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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레비나스의 주저임에도 번역되지 않아 독자들의 갈증이 컸던 『전체성과 무한』이 드디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 개념들, 이를테면 타자, 전체성, 무한, 초월, 책임, 향유, 맞아들임, 얼굴, 근접성 등이 망라되어 등장하며 또 체계적으로 엮여서 다루어진다. 『전체성과 무한』 이전의 저술들에서는 여기에서야 비로소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격적인 특징을 만나기 어렵고, 이후에 레비나스가 내놓은 책들은 여러 기회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성과 무한』만큼 자체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함뿐만 아니라 그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 『전체성과 무한』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목차
서문
1부 동일자와 타자
A. 형이상학과 초월 / B. 분리와 대화 / C. 진리와 정의 / D. 분리와 절대
2부 내면성과 경제
A. 삶으로서의 분리 / B. 향유와 재현 / C. 나와 의존 / D. 거주 / E. 현상들의 세계와 표현
3부 얼굴과 외재성
A. 얼굴과 감성 / B. 얼굴과 윤리 / C. 윤리적 관계와 시간
4부 얼굴 너머
A. 사랑의 애매성 / B. 에로스의 현상학 / C. 번식성 / D. 에로스 속의 주체성 / E. 초월과 번식성 / F. 자식성과 형제애 / G. 시간의 무한
결론
독일어판 서문 |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저역자 소개
1부 동일자와 타자
A. 형이상학과 초월 / B. 분리와 대화 / C. 진리와 정의 / D. 분리와 절대
2부 내면성과 경제
A. 삶으로서의 분리 / B. 향유와 재현 / C. 나와 의존 / D. 거주 / E. 현상들의 세계와 표현
3부 얼굴과 외재성
A. 얼굴과 감성 / B. 얼굴과 윤리 / C. 윤리적 관계와 시간
4부 얼굴 너머
A. 사랑의 애매성 / B. 에로스의 현상학 / C. 번식성 / D. 에로스 속의 주체성 / E. 초월과 번식성 / F. 자식성과 형제애 / G. 시간의 무한
결론
독일어판 서문 |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저역자 소개
책 속으로
하나의 정신이 자신에게 합치하지 않는 존재를 맞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폭력은 철학을 이끄는 자율성의 이상과, 즉 명백함 가운데서 자신의 진리를 지배하는 주인이어야 한다는 철학의 이상과 모순되는가? 하지만 무한과의 관계 ? 데카르트가 명명한 무한의 관념 ? 는 억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사유를 넘어선다. 억견은 사유가 건드리면 마치 바람처럼 사라지거나, 이미 이 사유 내부에 있는 것인 듯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무한의 관념 속에서는 언제나 사유 바깥에 머무는 것이 사유된다. 모든 억견의 조건, 그것은 모든 객관적 진리의 조건이기도 하다. 무한의 관념, 그것은 정신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발견하는 것과 억견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구별하는 사태에 앞서는 정신이다. --- pp.13-14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분리는 타자에 대한 대립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대립이란 순전히 반-정립적인 것에 불과하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서로를 밀쳐 내면서 서로를 요구한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그들의 대립 속에서 이 둘을 포괄하고 일람하는 시선에 출현한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하나의 전체성을 이미 형성하고 있다. 이 전체성은 무한의 관념에 의해 표현되는 형이상학적 초월을 통합하는 가운데, 이 형이상학적 초월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절대적 초월은 통합할 수 없는 것으로서 생산되어야 한다. --- p.61
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 pp.172-173
소유를 정초하는 집은,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를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한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즉 여성적 존재로 돌려보낸다. --- p.231
사랑은 타인을 향한다. 사랑은 타인의 약함 가운데서 타인을 향한다. 여기서 약함이란 어떤 속성의 열등한 정도를 나타내지 않으며, 나와 타자에 공통된 규정의 상대적 부족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속성들의 현시에 앞서, 그 약함은 타자성에 타자성의 자격을 준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이고, 타인의 약함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약함 속에서, 사랑받는 이인 연인이 여명 속에서처럼 몸을 일으킨다.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분리는 타자에 대한 대립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대립이란 순전히 반-정립적인 것에 불과하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서로를 밀쳐 내면서 서로를 요구한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그들의 대립 속에서 이 둘을 포괄하고 일람하는 시선에 출현한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하나의 전체성을 이미 형성하고 있다. 이 전체성은 무한의 관념에 의해 표현되는 형이상학적 초월을 통합하는 가운데, 이 형이상학적 초월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절대적 초월은 통합할 수 없는 것으로서 생산되어야 한다. --- p.61
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 pp.172-173
소유를 정초하는 집은,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를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한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즉 여성적 존재로 돌려보낸다. --- p.231
사랑은 타인을 향한다. 사랑은 타인의 약함 가운데서 타인을 향한다. 여기서 약함이란 어떤 속성의 열등한 정도를 나타내지 않으며, 나와 타자에 공통된 규정의 상대적 부족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속성들의 현시에 앞서, 그 약함은 타자성에 타자성의 자격을 준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이고, 타인의 약함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약함 속에서, 사랑받는 이인 연인이 여명 속에서처럼 몸을 일으킨다.
--- p.386
출판사 리뷰
동일자의 전체성을 넘어 타자의 무한에 응답하라!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긴 현대철학의 고전
1995년 12월 27일,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 독해에 수 세기가 걸리리라고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프랑스와 유럽의 경계를 넘어, 여러 언어로 된 다양한 저작들, 많은 번역서와 강의와 세미나와 학회 등등을 통해, 이 사유의 반향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반성의 흐름을, 그리고 철학에 대한 반성의 흐름을 바꾸리라는 무수한 조짐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을 윤리로, 윤리에 대한 다른 사유로 방향 짓는 것에 관한 숙고입니다. 책임, 정의, 국가 등등에 대한 다른 사유, 그리고 타자에 대한 다른 사유. 이것은 새로운 것들의 새로움보다 더 새롭다고 할 수 있는데요, 타인의 얼굴의 절대적 선행성을 향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크 데리다, 『아듀 레비나스』, 문성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16~17쪽)
여기서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대상이 바로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중요성에 주목하고 최초로 본격적인 논평을 했던 데리다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렇게 역설했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다수의 타자와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지는 오늘날, “철학을 윤리로, 윤리에 대한 다른 사유로 방향 짓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더욱 가치를 조명받으며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레비나스의 초기작 몇 권과 강의록, 인터뷰 소책자 등이 번역되었으나, 레비나스의 이름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체성과 무한』은 정작 번역되지 않아 그의 사상에 다가가고픈 독자들의 갈증이 컸다. 바로 그 책이 2018년 겨울, 그린비출판사 『레비나스 선집』의 세 번째 권으로 출간되어 늦게나마 독자들의 부름에 응답하게 된 것이다.
이 책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 개념들, 이를테면 타자, 전체성, 무한, 초월, 책임, 향유, 맞아들임, 얼굴, 근접성 등이 망라되어 등장하며 또 체계적으로 엮여서 다루어진다. 『전체성과 무한』 이전의 저술들에서는 여기에서야 비로소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격적인 특징을 만나기 어렵고, 이후에 레비나스가 내놓은 책들은 여러 기회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성과 무한』만큼 자체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함뿐만 아니라 그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 『전체성과 무한』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윤리가 존재론에 앞선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우리의 삶이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주체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관계다. 나의 삶은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타자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응답(response)해야 함이 바로 우리의 책임(responsibility)을 이루며, 윤리란 타자와 맺는 이 책임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를 책임으로 놓는다는 것은 타자를 지배나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음을 함축한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는 내게 익숙한 규정으로 파악될 수 없는 ‘다른’ 자이고 한정되지 않는 자이며, 그래서 무한한 자이다. 『전체성과 무한』이 내세우는 ‘무한’은 바로 이 타자의 무한이다.
반면에, 『전체성과 무한』이 문제 삼는 ‘전체성’은 나와 세계를 한정된 틀과 동일한 규정 안에 가두려는 데서 성립한다. 다름과 타자를 배제하고 같음을 통한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보하는 것이 이 전체성의 목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 중심의 서양 철학은 줄곧 이런 시도를 해왔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를테면 니체처럼 고정된 상태를 깨뜨리는 ‘힘을 향한 의지’를 앞세우든, 하이데거처럼 존재자들의 규정에 앞서는 ‘존재’를 앞세우든, 타자에 대한 책임이 아닌 존재론에서 출발하는 철학은 결국 지배를 지향하는 폭력적인 것이 되고 만다.
『전체성과 무한』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철학의, 또 문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전체성을 깨뜨리고 타자의 무한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의가 자유에 앞선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무한하지만 위력적이지 않다. 힘이나 위세는 자기를 확장하려는 동일자가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강하다든가 풍요롭다든가 하는 견지에서 보면 그런 규정을 넘어서 있는 타자는 오히려 약하고 헐벗은 자다.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우리는 이 약하고 헐벗은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는 것,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이것을 정의(正義)라고 부른다.
여기에 비해 자유는 나로부터, 동일성의 질서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참된 자유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므로 자유라는 가치에는 이미 타인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눈으로 보면, 그런 자유도 동등한 권리라는 집단적 동일성의 틀에 갇혀 있다. 자유주의적 자유가 결국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이 같은 한계는 상호적 권리나 조건을 구실로 일정한 경계 너머의 호소를 외면하는 자유주의 세계의 냉혹함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은 우리 삶에서 과연 자유가 타자에 대한 책임보다 근본적인 가치인가를 묻는다. 공정한 거래나 계산에 앞서 약자를 돕는 것이, 그러한 의미의 정의가 더 소중하지 않은가를 묻는다.
향유, 환대, 그리고 평화의 철학
『전체성과 무한』이 윤리적 관계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삶의 원초적 모습을 향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향유한다는 것, 즐긴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과 다르다. 어떤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장악해야 하지만, 즐기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향유는 불안정한 관계다. 향유의 요소들은 우리 밖에 있기에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영속적인 관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런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집을 짓고 울타리를 두르는데, 이 테두리는 동시에 배타적인 자리 잡음의 경계가 된다.
이해관계의 대립은 여기서 생겨난다. 울타리를 치고 담을 쌓음으로써 존재의 자리를 점령하고 독점한 결과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생긴다. 안락함을 주는 나의 집은 다른 이들을 밀어내고 배척하는 장소일 수 있다. 환대는 이런 폐쇄성을 열어젖히고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이는 행위다. 낯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리를 내주는 일이 환대다. 『전체성과 무한』에 등장하는 이 환대 개념은 오늘날에도 난민 문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깊이 있게 조망하는 데 큰 시사를 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평화는 전쟁의 중지를 통해 확보되지 않는다. 이기심과 경쟁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평화에 이를 수 없다. 『전체성과 무한』은 그 평화에 이르는 길이 동일자의 전체성을 넘어 타자의 무한을 향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개념과 테마 들이 엮여 있는 『전체성과 무한』은 결코 한 번 읽고 던져 버릴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데리다의 말처럼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며, 아직도 현대적 논의를 선도하는 책, 우리에게 새롭게 읽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책인 것이다.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긴 현대철학의 고전
1995년 12월 27일,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 독해에 수 세기가 걸리리라고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프랑스와 유럽의 경계를 넘어, 여러 언어로 된 다양한 저작들, 많은 번역서와 강의와 세미나와 학회 등등을 통해, 이 사유의 반향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반성의 흐름을, 그리고 철학에 대한 반성의 흐름을 바꾸리라는 무수한 조짐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을 윤리로, 윤리에 대한 다른 사유로 방향 짓는 것에 관한 숙고입니다. 책임, 정의, 국가 등등에 대한 다른 사유, 그리고 타자에 대한 다른 사유. 이것은 새로운 것들의 새로움보다 더 새롭다고 할 수 있는데요, 타인의 얼굴의 절대적 선행성을 향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크 데리다, 『아듀 레비나스』, 문성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16~17쪽)
여기서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대상이 바로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중요성에 주목하고 최초로 본격적인 논평을 했던 데리다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렇게 역설했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다수의 타자와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지는 오늘날, “철학을 윤리로, 윤리에 대한 다른 사유로 방향 짓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더욱 가치를 조명받으며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레비나스의 초기작 몇 권과 강의록, 인터뷰 소책자 등이 번역되었으나, 레비나스의 이름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체성과 무한』은 정작 번역되지 않아 그의 사상에 다가가고픈 독자들의 갈증이 컸다. 바로 그 책이 2018년 겨울, 그린비출판사 『레비나스 선집』의 세 번째 권으로 출간되어 늦게나마 독자들의 부름에 응답하게 된 것이다.
이 책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 개념들, 이를테면 타자, 전체성, 무한, 초월, 책임, 향유, 맞아들임, 얼굴, 근접성 등이 망라되어 등장하며 또 체계적으로 엮여서 다루어진다. 『전체성과 무한』 이전의 저술들에서는 여기에서야 비로소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격적인 특징을 만나기 어렵고, 이후에 레비나스가 내놓은 책들은 여러 기회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성과 무한』만큼 자체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함뿐만 아니라 그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 『전체성과 무한』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윤리가 존재론에 앞선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우리의 삶이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주체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관계다. 나의 삶은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타자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응답(response)해야 함이 바로 우리의 책임(responsibility)을 이루며, 윤리란 타자와 맺는 이 책임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를 책임으로 놓는다는 것은 타자를 지배나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음을 함축한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는 내게 익숙한 규정으로 파악될 수 없는 ‘다른’ 자이고 한정되지 않는 자이며, 그래서 무한한 자이다. 『전체성과 무한』이 내세우는 ‘무한’은 바로 이 타자의 무한이다.
반면에, 『전체성과 무한』이 문제 삼는 ‘전체성’은 나와 세계를 한정된 틀과 동일한 규정 안에 가두려는 데서 성립한다. 다름과 타자를 배제하고 같음을 통한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보하는 것이 이 전체성의 목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 중심의 서양 철학은 줄곧 이런 시도를 해왔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를테면 니체처럼 고정된 상태를 깨뜨리는 ‘힘을 향한 의지’를 앞세우든, 하이데거처럼 존재자들의 규정에 앞서는 ‘존재’를 앞세우든, 타자에 대한 책임이 아닌 존재론에서 출발하는 철학은 결국 지배를 지향하는 폭력적인 것이 되고 만다.
『전체성과 무한』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철학의, 또 문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전체성을 깨뜨리고 타자의 무한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의가 자유에 앞선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무한하지만 위력적이지 않다. 힘이나 위세는 자기를 확장하려는 동일자가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강하다든가 풍요롭다든가 하는 견지에서 보면 그런 규정을 넘어서 있는 타자는 오히려 약하고 헐벗은 자다.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우리는 이 약하고 헐벗은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는 것,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이것을 정의(正義)라고 부른다.
여기에 비해 자유는 나로부터, 동일성의 질서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참된 자유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므로 자유라는 가치에는 이미 타인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눈으로 보면, 그런 자유도 동등한 권리라는 집단적 동일성의 틀에 갇혀 있다. 자유주의적 자유가 결국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이 같은 한계는 상호적 권리나 조건을 구실로 일정한 경계 너머의 호소를 외면하는 자유주의 세계의 냉혹함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은 우리 삶에서 과연 자유가 타자에 대한 책임보다 근본적인 가치인가를 묻는다. 공정한 거래나 계산에 앞서 약자를 돕는 것이, 그러한 의미의 정의가 더 소중하지 않은가를 묻는다.
향유, 환대, 그리고 평화의 철학
『전체성과 무한』이 윤리적 관계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삶의 원초적 모습을 향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향유한다는 것, 즐긴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과 다르다. 어떤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장악해야 하지만, 즐기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향유는 불안정한 관계다. 향유의 요소들은 우리 밖에 있기에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영속적인 관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런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집을 짓고 울타리를 두르는데, 이 테두리는 동시에 배타적인 자리 잡음의 경계가 된다.
이해관계의 대립은 여기서 생겨난다. 울타리를 치고 담을 쌓음으로써 존재의 자리를 점령하고 독점한 결과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생긴다. 안락함을 주는 나의 집은 다른 이들을 밀어내고 배척하는 장소일 수 있다. 환대는 이런 폐쇄성을 열어젖히고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이는 행위다. 낯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리를 내주는 일이 환대다. 『전체성과 무한』에 등장하는 이 환대 개념은 오늘날에도 난민 문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깊이 있게 조망하는 데 큰 시사를 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평화는 전쟁의 중지를 통해 확보되지 않는다. 이기심과 경쟁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평화에 이를 수 없다. 『전체성과 무한』은 그 평화에 이르는 길이 동일자의 전체성을 넘어 타자의 무한을 향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개념과 테마 들이 엮여 있는 『전체성과 무한』은 결코 한 번 읽고 던져 버릴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데리다의 말처럼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며, 아직도 현대적 논의를 선도하는 책, 우리에게 새롭게 읽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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