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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007)

동방박사님 2024. 1. 2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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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주고받은 서한과 선종 후 브뤼기에르 주교를 추모하는 서한 등 서한 56편과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 및 송별기 등을 싣고 있다. 1825년 고향을 떠날 때 부모님께 올린 고별 서한부터 1835년 마찌아즈에서 선종할 때까지 브뤼기에르 주교가 주고받은 서한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으로 향한 여정의 고난과 장애들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목차

추천사
역자들의 말
일러두기
브뤼기에르 주교 연보
해제

서한:
1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5년 9월 8일자 서한(카르카손)
2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5년 11월 6일자 서한(파리)
3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5년 12월 19일자 서한(파리)
4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6년 4월 10일자 서한(항해 중)
5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6년 7월 서한(바타비아)
6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6년 말~1827년 초 서한(바타비아)
7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7년 2월 4일자 서한(바타비아)
8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7년 2월 6일자 서한(페낭)
9 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7년 6월 20일자 서한(방콕)
10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9년 5월 19일자 서한(방콕)
11신 : 브뤼기에르 신부의 1829년 5월 29일지 서한(방콕)

12신 :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1831년 9월 9일자 칙서(로마)
13신 :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1831년 9월 9일자 칙서(로마)
14신 : 교황청 포교성성의 1831년 10월 1일자 서한(로마)
15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4월 28일자 서한(페낭)
16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7월 3일자 서한(페낭)
17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8월 22일자 서한(싱가포르)
18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0월 25일자 서한(마카오)
19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1월 9일자 서한(마카오)
20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1월 10일자 서한(마카오)
21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1월 18일자 서한(마카오)
22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1월 19일자 서한(마카오)
23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2월 11일자 서한(마카오)
24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2월 14일자 서한(마카오)
25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1월 19일자 서한(마카오)

26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3년 4월 18일자 서한(푸젠성 푸저우)
27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3년 4월 20일자 서한(푸젠 푸저우)
28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3년 4월 23일자 서한(푸젠 푸저우)
29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3년 8월 28일자 서한(산둥)
30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3년 10월 28일자 서한(산시)
31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4년 6월 5일자 서한(산시)
32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4년 6월 6일자 서한(산시)
33신 : 포교성성 차관 A. 마유스의 1834년 8월 31일자 서한(로마)
34신 : 포교성성 차관 A. 마유스의 1834년 8월 31일자 서한(로마)
35신 : 포교성성 차관 A. 마유스의 1834년 8월 31일자 서한(로마)
36신 : 포교성성 차관 A. 마유스의 1834년 8월 31일자 서한(로마)
37신 : 포교성성 차관 A. 마유스의 1834년 8월 31일자 서한(로마)
38신 : 르그레즈와 신부의 1834년 9월 2일자 서한(마카오)
39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4년 9월 20일자 서한(산시)
40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4년 9월 20일자 서한(산시)
41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4년 9월 20일자 서한(산시)

42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1월 28일자 서한(시완쯔)
43신 : 포교성성 장관 프란소니우스 추기경의 1835년 1월 31일자 서한(로마)
44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2월 8일자 서한(시완쯔)
45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7월 27일자 서한(시완쯔)
46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7월 28일자 서한(시완쯔)
47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8월 7일자 서한(시완쯔)
48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9월 28일자 서한(시완쯔)
49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9월 28일자 서한(네이멍구 시완쯔)
50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10월 1일자 서한(시완쯔)
51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10월 2일자 서한(시완쯔)
52신 :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5년 10월 6일자 서한(시완쯔)
53신 : 알퐁소 데 도나타 산시 보좌 주교의 1835년 10월 서한(산시)
54신 : 모방 신부의 1835년 11월 9일자 서한(네이멍구 시완쯔)
55신 : 부스케 신부의 서한(에르)
56신 : 포교성성 장관 프란소니우스 추기경의 1836년 6월 18일자 서한(로마)

부록: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과 송별기

책 속으로

저 여기 대령했사오니 저를 보내주십시오. 주님의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저는 지상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추구하겠습니다. 어떤 선교사도 가지 않아서 무수히 멸망하는 영혼들을 구하러 제가 가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의 선교사, 주님의 사도로 살겠습니다. 저 영혼이 저를 부릅니다. 저는 그에 응답해서 하늘나라를 얻고 싶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 송별기 중에서)

만일 첫 사도들이 그들의 열정과 복음 선포를 자기네 고향 땅에서만 행했다면 이 세상과 우리 구원, 우리 신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부모님, 이를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무수한 백성들의 영적 필요를 헤아리시고, 우리가 애덕으로 도와주길 기도하는 저들의 울부짖음을 살펴주십시오. 그래서 두 분은 한탄을 거두시고, 오히려 저 가련한 외교인들의 회개에 일조한다고 생각하시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문득 불평불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는 지금 이 순간 내 아들이 외교인의 영혼을 또 하나 구원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1신 중에서)

불편해도 잠자리만이라도 있다면 여행이 지체되는 일은 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샴 사람들은 잠자리에 도통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저희 7명은 부엌 같은 곳에서 잤는데, 부엌 상단에 겨우 앉을 수 있었습니다. 오직 쪽문을 통해 부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배를 바닥에 깔아야만 그 쪽문으로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엌 구석에 아궁이가 있었는데 낮에는 노상 불을 때고 밤에도 더러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부엌에 연기가 꽉 차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도마뱀들과 파리 떼가 설쳤습니다. 여행객 대부분이 해충에 물렸습니다. 연옥이 따로 없었지요.
(9신 중에서)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제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로써 제 소망에 감읍하시어 저를 무사 안전하게 그 미로에서 구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52신 중에서)

주교님은 우선 인도의 작열하는 기후 아래서, 그리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북상하면서 궁핍과 피로와 온갖 고통을 겪으신 나머지 기운이 쇠잔하셨던 것입니다. 주교님이 평야가 아닌 곳을 가실 때는 15분마다 쉬지 않고선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타르(네이멍구와 만주)를 통과하는 고통스러운 여행이 가능하다고 여기시고 강행하셨습니다. 주교님이 겨울이 아닌 좋은 계절에 떠나셨다고 해도, 고신극기에 익숙해서 단식을 계속하신 그분이 설사 단식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고신극기와 기도는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덕행이었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매주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뜻에서 날마다 묵주기도를 드렸을 뿐 아니라 성모칠고 묵주기도와 기타 여러 가지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어려운 조선 선교의 성공을 위해서 매일 특별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54신 중에서)

어떻게 죽든 상관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그는 처음부터 작심하였다. 순교하기를 가장 바랐다. 사고사, 흑사병과 말라리아 열병과 과로로 죽는 것, 원주민들에게 당하는 죽음,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죽는 것, 독사와 독충에 물려 죽는 것, 밀림에서 죽는 것, 물 한 잔 떠다 주고 눈을 감겨 줄 친구 하나 없이 홀홀단신 슬프고 외롭게 오막살이에서 죽는 것, 병자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는 것 등 모든 죽음을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그는 이승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시련과 위험을 겪으려고 작심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살인적인 고장으로, 환란의 강물이 흐르는 땅으로, 선교사들을 빨리 집어삼키는 대지로 달려갔다.
(브뤼기에르 주교 송별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누가 저 위험한 조선 사목을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조선에 온 최초의 사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은 목자 없는 양 떼가 되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옹기쟁이를 하면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은 조선 교우들은 교황청에 사제를 보내달라는 애원의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조선 교우들의 처절한 사제 영입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박해로 인해 피로 얼룩진 조선에 들어가 선교를 하려고 나서는 사제들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파리외방전교회조차 나서기를 꺼렸지만 아시아 선교를 맡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한 젊은 사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하며 조선 선교를 자청하였다. 순교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조선 선교를 자청한 신앙의 증거자, 그가 바로 초대 조선 교구장인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이다.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썩은 밀알이 된 초대 조선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농촌 레삭 마을의 농가에서 열한 번째 자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1815년 사제품을 받고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10년간 봉직한 후 27세에 교구 명예 참사위원이 되었다. 1825년 아시아에서 전도하려는 열망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고 1827년 태국 방콕에 부임했다.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와 자금의 부족과 박해 등의 여러 이유 때문에 조선 선교를 회피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러한 이유들에 반박하면서 조선 선교를 자청하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뜻을 받아들여 1831년 9월 9일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 주교로 브뤼기에르를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4일 조선을 향해 즉시 떠났고, 이후 3년 동안 페낭, 마닐라, 마카오를 거쳐 중국 대륙을 종단하면서 조선을 향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었다. 그는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고 도적과 박해자들의 위협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조선 선교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앵베르 신부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같은 훌륭한 조선 선교사들을 발탁했고, 조선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로를 확보하기 위해 만주 땅에 교구를 설정해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했다. 이렇듯 조선 입국을 위해 갖은 노력을 했으나 조선 땅을 눈앞에 둔 1835년 10월 20일, 무리한 여정으로 쇠잔해진 그는 네이멍구 마찌아즈에서 조선 선교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선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을 위한 전기 자료집 출간

브뤼기에르 주교의 눈물겨운 노력이 씨앗이 되어 한국의 천주교 신자는 현재 450여 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업적은 한국천주교회사와 신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이에 한 성당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2005년 본당 설립 20주년을 맞아 개포동 성당의 주임신부와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위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마찌아즈 답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순례와 답사를 거듭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활발한 현양 사업을 펼쳐온 현양위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모아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하고 CD 제작과 사진전, 강연회 등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본당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공적을 보다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현양위원회는 그간 꾸준히 추적해온 자료들을 정리하여 ‘브뤼기에르 전기 자료집’을 엮어 출간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책인 서한집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주고받은 서한과 선종 후 브뤼기에르 주교를 추모하는 서한 등 서한 56편과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 및 송별기 등을 싣고 있다. 1825년 고향을 떠날 때 부모님께 올린 고별 서한부터 1835년 마찌아즈에서 선종할 때까지 브뤼기에르 주교가 주고받은 서한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으로 향한 여정의 고난과 장애들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