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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던 항해와 상업의 민족
페니키아-카르타고의 3천 년 역사
알파벳과 갤리선의 발명자들,
그들은 왜 역사에서 지워져버렸는가?
페니키아-카르타고의 역사를 국내 최초로 소개한 통사(通史). 그리스-로마 문명의 조연으로만 머물러 있던 페니키아인들의 사라진 문명을 오롯이 복원하여 흥미진진한 고대 지중해 세계의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세계 최초의 항구도시 비블로스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출발하여 카르타고의 비극적인 멸망까지 3천 년 역사가 생생한 필치로 펼쳐진다. 책의 전반부는 페니키아인들의 이야기다. 알파벳과 갤리선의 발명자인 페니키아인들이 백향목과 자줏빛 염료로 해양 제국을 일으키고, 아시아 대륙의 거대한 제국들과 상호작용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강자 그리스인들과 경쟁한 역사가 소개된다. 책의 후반부는 페니키아인들의 후손인 카르타고인들의 역사다.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터전을 마련한 카르타고는 서지중해의 교역망과 패권을 장악했지만,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 등 로마와 치열한 투쟁을 벌이다가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 책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주요한 일원이었던 페니키아-카르타고인들의 이야기, 즉 그리스-로마 문명에 가려 숨겨져 있던 빛나는 반쪽을 복원함으로써 고대사의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페니키아-카르타고의 3천 년 역사
알파벳과 갤리선의 발명자들,
그들은 왜 역사에서 지워져버렸는가?
페니키아-카르타고의 역사를 국내 최초로 소개한 통사(通史). 그리스-로마 문명의 조연으로만 머물러 있던 페니키아인들의 사라진 문명을 오롯이 복원하여 흥미진진한 고대 지중해 세계의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세계 최초의 항구도시 비블로스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출발하여 카르타고의 비극적인 멸망까지 3천 년 역사가 생생한 필치로 펼쳐진다. 책의 전반부는 페니키아인들의 이야기다. 알파벳과 갤리선의 발명자인 페니키아인들이 백향목과 자줏빛 염료로 해양 제국을 일으키고, 아시아 대륙의 거대한 제국들과 상호작용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강자 그리스인들과 경쟁한 역사가 소개된다. 책의 후반부는 페니키아인들의 후손인 카르타고인들의 역사다.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터전을 마련한 카르타고는 서지중해의 교역망과 패권을 장악했지만,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 등 로마와 치열한 투쟁을 벌이다가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 책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주요한 일원이었던 페니키아-카르타고인들의 이야기, 즉 그리스-로마 문명에 가려 숨겨져 있던 빛나는 반쪽을 복원함으로써 고대사의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목차
머리말
1장 페니키아의 탄생과 발전
페니키아,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다 |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 비블로스
페니키아의 백향목 | 티레의 등장과 자주색 염료 그리고 역청
고대 오리엔트와 페니키아의 격변 | 국제 상업도시 우가리트
철기시대로의 격변
2장 페니키아의 황금시대
페니키아의 장자 시돈 | 페니키아 알파벳 | 티레와 이스라엘 왕국의 밀월
대항해시대와 교역 거점 건설 | 페니키아인이 만든 또 하나의 걸작
티레의 패권 장악과 번영 | 페니키아의 다양한 산업 | 멜카르트의 기둥
페니키아의 성공 이유
3장 제국 사이의 페니키아
초강대국 아시리아 시대의 페니키아 |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페니키아
페르시아 패권 아래서의 부흥
4장 그리스인과의 전쟁과 페니키아 본토의 쇠락
바다의 라이벌 | 페르시아 전쟁의 발단이 페니키아?
이오니아 봉기와 페니키아인 | 숙적 아테네의 부상
아테네의 해군 확장과 페니키아의 출정 | 아르테미시온 참사
살라미스 결전 전야 | 대패와 후유증 |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계속되는 전쟁
티레 공방전 | 티레의 몰락과 카르타고의 부상
페니키아인의 이모저모
5장 카르타고의 탄생과 발전
카르타고의 건국신화 | 엘리사 전설의 진상 | 카르타고의 위치
카르타고의 대두 | 카르타고 ‘제국’의 형성 | 그리스인과의 투쟁
시칠리아를 둘러싼 지중해 민족들의 각축 | 말코스의 쿠데타
마고 왕조의 서지중해 패권 장악 | 로마와의 조약 체결
페르시아 전쟁 전야 | 1차 시칠리아 전쟁 | 동맹의 종말 | 농업대국 카르타고
한노의 대항해 | 히밀코의 항해 | 카르타고의 사하라 진출
2차 시칠리아 전쟁 | 3차 시칠리아 전쟁 | 카르타고와 그리스가 서로에게 미친 영향
휴전과 카르타고 공화국 | 4, 5차 시칠리아 전쟁과 디오니시우스의 죽음
20년의 평화와 티몰레온의 등장 | 6차 시칠리아 전쟁 | 카르타고의 두 번째 참패
7차 시칠리아 전쟁 |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전란 | 피로스 전쟁
카르타고의 마지막 시라쿠사 포위 | 카르타고-로마 동맹과 피로스의 몰락
6장 1차 포에니 전쟁 전야
정치제도 비교 | 군사력 비교 | 카르타고의 경제력
7장 1차 포에니 전쟁
어이없는 시작 | 아크라가스의 혈투 | 로마 해군의 탄생 | 밀라이 해전
넓어지는 전장 | 에크노무스 해전과 로마군의 아프리카 침공
바그라다스 전투와 대해난 사고 | 늪으로 빠져드는 두 강대국
코끼리부대의 궤멸 | 릴리바이움 공방전 | 드레파눔 해전
카르타고의 태만과 하밀카르의 등장 | 카르타고의 효웅, 하밀카르 바르카
전쟁의 승패를 가른 두 나라의 재정정책 | 로마 함대의 부활과 혁신
로마와 카르타고 함대의 재등장 | 아이가테스 해전과 강화조약
1차 포에니 전쟁 총평
8장 두 전쟁의 막간
용병 전쟁과 하밀카르의 와신상담 | 스페인의 바르카 가문
로마와의 조약과 한니발의 등장 | 한니발의 데뷔전
9장 2차 포에니 전쟁
사군툼 그리고 개전 | 대원정 준비 | 전설적인 대원정의 시작
알프스를 넘다 |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 | 티키누스 전투 | 트레비아 전투
아르노 습지 횡단 | 트라시메노 전투 | 마케도니아의 접근
굼벵이 파비우스의 등장 | 칸나이 전투 | 한니발의 딜레마
원로원을 중심으로 뭉친 로마인 |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 한니발
시라쿠사와 사르데냐가 반로마 연합에 가세하다
한니발과 필리포스 5세의 동맹 | 캄파니아의 한니발 | 시라쿠사 함락
타렌툼 함락 | 한니발 대 로마 | 여전한 한니발의 위력
성문에 한니발이 있다 | 빛을 잃은 한니발 | 한니발과 마르켈루스의 용쟁호투
마르켈루스의 어이없는 전사 | 바르카 대 스키피오 | 스키피오의 등장
카르타헤나 함락 | 바이쿨라 전투 | 메타우루스 전투 | 일리파 전투
너무 젊은 집정관 |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상륙 | 누미디아의 상실
한니발, 이탈리아를 떠나다! | 자마 전투
10장 마지막 번영
수페트 한니발 | 한니발의 망명 | 시리아의 대패
한니발의 2차 망명 | 스키피오의 재판과 죽음
한니발의 최후 |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11장 포에니의 바다가 사라지다
3차 포에니 전쟁의 배경 | 마지막 전쟁의 시작
결사항전에 나선 카르타고인들 | 카르타고의 구조와 방어
카르타고의 승리 | 마시니사와 카토의 죽음 | 소스키피오의 등장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 | 생지옥으로 변한 카르타고
최후의 보루 비르사 언덕 | 뒷이야기
1장 페니키아의 탄생과 발전
페니키아,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다 |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 비블로스
페니키아의 백향목 | 티레의 등장과 자주색 염료 그리고 역청
고대 오리엔트와 페니키아의 격변 | 국제 상업도시 우가리트
철기시대로의 격변
2장 페니키아의 황금시대
페니키아의 장자 시돈 | 페니키아 알파벳 | 티레와 이스라엘 왕국의 밀월
대항해시대와 교역 거점 건설 | 페니키아인이 만든 또 하나의 걸작
티레의 패권 장악과 번영 | 페니키아의 다양한 산업 | 멜카르트의 기둥
페니키아의 성공 이유
3장 제국 사이의 페니키아
초강대국 아시리아 시대의 페니키아 |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페니키아
페르시아 패권 아래서의 부흥
4장 그리스인과의 전쟁과 페니키아 본토의 쇠락
바다의 라이벌 | 페르시아 전쟁의 발단이 페니키아?
이오니아 봉기와 페니키아인 | 숙적 아테네의 부상
아테네의 해군 확장과 페니키아의 출정 | 아르테미시온 참사
살라미스 결전 전야 | 대패와 후유증 |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계속되는 전쟁
티레 공방전 | 티레의 몰락과 카르타고의 부상
페니키아인의 이모저모
5장 카르타고의 탄생과 발전
카르타고의 건국신화 | 엘리사 전설의 진상 | 카르타고의 위치
카르타고의 대두 | 카르타고 ‘제국’의 형성 | 그리스인과의 투쟁
시칠리아를 둘러싼 지중해 민족들의 각축 | 말코스의 쿠데타
마고 왕조의 서지중해 패권 장악 | 로마와의 조약 체결
페르시아 전쟁 전야 | 1차 시칠리아 전쟁 | 동맹의 종말 | 농업대국 카르타고
한노의 대항해 | 히밀코의 항해 | 카르타고의 사하라 진출
2차 시칠리아 전쟁 | 3차 시칠리아 전쟁 | 카르타고와 그리스가 서로에게 미친 영향
휴전과 카르타고 공화국 | 4, 5차 시칠리아 전쟁과 디오니시우스의 죽음
20년의 평화와 티몰레온의 등장 | 6차 시칠리아 전쟁 | 카르타고의 두 번째 참패
7차 시칠리아 전쟁 |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전란 | 피로스 전쟁
카르타고의 마지막 시라쿠사 포위 | 카르타고-로마 동맹과 피로스의 몰락
6장 1차 포에니 전쟁 전야
정치제도 비교 | 군사력 비교 | 카르타고의 경제력
7장 1차 포에니 전쟁
어이없는 시작 | 아크라가스의 혈투 | 로마 해군의 탄생 | 밀라이 해전
넓어지는 전장 | 에크노무스 해전과 로마군의 아프리카 침공
바그라다스 전투와 대해난 사고 | 늪으로 빠져드는 두 강대국
코끼리부대의 궤멸 | 릴리바이움 공방전 | 드레파눔 해전
카르타고의 태만과 하밀카르의 등장 | 카르타고의 효웅, 하밀카르 바르카
전쟁의 승패를 가른 두 나라의 재정정책 | 로마 함대의 부활과 혁신
로마와 카르타고 함대의 재등장 | 아이가테스 해전과 강화조약
1차 포에니 전쟁 총평
8장 두 전쟁의 막간
용병 전쟁과 하밀카르의 와신상담 | 스페인의 바르카 가문
로마와의 조약과 한니발의 등장 | 한니발의 데뷔전
9장 2차 포에니 전쟁
사군툼 그리고 개전 | 대원정 준비 | 전설적인 대원정의 시작
알프스를 넘다 |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 | 티키누스 전투 | 트레비아 전투
아르노 습지 횡단 | 트라시메노 전투 | 마케도니아의 접근
굼벵이 파비우스의 등장 | 칸나이 전투 | 한니발의 딜레마
원로원을 중심으로 뭉친 로마인 |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 한니발
시라쿠사와 사르데냐가 반로마 연합에 가세하다
한니발과 필리포스 5세의 동맹 | 캄파니아의 한니발 | 시라쿠사 함락
타렌툼 함락 | 한니발 대 로마 | 여전한 한니발의 위력
성문에 한니발이 있다 | 빛을 잃은 한니발 | 한니발과 마르켈루스의 용쟁호투
마르켈루스의 어이없는 전사 | 바르카 대 스키피오 | 스키피오의 등장
카르타헤나 함락 | 바이쿨라 전투 | 메타우루스 전투 | 일리파 전투
너무 젊은 집정관 |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상륙 | 누미디아의 상실
한니발, 이탈리아를 떠나다! | 자마 전투
10장 마지막 번영
수페트 한니발 | 한니발의 망명 | 시리아의 대패
한니발의 2차 망명 | 스키피오의 재판과 죽음
한니발의 최후 |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11장 포에니의 바다가 사라지다
3차 포에니 전쟁의 배경 | 마지막 전쟁의 시작
결사항전에 나선 카르타고인들 | 카르타고의 구조와 방어
카르타고의 승리 | 마시니사와 카토의 죽음 | 소스키피오의 등장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 | 생지옥으로 변한 카르타고
최후의 보루 비르사 언덕 | 뒷이야기
저자 소개
책 속으로
백향목은 2,000년 동안 지중해 세계 최고의 목재였고,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의 궁전이나 신전 등 최고의 건물을 지을 때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잘 알려진 대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이 만들어낸 충적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농사에 매우 유리한 충적토는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두 문명 세계는 백향목이 나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고, 특히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그 숲을 ‘신들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 p.25
페니키아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이유는 단순히 이집트의 쇠퇴와 백향목, 자줏빛 염료 덕만은 아니었다. 지중해의 주요 상품인 소금과 포도주, 올리브는 기후와 토양에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페니키아인들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 p.39
페니키아인들은 풍향과 조류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본토에서 서쪽으로 갈 때는 키프로스-그리스-이탈리아-사르데냐-발레아레스제도-스페인 항로를, 귀국할 때는 북아프리카 해안을 이용하는 안전한 항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인지 『박물지』로 유명한 플리니우스는 “이집트인은 왕조를 만들었고, 그리스인은 민주주의를 만들었으며, 페니키아인은 상업을 만들었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 p.51
비블로스에서 시작하여 베네치아의 멸망으로 끝나는 지중해 도시국가들은 결국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난 대제국들에 압도되어 사라져버리지만 그들은 결코 잠시 반짝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1,000년 이상 유지된 이 도시국가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무엇보다 정복과 무력, 종교가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에 교역을 통한 부의 증대를 추구했으며, 육지가 아닌 바다로 진출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갔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의 큰 흐름 중 하나가 되었다.
--- p.61~62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같은 거대한 제국들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던 시기 페니키아인들은 바다에서도 강적을 만나는데 바로 그리스인이었다. 고대 내내 끊이지 않고 활동했던 페니키아인과 달리 미케네 멸망 이후 몇 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이들은 지중해 전역에서 상권과 해상 패권을 두고 페니키아와 싸우는데, 페니키아 본토가 쇠퇴한 후에는 카르타고가 그 상대가 된다.
--- p.75
화려한 전적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지만 그가 가장 고전했던 티레 공방전은 기원전 332년 1월 시작되었다. 티레 입장에서는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이어 세 번째 거물을 상대하는 셈이었다.
--- p.107
서쪽으로 방랑하던 엘리사 공주는 지금의 튀니지 땅에 도착하여 망명을 요청하고 근거지를 요구했다. 그곳은 티레의 지중해 교역망에서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짓궂은 추장 이아르바스는 엘리사에게 황소 한 마리 가죽으로 덮을 수 있는 땅만 주겠다고 했다. 이에 총명한 공주는 황소 가죽을 실처럼 가늘게 잘라 언덕 하나를 둘러쌌다. 이 언덕이 고대 지중해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카르타고의 기원이 되었는데, 언덕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가죽’이라는 의미의 비르사가 되었다.
--- p.128
카르타고는 군대의 지휘관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승리를 너무 많이 거두면 독재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고소를 당하여 법원에서 문책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크게 패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때로는 중대한 시기에 노련한 지도자를 잃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런 악습은 로마와의 운명적인 결전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 p.145
이제 거대한 적인 알프스산맥이 한니발군의 눈앞에 나타났다.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으려고 하자 주위에서 불가능하다고 했고 이에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대답하고 결국 알프스를 넘은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그보다 무려 2,000년 전에 대군을 이끌고, 그것도 겨울에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젊지만 냉철한 한니발은 가능하다고 여겼고, 준비도 착착 진행되었다.
--- p.25
페니키아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이유는 단순히 이집트의 쇠퇴와 백향목, 자줏빛 염료 덕만은 아니었다. 지중해의 주요 상품인 소금과 포도주, 올리브는 기후와 토양에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페니키아인들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 p.39
페니키아인들은 풍향과 조류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본토에서 서쪽으로 갈 때는 키프로스-그리스-이탈리아-사르데냐-발레아레스제도-스페인 항로를, 귀국할 때는 북아프리카 해안을 이용하는 안전한 항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인지 『박물지』로 유명한 플리니우스는 “이집트인은 왕조를 만들었고, 그리스인은 민주주의를 만들었으며, 페니키아인은 상업을 만들었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 p.51
비블로스에서 시작하여 베네치아의 멸망으로 끝나는 지중해 도시국가들은 결국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난 대제국들에 압도되어 사라져버리지만 그들은 결코 잠시 반짝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1,000년 이상 유지된 이 도시국가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무엇보다 정복과 무력, 종교가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에 교역을 통한 부의 증대를 추구했으며, 육지가 아닌 바다로 진출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갔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의 큰 흐름 중 하나가 되었다.
--- p.61~62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같은 거대한 제국들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던 시기 페니키아인들은 바다에서도 강적을 만나는데 바로 그리스인이었다. 고대 내내 끊이지 않고 활동했던 페니키아인과 달리 미케네 멸망 이후 몇 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이들은 지중해 전역에서 상권과 해상 패권을 두고 페니키아와 싸우는데, 페니키아 본토가 쇠퇴한 후에는 카르타고가 그 상대가 된다.
--- p.75
화려한 전적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지만 그가 가장 고전했던 티레 공방전은 기원전 332년 1월 시작되었다. 티레 입장에서는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이어 세 번째 거물을 상대하는 셈이었다.
--- p.107
서쪽으로 방랑하던 엘리사 공주는 지금의 튀니지 땅에 도착하여 망명을 요청하고 근거지를 요구했다. 그곳은 티레의 지중해 교역망에서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짓궂은 추장 이아르바스는 엘리사에게 황소 한 마리 가죽으로 덮을 수 있는 땅만 주겠다고 했다. 이에 총명한 공주는 황소 가죽을 실처럼 가늘게 잘라 언덕 하나를 둘러쌌다. 이 언덕이 고대 지중해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카르타고의 기원이 되었는데, 언덕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가죽’이라는 의미의 비르사가 되었다.
--- p.128
카르타고는 군대의 지휘관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승리를 너무 많이 거두면 독재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고소를 당하여 법원에서 문책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크게 패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때로는 중대한 시기에 노련한 지도자를 잃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런 악습은 로마와의 운명적인 결전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 p.145
이제 거대한 적인 알프스산맥이 한니발군의 눈앞에 나타났다.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으려고 하자 주위에서 불가능하다고 했고 이에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대답하고 결국 알프스를 넘은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그보다 무려 2,000년 전에 대군을 이끌고, 그것도 겨울에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젊지만 냉철한 한니발은 가능하다고 여겼고, 준비도 착착 진행되었다.
--- p.280~281
출판사 리뷰
고대 지중해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이집트 문명, 그리스 신화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테네를 위시한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페르시아 제국의 대전쟁, 그리고 지중해를 자신의 호수로 만든 끝판왕 로마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활약했고, 몇 세기 동안 그리스와 로마를 압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페니키아인들이다. 세계 최초의 항구도시와 해군을 건설한 사람들이 바로 페니키아인들이었고, 그리스인들이 지중해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훨씬 전부터 스페인과 시칠리아 등 여러 식민도시를 건설한 사람들도 페니키아의 후손인 카르타고인들이었다. 고대 지중해의 상업과 바다를 장악했지만 결국 그들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패배하여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알파벳의 발명자임에도 자신들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서양 고대사의 조연으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정치·경제적으로는 그리스-로마 문명의 라이벌이자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최대 강적이었던 페니키아-카르타고 문명의 전반적인 역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페니키아 문명을 일으킨 백향목과 자줏빛 염료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지금의 시리아-레바논 해안, 이스라엘 북부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여 살았다. 비록 한 번도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시돈, 티레, 비블로스, 아라두스, 베리투스 등 페니키아의 항구도시들은 기원전 1200~800년에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페니키아의 라이벌이던 그리스인들 역시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단 한 번 힘을 모아 대제국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운 역사가 있다. 반면 페니키아인들은 아시아 대륙의 대제국들(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에 복속되어야 했다. 그리스-로마가 주도권을 잡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의 민족, 악명 높은 ‘이코노믹 애니멀’로 폄훼되고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명예로운 전사 민족으로 여겨졌다.
고고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 비블로스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을 기원전 8800년까지로 보고 있다. 기원전 2900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 도시도 발굴되었다. 비블로스 유적지에는 망루, 도로, 배수시설 등이 있었고 성벽의 두께는 25미터에 달했다. 그러나 비블로스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이후 페니키아는 시돈과 티레, 두 도시를 투톱으로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 큰 번영을 구가했다.
페니키아의 주요 수출품은 2,000년 동안 지중해 최고의 목재였던 백향목(레바논 삼나무)이었다. 페니키아는 주요 고객인 이집트와의 교역에서 백향목을 수출하고 파피루스를 수입했는데 비블로스라는 이름이 여기서 파생되었다(바이블Bible의 어원도 뿌리가 같다). 백향목과 함께 페니키아에 막대한 부를 가져온 것은 바다달팽이에서 추출한 자주색 염료였다. 매우 짙은 자주색을 띠는 이 염료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고가의 사치재로 그리스인들은 이 색을 포이닉스phonix라고 불렀으며 페니키아phoenicia와 포에니poeni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백향목과 자줏빛 염료, 이 두 교역품은 페니키아 문명을 말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해상무역이 촉발한 알파벳 발명
해상무역에 나선 페니키아인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기존 설형문자나 이집트 상형문자로는 표기가 너무 번거로워 장부나 문서를 쓰기 어려웠다. 당연히 쉽고 빠르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이 증가했다. 결국 기원전 11세기 중반 페니키아인들은 우가리트 문자를 개량하여 22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페니키아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므로 그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중해 문화권에 전파되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완전히 대척점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조차 이를 받아들여 히브리 문자를 만들 정도였다.
특히 기원전 10세기 히람 1세 치하의 티레는 그 유명한 솔로몬 왕 치하의 이스라엘과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성전을 페니키아의 백향목과 자재들로 페니키아 기술자들이 건설했다. 그 대가로 솔로몬은 대량의 밀과 양질의 올리브유를 티레에 보냈다. 이스라엘은 내륙 교역로와 군사적 안정을 제공하고 페니키아는 선박, 상업, 기술 노하우를 제공했다. 고대 세계의 막강한 종교적 라이벌 간의 협력이었다(성서에 나오는 악명 높은 ‘바알’ 신은 페니키아의 최고신이다. 한니발[바알의 은총], 하스드루발[바알의 도움] 등 카르타고 남성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큰 그림으로 보면 페니키아인들은 알파벳을 창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서구 문화의 양대 축을 이룬 그리스-로마 세계와 일신교의 기초가 된 헤브라이즘 세계는 강력한 라이벌인 포에니 세계를 일생일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역사를 곡해하고 철저히 말살해버린 것이다.
활발한 식민지 건설과 갤리선의 탄생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각지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나폴리, 이스탄불, 마르세유, 타란토, 시라쿠사 등이 그리스인들이 건설해 아직도 남아있는 도시들이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인들의 활약은 역사의 절반에 불과했다.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먼저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들이 세운 스페인의 카디스, 카르타헤나, 바르셀로나, 말라가, 리스본, 탕헤르, 리비아의 트리폴리, 사르데냐의 칼리아리,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등은 지금도 건재하다. 그리스인들의 도시가 대부분 동지중해와 흑해에 있었던 것과 달리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는 대부분 서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던 오늘날 지브롤터해협의 원조 명칭은 페니키아인들이 칭한 ‘멜카르트의 기둥’이었다(멜카르트는 페니키아의 신이다).
백향목이라는 최고의 선박용 자재를 가진 페니키아인들은 타고난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사람으로 치면 척추에 해당하는 용골과 갈비뼈에 해당하는 빔과 프레임으로 선체의 뼈대를 만들어 원양항해에 적합한 배를 만들었다. 이미 기원전 9세기부터 노를 이층으로 배치하는 바이렘식 갤리선을 건조했고 선수에는 충각을 달아 전투에 사용했다.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던 갤리선의 탄생이었다. 갤리선은 점점 대형화되어 훗날 카르타고는 5단노선까지 보유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 최첨단 선박으로 지중해를 사실상 ‘페니키아의 바다’로 만들었다. 페니키아인들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금속이었다. 특히 스페인은 금속의 보고였고 틴토강 유역에 유명한 은광이 있었다. 『박물지』로 유명한 플리니우스는 “이집트인은 왕조를 만들었고, 그리스인은 민주주의를 만들었으며, 페니키아인은 상업을 만들었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페니키아 본토의 몰락과 카르타고의 부상
오리엔트에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대제국이 들어서면서 페니키아의 처지는 저항과 복속이 반복되는 역사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관대한 지배 아래에서 페니키아는 다소 자율성을 회복하고 번영을 누렸지만 그리스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점차 해상에서 패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페니키아는 두 차례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해군력으로 참전했지만 대패했고, 이후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오리엔트를 통일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티레가 정복당해 파괴되었다(기원전 332년). 페니키아 본토의 몰락으로 새롭게 지중해의 여왕이 된 것은 티레의 주민들이 이주해 건설한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 건설 시기는 기원전 814년으로 보는데, 이는 로마가 건국되었던 753년보다 약 반세기 이상 앞선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무역망 중간 지점인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건설되었다. 페니키아 본토와 다른 점은 카르타고가 군사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를 두고 그리스인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하며 제국으로 성장했고 기원전 3세기까지 서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지정학적으로 특히 중요한 곳은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 패권을 노리는 국가라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시칠리아였다. 카르타고와 범그리스 세력(주요하게는 시라쿠사)은 시칠리아섬을 두고 7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그러는 사이 이탈리아에서는 카르타고의 최대 적수가 될 로마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과 지중해 제해권의 상실
지중해 패권을 두고 벌어질 카르타고와 로마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명목상 공화국이었지만 상업 귀족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령관들은 정치적 힘이 약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시에 사형 등 가혹한 벌을 받았다. 국민개병제를 기반으로 한 로마와 달리 평민 세력이 없었던 카르타고는 군대를 외국의 용병에 의존했다. 한마디로 카르타고는 경제력은 강하지만 군사력에는 문제점이 많은 나라였다. 카르타고는 해외 식민지와의 관계도 일방적인 지배와 예속 관계였던 반면 로마는 동맹 세력들에게 로마의 사업에 참가 지분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가용 병력이 상당했고 기원전 4세기 말에는 50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활용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 동원한 병력이 5만 명이었고,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할 때 동원한 병력도 20만 명 수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로마의 동원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동원력 덕분에 로마는 전투에는 져도 전쟁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의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인 시칠리아에 로마가 진입하자 카르타고가 대응함으로써 벌어졌다. 전쟁은 두 나라 중 어느 한쪽이 시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까지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승자는 서지중해의 지배자가 될 것이었다.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었던 로마는 새롭게 해군을 건설했다. 당시 해전은 충각의 충돌로 승패가 결정되었는데 이는 해양 민족인 카르타고에게 전통적인 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로마는 선수에 까마귀라고 불리는 상선교를 장착하여 선상 백병전을 펼침으로써 열세를 만회하려고 했다(상선교 끝의 쇠뿔이 까마귀 부리를 닮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까마귀는 전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로마 해군에 큰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1톤에 달하는 무게 때문에 선수가 과도하게 무거워져 항해에 악영향을 미쳤고 폭풍우를 만났을 때는 대규모 해난 사고를 일으켰다. 몇 번의 심각한 해난 사고로 수많은 병력과 선박을 잃은 로마는 해군을 아예 포기하기까지 했는데, 카르타고는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고 태만하게 날려버렸다. 당시 카르타고는 내륙 진출파와 해외 진출파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함대를 재건한 로마에 패배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되었고 사르데냐섬과 코르시카섬까지 로마에 빼앗겨버렸다(기원전 241년).
한니발이 로마 본토에서 전쟁을 감행하다
1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의 유능한 장군 하밀카르(한니발의 아버지)는 스페인 남부를 정복했다. 사위 하스드루발은 장인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하여 스페인을 사실상 바르카 가문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한니발 바르카가 매형 하스드루발의 대권을 이어받은 후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역사상 최강의 명장인 한니발의 기본 전략은 이탈리아가 전쟁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한 로마 연합의 붕괴였다. 1차 전쟁 당시 카르타고는 제해권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육로로 북상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의 전설이 생겼다. 본토를 침공당해 경악한 로마인들은 급히 대군을 보냈지만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했다.
한니발은 당시 로마의 지배가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은 남부 이탈리아를 로마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로마를 바로 치지 않고 남하했다. 남이탈리아에서 그는 해방자를 자처하며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다. 로마는 퀸투스 파비우스를 중심으로 야전에서 우월한 한니발과 정면대결하지 않고 지구전·소모전으로 대결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니발의 전략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싸우며 로마의 동맹을 해체하고, 본국으로부터 병력 충원과 물자 보급을 받고 로마를 포위해서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시칠리아를 재정복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한니발이 조국의 도움도 없이 이탈리아 한복판에서 초인적으로 버티는 사이, 로마의 명장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스페인으로 가서 바르카 가문의 기반을 붕괴시켰다. 그는 승리의 기세를 몰아 카르타고 본토로 침공해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불러들였고 마침내 자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이 종료되었고 지중해에서의 완전한 로마 우위 시대가 열렸으며 아프리카 기반의 지중해 제국이 탄생할 가능성은 사라졌다(기원전 202년).
전설로 사라진 그리스-로마 문명의 최고 라이벌
지중해 군사 패권국으로서의 가능성은 완전히 상실했지만, 패전 후에도 카르타고는 경제대국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로마는 카르타고를 그냥 두지 않았다. 3차 포에니 전쟁은 한 도시, 즉 카르타고에 대한 포위와 공성전이 전부였다. 카르타고인들은 3년에 걸쳐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소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결국 함락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했다(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멸망 후 로마의 부유층들은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과학적 영농법으로 생산량을 증진하는 카르타고의 플랜테이션 농법을 그대로 모방했고 그들의 영토가 된 북아프리카 농장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로마군의 중추를 이루는 자작농들이 대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붕괴로 이어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편 카르타고 유적은 한 세기 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그의 병사들이 은퇴 후 거주할 도시로 재건된다. 나중에는 2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자랑하는 로마 제국 최대 도시 중 하나로 번영을 누렸다. 페니키아계 도시들은 비잔티움 치하 때까지는 상당한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아랍 정복 이후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랍인에게 동화되면서 사라졌다.
카르타고 멸망 과정에서 보여준 카르타고 정부의 무능함과 탐욕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인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는 물론이고, 동방의 헬레니즘 왕국들이 카르타고보다 훨씬 더 무력하게 로마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야전에서의 승리가 전무에 가까웠고, 술라와 마리우스가 엄청난 규모로 벌인 로마의 내분에도 전혀 승기를 잡지 못했다. 카르타고처럼 3년 동안이나 항전한 도시도 없었다. 카르타고만이 전쟁 기간만 쳐도 반세기 동안 로마와 대등하게 싸웠고 이탈리아 본토를 초토화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패배해 사라졌다. 페니키아-카르타고는 국가의 존속에 경제력과 군사력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명제를 후세 국가들에게 남겼다. 인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히브리-그리스-로마 세 문명에 최고의 적이었지만 알파벳과 항해술과 교역망을 남김으로써 그들에게 최고의 공헌을 했던 민족, 하지만 패하여 사라져버린 위대한 민족이 바로 페니키아-카르타고인들이었다.
페니키아 문명을 일으킨 백향목과 자줏빛 염료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지금의 시리아-레바논 해안, 이스라엘 북부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여 살았다. 비록 한 번도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시돈, 티레, 비블로스, 아라두스, 베리투스 등 페니키아의 항구도시들은 기원전 1200~800년에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페니키아의 라이벌이던 그리스인들 역시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단 한 번 힘을 모아 대제국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운 역사가 있다. 반면 페니키아인들은 아시아 대륙의 대제국들(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에 복속되어야 했다. 그리스-로마가 주도권을 잡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의 민족, 악명 높은 ‘이코노믹 애니멀’로 폄훼되고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명예로운 전사 민족으로 여겨졌다.
고고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 비블로스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을 기원전 8800년까지로 보고 있다. 기원전 2900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 도시도 발굴되었다. 비블로스 유적지에는 망루, 도로, 배수시설 등이 있었고 성벽의 두께는 25미터에 달했다. 그러나 비블로스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이후 페니키아는 시돈과 티레, 두 도시를 투톱으로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 큰 번영을 구가했다.
페니키아의 주요 수출품은 2,000년 동안 지중해 최고의 목재였던 백향목(레바논 삼나무)이었다. 페니키아는 주요 고객인 이집트와의 교역에서 백향목을 수출하고 파피루스를 수입했는데 비블로스라는 이름이 여기서 파생되었다(바이블Bible의 어원도 뿌리가 같다). 백향목과 함께 페니키아에 막대한 부를 가져온 것은 바다달팽이에서 추출한 자주색 염료였다. 매우 짙은 자주색을 띠는 이 염료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고가의 사치재로 그리스인들은 이 색을 포이닉스phonix라고 불렀으며 페니키아phoenicia와 포에니poeni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백향목과 자줏빛 염료, 이 두 교역품은 페니키아 문명을 말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해상무역이 촉발한 알파벳 발명
해상무역에 나선 페니키아인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기존 설형문자나 이집트 상형문자로는 표기가 너무 번거로워 장부나 문서를 쓰기 어려웠다. 당연히 쉽고 빠르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이 증가했다. 결국 기원전 11세기 중반 페니키아인들은 우가리트 문자를 개량하여 22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페니키아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므로 그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중해 문화권에 전파되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완전히 대척점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조차 이를 받아들여 히브리 문자를 만들 정도였다.
특히 기원전 10세기 히람 1세 치하의 티레는 그 유명한 솔로몬 왕 치하의 이스라엘과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성전을 페니키아의 백향목과 자재들로 페니키아 기술자들이 건설했다. 그 대가로 솔로몬은 대량의 밀과 양질의 올리브유를 티레에 보냈다. 이스라엘은 내륙 교역로와 군사적 안정을 제공하고 페니키아는 선박, 상업, 기술 노하우를 제공했다. 고대 세계의 막강한 종교적 라이벌 간의 협력이었다(성서에 나오는 악명 높은 ‘바알’ 신은 페니키아의 최고신이다. 한니발[바알의 은총], 하스드루발[바알의 도움] 등 카르타고 남성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큰 그림으로 보면 페니키아인들은 알파벳을 창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서구 문화의 양대 축을 이룬 그리스-로마 세계와 일신교의 기초가 된 헤브라이즘 세계는 강력한 라이벌인 포에니 세계를 일생일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역사를 곡해하고 철저히 말살해버린 것이다.
활발한 식민지 건설과 갤리선의 탄생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각지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나폴리, 이스탄불, 마르세유, 타란토, 시라쿠사 등이 그리스인들이 건설해 아직도 남아있는 도시들이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인들의 활약은 역사의 절반에 불과했다.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먼저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들이 세운 스페인의 카디스, 카르타헤나, 바르셀로나, 말라가, 리스본, 탕헤르, 리비아의 트리폴리, 사르데냐의 칼리아리,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등은 지금도 건재하다. 그리스인들의 도시가 대부분 동지중해와 흑해에 있었던 것과 달리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는 대부분 서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던 오늘날 지브롤터해협의 원조 명칭은 페니키아인들이 칭한 ‘멜카르트의 기둥’이었다(멜카르트는 페니키아의 신이다).
백향목이라는 최고의 선박용 자재를 가진 페니키아인들은 타고난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사람으로 치면 척추에 해당하는 용골과 갈비뼈에 해당하는 빔과 프레임으로 선체의 뼈대를 만들어 원양항해에 적합한 배를 만들었다. 이미 기원전 9세기부터 노를 이층으로 배치하는 바이렘식 갤리선을 건조했고 선수에는 충각을 달아 전투에 사용했다.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던 갤리선의 탄생이었다. 갤리선은 점점 대형화되어 훗날 카르타고는 5단노선까지 보유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 최첨단 선박으로 지중해를 사실상 ‘페니키아의 바다’로 만들었다. 페니키아인들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금속이었다. 특히 스페인은 금속의 보고였고 틴토강 유역에 유명한 은광이 있었다. 『박물지』로 유명한 플리니우스는 “이집트인은 왕조를 만들었고, 그리스인은 민주주의를 만들었으며, 페니키아인은 상업을 만들었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페니키아 본토의 몰락과 카르타고의 부상
오리엔트에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대제국이 들어서면서 페니키아의 처지는 저항과 복속이 반복되는 역사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관대한 지배 아래에서 페니키아는 다소 자율성을 회복하고 번영을 누렸지만 그리스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점차 해상에서 패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페니키아는 두 차례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해군력으로 참전했지만 대패했고, 이후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오리엔트를 통일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티레가 정복당해 파괴되었다(기원전 332년). 페니키아 본토의 몰락으로 새롭게 지중해의 여왕이 된 것은 티레의 주민들이 이주해 건설한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 건설 시기는 기원전 814년으로 보는데, 이는 로마가 건국되었던 753년보다 약 반세기 이상 앞선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무역망 중간 지점인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건설되었다. 페니키아 본토와 다른 점은 카르타고가 군사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를 두고 그리스인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하며 제국으로 성장했고 기원전 3세기까지 서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지정학적으로 특히 중요한 곳은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 패권을 노리는 국가라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시칠리아였다. 카르타고와 범그리스 세력(주요하게는 시라쿠사)은 시칠리아섬을 두고 7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그러는 사이 이탈리아에서는 카르타고의 최대 적수가 될 로마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과 지중해 제해권의 상실
지중해 패권을 두고 벌어질 카르타고와 로마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명목상 공화국이었지만 상업 귀족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령관들은 정치적 힘이 약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시에 사형 등 가혹한 벌을 받았다. 국민개병제를 기반으로 한 로마와 달리 평민 세력이 없었던 카르타고는 군대를 외국의 용병에 의존했다. 한마디로 카르타고는 경제력은 강하지만 군사력에는 문제점이 많은 나라였다. 카르타고는 해외 식민지와의 관계도 일방적인 지배와 예속 관계였던 반면 로마는 동맹 세력들에게 로마의 사업에 참가 지분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가용 병력이 상당했고 기원전 4세기 말에는 50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활용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 동원한 병력이 5만 명이었고,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할 때 동원한 병력도 20만 명 수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로마의 동원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동원력 덕분에 로마는 전투에는 져도 전쟁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의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인 시칠리아에 로마가 진입하자 카르타고가 대응함으로써 벌어졌다. 전쟁은 두 나라 중 어느 한쪽이 시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까지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승자는 서지중해의 지배자가 될 것이었다.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었던 로마는 새롭게 해군을 건설했다. 당시 해전은 충각의 충돌로 승패가 결정되었는데 이는 해양 민족인 카르타고에게 전통적인 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로마는 선수에 까마귀라고 불리는 상선교를 장착하여 선상 백병전을 펼침으로써 열세를 만회하려고 했다(상선교 끝의 쇠뿔이 까마귀 부리를 닮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까마귀는 전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로마 해군에 큰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1톤에 달하는 무게 때문에 선수가 과도하게 무거워져 항해에 악영향을 미쳤고 폭풍우를 만났을 때는 대규모 해난 사고를 일으켰다. 몇 번의 심각한 해난 사고로 수많은 병력과 선박을 잃은 로마는 해군을 아예 포기하기까지 했는데, 카르타고는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고 태만하게 날려버렸다. 당시 카르타고는 내륙 진출파와 해외 진출파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함대를 재건한 로마에 패배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되었고 사르데냐섬과 코르시카섬까지 로마에 빼앗겨버렸다(기원전 241년).
한니발이 로마 본토에서 전쟁을 감행하다
1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의 유능한 장군 하밀카르(한니발의 아버지)는 스페인 남부를 정복했다. 사위 하스드루발은 장인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하여 스페인을 사실상 바르카 가문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한니발 바르카가 매형 하스드루발의 대권을 이어받은 후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역사상 최강의 명장인 한니발의 기본 전략은 이탈리아가 전쟁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한 로마 연합의 붕괴였다. 1차 전쟁 당시 카르타고는 제해권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육로로 북상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의 전설이 생겼다. 본토를 침공당해 경악한 로마인들은 급히 대군을 보냈지만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했다.
한니발은 당시 로마의 지배가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은 남부 이탈리아를 로마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로마를 바로 치지 않고 남하했다. 남이탈리아에서 그는 해방자를 자처하며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다. 로마는 퀸투스 파비우스를 중심으로 야전에서 우월한 한니발과 정면대결하지 않고 지구전·소모전으로 대결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니발의 전략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싸우며 로마의 동맹을 해체하고, 본국으로부터 병력 충원과 물자 보급을 받고 로마를 포위해서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시칠리아를 재정복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한니발이 조국의 도움도 없이 이탈리아 한복판에서 초인적으로 버티는 사이, 로마의 명장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스페인으로 가서 바르카 가문의 기반을 붕괴시켰다. 그는 승리의 기세를 몰아 카르타고 본토로 침공해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불러들였고 마침내 자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이 종료되었고 지중해에서의 완전한 로마 우위 시대가 열렸으며 아프리카 기반의 지중해 제국이 탄생할 가능성은 사라졌다(기원전 202년).
전설로 사라진 그리스-로마 문명의 최고 라이벌
지중해 군사 패권국으로서의 가능성은 완전히 상실했지만, 패전 후에도 카르타고는 경제대국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로마는 카르타고를 그냥 두지 않았다. 3차 포에니 전쟁은 한 도시, 즉 카르타고에 대한 포위와 공성전이 전부였다. 카르타고인들은 3년에 걸쳐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소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결국 함락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했다(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멸망 후 로마의 부유층들은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과학적 영농법으로 생산량을 증진하는 카르타고의 플랜테이션 농법을 그대로 모방했고 그들의 영토가 된 북아프리카 농장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로마군의 중추를 이루는 자작농들이 대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붕괴로 이어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편 카르타고 유적은 한 세기 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그의 병사들이 은퇴 후 거주할 도시로 재건된다. 나중에는 2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자랑하는 로마 제국 최대 도시 중 하나로 번영을 누렸다. 페니키아계 도시들은 비잔티움 치하 때까지는 상당한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아랍 정복 이후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랍인에게 동화되면서 사라졌다.
카르타고 멸망 과정에서 보여준 카르타고 정부의 무능함과 탐욕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인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는 물론이고, 동방의 헬레니즘 왕국들이 카르타고보다 훨씬 더 무력하게 로마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야전에서의 승리가 전무에 가까웠고, 술라와 마리우스가 엄청난 규모로 벌인 로마의 내분에도 전혀 승기를 잡지 못했다. 카르타고처럼 3년 동안이나 항전한 도시도 없었다. 카르타고만이 전쟁 기간만 쳐도 반세기 동안 로마와 대등하게 싸웠고 이탈리아 본토를 초토화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패배해 사라졌다. 페니키아-카르타고는 국가의 존속에 경제력과 군사력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명제를 후세 국가들에게 남겼다. 인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히브리-그리스-로마 세 문명에 최고의 적이었지만 알파벳과 항해술과 교역망을 남김으로써 그들에게 최고의 공헌을 했던 민족, 하지만 패하여 사라져버린 위대한 민족이 바로 페니키아-카르타고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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