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서양철학의 이해 (독서>책소개)/4.서양철학이해

카페에서 읽는 서양사상 (2024) - 마음 근육을 키우는 하루 10분 인문 독서!

동방박사님 2024. 5. 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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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강// 습관은 제2의 천성

제2강//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성적이다

제3강// 재능이 끝나면 형식이 시작된다

부록// 동서양 철학사 요약

제1장 · 고대
제2장 · 중세
제3장 · 근대

저자 소개

저 : 리소정
 
저술가. 문사철의 고전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자기 계발을 꾀하는 이야기 그룹 ‘금요일의 인문학’을 이끌고 있다. 엮은 책으로 《카페에서 만난 동양철학》 《카페에서 만난 서양사상》 《카페에서 만난 동양고사》 《카페에서 만난 서양고사》 《카페에서 만난 명심보감》 《카페에서 만난 지혜의 말》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습관은 제2의 천성”

이 말은 통 속의 철학자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큐니크파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집 대신 통 속에서 생활했는데, 큐니크란 말은 그리스 말의 큐니코스(개와 같은)에서 나온 말이며, 이 말은 견유파(犬儒派)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습관 형식 등을 가치 없는 것으로 경멸하며, 역문명적(逆文明的), 역사회적(逆社會的)인, 말하자면 개와 같은 원시적 생활을 실행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은 디오게네스가 했다고 하는데, 습관의 구속력이 얼마나 강하며 무의미한지를 찌른 말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자랑스러운 일이나 권위 있는 것들이 웃기는 착각에 불과했다.
--- p.9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의 대명사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말 많은 심술꾸러기였다. 소크라테스 같은 현철한 사람이 왜 그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지 의심이 가는데, 그 자신은 그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술에 능숙해지려고 하는 자는 막된 말을 선택한다. 막된 말을 다룰 수 있으면, 다른 여느 말을 타기는 매우 수월하다. 내가 이 여성을 능히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없을 것 아닌가.”

또 어떤 사람이,

“용케도 부인의 잔소리를 참아 넘기십니다.”
하고 일변 동정하며 말했더니,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자꾸 들으면 시끄럽지 않지.”
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악담 끝에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가 물을 뒤집어씌운 일은 잘 알려진 이야긴데,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고 말한 것은 악처의 악행을 자기 수양의 기틀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매미의 남편은 행복하다.”
는 속담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매미는 수놈이 울고, 암놈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관찰은 생물학적으로는 정당했다. 그리스에는 매미가 많았고, 그리스 사람들은 그 우는 소리를 좋아했고, 자주 시로 읊고 있다. 매미 남편도 가졌던 행복을, 소크라테스 한 사람만이 갖지 못했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매미의 남편은 행복하다」중에서

그리스 전역을 정복하고 그 힘을 과시하고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통 속의 철학자로 알려진 디오게네스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 보려고 했다. 디오게네스가 왕이 오라는데도 응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대왕이 그를 찾아갔다. 디오게네스는 이때 통 속에 있었다. 아마 볕을 쪼이며 이나 벼룩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알렉산드로스인데, 당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고 말을 건넸다.
“비켜 주시오. 그늘이 집니다.”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왕은 혼자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저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플라톤도 세속적인 영예를 배제하고 무시하는 점에서는 디오게네스와 같았다. 플라톤은 인간을,
“몸에 날개가 없고, 두 다리로 걷는 동물이다.”
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은 이 정의의 심각함에 놀랐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디오게네스는 한 마리의 닭을 잡아 털을 뽑아 플라톤의 찬미자들 앞에다 내던졌다.

“이게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이란 물건이다.”

큐니크파 사람들의 세상을 등진 태도는 어딘지 동양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서양 문화의 본류는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인 인간 긍정에 기조를 둔 문명 중심주의였다.
---「몸에 날개가 없고, 두 다리로 걷는 동물」중에서

16세기 초 폴란드 태생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를 관측한 결과, 지구는 하나의 둥근 형태를 갖춘 천체의 한 덩어리이며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다는 소위 지동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원래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 그리스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대체로 그럴 것이라는 추정을 내리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확립되자 교회는 그러한 학설을 이단이라고 부정하고, 지구는 우주의 확고한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주장해 왔다.

만약 지동설을 인정한다면, 소박한 우주관에 입각한 성경의 가르침 대부분이 뒤집히며, 나아가서는 교회의 권위가 뒤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동설이 정당하다는 것에 확신을 품고는 있었으나, 자기의 주장을 공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3년에 이르러 친구의 권유도 있고 해서 ‘천체의 운행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때도 논문의 첫머리에 교황 바울 3세에게 다음과 같은 헌사를 붙였다.

“저는 조물주가 우리들을 위하여 만드신 우주에 대하여 종래의 학설이 충분치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옛날 문헌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파의 철학자들이 지동설을 창조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천체 현상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여러 면으로 상상하는 것이 자연 용서될 줄 알았으므로 저도 지동설의 입장에서 수년 동안에 걸쳐 연구를 쌓아 보았더니 천체의 운행이 더 이론적으로 해명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헌사는 교황청의 눈치를 살펴 가며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운 말로 쓰여 있다. 그 태도는 복종적이었으나, 어차피 그는 자기가 확신하는 지동설을 내세웠던 것이다. 교황은 헌사 속에 교회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자세를 보고 만족했는지 코페르니쿠스는 아무런 탄압도 받지 않고 그의 생애를 평온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 논문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매우 조용한 가운데 결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세계관에 180도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회전」중에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성적이다.”

철학자 헤겔의 말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법철학강요〉에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것은 그것이 이성적이다’라는 문장을 바꿔서 요약한 것이다.

헤겔이란 사람이 얼마나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고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일화가 있다. 헤겔이 서재에서 연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하는 사람이 뛰어들었다.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헤겔은 잠시 멍한 얼굴로 일꾼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머리를 휘저으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아주머니에게 하게. 자네는 내가 집안일에는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면서 침착한 태도로 책상을 향한 채 사색을 계속했다고 전한다. 헤겔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나의 제자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나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 p.68

엘리자베스 시대의 궁정 신하이며, 군인이자 문필가이기도 했던 월터 롤리는 동부 데본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는데, 17세 때 프랑스 신교도를 구원할 의용군에게 가담하였고, 또 1580년에는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시원스러운 태도로 처녀 왕 엘리자베스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

그가 이복형 길버트를 따라 북아메리카로 탐험하러 가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버지니아(처녀지)로 정한 것도 여왕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었다. 그때 본국으로 감자와 담배를 가져온 것도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수는 데 크게 공을 세웠고, 기니아를 탐험하여 그곳에 금은재보가 많음을 보고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는데, 나중에는 도리어 여왕의 비위를 건드리게 되었다.

그의 말년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다. 여왕이 죽은 뒤 제임스 왕으로부터 반역의 혐의를 받고 12년 동안이나 런던탑 속에 갇히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에 〈세계사〉를 써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왕의 명령으로 남아메리카로 전설적인 황금 지대 엘도라도를 찾아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그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왕의 불신은 더해 갔으며, 드디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가 처형된 곳은 올드 파레스 현장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도 힘닿는 데까지 손을 써서 구명을 탄원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과연 풍운아다운 행동을 보여 주었다. 그는 사형 집행인이 들고 있는 도끼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극약이지만, 약효는 확실하겠군!”

일대의 풍운아이자 모험가였던 그에게 걸맞은 최후라고 할까.
---「극약이지만 약효는 확실하다」중에서

아메리카 독립전쟁 당시 1775년 버지니아의 지사 헨리(Henry, Patrick 1736~1799)가 그 지방 대의원회에서 한 연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치 독립을 열망하는 북미 각주의 저항과 이를 저지하여 본국을 이롭게 하려는 영국군과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발전할 운명에 있었다.

당시 각 주는 영국의 기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데 있어 적극적인 그룹과 비교적 소극적인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때 정세는 남쪽 버지니아 식민지도 그 태도를 분명하게 해야 할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이때 헨리는 간청이나 타협으로 이야기할 시기는 이미 지났으며, 이젠 오로지 무기를 들고 분기하여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길밖에는 없다고 외쳤다.

“…사태를 가볍게 넘기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를 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눈앞에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북쪽에서 불어치는 다음의 바람은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를 우리의 귀에 전할 것입니다. 우리 동포는 이미 전지에 나서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팔짱만 끼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귀하고, 평화는 달콤하고, 쇠사슬에 묶여 노예가 되어도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르나, 여기 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거든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중에서

프랑스의 국가(國歌)는 ‘라 마르세예즈’라고 불린다. 그 뜻은 ‘마르세유의 노래’인데, 여기서 마르세유는 프랑스 남쪽 론강 어귀에서 동쪽으로 40km 거리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무역항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국가가 어떻게 일개 지명으로 표시되어 있는가.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1792년에 들어서자, 프랑스 국내는 대혁명으로 인해 분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의 왕실을 옹호하려고 떠들썩했다.

의회는 국왕 루이 16세를 압박하여 오스트리아에 선전을 포고하게 했다. 이때 북프랑스의 도시 스트라스부르에 공병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부대 안에 루제 드 릴이라는 젊은 장교가 있었다. 그는 시를 짓고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때마침 이 지방에서는 의용군 일대대가 출발하게 되었는데, 시장이 그 공병 장교에게 출정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새로운 군가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루제 드 릴은 별실로 들어가서 하룻밤 사이에 지금의 ‘라 마르세유의 노래’를 만들어 냈다. 그 당시의 제목은 ‘라인군의 군가’였다.

이튿날 아침, 극장의 전속 가수가 이 노래를 연습하여 정오가 되어 광장에 모인 출정 병사 6백 명 앞에서 처음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노래에 감격한 의용군은 금방 9백 명으로 불어났다.

‘라인군의 군가’는 바람과 같이 부대에서 부대로 퍼졌으며, 8월 10일 루이 16세가 왕위를 물러나던 날, 궁정을 향해 상경해 온 마르세유의 의용부대가 처음으로 소리 높이 그 노래를 부르며, 샹젤리제의 큰 거리를 행진했다. 그리고 파리시에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파리의 시민들은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들었으므로, ‘마르세유 사람의 군가’라고 했고, 이것이 ‘라 마르세예즈’가 된 것이다.
---「라 마르세유의 유래」중에서

프랑스 19세기의 역사가이며 동시에 혁신적인 정치가이던 아돌프 체루(1797~1877)의 말이다.

1830년에 자기 손으로 창간했던 기관지 ‘내셔널’의 2월 4일 호에 그는 국왕은 왕국의 최고 관리가 아니며, 대신을 임명하는 권리는 국회가 갖고 대신은 국왕 마음대로 뽑을 수 없도록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왕은 지배하지 않으며, 통치하지 않으며, 군림할 뿐이다. 대신은 지배하고 통치한다. 대신은 자기에게 반대하는 한 사람의 부하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국왕은 자기와 의사가 다른 대신을 가질 수 있다. 국왕은 지배하지 않으며, 통치하지 않으며, 군림할 뿐이다.”

체루는 국왕의 전통적인 전제 주권을 거세하려고 한 것인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왕당파나 보수파 정치가들의 맹렬한 반박과 반대를 받았다.

“국왕을 하나의 기계로 만들자는 것인데, 국왕도 인격 있는 존재임을 잊고 있다.”
라는 반박 의견도 있었다.

당시의 검찰 총장도 이 말은 ‘국왕을 무력화하려는 음모’라고 갈파했다.

전제군주 정치는 결국 자유주의의 물결에 쓸려 체루의 말대로 왕권은 거세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체루가 처음 한 말은 아니다. 1605년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가 국회에서 왕권을 상징화하자고 말했고, 체루는 그 말을 인용했던 것이다.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중에서

“후란스핼스를 보면 그림이 그리고 싶어지는데, 렘브란트를 보면 그만두고 싶어지거든.”

독일의 화가 라이베르만(1847~1935)은 렘브란트를 곧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가 전람회장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젊은 화가 한 사람이 물었다.

“선생께선 이 그림을 단단한 연필로 그렸습니까, 아니면 연한 연필로 그렸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보게, 그건 오로지 재능으로 그린 것이야.”

또 다른 전람회에서 몇 폭의 그림을 두고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 속에 ‘형식’이란 말이 나오자, 그가 입을 열었다.

“재능이 끝나면 형식이 시작되는 법이지.”

한때는 재능에 따라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지만, 재능의 샘이 고갈하기 시작할 때는, 즉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되면 작가는 내용보다 형식미에 치중하게 된다는 뜻인데, 이같이 라이베르만은 즉석에서 곧잘 함축성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재능이 끝나면 형식이 시작된다」중에서

아프리카 탐험으로 유명한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했으므로 독학으로 기초 교육을 마치고, 글래스고대학에 입학하여 의학과 신학을 이수했다. 졸업 후 런던 전도교회의 의료전도사가 되어 1841년에 아프리카 남부 전도를 위해 길을 떠났다.

1849년부터 아프리카의 깊은 골짜기를 탐험하기 시작했는데, 칼라하리 사막을 넘어 느가미 호수에 이르러 잠베지강 상류를 탐색하고, 1855년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라는 책을 냈다. 1858년에서 1863년에 걸쳐 또다시 탐험 여행에 나섰으며, 1864년에 귀국하여 〈잠베지강과 그 지류 탐험기〉를 저술했다.

1866년 왕립지리협회의 의뢰로 잠베지와 나일강 수원지의 탐험을 계획했는데, 그 뒤 한 5년간 전혀 소식이 끊겨 생사가 의심되었다. 그러다 1871년에 이르러 미국의 탐험가 스탠리 일행에 의해 탕가니카호반 우지지 부근에서 늙은 백인으로 발견되었다. 스탠리가 가까이 가서,

“리빙스턴 박사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빙스턴은 스탠리와 헤어지고, 1873년 병에 걸려 뱅귀울루 호에서 죽었다. 영국 정부는 리빙스턴이 암흑대륙의 전도 사업과 탐험에 바친 공적을 찬양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유해를 묻었다. 잠베지강 변에는 그의 이름을 쓴 동네가 있고, 박물관에는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리빙스턴은 소위 암흑대륙과 관계를 맺은, 유럽 사람 가운데에 가장 인도적이고 양심적인 타입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도 백인 우월의식은 있었으나, 기독교적 인도주의 입장에서 원주민의 구제를 생각했고, 결국 그 사명을 위해서 생애를 바쳤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닙니까(Dr. Livingstone, I presume?)?’라는 말은,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뜻하지 않게 오래간만에 만났거나, 오랫동안 찾던 사람을 갑자기 만났을 때 쓰이는 표현이다. 우리말에 속된 표현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군?’ 하는 말과 같은 뜻이지만, 품위를 갖춘 말이다.
---「리빙스턴 박사 아닙니까?」중에서

‘보이콧’이라는 말은 보통 노동자가 단결해서 자본가와의 관계를 끊는다든지, 혹은 소비자가 단결해서 상품을 사지 않는 불매운동 등을 의미할 때 쓰이는 말인데, 그 밖에도 광범위하게 쓰여 독일어, 프랑스어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말에 흡수되었다.

이 말은 1880년 아일랜드의 소작인들로부터 배척당한 지주의 마름 보이콧(1832~1897)이라는 인물의 이름에서 생긴 것이다. 육군 대위의 이력을 가진 이 마름은 사람 됨됨이가 몹시 짜고 인색해 농민 중 누구 하나도 그를 좋게 보는 사람이 없어서 배척당했다고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업자들 간에도 그와의 모든 거래를 끊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의 보이콧이란 말의 유래이다.
---「보이콧」중에서

출판사 리뷰

지금, 왜 다시 철학이 필요한가?

첫째, 삶과 세계의 관계 맺음과 문제 해결의 잣대―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며, 이로써 우리의 삶과 세계를 더 잘 관계 맺을 수 있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직면한 다양한 도전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철학은 그 해결책의 잣대가 된다.

둘째, 철학적 논리와 비판적 사유의 필요성―

철학은 개인이 개인의 삶과 가치관을 깊이 성찰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또, 비판적 사고를 통해 잘못된 믿음의 근원을 찾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동력을 가져다준다.

셋째, 인간 정신의 무한한 가능 세계로 나아가는 마중물―

서양철학은 논리적 논증과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며, 과학적 방법론과 객관적 지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예술가와 정치가, 과학자들의 일화를 통해 서양사상의 흐름을 읽는다!

“카페에서 읽는” 시리즈에 걸맞게 다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서양사상의 요목들을 모아 예화를 통해 가볍고 편안히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함으로써 남녀노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부록으로 동서양 철학사를 요약해 게재함으로써 서양사상과 동양철학의 흐름과 차이를 일별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