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한일관계사 연구 (전공분야>책소개)/2.한일역사갈등

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 위안부,야스쿠니,독도

동방박사님 2022. 7. 29.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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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거꾸로 가는 한일 관계

2015년은 해방 70주년, 한일협정 50주년이 되는 해다. 이처럼 의미 있는 해에 개정증보판으로 나온 이 책은 정확히 10년 전, 해방 60주년, 한일협정 40주년이 되는 2005년, ‘한일 우정의 해’에 나왔던 책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올해,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나온 이유는 해방 70년, 한일협정 50년임에도 한일관계는 의미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쌓아왔던 화해의 분위기는 많은 부분 퇴색되고 정치인의 선정적인 발언에 휘둘려 화해는 한일 국민 간 대결과 상대방 비난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일본의 혐한시위와 한국의 『제국의 위안부』 소송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전해주는 양국의 현상이다.

이 책은 말한다. 국가와 국가, 특히 이웃 국가 간의 화해와 평화는 상대방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화해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과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꺾어야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획득한, 싸움으로 얻은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는 화해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폭력’일 뿐이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상태와 주장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후 이해하고 조정하고 공유할 부분은 증폭시켜 화해로 평화로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식민지 경험에 막혀, 이를 핑계로 아직 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를 원한다면 한국의 시민사회는 알아야 한다. 일본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는 얼마나 다양한 생각과 사람들이 존재하는지를.

 

목차


『화해를 위해서』를 다시 내면서

1장 교과서 -‘긍지’에서 ‘책임’으로
1990년대 이후의 일본의 ‘반성’과 새역모
반성하는 전후 일본
새역모의 불만
한일 양측 대응의 문제점
‘사실’과 윤리
새역모와 민주주의
‘애국심’을 넘어

2장 위안부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위안부는 없었’나
일본 정부의 대응과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
‘도의적 책임’의 한계와 평가
한국의 불신
우리 안의 책임
우리 안의 가해성
‘국가’를 넘어서

3장 야스쿠니 -‘사죄’하는 참배
고이즈미 수상의 ‘반전’ 의지
야스쿠니와 전후 일본
피해 의식으로서의 야스쿠니 지지
‘국가를 위한 죽음’에 대한 추모
한국의 모순, 국립묘지
피해자로서의 군인
‘사죄’하는 추모

4장 독도 -다시 경계민의 사고를
두 개의 독도 이야기(1) -근대 이전
소유의 정치학-이름·일탈·식민지
두 개의 독도 이야기(2) -근대 초기
영토 확장의 욕망과 근대
두 개의 독도 이야기(3) -해방 후
미국이라는 팩트
경계심과 표상
시마네 현과 독도
경계민의 사고를 위해
독도의 주인은 누구인가
소통하는 경계

5장 화해를 위해서
근대가 야기시킨 네 가지 문제
본질주의를 넘어
새로운 비판을 위해
한일협정과 일본의 선택
냉전 구도 속의 한국과 일본
‘국민’을 넘어서

독도 보론 -냉전과 독도 체제
현황
‘과거’의 기억
독도와 냉전

나오면서
전자책을 내면서
들어가면서(초판 서문)
서평 _적대적 이분법을 넘어서 윤리적으로 사유하기 |정승원

 

저자 소개

저 : 박유하
 
박유하는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고교 졸업 후 도일, 일본 게이오 대학과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일본 근대문학과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세종대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를 기획, 편집하고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를 번역하는 등 근현대 일본 문학과 사상을 소개하는 작업과 함께, 민족제국젠더에 대한 관심...
 

책 속으로

그동안 한국에서 어떤 문제든 늘 ‘반성 없는 일본’으로 이어지기 쉬웠던 이유 중에는 일본 우파의 발언과 행동의 배경에 일본의 전후 교육과 교과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이 있다. 물론 패전 후에도 정말은 전쟁 책임을 져야 할 천황제가 유지되었고 보수 자민당 체제가 바뀌지 않았으며 이른바 ‘전범’ 출신이 정치체제에 깊숙이 다시 포진되었고 여전히 재일교포는 차별받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전후의 일본과 전전의 일본의 ‘단절’에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의구심이 그동안 별문제 없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전후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나카노, 박유하 등). 그러나 그러한 그들,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낳은 것 역시 다름 아닌 전후 일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다수인 것이 분명한 이상, 일본이 전후에 지
향했던 ‘새로운’ 일본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반성 없는 일본’이라는 대전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교과서 ?‘긍지’에서 ‘책임’으로」중에서

정대협 관계자가 돈을 수령한 이들을 두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동정금을 받으면 피해자는 자원해나간 공창이 된다”(윤정옥, 1997년 2월의 시민연대 주최 국제 세미나)고 비난했다는 것은, 위안부를 지원하는 이들에게조차 위안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어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기금을 ‘돈 때문에 받’았다고 비난한 일은 과거에 실제로 ‘돈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판 처참한 경험이 있는 그들을 두 번 울린 일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들이 ‘돈 때문에’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난할 자격이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러한 정대협의 단정은, 억압받는 하위 계층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늘 상위 계층이라며 “서벌턴(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스피박(G. Spivak)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위안부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중에서

‘야스쿠니(靖國)’란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평안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평안이란 무엇보다 일상의 지속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면, 국가는 무엇보다도 편안한 일상과 행복 추구의 권리를 만족시키는 의무를 지닌다. 전쟁은 그 어떤 정의의 전쟁일지라도 일상을 파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야스쿠니신사가 진정으로 국가의 평안을 생각하는 장소가 되려면 국가에 몸 바치는 일이 정말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케 하는 장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전사자들의 죽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야스쿠니 참배 문제는 장소를 바꾼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야스쿠니 ?‘사죄’하는 참배」중에서

국경은 민족과 언어에 바탕을 둔 혈연적?문화적 경계와 함께 강이나 산맥을 통한 자연적 경계를 기반으로 해서 그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기 위한 경계가 아니라 소통하기 위한 경계가 되어야 한다. 경계는 넘어가 만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선이라야 한다. 만나는 시간보다 만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아서 말하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즐겁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경계여야 한다. 경계 내부의 구성원만을 위한 이기적 경계라면, 그런 담을 쌓는 경계라면, 장래의 반목과 불화만을 잉태하고 있는 그런 경계라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다.
전쟁을 하면서까지, 즉 평화를 훼손하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 영토란 없다. 설령 그곳에서 엄청난 가스가 나온다 하더라도 혹은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힌다 하더라도, 나아가 외화를 벌어들일 엄청난 관광자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독도가 낳을 수 있는 최상의 가치는 한일 간의 평화다.
---「독도 ?다시 경계민의 사고를」중에서

한일이 함께 싸워야 할 것은 단일한 주체로 상상되는 ‘일본’이거나 ‘한국’이 아니라 각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전쟁을 열망하는 폭력적인 감성(고바야시 요시노리)과 군사 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전쟁에 대해 사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식의 전쟁에의 욕망(니시오 간지) 쪽이다. 폭력적 사고와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배타적 민족주의 담론에 함께 저항할 수 있을 때 한일 간의 ‘우정’은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공포는 경계심과 폭력을 부른다.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한일 양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의 아픔에 대해 좀 더 아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한일의 젊은이들이, 폭력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전쟁을 용인하는 민족주의적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에 대항해 함께 그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날, 자신들의 행복한 일상과 사적 관계를 깨버리고 말, 그래서 그들의 인생을 온통 망가뜨리고 말 국가의 부름을 인터넷을 통해 거부할 수 있는 신뢰 관계가 만들어지는 날, 상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폭력적 사고를 거부하는 촛불 시위가 한일 간에 가능한 날, 그날, 우리는 100년 전의 잘못된 시작이 남긴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100년을 준비할 수 있다.
---「화해를 위해서」중에서

그런 의미에서도 독도 문제는 일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근대 국민국가 시대에 먼저 ‘편입’한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물론한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국주의 시대에 빼앗긴 그저 ‘역사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냉전이 임계점을 넘어 열전(熱?)이 된 시대에 한국을 서방 측에 남겨두기 위해 전쟁의 주역이기도 했던 미국의 의사에 따라 애매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남긴 ‘냉전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경계’에 실제로 사는 이들이 아니라 ‘중심’에 존재하는 ‘권력’이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경계’를 일찍이 미국이 결정했고(물론 승전국으로서 그랬지만 사실, 미국은일본의 한국 병합도 인정한 나라였다), 현재도 여전히 한일 양국이 미국을 향해 자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그 증거 중 하나다.
---「독도 보론 -냉전과 독도 체제」중에서
 

출판사 리뷰

모르는 것은 ‘약’이 아니라, ‘죄’!

21세기 한국인은 한일 관계의 악화를 더 이상 정치인이나 정부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국가 간 화해와 평화는 외교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외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과 마주하는 것이므로 이해가 첨예하게 상충되면 결국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한일 간 화해와 평화는 시민 차원의 다양한 교류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 사회는 상대방의 이해를 통한 교류에 나서기보다는 극단적인 정치인들에 기댄 결과 일본 비난으로 치달아온 것도 사실이다. 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상대방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모르는 데서 나온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시민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일본을, 한일 간 첨예하게 부닥치는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문제를 통해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당연시해왔던 생각과 관점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출발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간으로서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한일 관계를 바라보고 화해와 평화를 모색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연구만 하는 학술서가 아니라, 한일 관계의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는 ‘실용서’다. 비록 그 목소리는 작을지라도 한국 시민 사회의 독자들이 이 책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책의 작은 목소리가 독자라는 스피커를 통해 큰 목소리로 울려 퍼질 때, 이 책은 비로소 실용서가 아닌 ‘학술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말한다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일본에서 상 주면 ‘친일’이라는 오해를 불러 역효과를 낳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우려도 논의했다. 그러나 이 책은 일본의 우익적 언론도 매섭게 비판하고 있고 한국 신문 등에는 설득력이 있다는 서평이 실렸다. 게다가 우익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아사히신문]사에서 상을 받는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도 한때 ‘다케시마를 한국에 양보해 우정의 섬으로 한다’라는 ‘몽상(夢想)’을 [아사히신문] 칼럼에 쓴 적이 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우익에게 “매국노”라고 공격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지만 내 생각엔 나보다 박 교수가 훨씬 용기 있다. 무엇보다 한일 관계에 관한 한 자유로운 주장을 펼칠 여지가 한국에서는 훨씬 좁기 때문이다.
― 와카미야 요시부미 | [아사히신문] 전 주필

박유하 씨의 저서는 학문적 수준도 높고 시사 문제의 해설로서도 균형이 잡혀있다. 게다가 읽기 쉬운 문장으로 쓰인 보기 드문 수작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오해와 무지 또는 감정적 대립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논의의 전개를 위해 역사 문헌과 여론조사 등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책이 한일 양국에서 출판됐다는 것은 한일 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뻐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은 또한 세계 각지의 국가 간 또는 민족 간의 분쟁을 극복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