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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실 (2023) -『언덕 위의 구름』과 일본인의 역사관

동방박사님 2023. 8. 17.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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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청전사』와 「일청전사 결정초안」

청일전쟁은 1894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방을 배경으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국제전이었다. 그 무대는 조선이었다. 이는 근대 일본이 처음으로 경험한 대외 전쟁이었으며 그 결과로 일본은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1904년에서 1907년에 걸쳐 『일청전사』를 총 8권으로 발간했는데 이를 정사로 여겨 왔다. 『일청전사』는 조선 국내에 있는 청나라 병사를 몰아내 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전쟁을 시작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대의명분으로 유포되었다.

『일청전사』편찬을 위해 정리된「일청전사 결정초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4년, 일본 학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논문과 저술을 통해서였다. 청일전쟁이 벌어진 뒤 100년이 지난 때였다. 「일청전사 결정초안」에는 일본군이 서울 왕궁을 공격해 국왕을 사로잡고 정권을 전복시켜 강제로 얻어낸 의뢰였다는 것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둘러싼 숨겨졌던 새로운 진실들이 발견되었다.

한편 전쟁사 편찬을 둘러싼 참모본부 내 회의 기록도 발견되었다. 전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작성된 「결정초안」을 폐기하고 일본 정부와 군이 알리고 싶지 않은 불리한 사실을 삭제하고 다시 작성해『일청전사』가 만들어졌다는 편찬 과정이 드러났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제1장 「일청전사 결정초안」
제2장 추가 부대 파견
제3장 평양을 향해
제4장 평양의 공방
제5장 백기의 수수께끼
제6장 『일러전사』의 편찬
제7장 육군의 전쟁사

맺음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195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018년까지 아시히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아오모리시 산나이마루야마三?丸山 유적 출현, 중국 시안 견당사 묘지墓誌 발견, 지바시 가소리패총加?利貝塚 재평가 등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역사 자료 발굴에 힘썼다. 논문으로 「「731부대―묻혀버린 세균전의 연구 보고(731部隊―埋もれていた細菌?の?究報告)」(《세카이(世界)》 2012...

역 : 이규수

역사학자. 1962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를 졸업했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대학교 고려인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수탈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2021), 『제국과 식민지 사이』(2018), 『한국과 일본, 상호 인식의 변용과 기억』(2014),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

책 속으로

참모본부는 1904년부터 1907년에 걸쳐 『일청전사』를 총 8권으로 간행하여 이 전쟁의 정사로 여겨져 왔다. 조선 국내에 있는 청나라 병사를 몰아내 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전쟁을 시작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대의명분으로 유포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이 서울 왕궁을 공격해 국왕을 사로잡고 정권을 전복시켜 강제로 얻어낸 의뢰였다는 것을 「결정 초안」은 명확히 기록했다.
--- p.18

대본영은 최대한 빨리 공격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내각은 어디까지나 “청나라가 쳐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라는 방식으로 전쟁을 벌이고 싶었다. 당시에는 아직 러시아의 중재도 진행 중이어서 내각은 전쟁을 개시하기로 정하긴 했지만, 현지 여단장에게 직접 전달하면 전쟁이 곧바로 시작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의문점을 애매모호하게 하지 않고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결정 초안」의 기본 편집 방침이었던 것 같다.
--- p.46

왕궁 공격도, 아산의 청군과의 전투 내용도, 부산항에서의 혼란도, 그 이후의 무모한 행군도 모두 불필요한 서술로 치부한다. 이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침도 제시한다. … 일본은 평화를 원했지만, 호전적인 청나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것, 실패한 군사행동은 기록하지 말 것, 직접 작전에 관한 것 외에는 맨 뒤에 덧붙이면 된다는 지시였다.
--- p.159

패전 당시 근위사단장이었던 모리 다케시 중장은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반란군 장교들에게 학살당하기 전날, “러일전쟁을 진지하게 분석했더라면 태평양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71사단장이었던 도야마 노보루 중장은 패전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러일전쟁에서 배우지 않아 노몬한에서 참패했고, 노몬한에서 배우지 않아 대동아전쟁의 패배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 p.186

그러나 그런 문제점들을 삭제하고 조작하여 정사를 작성했기 때문에 사실로 기록되거나 교훈으로 전해지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수정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본래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무모한 군사행동이 내막을 감춘 결과만을 근거로 모범이 되어야 할 성공 사례나 무용담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 근대 일본이 최초로 편찬한 『일청전사』의 이런 경험과 방침은 이후 전쟁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어 전쟁사의 정형화가 진행되었다. 이런 전쟁사를 바탕으로 교육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특별하다’ ‘일본은 패배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 p.233
 

출판사 리뷰

청일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역사 왜곡

「결정초안」은 전체 122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남아 있는 것은 16장, 두 권 분량이다. 원고 형식으로 보아 총 38만 4,540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반해 8권 50장으로 되어 있는『일청전사』는 13만 1,898자로 「결정초안」에 포함된 분량의 3분의 2를 삭제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실』은 『일청전사』와 「결정초안」을 비교 분석하며 일본 내각과 군이 왜 전쟁의 기억을 왜곡하려 했으며 숨겨진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저자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일본의 파멸을 가져온 소위 대미전쟁을 둘러싼 자료들을 찾다가 새로운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자료를 계속 찾아 나가다 보니 청일전쟁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어야 할 일본군의 기록으로는 도무지 실상을 파악할 수 없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조선에서의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이 관심을 청일전쟁의 발단이라고 하지만 『일청전사』에서 농민군과 싸운 일본군 부대의 활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농민군 측의 희생자는 3만 명이라고도 하고 5만 명이라고도 하지만 일본군 기록에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일청전사 결정초안」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낸다. 대본영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현지 부대의 독단적인 행동, 지휘관의 개인적 야망과 사심에 의한 무모한 작전, 인명을 경시하고 병참을 고려하지 않는 방만한 부대 운영 등 숨겨진 사실을 파헤쳐 전쟁의 실체에 접근한다. 그리고 러일전쟁은 물론 이후의 침략전쟁에서 일본 육군에 나타난 심각한 결함과 문제는 이미 청일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혀내고 있다.

『일러전사』의 허구 - 이것은 구술에 그치기로 한다

불편한 사실을 은폐, 조작하여 전쟁사를 편찬하는 작업은 『일청전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후 간행된『일러전사』역시 그런 생각과 경험을 그대로 답습했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은 일본인의 역사관을 크게 뒤흔들었다. 일본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던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를 평범한 장군으로, 나라를 불가피한 희생으로 여겨지던 뤼순 요새 공략을 둘러싼 수많은 전사자에 대해 어리석은 작전으로 인한 불필요한 죽음으로 단정 지었기 때문이었다.

시바 료타로가 비판했던『일러전사』편찬과 관련된 참모본부 내부 자료가 확인되었다. 결정 초안을 처음 공개한 나까쓰카 아키라가 찾아낸 「일러전사 편찬강령」이었다. 러일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06년에 참모총장의 이름으로 간행한 것으로 그중 「일러전사 편찬에 관한 주의」라는 제목의 문서다. 무엇을 써서는 안 되는지를 15개 항목에 걸쳐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으니 『일러전사』 역시 일청전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겉으로만 보기 좋게 꾸며진 전쟁사에 의문을 품고 있던, 대좌이자 육군대학교의 병학 교관이었던 다니 히사오는 진실을 규명하는 러일전쟁사를 만들어 육군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으로『기밀 일러전사』라는 강의록을 만들었다. 다니가 강의한 것은 단 1년뿐이고 수강자는 단지 10명뿐인 특별한 강의였다. 그『기밀 일러전사』에는 “이것은 구술에 그치기로 한다”고 적힌 부분이 있다. 강의에서는 말하지만, 글로는 남기지 않겠다는 설명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기밀 일러전사』가 발견되어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것은 1996년, 그로부터 2년 뒤에 『일러전사』에 비판적인 시바 료타로의『언덕 위의 구름』이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짚어낸다. 그리고 『기밀 일러전사』에 서술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군신으로 추앙받던 노기 장군의 실체, 황당하기까지 했던 뤼순 요새 공방전의 진실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정사로 발간된『일러전사』를 가리켜 전쟁사라기보다는 다이헤이키太平記 같은 군담소설의 세계와도 같다고 일침한다.

전쟁의 실체, 비대칭 공간에서의 개인과 집단의 기억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실』은 일본 정부와 군이 국민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그렇게 왜곡된 전쟁사를 정사正史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인의 역사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근대 일본이 최초로 편찬한 『일청전사』의 경험과 방침은 이후 러일전쟁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어 『일러전사』와 같이 전쟁사의 정형화가 진행되었고, 왜곡된 전쟁사를 바탕으로 획일적인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특별한 일본”이라는 환상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고 주장한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조선과 중국은 일본과 열강의 수탈 대상, 분할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른바 ‘강한’ 일본, ‘늙은’ 중국, ‘약한’ 조선이라는 이미지 프레임이 만들어지게 된 출발점이었다.

근대 이후 한일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되었고, 그 비대칭적 관계는 끊임없이 그리고 새롭게 재생산되어 왔다. 한일 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역사적 체험과 기억의 차이점을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이 책의 대상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의 가해자/피해자 모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