석관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郭?謂燕王 禮賢請從?始 乃爲碣石館於臺前) 하북성 보정시 역수유역에 갈석산이 없었다면 왜 여기에 멋진 건물을 지어 갈석관이란 명칭을 붙였겠는가. 이는 갈석산이 역수유역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연나라 시대 연과 고조선의 국경은 압록강이나 난하가 아니라 역수였다. 현재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백석산과 역수가 연나라 진나라 한나라시대의 갈석산과 요수이고 시대에 따라서 다소의 변동은 있었지만 이곳이 고조선의 서쪽 경계, 즉 중국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다. 리지린이 고조선의 서쪽 강역을 난하 이동 요서지역으로 간주한 것은 청천강을 중국과 조선의 경계로 인식한 반도사관에 비하면 크게 진전된 견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북성 남쪽의 백석산과 역수유역까지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다면 이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보다 훨씬 더 큰 민족의 역사영토를 중국에 떼어주는 격이다.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우리 강역을 축소시키는 우를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이 책은 『사고전서』에 나타난 새로운 고조선 자료에 근거, 북경이 한국의 고대영토임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밝혔다.
리지린은 생전에 『사고전서』에 실려 있는 고조선 관련 자료들을 섭렵할 기회를 갖지 못하여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 고조선의 수도였고 고조선이 옛 고죽국 땅 노룡현에서 건국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하를 고조선의 서쪽 경계로 설정함으로써 한국인의 고대 영토 북경을 모조리 중국 영토에 편입시키는 한계를 드러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의 건륭황제가 청나라 이전의 중국 5000년 역사상의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약 8만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는 한국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귀중한 고조선 자료들이 담겨 있다.
예컨대 『무경총요』의 북경 조선하朝鮮河, 『태평환우기』의 하북성 노룡현 조선성朝鮮城,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명』의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 관련 기록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쪽같은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북경이 한국인의 고대영토이며 역사주권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사고전서』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지금 중국의 수도 북경은 본래 발해조선의 강역으로서 한국인의 고대영토였고 따라서 북경의 역사주권은 우리 한국에 있다. 한국인이 북경의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사고전서』라는 세계가 공인하는 자료에 담겨 있다.
발해조선을 『사고전서』로 되살려 아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이 책은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시진핑의 한국사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에 경종을 울려서 역사테러의 재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한 짓인가를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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