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덕수궁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재조명
외국인 친구가 한국을 찾았다고 치자. 대부분 고궁으로 데려갈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으로 데려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덕수궁은 어떤가. 우리는 덕수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상징성이나 존재감이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에 비해 덜하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덕수궁은 물리적으로는 어느 궁보다 우리와 가깝고 역사 속에서도 굵직한 사건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덕수궁은 개항과 아관파천, 을사늑약, 한일 병합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덕ㄷ수궁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은 조선왕조를 정리하는 기회이자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덕수궁이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건설한 궁궐인 동시에 실질적으로 조선왕조 최후의 궁궐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덕수궁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더불어 덕수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덕수궁의 구조와 구체적인 건물 그리고 저자가 덕수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견과 감회 등에 대해 설명한다. 글과 함께 관련된 사진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도모한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을 찾았다고 치자. 대부분 고궁으로 데려갈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으로 데려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덕수궁은 어떤가. 우리는 덕수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상징성이나 존재감이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에 비해 덜하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덕수궁은 물리적으로는 어느 궁보다 우리와 가깝고 역사 속에서도 굵직한 사건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덕수궁은 개항과 아관파천, 을사늑약, 한일 병합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덕ㄷ수궁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은 조선왕조를 정리하는 기회이자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덕수궁이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건설한 궁궐인 동시에 실질적으로 조선왕조 최후의 궁궐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덕수궁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더불어 덕수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덕수궁의 구조와 구체적인 건물 그리고 저자가 덕수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견과 감회 등에 대해 설명한다. 글과 함께 관련된 사진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도모한다.
목차
책을 내면서
가깝고도 먼 궁궐, 덕수궁
경운궁, 근대한국의 문을 열다
근대의 시작
한국 근대의 원점, 서울광장 / 을미사변, 일본의 도발 / 아관파천, 제국을 향한 첫걸음
근대국가 프로젝트
독립문의 진실 / 근대도시의 상징, 탑골공원 / 근대도시 개조 프로젝트, 가로 정비 사업
경운궁의 부활
국난 극복의 상징, 정릉동 행궁 / 경운궁의 부활
경운궁, 제국의 시대를 열다
고종, 황제의 위에 오르다 / 조선의 새로운 국호, 대한
도심궁궐, 경운궁
경운궁의 입지 / 경운궁 터 / 궁역의 확장
환구단, 황제의 격을 갖추다
환구단 건설과 도시 구조의 변화 / 새 환구단의 건설 / 환구단 / 황궁우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
시청 앞 광장을 대한문 앞 광장으로
대한문, 제국의 의지를 담다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 인화문에서 대안문으로 / 두 개의 금천교
궐내 각사
광무개혁의 두 기둥, 궁내부와 원수부
중화전, 제국의 얼굴을 세우다
중화전 가는 길 / 제국의 심장, 중화전 / 화마에 날아간 제국의 꿈 / 중화전 새롭게 들여다보기
즉조당, 덕수궁의 원 공간
즉조당과 준명당 / 석어당 / 의궤 속 덕수궁의 원 공간
석조전, 근대국가의 뜻을 세우다
석조전, 개명한 근대국가의 상징 / 돌로 지은 집 / 석조전과 중화전의 엇갈린 두 축
덕수궁의 서양 건축
구성헌 / 돈덕전, 마지막 황제의 추억 / 정관헌
함녕전 권역, 황제의 침전과 편전
함녕전 / 덕홍전
궐 밖의 덕수궁 전각들:수학원, 중명전, 선원전
수학원 / 중명전, 고종의 마지막 승부수 / 선원전
경희궁, 새로운 시대의 초석이 되다
대한제국기 경희궁의 역할
주인 잃은 덕수궁
덕수궁의 해체 / 덕수궁의 중앙 공원화와 전각의 훼철 / 석조전의 권역 변화 /
해방 후 덕수궁의 변화
경운궁인가, 덕수궁인가
가깝고도 먼 궁궐, 덕수궁
경운궁, 근대한국의 문을 열다
근대의 시작
한국 근대의 원점, 서울광장 / 을미사변, 일본의 도발 / 아관파천, 제국을 향한 첫걸음
근대국가 프로젝트
독립문의 진실 / 근대도시의 상징, 탑골공원 / 근대도시 개조 프로젝트, 가로 정비 사업
경운궁의 부활
국난 극복의 상징, 정릉동 행궁 / 경운궁의 부활
경운궁, 제국의 시대를 열다
고종, 황제의 위에 오르다 / 조선의 새로운 국호, 대한
도심궁궐, 경운궁
경운궁의 입지 / 경운궁 터 / 궁역의 확장
환구단, 황제의 격을 갖추다
환구단 건설과 도시 구조의 변화 / 새 환구단의 건설 / 환구단 / 황궁우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
시청 앞 광장을 대한문 앞 광장으로
대한문, 제국의 의지를 담다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 인화문에서 대안문으로 / 두 개의 금천교
궐내 각사
광무개혁의 두 기둥, 궁내부와 원수부
중화전, 제국의 얼굴을 세우다
중화전 가는 길 / 제국의 심장, 중화전 / 화마에 날아간 제국의 꿈 / 중화전 새롭게 들여다보기
즉조당, 덕수궁의 원 공간
즉조당과 준명당 / 석어당 / 의궤 속 덕수궁의 원 공간
석조전, 근대국가의 뜻을 세우다
석조전, 개명한 근대국가의 상징 / 돌로 지은 집 / 석조전과 중화전의 엇갈린 두 축
덕수궁의 서양 건축
구성헌 / 돈덕전, 마지막 황제의 추억 / 정관헌
함녕전 권역, 황제의 침전과 편전
함녕전 / 덕홍전
궐 밖의 덕수궁 전각들:수학원, 중명전, 선원전
수학원 / 중명전, 고종의 마지막 승부수 / 선원전
경희궁, 새로운 시대의 초석이 되다
대한제국기 경희궁의 역할
주인 잃은 덕수궁
덕수궁의 해체 / 덕수궁의 중앙 공원화와 전각의 훼철 / 석조전의 권역 변화 /
해방 후 덕수궁의 변화
경운궁인가, 덕수궁인가
출판사 리뷰
개항, 아관파천, 을사늑약, 한일 병합의 현장, 덕수궁
덕수궁은 개항과 아관파천, 을사늑약, 한일 병합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을 형성했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결과만 기억될 뿐, 그 사건들이 어찌 일어나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현장으로서의 덕수궁 이야기는 항상 빠져 있었다. 현장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의 현장을 재현해 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15쪽에서
올해는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스러진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많은 단체들과 언론에서는 경술국치 100년을 되돌아보는 행사를 준비하거나, 특집기사를 내 보내고 있다. 이 100년 전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공간이 덕수궁이다.
그런데 덕수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궁궐을 얘기할 때,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은 얘기하지만 덕수궁을 얘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몇 년 전에는 덕수궁 영역이었던 선원전 터가 미국 대사관 숙소가 될 뻔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덕분에 덕수궁이 가진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하고, ‘경운궁’인지 ‘덕수궁’인지 논의도 일었다.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에서는 덕수궁이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왜 같은 궁궐인데 유독 덕수궁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다른 궁궐들과 무엇이 다른지 차근차근 짚어주고 있다.
고종황제가 꿈꾼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서울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저 서울시내 한복판에 잔디가 있어 신기할 것이다. 약간의 연배가 있는 시민들은 예전 같으면 자동차가 씽씽 달렸던 곳에 앉아 보고, 누워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한국 근대의 출발점이자 우리 역사 최초로 황제국을 열었던 역사 현장인 최초의 황궁, 경운궁의 끝자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1쪽에서
이 책은 근대한국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경운궁, 근대한국의 문을 열다”와 덕수궁 내 전각이 지닌 역사를 하나하나 읽어 주는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인 안창모 교수는 머리말에서 ‘고궁=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말이 공식처럼 되어 있는 현실에서 근대 건축을 전공한 자신이 덕수궁의 필자가 되었음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며, 덕수궁을 제대로 알려면 근대 역사를 알아야 하고, 반대로 근대역사를 알려면 덕수궁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피력한다.
사실 근대 건축을 연구하는 필자가 서울의 다섯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 전체를 조명하는 집필을 의뢰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 ‘고궁=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덕수궁에 관한 책을 근대 건축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의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4쪽에서
단순히 덕수궁 내 전각이 지닌 건축적 의미와 건축 역사적 가치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1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근대 역사의 심장부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공간으로서 덕수궁을 조명한다.
먼저, 그는 고종이 지향했던 제국은 여느 서양의 제국과 많이 달랐음을 강조한다. 고종이 꿈꾼 대한제국은 고조선 이후 역사를 계승한 고대국가 모델과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국가 건설이었다고 하면서 고대국가 모델이 황제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고종이 지향했던 제국은 여느 서양의 제국과는 많이 달랐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며 고종이 지향했던 궁극점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방국가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 그 중심에 고종이 있었고, 고종이 지향점으로 삼은 것이 고대국가 모델이었다. 그 성과는 황제국가의 모습을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세계질서의 절대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국가 건설이었다. -6쪽에서
고종은 황제의 위에 오르면서 환구단을 짓고 황제국가에서만 행하는 의식인 고천지제를 지낸다. ‘광무’라는 연호를 선택해 중국은 물론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다지는가 하면, 서양 근대도시들이 갖추고 있는 공원(탑골공원)을 만들고, 도시 가로 정비 사업과 같은 일련의 근대화 프로젝트들을 진행한다.
탑골공원 건설 후 고종이 공원에서 민의가 수렴되는 언로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는 점도 『독립신문』이 정부와 국민 사이에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랐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탑골공원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공원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깆는 기능보다는 근대국가에서 공원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 가치에 의미를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3쪽에서
저자는 독립문과 『독립신문』의 진실이 잘못 알려졌음을 이야?한다. 이들은 고종의 근대화 프로젝트 일환이지, 우리가 배운 것처럼 서재필 박사 단독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립문이 들어선 자리도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영은문의 철거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아관파천에 대해서도 고종이 무능해서 도망친 것으로 배웠는데, 이것도 잘못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당시는 ‘왕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로 직결되던 왕조 국가 시절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압박하는 일본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던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고, 그래서 선택된 나라가 러시아라는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고종은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환궁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당시 조선의 국력과 조선에서의 국제적인 역학 관계를 감안할 때 일본을 가장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각종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이때 펼친 각종 도시ㆍ건축 사업은 근대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는 서울 도시 구조의 근간이 되었다. -29쪽에서
왜 고종황제는 궁궐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았을까?
현저한 국력의 차이를 갖고 있는 조선이 일본에 홀로 대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고종은 구미국가의 도움을 얻기에 용이한 정동을 선택했다. 고종이 선택한 정동은 조선을 압박해 오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서구 제국들의 공사관들이 있는 곳이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선조가 머물면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곳이 바로 경운궁이었기에 국난 극복의 의지를 다잡는다는 명분과 상징성도 함께 갖고 있었다. -73쪽에서
덕수궁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산을 등지고 있지도 못하고, 경계도 들쭉날쭉하다. ‘왕궁 만들기’의 원칙인, ‘전조후침’, ‘배산임수’, ‘좌묘우사’ 등과 같은 원칙들을 지킬 수 없었다. 한마디로 궁궐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격도 갖추지 못한 궁궐인 것이다. 하지만 안창모 교수는 경운궁의 입지와 건축은 당시 시대 상황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내적ㆍ외적 조건이 달랐음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에 비해 막강한 국력을 가진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외국 공사관이나 선교사들이 많이 있는 정동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머물면서 조선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궁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경운궁 영역을 확장하면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운교라는 것을 설치했다. 운교는 지대가 다른 두 지역을 연결하는 육교와 같은 시설로,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민가 영역을 고려해 높게 띄운 다리를 말한다. 이 책의 145쪽과 234쪽에는 당시 운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진이 있는데, 이는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사진다. 운교는 두 곳에 설치되었다. 남측으로 궁역을 확장하면서 매입한 독일 공사관 자리와 경운궁을 연결해 주는 곳에 있고, 다른 하나는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하는 곳에 설치되었다. 지금도 덕수궁 담장과 서울시청 별관 담장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두 사진 이외에도 1904년 화재 전 경운궁 모습, 1910년대 경운궁의 전각들이 훼손되기 전 경운궁 전경, 경운궁 주변 정동 인근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진 및 도면 자료들을 담았다.
덕수궁에 있는 서양식 건축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대한제국 13년의 중심 공간이었던 덕수궁에는 당시 서양 건축 양식을 따른 서양식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정도 밖에 없다. 황제의 침실이었던 돈덕전,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구성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 서양식 건축물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추적한다.
구성헌은 준명당의 서북쪽 석조전의 부지에 있었던 2층 양관으로 여기서 여러 차례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나, 구성헌이 어떻게 지어졌고, 언제 어떻게 덕수궁에서 사라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구성헌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성헌을 둘러싼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윤곽이 어슴푸레 보이는 정도다. -195쪽에서
석조전의 왼쪽 모퉁이를 돌면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양관인 돈덕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덕수궁이 건설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 개설되면서 돈덕전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199쪽에서
석조전을 포함해 대부분 서양식 ?각들에는 베란다가 있는데, 이는 덥고 습한 동남아 기후와는 다른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했기 때문이라는 점, 석조전 공사를 위해 국내 최초로 모형을 만들어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는 얘기 등 덕수궁의 각 전각들과 관련한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들을 전한다. 또한 석조전과 정전인 중화전의 축이 어긋나 있는데, 그 축이 왜 어긋나 있는지를 추적하기도 한다.
덕수궁의 참모습 찾기를 통한 우리 근대사의 재조명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며 덕수궁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많은 전각이 훼철되거나 궁역이 축소되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과 동떨어져 도심 한복판에 홀로 덩그마니 놓여 있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지나는 사람들이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발상 때문에 궁궐의 담장이 철거되고 투시형 담장이 설치되기도 했다. 한때 덕수궁은 스케이트장이 있는 공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 덕수궁은 제모습찾기를 하고 있다. 함녕전 복원 공사를 시작으로, 현재는 석조전 복원 공사, 중명전 복원, 선원전 복원 공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덕수궁 전각들을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우리 근대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재조명해 볼 시점이다.
덕수궁은 개항과 아관파천, 을사늑약, 한일 병합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을 형성했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결과만 기억될 뿐, 그 사건들이 어찌 일어나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현장으로서의 덕수궁 이야기는 항상 빠져 있었다. 현장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의 현장을 재현해 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15쪽에서
올해는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스러진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많은 단체들과 언론에서는 경술국치 100년을 되돌아보는 행사를 준비하거나, 특집기사를 내 보내고 있다. 이 100년 전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공간이 덕수궁이다.
그런데 덕수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궁궐을 얘기할 때,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은 얘기하지만 덕수궁을 얘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몇 년 전에는 덕수궁 영역이었던 선원전 터가 미국 대사관 숙소가 될 뻔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덕분에 덕수궁이 가진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하고, ‘경운궁’인지 ‘덕수궁’인지 논의도 일었다.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에서는 덕수궁이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왜 같은 궁궐인데 유독 덕수궁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다른 궁궐들과 무엇이 다른지 차근차근 짚어주고 있다.
고종황제가 꿈꾼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서울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저 서울시내 한복판에 잔디가 있어 신기할 것이다. 약간의 연배가 있는 시민들은 예전 같으면 자동차가 씽씽 달렸던 곳에 앉아 보고, 누워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한국 근대의 출발점이자 우리 역사 최초로 황제국을 열었던 역사 현장인 최초의 황궁, 경운궁의 끝자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1쪽에서
이 책은 근대한국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경운궁, 근대한국의 문을 열다”와 덕수궁 내 전각이 지닌 역사를 하나하나 읽어 주는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인 안창모 교수는 머리말에서 ‘고궁=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말이 공식처럼 되어 있는 현실에서 근대 건축을 전공한 자신이 덕수궁의 필자가 되었음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며, 덕수궁을 제대로 알려면 근대 역사를 알아야 하고, 반대로 근대역사를 알려면 덕수궁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피력한다.
사실 근대 건축을 연구하는 필자가 서울의 다섯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 전체를 조명하는 집필을 의뢰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 ‘고궁=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덕수궁에 관한 책을 근대 건축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의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4쪽에서
단순히 덕수궁 내 전각이 지닌 건축적 의미와 건축 역사적 가치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1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근대 역사의 심장부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공간으로서 덕수궁을 조명한다.
먼저, 그는 고종이 지향했던 제국은 여느 서양의 제국과 많이 달랐음을 강조한다. 고종이 꿈꾼 대한제국은 고조선 이후 역사를 계승한 고대국가 모델과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국가 건설이었다고 하면서 고대국가 모델이 황제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고종이 지향했던 제국은 여느 서양의 제국과는 많이 달랐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며 고종이 지향했던 궁극점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방국가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 그 중심에 고종이 있었고, 고종이 지향점으로 삼은 것이 고대국가 모델이었다. 그 성과는 황제국가의 모습을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세계질서의 절대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국가 건설이었다. -6쪽에서
고종은 황제의 위에 오르면서 환구단을 짓고 황제국가에서만 행하는 의식인 고천지제를 지낸다. ‘광무’라는 연호를 선택해 중국은 물론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다지는가 하면, 서양 근대도시들이 갖추고 있는 공원(탑골공원)을 만들고, 도시 가로 정비 사업과 같은 일련의 근대화 프로젝트들을 진행한다.
탑골공원 건설 후 고종이 공원에서 민의가 수렴되는 언로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는 점도 『독립신문』이 정부와 국민 사이에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랐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탑골공원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공원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깆는 기능보다는 근대국가에서 공원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 가치에 의미를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3쪽에서
저자는 독립문과 『독립신문』의 진실이 잘못 알려졌음을 이야?한다. 이들은 고종의 근대화 프로젝트 일환이지, 우리가 배운 것처럼 서재필 박사 단독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립문이 들어선 자리도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영은문의 철거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아관파천에 대해서도 고종이 무능해서 도망친 것으로 배웠는데, 이것도 잘못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당시는 ‘왕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로 직결되던 왕조 국가 시절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압박하는 일본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던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고, 그래서 선택된 나라가 러시아라는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고종은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환궁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당시 조선의 국력과 조선에서의 국제적인 역학 관계를 감안할 때 일본을 가장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각종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이때 펼친 각종 도시ㆍ건축 사업은 근대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는 서울 도시 구조의 근간이 되었다. -29쪽에서
왜 고종황제는 궁궐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았을까?
현저한 국력의 차이를 갖고 있는 조선이 일본에 홀로 대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고종은 구미국가의 도움을 얻기에 용이한 정동을 선택했다. 고종이 선택한 정동은 조선을 압박해 오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서구 제국들의 공사관들이 있는 곳이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선조가 머물면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곳이 바로 경운궁이었기에 국난 극복의 의지를 다잡는다는 명분과 상징성도 함께 갖고 있었다. -73쪽에서
덕수궁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산을 등지고 있지도 못하고, 경계도 들쭉날쭉하다. ‘왕궁 만들기’의 원칙인, ‘전조후침’, ‘배산임수’, ‘좌묘우사’ 등과 같은 원칙들을 지킬 수 없었다. 한마디로 궁궐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격도 갖추지 못한 궁궐인 것이다. 하지만 안창모 교수는 경운궁의 입지와 건축은 당시 시대 상황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내적ㆍ외적 조건이 달랐음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에 비해 막강한 국력을 가진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외국 공사관이나 선교사들이 많이 있는 정동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머물면서 조선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궁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경운궁 영역을 확장하면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운교라는 것을 설치했다. 운교는 지대가 다른 두 지역을 연결하는 육교와 같은 시설로,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민가 영역을 고려해 높게 띄운 다리를 말한다. 이 책의 145쪽과 234쪽에는 당시 운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진이 있는데, 이는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사진다. 운교는 두 곳에 설치되었다. 남측으로 궁역을 확장하면서 매입한 독일 공사관 자리와 경운궁을 연결해 주는 곳에 있고, 다른 하나는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하는 곳에 설치되었다. 지금도 덕수궁 담장과 서울시청 별관 담장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두 사진 이외에도 1904년 화재 전 경운궁 모습, 1910년대 경운궁의 전각들이 훼손되기 전 경운궁 전경, 경운궁 주변 정동 인근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진 및 도면 자료들을 담았다.
덕수궁에 있는 서양식 건축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대한제국 13년의 중심 공간이었던 덕수궁에는 당시 서양 건축 양식을 따른 서양식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정도 밖에 없다. 황제의 침실이었던 돈덕전,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구성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 서양식 건축물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추적한다.
구성헌은 준명당의 서북쪽 석조전의 부지에 있었던 2층 양관으로 여기서 여러 차례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나, 구성헌이 어떻게 지어졌고, 언제 어떻게 덕수궁에서 사라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구성헌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성헌을 둘러싼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윤곽이 어슴푸레 보이는 정도다. -195쪽에서
석조전의 왼쪽 모퉁이를 돌면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양관인 돈덕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덕수궁이 건설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 개설되면서 돈덕전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199쪽에서
석조전을 포함해 대부분 서양식 ?각들에는 베란다가 있는데, 이는 덥고 습한 동남아 기후와는 다른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했기 때문이라는 점, 석조전 공사를 위해 국내 최초로 모형을 만들어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는 얘기 등 덕수궁의 각 전각들과 관련한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들을 전한다. 또한 석조전과 정전인 중화전의 축이 어긋나 있는데, 그 축이 왜 어긋나 있는지를 추적하기도 한다.
덕수궁의 참모습 찾기를 통한 우리 근대사의 재조명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며 덕수궁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많은 전각이 훼철되거나 궁역이 축소되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과 동떨어져 도심 한복판에 홀로 덩그마니 놓여 있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지나는 사람들이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발상 때문에 궁궐의 담장이 철거되고 투시형 담장이 설치되기도 했다. 한때 덕수궁은 스케이트장이 있는 공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 덕수궁은 제모습찾기를 하고 있다. 함녕전 복원 공사를 시작으로, 현재는 석조전 복원 공사, 중명전 복원, 선원전 복원 공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덕수궁 전각들을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우리 근대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재조명해 볼 시점이다.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2.개항기.구한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일전쟁 : 러시아 군사령관 쿠로파트킨 장군 회고록 (0) | 2022.07.18 |
---|---|
기생 이야기 :일제시대의 대중스타 (0) | 2022.07.18 |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 (0) | 2022.07.18 |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0) | 2022.07.18 |
한국병합 110년만의 진실 (0) | 2022.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