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이데올로기 연구 (독서>책소개)/5.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이글턴)

동방박사님 2022. 2. 9. 14:03
728x90

책소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테리 이글턴의 대답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교수가 유물론을 화두로 하여 인간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 『유물론』의 핵심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 테리 이글턴이 내놓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대답이며, 그 대답의 의미는 인간의 몸이라는 복잡 미묘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관념론이나 신유물론과의 대비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글턴에게 인간은 분열적, 개방적, 창조적, 자기초월적인 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그런 인간들이 여전히 착취적인 세계에서 산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이글턴은 그 특유의 깊이 있으면서도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글쓰기로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사유를 오가며 인간의 동물성이 나타내는 다양한 양태를 탐구한다. 만만치 않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공들여 여러 번 읽는 독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목차

서문

1장 유물론들
2장 오소리는 영혼이 있을까?
3장 감각들을 해방시키기
4장 쾌활
5장 거친 바닥


옮긴이 해제 :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우리의 자화상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 1943년 영국 샐퍼드의 아일랜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국 문화 연구의 창시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옥스퍼드대학교와 맨체스터대학교 영문학 교수를 거쳐 현재 랭커스터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 이후 영미문학을 주로 연구했으며, 문학사상론, 포스트모더니즘, 정치, 이념, 종교 등 분야를 넘나들...

역 : 전대호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독일학술교류처 장학금으로 라인강가의 쾰른에서 주로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 등단했다. 독일로 떠나기 전 첫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민음사 1995)와 둘째 시집 『성찰』(민음사 1997)을 냈다. 귀국 후 과학 및 철학 전문번역가로 정착해 『위대한 설계』, 『로지코믹스』, 『물은 H2O인가?』를 ...
 

책 속으로

역사적 유물론자가 반드시 무신론자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이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물론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대개 종교적 믿음을 거부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과 종교가 논리적으로 별개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유물론은 존재론이 아니다. 그 이론은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신은 터무니없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 p21, ‘1장 유물론들’ 중에서

일부 생기론적 유물론자들은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차별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사람은 실제로 몇몇 측면에서 고슴도치보다 더 창조적이다. 또한 사람은 고슴도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인데, 그 원인은 대체로 사람의 창조성과 연결된다.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 p26, ‘1장 유물론들’ 중에서

유물론은 대단히 통이 큰 개념이다. 유물론의 관심사는 정신-신체 문제부터 과연 국가는 일차적으로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유물론은 신에 대한 부정을 뜻할 수도 있고, 중국 만리장성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발목이 서로 은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아무도 금문교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금문교는 계속 존재한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
- p48, ‘1장 유물론들’ 중에서

이처럼 기독교 신학자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 혈통의 유물론자다. 이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유물론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교리는 신이 동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성찬식에서 신은 일상적인 물질인 빵과 포도주 안에, 세속적인 일인 씹기와 소화하기 안에 임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숭배와 예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보살피는 것에 관한 문제다.
- p67, ‘2장 오소리는 영혼이 있을까?’ 중에서

간단히 말해서 아기와 개는 도덕적 동물일 수 없다. 아기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반면, 더 성장한 형제들은 그 질문에 대해서 개인적인 대답을 제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어미 새는 새끼들을 먹이라고 명령하는 본능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을 설득할 수 없다. 어미 새는 불현듯 육아 프로젝트 전체의 실존적 허망함을 깨닫고 둥지를 떠나 바하마로 날아갈 수 없다.
- p73, ‘2장 오소리는 영혼이 있을까?’ 중에서

자연은 항상 문화에 의해 매개되지만, 유물론자는 자연이 인간사에 선행하고 또한 독립적이라고 믿는다. 도마뱀과 자기장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의존할 수도 있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은 자연 속에서 살기를 그친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특별한 방식으로 ‘산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자연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는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산다는 것이다.
- p96, ‘3장 감각들을 해방시키기’ 중에서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극심하게 몸을 결여한 형태의 이성의 지배하에 놓이고, 그 지배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제철학수고》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신체적 정신적 감각들을 밀어내고 그 모든 것들의 단적인 소외가, 곧 소유 감각이 들어섰다. 내적인 부(wealth)를 바깥으로 낳기 위하여, 인간 본성은 이 절대적 빈곤에 빠져야 했다”라고 지적한다.
- p100, ‘3장 감각들을 해방시키기’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목표는 자신을 실현하면서 또한 제거하는 것이다. 해방된 사회에는 해방을 논하는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론의 임무는 자신이 불필요해지는 사회의 탄생에 기여하는 것이지, 자신이 계속 고용되기를 바라며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니다.
- p113, ‘3장 감각들을 해방시키기’ 중에서

니체는 “인간의 기원을 ‘정신’에서, ‘신성함’에서 찾을” 생각이 더는 없다. “우리는 인간을 동물들 속으로 되돌려놓았다.” 《즐거운 학문》에서 그는 이제껏 철학은 “단지 몸에 대한 오해와 해석에 불과하지 않았나”라고 자문하면서, 모든 전통적 사상의 커다란 맹점은 바로 몸이라고 평가한다.
- p133, ‘4장 쾌활’ 중에서

예컨대 부르주아 사회는 신을 죽여버렸다. 왜냐하면 세속적이며 유물론적인 사회에는 실제로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회는 너무나 비겁해서 자신의 살신(殺神)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치 신으로 대표되는 절대적 가치들이 여전히 작동하는 양 행동한다. 이것은 기묘한 인지부조화다. 부르주아 사회는 신을 믿지 않는데,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신은 죽었다고 니체가 선언하는 것은, 당대의 용감한 시민들에게 그들 자신의 궁극적인 오이디푸스적 반란 행위가 가져온 끔찍하고 신나는 귀결들을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 p144, ‘4장 쾌활’ 중에서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거나 실재와 연결되지 않는다. 언어는 그 자체로 물질적 실재다. 《색깔에 관한 소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개념들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우리의 삶의 방식]의 한복판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확실히 관념론적이라기보다 유물론적인 관점이다.
- p155, ‘5장 거친 바닥’ 중에서

철학자들이 우리의 활동을 변혁할 수 있다는 상상은 얼마나 터무니없이 관념론적인가! “먼저 자신을 혁명할 수 있는 사람이 혁명을 이뤄낼 것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철학자는 당신을 혁명할 수 없다. 이는 철학자가 당신을 대신해서 재채기를 해줄 수 없는 것과 똑같다. 하품하기나 토하기와 마찬가지로 해방은 당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활동이다.
- p180, ‘5장 거친 바닥’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인간의 몸을 생각한다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을 읽는 평균적인 독자는 그의 서술이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널리 알려진 20세기 철학자들인 마르크스,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가 이른바 “신체적 유물론자”로서 주로 언급되지만, 그들에 못지않게 13세기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역시 자주 거론된다는 점부터가 의아하게 다가올 만하다. 가톨릭의 성인인 아퀴나스와 유물론은 상극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저자의 신체적 유물론이 보편적 존재론으로 자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물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오로지 물질만 존재하며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식의 보편적 주장을 떠올리지만, 이는 이글턴이 책의 첫머리에서 열거하는 유물론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글턴의 신체적 유물론은 그런 거창한 존재론적 주장과 사뭇 다르다. 신체적 유물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태도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학적 유물론”이라는 대안적인 명칭도 제안한다. 저자에 따르면 “신체적 유물론”은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그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것은 “인간의 동물성, 실천적 활동, 신체 구조”다.
요컨대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몸이다. 그는 인간의 몸을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 입장을 신체적 유물론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기독교도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체적 유물론자로 분류되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저자가 옳게 지적하듯이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 종교니까 말이다. 우리가 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토마스의 기본 전제였다.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 인간

물론 똑같이 몸을 주목하면서도 몸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느냐는 철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이 다루는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크스,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는 결코 단조로운 선율을 연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프리 재즈를 하는 연주자들처럼 각자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음악을 뭉뚱그려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느슨한 통일체를 구성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산만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신체적 유물론이 일관성을 갖췄다는 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일관성은 저자가 공격하고자 하는 적이 누구인가를 보면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 적은 역시나 관념론이다. 이때 관념론이란, 오직 관념만 존재한다, 라는 식의 거창하고 공허한 존재론적 주장이 아니다. 이번에도 핵심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 기본적인 인간상이다. 이글턴이 말하는 관념론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며 자족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다. 거기에 맞서 신체적 유물론은 인간 주체가 항상 자기에게 어느 정도 낯선 자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주위에서 인간의 절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글턴이 맞서는 적이 그런 자율적 자족적 주체에 기초를 둔 ‘관념론’뿐이라면, 그의 대결은 우리에게 큰 관심거리이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글턴은 또 다른 강력한 적에 맞선다. 그 적은 그가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이다. 생기론적 유물론의 전통 안에 있는 신유물론은 생명이라는 신비로운 개념에 취해 인간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유물론은 탈인간적 관점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글턴은 이런 탈인간적 관점 역시 ‘관념론’과 마찬가지로 한쪽 극단으로 치우쳤다고 비판한다. 그는 “신체적 유물론자”로서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며,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와 ‘신유물론’이 말하는 탈인간화의 요구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착취적 세계에서 인간이 처한 운명

이글턴에게 물질(대표적으로 몸)은 우리의 기반인 동시에 굴레다. 물질은 우리에게 완강히 저항한다. 이 같은 물질의 완강함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이 신체적 유물론, 나아가 무릇 유물론의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이른바 신유물론은 우리와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엄연한 맞섬을 은폐하면서 양자의 동질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글턴은 “일부 생기론적 유물론자들은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차별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인본주의는 흔히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비판받지만 오히려 그 같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 동반된 책임을 강조하는 겸허한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신유물론과 포스트구조주의는 인본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질 들뢰즈는 인간 주체를 주춧돌로 삼는 철학 전통에서 훌쩍 벗어나 웅장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추구하지만 이글턴이 보기에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자’조차도 아니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말하는 “생명”은 인간의 “몸”이 발휘하는 완강한 저항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멋진 그림 앞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듯한데, 이글턴은 어떤 불만을 느끼는 것일까? 왜 그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대안을 들이대면서 이런 탈인간적 형이상학에 저항하는 것일까? 철학 공부 따위는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아먹을 만한 다음 인용문에 그 답이 있다. “역사적 유물론과 달리 신유물론의 모든 유파들은 착취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처한 운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다들 알겠지만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1990년대 이후 숱한 사람들이 마르크스 철학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더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했지만, 21세기가 시작되고도 한참 지난 지금, 테리 이글턴은 본래 마르크스가 품었던 화두를 되새기는 셈이다. “착취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처한 운명”이라는 화두를 말이다. 이것이 터무니없는 시대착오인지, 아니면 거센 유행의 물결에 가렸던 진짜 문제 혹은 진실의 재등장인지는 독자 스스로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분열적, 개방적, 창조적, 자기초월적인 몸

결국 관건은 인간상이다. 우리는 어떤 놈인가? 라는 질문의 대답, 우리가 스스로 그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 말이다. 관념론이든, 신유물론이든, 신체적 유물론이든, 거기에 담긴 메시지의 핵심은 ‘우리는 이러이러한 존재다’라는 대답으로 요약될 것이다.
그리고 저자 테리 이글턴의 신체적 유물론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우리는 분열적인 존재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분열성을 “시간성”, “창조성”, “개방성”, “초월성” 등과 연결한다. 우리의 분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글턴은 전통적인 영혼-신체 이원론자로 전락할 성싶기도 한데, 그는 우리의 분열성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그 이원론을 함축하지는 않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원론자들의 오류는 인간을 자기 분열적 존재로 보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의 오류는 단지 이 균열의 본성을 잘못 파악하는 것에 있다. ……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불화하는 것은 몸과 영혼이 서로 불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적이고 창조적이며 개방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에게 관념론이나 신유물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끝내 낯선 자’라는 사실을 일깨우지 않는 사상, 그래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다. “자기를 뛰어넘기는 인간 몸의 내재적 속성이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글턴이 보기에 우리 인간은 무언가로 고정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면서 울타리를 뛰어넘는 존재이다.

신체적 유물론

이 책 《유물론》의 핵심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자 이글턴이 내놓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대답이며, 그 대답의 의미는 인간의 몸이라는 복잡미묘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관념론이나 신유물론과의 대비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글턴에게 인간은 분열적, 개방적, 창조적, 자기초월적인 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그런 인간들이 여전히 착취적인 세계에서 산다는 점이다.
이 핵심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친다.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에 관하여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신선한 정보와 해석을 얻을 수 있다. 맨 처음에 언급한 대로 저자의 서술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간략한 소책자의 형식인 것에서도 비롯되지만, 더 큰 원인은 이 책에 담긴 철학적 성찰의 만만치 않은 깊이에 있다. 철학책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이 책은 공들여 여러 번 읽는 독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