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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올해로 120주년을 맞이하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라고 하는 ‘1871년 영해 동학혁명’의 전말을 조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 동학의 역사에서의 위상, 그 주동자인 이필제의 생애와 사상 등을 조명한 책이며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동학총서 제1권이다.
목차
조선후기 향촌사회 지배구조와 영해지방의 동학 변혁운동 - 이이화
1871년 영해 동학혁명의 사료와 자취 - 김기현
초기 동학 교단과 영해지역의 동학 - 성주현
혁명가 이필제의 생애와 영해 - 임형진
1894년 영남의 동학농민군과 동남부 일대의 상황 - 신영우
이필제와 최시형 - 임상욱
영해 동학혁명과 해월의 삶에 나타난 사인여천 사상 - 김영철
동학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인문학적 기반 연구 - 조극훈
1871년 영해 동학혁명의 사료와 자취 - 김기현
초기 동학 교단과 영해지역의 동학 - 성주현
혁명가 이필제의 생애와 영해 - 임형진
1894년 영남의 동학농민군과 동남부 일대의 상황 - 신영우
이필제와 최시형 - 임상욱
영해 동학혁명과 해월의 삶에 나타난 사인여천 사상 - 김영철
동학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인문학적 기반 연구 - 조극훈
출판사 리뷰
동학혁명의 시발점, 1871년 3월 ‘영해 동학혁명’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
영해의 ‘동학혁명’과 해월 최시형
영해와 동학, 그리고 이필제
영해(寧海)는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되어 1862년 12월 수운이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할 때 접소(接所)를 설치했던 지역이다. 1863년부터 수운이 처형당할 때까지 경주 등과 함께 동학교세가 가장 큰 지역이었다. 그리고 영해(寧海) 지역의 동학교인들은 현실 비판과 인간 존중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곧 영해 동학혁명의 리더였던 이필제의 사상적 성향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필제의 신분이 몰락양반이고, 그로 인해 당시 봉건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필제, 개벽을 꿈꾼 변혁운동 전문가
이필제는 영해 동학혁명 이전에도 여러 차례 민란을 주도했고, 영해 동학혁명 이후에도 문경작변을 도모했다. 한마디로 이필제는 ‘변혁운동’ 전문가이다. 그 가운데 영해 동학혁명은 유일하게 일시적이나마 성공을 거둔 운동이었다. 이는 동학교단과 동학교도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해 동학혁명은 그 시기를 전후한 일반적인 민란과는 다른 형태와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민란이 1개 군을 넘지 못하는 지역적 한계 속에 스스로를 위치 지우는 것과는 달리 경상도 전역에서 참여자를 모집하고, 또한 영해 관아 점거 후 이웃 고을까지 도모해 나간 것은 일반적인 민란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영해 동학혁명, 신향과 구향의 한판 맞대결
영해 동학혁명의 또 하나의 의의는 기존 지배체제의 핵을 이루고 있던 구향(舊鄕)에 대항하여 새롭게 성장하던 계층인 신향(新鄕)들이 동학이라는 사상적 뒷받침에 의거한 의식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사회의 주류 세력 교체를 도모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해 동학혁명의 전국적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영해 동학혁명 또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히 빈곤에 지친 농민들의 ‘빈민투쟁’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이며 지배세력 교체를 염두에 둔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영해 동학혁명 이후 해월의 삶과 사상
영해 동학혁명은 동학의 교주인 해월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해 동학혁명 이후 해월의 사상은 한마디로 사인여천을 실천하는 태도를 더욱 공고하게 동학 활동의 중심에 세워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월은 영해 동학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수운의 가르침인 시천주에 대한 이론적인 설법을 행하기보다는 영해 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일반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여 자신에 내재하는 한울님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들과 만물을 공경하는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이 해월이 생각한 본질적인 사회변혁운동의 방법이었고, 동학적인 혁명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영해의 ‘동학혁명’과 해월 최시형
영해와 동학, 그리고 이필제
영해(寧海)는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되어 1862년 12월 수운이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할 때 접소(接所)를 설치했던 지역이다. 1863년부터 수운이 처형당할 때까지 경주 등과 함께 동학교세가 가장 큰 지역이었다. 그리고 영해(寧海) 지역의 동학교인들은 현실 비판과 인간 존중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곧 영해 동학혁명의 리더였던 이필제의 사상적 성향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필제의 신분이 몰락양반이고, 그로 인해 당시 봉건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필제, 개벽을 꿈꾼 변혁운동 전문가
이필제는 영해 동학혁명 이전에도 여러 차례 민란을 주도했고, 영해 동학혁명 이후에도 문경작변을 도모했다. 한마디로 이필제는 ‘변혁운동’ 전문가이다. 그 가운데 영해 동학혁명은 유일하게 일시적이나마 성공을 거둔 운동이었다. 이는 동학교단과 동학교도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해 동학혁명은 그 시기를 전후한 일반적인 민란과는 다른 형태와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민란이 1개 군을 넘지 못하는 지역적 한계 속에 스스로를 위치 지우는 것과는 달리 경상도 전역에서 참여자를 모집하고, 또한 영해 관아 점거 후 이웃 고을까지 도모해 나간 것은 일반적인 민란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영해 동학혁명, 신향과 구향의 한판 맞대결
영해 동학혁명의 또 하나의 의의는 기존 지배체제의 핵을 이루고 있던 구향(舊鄕)에 대항하여 새롭게 성장하던 계층인 신향(新鄕)들이 동학이라는 사상적 뒷받침에 의거한 의식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사회의 주류 세력 교체를 도모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해 동학혁명의 전국적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영해 동학혁명 또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히 빈곤에 지친 농민들의 ‘빈민투쟁’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이며 지배세력 교체를 염두에 둔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영해 동학혁명 이후 해월의 삶과 사상
영해 동학혁명은 동학의 교주인 해월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해 동학혁명 이후 해월의 사상은 한마디로 사인여천을 실천하는 태도를 더욱 공고하게 동학 활동의 중심에 세워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월은 영해 동학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수운의 가르침인 시천주에 대한 이론적인 설법을 행하기보다는 영해 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일반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여 자신에 내재하는 한울님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들과 만물을 공경하는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이 해월이 생각한 본질적인 사회변혁운동의 방법이었고, 동학적인 혁명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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