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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세기 (2024 / 서양고중세사) - 서양 천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

동방박사님 2023. 2. 6.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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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변화의 세기에 살고 있다
변화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서양 천 년사

새천년이 오던 때를 떠올려보자. 세기말의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가운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연도의 천 단위 자릿수가 바뀌어 전자기기들이 일제히 오류를 일으킬 것이라는 Y2K가 우리를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인류는 무사히 새로운 천 년을 맞이했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뒷걸음치기도 하면서 변화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에 이르렀다. 『변화의 세기』는 지난 천 년간의 서구 사회를 ‘변화’라는 키워드로 해석하는 독특한 역사책이다.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각 세기별 가장 중요한 변화들을 제시하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인물들을 꼽는다. 지난 천 년간, 서양을 뒤흔든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기독교의 확산과 십자군 전쟁, 유럽 기준에서의 ‘신대륙 발견’과 유럽 열강의 확장, 종교 개혁과 프랑스 혁명, 증기기관과 전신의 개발,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핵무기 사용 등이 떠오르지만 저자는 이 모두를 다루면서 변화의 주체로는 세기별로 한 명의 인물만을 꼽는다. 각 세기마다 변화의 주체가 유럽 대륙에 변화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변화와 변화의 주체가 단일 세기 내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주목한다. 산업 혁명이라 불리는 혁신도 그다음 세기에 영향을 미쳤고 비행 기술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았으나 실용화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히틀러의 경우 전쟁과 대학살을 통해 과학과 의학이 혁신될 수밖에 없게 만듦으로써 한 세기 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히틀러의 만행은 분명 비극이었지만 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를 20세기의 인물 중 누구보다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변화의 세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뒤바꾼 사건과 인물을 찾아나가며 사회사(社會史)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려준다.

저자 이언 모티머는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역사가이자 기록물 연구가이다. 12권의 역사서와 4권의 역사소설을 썼으며 그의 책은 15개 언어로 번역돼 13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타임스]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중세 역사학자”라고 평가했다. 모티머는 1999년 말에 뉴스를 보다가 진행자가 20세기 전체를 논평하며 다른 어느 세기보다 변화가 많았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때가 정말 20세기일까?’ ‘변화에 관해 우리가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변화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변화의 세기』에 대해 “인간의 인내에 대한 작가의 본질적인 믿음은 다가올 천 년에 대한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깨닫고 이를 미래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목차

들어가는 말

11세기
서방 교회의 성장 / 평화 / 노예제 폐지 / 구조 공학
12세기
인구 증가 / 수도회 연결망의 확장 / 지적 르네상스 / 의학 / 법치주의
13세기
상업 / 교육 / 법적 책임 / 탁발 수도사 / 여행
14세기
흑사병 / 투사체 전쟁 / 민족주의 / 지역어
15세기
대항해 시대 / 시간 측정 / 개인주의 / 사실주의와 르네상스 자연주의
16세기
책 인쇄와 문해력 / 종교개혁 / 소형 화기 / 사적 폭력의 감소 / 유럽 열강의 설립
17세기
과학 혁명 / 의학 혁명 / 세계의 정착 / 사회 계약 / 중산층의 발흥
18세기
운송과 통신 / 농업 혁명 / 계몽 자유주의 / 경제 이론 / 산업 혁명 / 정치 혁명
19세기
인구 증가와 도시화 / 운송 / 통신 / 공중 보건과 위생 관리 / 사진술 / 사회 개혁
20세기
운송 / 전쟁 / 기대수명 / 매스컴 / 전기제품과 전자제품 / 미래의 발명품
결론: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맺음말
부록: 인구 추정치

사진 출처
감사의 말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이언 모티머 (Ian Mortimer)
 
역사가이자 작가. 1967년 영국 펫츠우드에서 태어났으며 UCL에서 기록학 석사학위를, 엑서터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역사와 아카이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시간 여행자의 가이드〉 시리즈의 저자로 잘 알려진 그는 영국 역사를 다룬 4편?『중세 시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왕정복고 시대』, 『섭정 시대』?으로 평단과 학계, 독자들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타임스》는 그를 “...
 
역 : 김부민
 
과학서와 역사서를 즐겨 읽는 번역가다. 경영학으로 학사 학위를, 재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과 인간이 만나는 뜻깊은 책을 잘 번역해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물건의 탄생』, 『코스모스 인포그래픽스』, 『정상성의 종말』, 『내 손 안의 테크놀로지』, 『창의적으로 살아가기』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요즘은 논리가 살아 있는 책을 아름답게 번역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책 속으로

가장 큰 변화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은, 특정한 주제나 개인들이 일반적인 역사서에서 흔히 받는 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내 친구들과 동료들은 자주 “어떻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무시할 수 있어?”라든가 “어떻게 음악이란 주제를 다루지 않을 수 있어?”라고 묻곤 했다. 다빈치는 놀라운 천재였지만, 그의 기술적 고찰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사실상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다빈치의 수첩을 읽었을 뿐이며, 그의 발명품은 실제로 제작되지도 않았다. 다빈치의 유산 가운데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림뿐인데, 솔직히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한두 명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현재 내 삶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 p.17

학자들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상을 11세기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로 꼽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세계의 확장이 부분적으로 로마 교회에 의존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의 지리적 확장은 교황청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지닌 권력 집단으로 부상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교회의 권력이 강화되고, 교회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변화를 불러왔다. 교회의 성장이 없었다면 중세 시대는 우리 역사와는 퍽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 p.33

인구 증가의 더 중요한 원인은 역사학자들이 중세 온난기라 부르는 현상 때문이다. 10세기와 11세기에 평균 기온이 아주 천천히 상승하면서, 12세기에는 900년대 이전보다 거의 1도 가까이 따뜻했다. 우리는 온도 1도 차이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큰 차이처럼 여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연평균 기온으로 보면 실로 엄청난 차이다. 역사학자 조프리 파커(Geoffrey Parker)가 지적했듯, 온대 지역에서 봄 평균 기온이 섭씨 0.5도만큼 내려가면 서리가 마지막으로 내릴 위험이 있는 일자가 10일 연장되고, 가을 평균 기온이 섭씨 0.5도만큼 내려가면 서리가 처음 내릴 위험이 있는 일자가 10일가량 당겨진다. 그리고 둘 중 어떤 일이 일어나든 농작물을 모조리 죽일 수 있다.
--- p.66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으로 재위한 1198년부터 1216년까지의 기간이 교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임을 유념해야 한다. 바로 이 세기에 최소 여섯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그중에는 인노첸시오 3세의 설교로 시작되었지만 돈에 굶주린 베네치아인들의 주도로 결국에는 같은 기독교도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 것으로 끝난, 악명 높은 제4차 십자군 원정도 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스페인에서 전쟁을 재개하라고 촉구하자 아라곤, 나바라, 카스티야, 포르투갈 왕국은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 왕조를 무찌르고자 연합했다. 1236년에 코르도바가, 1248년에 세비야가 기독교 군대에 함락되면서 1294년경 이베리아 반도는 그라나다만 빼고 모조리 기독교도의 손에 들어왔다.
--- p.102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국내외의 다양한 목적을 위해 민족적 이해관계를 활용했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나중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이 민족적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잉글랜드 영주들이 서로 싸우지 못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드워드 3세는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국내 평화를 유지했다. 추가 세금이 부과되었음에도 의회는 이 정책을 승인했고, 프랑스에서 전쟁을 벌이는 왕을 지지했다. 왕들은 민족 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단결심을 고취할 수 있었다. 나라 한쪽 끝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쪽 끝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세금을 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 출신이든 잉글랜드인을 정의하는 것은 프랑스인과 스코틀랜드인에 대한 적대감이었고, 잉글랜드의 국왕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거나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에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이었다.
--- p.168

콜럼버스는 17척의 함선과 1,200명의 정착민, 군인과 함께 부를 찾아 출항했다. 히스파니올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그가 세운 요새가 폐허가 되었으며 주둔군이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것을 알았다. 그는 즉시 끝없는 보복에 나섰다. 콜럼버스의 통치는 광산에서의 강제 노동, 가족의 붕괴, 노예화, 고문, 사형, 질병을 통한 원주민의 조직적인 파괴로 특징지을 수 있다. 훗날 신세계 원주민들의 ‘권리의 수호자’가 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콜럼버스의 잔학 행위로 본래 300만 명에 달했던 히스파니올라 인구가 1508년에 6만 명으로 줄었다고 기술했다. 이는 원주민 사망률이 15년간 95퍼센트에 달했다는 이야기다.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 따라온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파괴성을 용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약속한 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500년경, 콜럼버스가 폭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식이 스페인에 전해지면서 콜럼버스는 즉시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 p.192

총포의 발전은 유럽 대륙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쳤다. 유럽 국가들이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16세기 후반에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총포 덕분이었다. 우리는 이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총기 덕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의 토착 예언과 미신, 지역 내전, 천연두를 비롯해 원주민의 돌 곤봉과 단거리 활과 화살로는 톨레도산 강철로 제작한 무기와 갑옷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점 등 여러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그러나 스페인이 신대륙을 오가는 배를 보호하기 위해 대포에 의존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잉글랜드와 모로코의 뱃사람들은 금과 은을 적재한, 무장이 허술한 선박만을 열심히 약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은 휴대용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경쟁과 이에 맞먹는 해군 군비 경쟁이 일어났다. 자신들의 해상 제국을 위해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총포에 훨씬 더 크게 의존했다.
--- p.244

17세기가 고대와 근대 세계를 나누는 문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솔깃한 일이다.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희망이 신에게서 다른 인간에게로 옮겨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전쟁 수행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17세기는 세속적 물질주의를 향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이전 세기에는 전투의 결과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으나, 17세기에는 전투의 결과가 지휘관이 그날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전투를 얼마나 잘 혹은 잘못 수행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여겼다. 다른 측면에서도 17세기는 미신의 급격한 감소와 그에 상응하는 과학적 합리성의 부상, 폭력의 지속적 감소를 통해 근대 세계의 시작을 알린 듯하다.
--- p.300

실증 연구를 통해 콜레라가 물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은 증명했지만, 존 스노는 브로드 거리의 우물이 실제로 어떻게 콜레라를 전파하는지 밝혀낼 수 없었다. 1861년, 루이 파스퇴르가 최종적으로 그 해답으로 이어지는 길을 우연히 발견했다. 세균 배양용 페트리 접시에 육수를 담아 실험하던 파스퇴르는 공기에 노출된 육수는 단시간 내에 변질된 반면, 공기에 노출되지 않은 육수는 변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스퇴르는 육수가 공기에 노출되더라도 미세한 먼지 필터로 페트리 접시를 감쌀 경우 곰팡이가 피거나 발효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이에 따라 육수에 미생물이 생기는 것은, 육수 자체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공기 중에 있는 어떤 입자에 감염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 p.389

색인 카드 작성에서 데이터 저장으로의 전환은, 표면적으로는 손쉽게 되돌릴 수 있는 과정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색인 카드에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기술이 쓰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변화는 생각보다 더 복합적이었다. 2000년이 다가옴에 따라 전문가들은 날짜를 기록하는 두 자리 숫자가 ‘99’에서 ‘00’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많은 컴퓨터 운영 체제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람들은 전자 운영 체제가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컴퓨터화의 복합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자료가 잠재적으로 덜 안전한 전자 체제에 저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취약성이 실제로 증명되었다고 해도, 이전의 비非전자 체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비전자 체제로 돌아가려면 색인 카드를 처음부터 몽땅 다 다시 작성해야 한다. 즉 컴퓨터화는 일방통행로였다.
--- p.454

그렇다면 실존 인물 가운데서는 과연 누가 지난 천년기의 변화의 주체라는 칭호에 걸맞을까? 요점은 그 누구도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골라야만 한다면 나는 유럽의 확장이 대단히 중요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콜럼버스를 선택하거나, 과학적 방법론이 종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갈릴레오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모두 내 개인적인 선택이자, 실질적인 중요성보다는 상징적인 중요성에 초점을 둔 선택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의견 교환 게임의 영역에 들어가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미화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자.
--- p.514~515
 

출판사 리뷰

그레고리오 7세부터 히틀러까지
의외성 가득한 변화의 주체


『변화의 세기』는 세기별 변화의 주체가 누군지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사회사에 읽는 재미를 더한다. 각 장의 마지막 부분마다 변화의 주체 1등을 정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예상 가능한 변화의 주체들이 후보로 언급되지만 결정 과정에서 상당수가 탈락해버리고, 이 의외성이 『변화의 세기』를 흡인력을 갖춘 새로운 역사 콘텐츠로 만든다. 특히 11세기의 그레고리오 7세, 12세기의 피에르 아벨라르, 13세기의 인노첸시오 3세, 14세기의 에드워드 3세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이지만 이들의 결정적 활약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의 목소리를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로 바꾸었으며, 피에르 아벨라르는 종교적 믿음에 합리적 의심을 더함으로써 신학의 탄생에 큰 공헌을 했다. 신을 믿지 않는 저자가 전반부를 종교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운 것은 서양사에서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를 빼고는 어떠한 담론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종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에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민중의 삶에 주목하는 서술 태도를 잃지 않는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탁발 수도사들을 받아들여 종교 확산에 기여했고 모든 성당에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게 하여 문해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혁명적 변화였다. 변화의 주체 중 유일한 왕인 에드워드 3세의 경우 민족주의를 자극해 서양 세계의 분화와 결속을 가속시켰다 궁수를 양성해 기마병에 맞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그에 대한 묘사는 탁월한 영국사가로 인정받고 있는 저자의 특기가 잘 드러나는 이 책의 백미다. 생소한 인물의 생애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어 강의 한 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는 느낌마저 든다.

이어지는 변화의 주체들은 15세기의 콜럼버스, 16세기의 마르틴 루터, 17세기의 갈릴레오, 18세기의 루소, 19세기의 마르크스, 20세기의 히틀러다. 그들의 선악, 업적의 경중과 관계없이 이들도 단일 세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이름을 올렸다.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학살했으나 기독교 세계 밖에도 새로운 진리가 있음을 유럽 대륙에 전파했으며, 루터는 종교 개혁을 통해 서양 세계를 전방위적으로 흔들었다. 그는 다빈치, 베이컨, 마키아벨리를 이겼다. 전쟁과 기근으로 흑사병 팬데믹 이후 가장 황폐했지만 예술적 성취가 봇물 터지듯 폭발한 시기이기도 한 17세기에 이름을 올린 갈릴레오는 뉴턴, 로크를 꺾었다. 과학자로서의 업적이 결정적일 뿐 아니라 교황청의 억압에도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진리 그 자체에 헌신해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 교황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게 되고 과학자들의 견해가 대중에게 인정받게 된 결정적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루소는 시민 혁명의 기반이 되는 『사회 계약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혁명을 앞당겼으며 사회복지를 태동시켰다. 히틀러의 잔혹함은 한편으로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불러왔다.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변화를 포착해 유럽 대륙의 천년기를 한눈에 조망하다


변화에 초점을 맞춰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게 되고, 각 세기마다 벌어지는 사건들은 여기에 얽혀 쉽게 이야기 구조를 갖춘다. 저자의 이 영리한 전략의 결과물이 바로 ‘이언 모티머의 한눈에 쉽게 읽는 서양 천 년사’인 『변화의 세기』다. 모티머는 변화라는 도구로 사회사, 과학기술사, 문화사, 경제사를 고루 녹여내어 서양사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이는 서양사를 쉽게 조망하게 하여 나아가 세계사 이해에도 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자신의 집, 11세기에는 아주 외진 마을이었던 모어턴햄스테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에는 유럽 대륙의 많은 곳들이 교회도 사제도 없는 농촌 마을이었다. 교구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11세기 말에는 교구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저자는 ‘서방 교회의 성장’이라고 정의한다. 12세기에는 수도회가 잇달아 만들어졌으며 중세의 따뜻한 기온에 힘입어 인구가 증가했으며 법치주의가 태동했다. 13세기에는 탁발 수도사들이 교황에게 인정을 받아 종교를 유럽 대륙 구석구석에 전파했으며 공의회를 통해 모든 성당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지역사회를 넘어선 이동의 개념이 본격화한 것도 이 시기다. 사람들은 정시 시장에 방문하고 법적 책임을 지고 특허를 획득하기 위해 고향을 잠시 떠났다.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유럽 대륙 전체를 휩쓸었고 민족주의가 확립됐으며 지역어가 이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인다. 에드워드 3세가 활용한 투사체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바뀐 것도 이 시기다. 15세기에는 대항해 시대가 열렸으며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되어 시간이 종교적 개념에서 세속적 개념으로 내려왔으며 개인주의가 태동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지역어 성경이 널리 읽히고 문해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며 루터가 종교 개혁을 주창했다. 사적 폭력이 감소하고 분쟁을 법에 처분을 맡겼으며 유럽 열강이 확장되었다. 17세기에는 의학, 과학 혁명이 변화를 주도했고 18세기에는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9세기에는 철도가 유럽 대륙 곳곳을 이어주었고 도시화가 고도화되었으며 사람들이 공중 보건과 위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전자기기가 보급되었으며 수많은 기술이 혁신되었고 전쟁이 인간 존엄을 파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