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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선사,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자!
『밖에서 본 한국사』,『뉴라이트 비판』 등의 전작으로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한 저자가 이번에는 조선사를 다룬다.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허망하게 망한 나라인 동시에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버틴 생명력 강한 왕조이다. 도대체 조선은 왜 망했을까. 저자는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총 3부에 걸쳐 조선의 쇠퇴와 망국 과정을 살핀다.
그간 조선이 망한 원인을 지나친 당쟁과 성리학에 두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것이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며 고종과 대한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흐름 또한 공존했다. 저자는 조선이 망한 원인에 집중하지 않고 조선이 망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따라간다.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배경이 결국 강제병합으로 이어졌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뉴라이트 비판』 등의 전작으로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한 저자가 이번에는 조선사를 다룬다.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허망하게 망한 나라인 동시에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버틴 생명력 강한 왕조이다. 도대체 조선은 왜 망했을까. 저자는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총 3부에 걸쳐 조선의 쇠퇴와 망국 과정을 살핀다.
그간 조선이 망한 원인을 지나친 당쟁과 성리학에 두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것이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며 고종과 대한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흐름 또한 공존했다. 저자는 조선이 망한 원인에 집중하지 않고 조선이 망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따라간다.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배경이 결국 강제병합으로 이어졌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목차
머리말_ 망국의 의미
프롤로그 _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풍경
1부 조선은 어떻게 시들어갔는가(17~18세기)
1. 조선과 중국의 관계 (1)_ 천하 체제 속의 전통 질서
2. 조선과 중국의 관계 (2) _ 껍데기만 남은 조공 관계
3. 사림(士林)의 권위와 사림의 권력
4. 실용주의의 보루, 대동법
5. 신권과 왕권의 힘겨루기, 예송논쟁
6. 정조의 어찰 정치
7. 정조의 권도(權道) 정치
8. 실학의 좌절
2부 조선은 어떻게 쓰러져갔는가(19세기)
1. 조선 망국의 두 단계
2. 실종된 왕권
3. 대원군도 못 벗어난 세도 정치의 틀
4. 동도서기론의 한계
5. 『매천야록』의 고종 시대
6. 망국의 마지막 고비, 임오군란
7. 친일의 두 자세, 김홍집과 박영효
8. 세도 정치의 종점, 을미사변
9. 왕 노릇을 거부한 고종
3부 조선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대한제국기)
1. 외세 줄서기의 천태만상
2. 중국과 일본의 엇갈린 행로
3. 조선의 마지막 지킴이, 의병
4. 고종만을 위한 나라, 대한제국
5. 고종의 마지막 짝사랑, 러시아
6. 러일전쟁을 향한 길
7. 오적의 죄인가, 고종의 죄인가?
8. 죽음의 품격
에필로그_ 근대화의 길
맺음말_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프롤로그 _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풍경
1부 조선은 어떻게 시들어갔는가(17~18세기)
1. 조선과 중국의 관계 (1)_ 천하 체제 속의 전통 질서
2. 조선과 중국의 관계 (2) _ 껍데기만 남은 조공 관계
3. 사림(士林)의 권위와 사림의 권력
4. 실용주의의 보루, 대동법
5. 신권과 왕권의 힘겨루기, 예송논쟁
6. 정조의 어찰 정치
7. 정조의 권도(權道) 정치
8. 실학의 좌절
2부 조선은 어떻게 쓰러져갔는가(19세기)
1. 조선 망국의 두 단계
2. 실종된 왕권
3. 대원군도 못 벗어난 세도 정치의 틀
4. 동도서기론의 한계
5. 『매천야록』의 고종 시대
6. 망국의 마지막 고비, 임오군란
7. 친일의 두 자세, 김홍집과 박영효
8. 세도 정치의 종점, 을미사변
9. 왕 노릇을 거부한 고종
3부 조선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대한제국기)
1. 외세 줄서기의 천태만상
2. 중국과 일본의 엇갈린 행로
3. 조선의 마지막 지킴이, 의병
4. 고종만을 위한 나라, 대한제국
5. 고종의 마지막 짝사랑, 러시아
6. 러일전쟁을 향한 길
7. 오적의 죄인가, 고종의 죄인가?
8. 죽음의 품격
에필로그_ 근대화의 길
맺음말_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저자 소개
출판사 리뷰
강제병합 100주년,
망국(亡國)의 역사에 대한 복기와 성찰
저자는 이미 『밖에서 본 한국사』,『뉴라이트 비판』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했던 역사학자. 그가 이번에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망국’(亡國)이라는 화두로 조선의 실패를 유교 정치의 좌절과 동아시아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짚어냈다.
이 책은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총 3부에 걸쳐 조선의 쇠퇴와 망국 과정을 살핀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조선의 망국 원인을 두고 신채호 같은 한말·일제 때의 많은 지식인들이 주장한 유교 망국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양인들의 한국 발전의 비결로 꼽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망국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조차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꺾으려는 식민사관으로 간주하여, 대한제국기와 고종을 과대평가하는 자위(自慰) 사관으로 흐르는 경향도 보였다. 이런 논란의 흐름 속에 아직도 조선의 망국에 대한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같은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강제병합으로부터 한 세기, 해방으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시점에 출간된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화·경제성장의 성취를 통해 자부심을 갖게 된 우리 사회가, 이젠 과거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를 걷어내고 100년 전 망국의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망국의 귀결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일제에 의해 조선이 망한 결과에만 주목했지 무너지는 과정 자체를 복기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지만, 강제병합이라는 결과만으로 조선 망국의 모든 책임을 일제에 지우는 것은 조선 망국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그리고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있었고, 1910년 강제병합은 그 귀결이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 망국 책임론은 식민 지배의 피해자인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쏟아낼 출구는 만들어줄지언정, 스스로 망국에 대한 내부적 진단과 성찰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비판이다.
유교 정치의 쇠퇴, 어떻게 조선의 망국을 불렀나?
권력 사유화는 곧 국가 위기의 지표
저자는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원인으로 유교 정치의 쇠퇴를 지목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권력 사유화’가 있다.
조선 후기 유교 질서 퇴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권력 사유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권력의 공공성은 사회 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한 필수적 기반 요소다. 권력 사유화는 광해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상이었다. (……) 19세기의 조선은 권력의 공공성이 완전히 증발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 48쪽
저자에 따르면 유교 정치에서 원칙적으로 지배층의 권력은 공공에 복무하도록 제한된다.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무리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관료 봉건제’에서 구체화되는데, 무력·경제력 등에서 우월한 유력 계층이 관료층으로 편성되어 특권을 부여받는 대신에 왕권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중간 권력의 경쟁과 발호를 억제하여 국가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이후 인조반정, 붕당정치,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왕권의 쇠퇴로 인해 이런 유교 정치의 틀은 작동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렸고, 철종을 왕으로 세운 것에서 보듯 19세기 세도정치하에서는 신하가 왕을 갈아치우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젠 왕 주변으로 친위 세력이 형성되면서 지배층의 권력은 공공성이 아닌, 자신의 사익을 목적으로 행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정점을 보여준 것이 고종의 대한제국기이다.
대한제국 건립은 권력 사유화의 절정이었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이런 권력 사유화는 유교 정치의 원리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오랜 세도정치를 통해 정치의 공공성이 약화된 끝에 (……) 유교적 질서가 말살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 212쪽
저자는 고종이 왕조 위기의 순간에도 수시로 의정부 관리들을 갈아치우며, 자신의 부와 권력 쌓기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한다. 『매천야록』 곳곳에 진상품에 따라 신하를 평가하는 왕의 추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고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겠지만 조선의 ‘품위 없는 죽음’에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권력 사유화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은 조선의 망국에서 보듯, 곧 권력 집단의 위기의 지표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없었다면 과연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까?
조선의 실패와 유교 정치의 종말은 별개
유교 국가는 대규모 보험 체계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납입금이 많은 고객에게 더 큰 혜택을 제공하지만, 납입금이 거의 없는 고객에게도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보장해주는 보험 체계다. 오늘날의 정치론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부와 권력의 성장에 한계를 두고 생존 조건을 보장하는 체제이므로 부와 권력을 추구할 동기도 약하기 때문에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큰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농업 사회에 매우 적합한 체제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105쪽
저자는 유럽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유교 정치는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원리로서 제 역할을 잘 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유력 계층의 권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기능에 효과적이었는데, 건국 초기 조선 사회의 안정성도 이런 유교 정치에 바탕을 두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만약 동아시아 국가들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면 유럽식 근대화 못지않은 나름의 독창적인 근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유교 정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낸다. 대원군 입장에서는 당시 세도 정치로 망가진 조선의 유교 국가 체제를 복구하는 것이 유럽식 근대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로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개항 이후 유럽식 근대화 도입만 빨랐어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항 무렵의 조선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무시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쇄국이든 개국이든 조선의 망국은 “유교 국가 체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있던 세도 정치”에서 이미 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이런 논리를 따라 가면 조선의 실패와 유교 정치의 실패를 함께 묶는 것은 큰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조선의 실패로 유교 정치 체제가 사라졌을 뿐이지, 그 거꾸로는 아니었다.
고종은 계몽군주인가 암군인가?
“요즘 일각의 보수적인 사학자들이 고종을 ‘계몽군주’쯤으로 높여주고 (……) 예술인들이 명성황후를 뮤지컬의 주인공이자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고종의 집권기는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 -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중에서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올해 구한말 황실 인물들을 조명한 소설들이 나오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연초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한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최근에는 고종의 리더십을 높게 재평가한 평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왕실의 모습이 정말 우리 역사 속 모습이었을까?
저자는 고종과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연결시키려는 이태진 교수식의 논리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태진은 『고종 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 실은 ‘고종 황제 암약설 비판’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한국사에서 고종 시대는 근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방향은 아주 달라질 수 있다. 이 시대의 군주정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거나 진행되었으면 일본의 36년간의 한국 지배는 그것을 꺾은 불법 강점이 되고, 그 반대라면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고종 암군설-암약설 등은 바로 후자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 답답한 이야기다.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장담하는데, 황현이 침략주의자들 말에 따라서 『매천야록』을 썼단 말인가? (……) 고종이 암군이라는 이야기는 일본 침략을 지지하려는 목적 없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 나는 고종이 보기 드문 암군이었다고 믿지만, 그렇다 해서 일본 침략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 178쪽
또한 저자는 이태진 교수가 “고종의 평판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 미국공사 알렌이 고종을 평하는 1903년 일기의 한 대목까지 잘못 번역했다고 주장한다(179쪽).
저자는 이런 무리한 해석과 번역이 나온 이유를 고종 암약설을 반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고 본다. 한때 조선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을 망국의 원인으로 돌린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종 시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사관으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 조선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거나 그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히려 그런 자위 사관이야말로 그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종말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품격 있게 망할 수는 있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큰 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선 왕조는 일본의 도움 없이도 망할 길을 오랫동안 잘 찾아 왔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진짜 피해자는 왕조가 아니라 민족사회였다. 왕조가 왕조 노릇 못한 것은 이 피해를 막거나 줄여주지 못한 하나의 주변 조건일 뿐이었다. 대단히 큰 조건이기는 했지만 식민지화의 본질적 조건은 아니었다. - 180쪽
저자는 20세기 초 우리 민족의 식민지화는 어쩌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대한제국기 고종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 특사를 파견하고 조선의 중립국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을 확률은 희박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 영토에 필사적인 관심을 가진 나라는 일본 하나뿐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에 구애의 손길을 뻗었지만,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중국이었고, 만주에 정신이 팔려 조선까지 봐줄 형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식민 지배는 일본에 형식적 절차만 남은 수준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숱한 이권을 유럽 열강에 넘기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 시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던 “고종만의 환상”이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또한 고종 양위의 직접적 원인이 된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해서도, 고종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양위 압박에 몰리자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한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민비 암살 음모 혐의로 망명했다가 다시 고종 폐위 음모로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로, 고종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러나 황제 자리가 위험해지자 고종은 일본에 연줄이 많은 박영효에 매달린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고종의 일련의 돌출 행동들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자는 일본 내 강경파에 힘을 실어준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에게 계속 이토 노선을 공격할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원했다. - 265쪽
저자의 이런 주장들이 물론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또한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한다. 다만 저자의 관점에서 구한말 고종이 자리보존을 위해 했던 “술수와 책략”은 결코 조선의 멸망에 결코 이롭게 작용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도 숭고하고 비천한 품격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 국가의 멸망에서도 그 사회의 격조가 나타난다. (……) 조선 왕조 멸망의 책임을 고종 한 사람에게 물을 일은 아니지만, 왕조 멸망에 임해 민족사회를 비참한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그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 268쪽
한국은 여전히 식민지 사회인가?
기회주의자가 승리하고 지배층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
왕조의 개폐는 이민족 지배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10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의 본질은 전통의 단절에 있었고, 전통의 단절로 잃어버린 것이 도덕성이었다.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식민 통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 298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양국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종결이 확정되었다. 일본은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겨받고,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다.
저자는 조선의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안긴 가장 큰 해악이 바로 도덕성을 갖춘 인물보다 기회주의자가 승리하는 구조로 역사가 흘러왔다고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17세기부터 이어온 권력 사유화는 조선의 가장 큰 병폐였지만, 결국 고종의 손으로 뽑힌 을사 7적은 조선을 판 대가로 일본 통치하에서 권력을 누렸다. 홀로 조약을 반대한 한규설은 쫓겨나고 한말 유생의 꿋꿋한 의를 보여준 최익현과 황현은 죽음을 택했다. 이후 역사는 지배자와 그들의 취향에 맞는 기회주의자들의 뜻에 따라 움직여왔다.
저자가 비록 유교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책 전체 서술에서 유교 정치를 강조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도덕성 부재의 근원을 살피면 100년 전 조선 사회의 유교 전통의 단절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도덕 수준의 틀을 갖추지 못하는 한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라는 저자의 일갈은 유효해 보인다.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299쪽
망국(亡國)의 역사에 대한 복기와 성찰
저자는 이미 『밖에서 본 한국사』,『뉴라이트 비판』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했던 역사학자. 그가 이번에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망국’(亡國)이라는 화두로 조선의 실패를 유교 정치의 좌절과 동아시아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짚어냈다.
이 책은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총 3부에 걸쳐 조선의 쇠퇴와 망국 과정을 살핀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조선의 망국 원인을 두고 신채호 같은 한말·일제 때의 많은 지식인들이 주장한 유교 망국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양인들의 한국 발전의 비결로 꼽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망국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조차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꺾으려는 식민사관으로 간주하여, 대한제국기와 고종을 과대평가하는 자위(自慰) 사관으로 흐르는 경향도 보였다. 이런 논란의 흐름 속에 아직도 조선의 망국에 대한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같은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강제병합으로부터 한 세기, 해방으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시점에 출간된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화·경제성장의 성취를 통해 자부심을 갖게 된 우리 사회가, 이젠 과거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를 걷어내고 100년 전 망국의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망국의 귀결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일제에 의해 조선이 망한 결과에만 주목했지 무너지는 과정 자체를 복기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지만, 강제병합이라는 결과만으로 조선 망국의 모든 책임을 일제에 지우는 것은 조선 망국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그리고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있었고, 1910년 강제병합은 그 귀결이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 망국 책임론은 식민 지배의 피해자인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쏟아낼 출구는 만들어줄지언정, 스스로 망국에 대한 내부적 진단과 성찰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비판이다.
유교 정치의 쇠퇴, 어떻게 조선의 망국을 불렀나?
권력 사유화는 곧 국가 위기의 지표
저자는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원인으로 유교 정치의 쇠퇴를 지목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권력 사유화’가 있다.
조선 후기 유교 질서 퇴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권력 사유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권력의 공공성은 사회 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한 필수적 기반 요소다. 권력 사유화는 광해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상이었다. (……) 19세기의 조선은 권력의 공공성이 완전히 증발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 48쪽
저자에 따르면 유교 정치에서 원칙적으로 지배층의 권력은 공공에 복무하도록 제한된다.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무리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관료 봉건제’에서 구체화되는데, 무력·경제력 등에서 우월한 유력 계층이 관료층으로 편성되어 특권을 부여받는 대신에 왕권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중간 권력의 경쟁과 발호를 억제하여 국가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이후 인조반정, 붕당정치,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왕권의 쇠퇴로 인해 이런 유교 정치의 틀은 작동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렸고, 철종을 왕으로 세운 것에서 보듯 19세기 세도정치하에서는 신하가 왕을 갈아치우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젠 왕 주변으로 친위 세력이 형성되면서 지배층의 권력은 공공성이 아닌, 자신의 사익을 목적으로 행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정점을 보여준 것이 고종의 대한제국기이다.
대한제국 건립은 권력 사유화의 절정이었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이런 권력 사유화는 유교 정치의 원리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오랜 세도정치를 통해 정치의 공공성이 약화된 끝에 (……) 유교적 질서가 말살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 212쪽
저자는 고종이 왕조 위기의 순간에도 수시로 의정부 관리들을 갈아치우며, 자신의 부와 권력 쌓기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한다. 『매천야록』 곳곳에 진상품에 따라 신하를 평가하는 왕의 추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고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겠지만 조선의 ‘품위 없는 죽음’에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권력 사유화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은 조선의 망국에서 보듯, 곧 권력 집단의 위기의 지표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없었다면 과연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까?
조선의 실패와 유교 정치의 종말은 별개
유교 국가는 대규모 보험 체계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납입금이 많은 고객에게 더 큰 혜택을 제공하지만, 납입금이 거의 없는 고객에게도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보장해주는 보험 체계다. 오늘날의 정치론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부와 권력의 성장에 한계를 두고 생존 조건을 보장하는 체제이므로 부와 권력을 추구할 동기도 약하기 때문에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큰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농업 사회에 매우 적합한 체제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105쪽
저자는 유럽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유교 정치는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원리로서 제 역할을 잘 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유력 계층의 권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기능에 효과적이었는데, 건국 초기 조선 사회의 안정성도 이런 유교 정치에 바탕을 두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만약 동아시아 국가들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면 유럽식 근대화 못지않은 나름의 독창적인 근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유교 정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낸다. 대원군 입장에서는 당시 세도 정치로 망가진 조선의 유교 국가 체제를 복구하는 것이 유럽식 근대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로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개항 이후 유럽식 근대화 도입만 빨랐어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항 무렵의 조선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무시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쇄국이든 개국이든 조선의 망국은 “유교 국가 체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있던 세도 정치”에서 이미 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이런 논리를 따라 가면 조선의 실패와 유교 정치의 실패를 함께 묶는 것은 큰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조선의 실패로 유교 정치 체제가 사라졌을 뿐이지, 그 거꾸로는 아니었다.
고종은 계몽군주인가 암군인가?
“요즘 일각의 보수적인 사학자들이 고종을 ‘계몽군주’쯤으로 높여주고 (……) 예술인들이 명성황후를 뮤지컬의 주인공이자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고종의 집권기는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 -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중에서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올해 구한말 황실 인물들을 조명한 소설들이 나오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연초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한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최근에는 고종의 리더십을 높게 재평가한 평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왕실의 모습이 정말 우리 역사 속 모습이었을까?
저자는 고종과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연결시키려는 이태진 교수식의 논리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태진은 『고종 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 실은 ‘고종 황제 암약설 비판’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한국사에서 고종 시대는 근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방향은 아주 달라질 수 있다. 이 시대의 군주정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거나 진행되었으면 일본의 36년간의 한국 지배는 그것을 꺾은 불법 강점이 되고, 그 반대라면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고종 암군설-암약설 등은 바로 후자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 답답한 이야기다.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장담하는데, 황현이 침략주의자들 말에 따라서 『매천야록』을 썼단 말인가? (……) 고종이 암군이라는 이야기는 일본 침략을 지지하려는 목적 없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 나는 고종이 보기 드문 암군이었다고 믿지만, 그렇다 해서 일본 침략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 178쪽
또한 저자는 이태진 교수가 “고종의 평판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 미국공사 알렌이 고종을 평하는 1903년 일기의 한 대목까지 잘못 번역했다고 주장한다(179쪽).
저자는 이런 무리한 해석과 번역이 나온 이유를 고종 암약설을 반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고 본다. 한때 조선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을 망국의 원인으로 돌린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종 시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사관으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 조선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거나 그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히려 그런 자위 사관이야말로 그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종말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품격 있게 망할 수는 있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큰 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선 왕조는 일본의 도움 없이도 망할 길을 오랫동안 잘 찾아 왔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진짜 피해자는 왕조가 아니라 민족사회였다. 왕조가 왕조 노릇 못한 것은 이 피해를 막거나 줄여주지 못한 하나의 주변 조건일 뿐이었다. 대단히 큰 조건이기는 했지만 식민지화의 본질적 조건은 아니었다. - 180쪽
저자는 20세기 초 우리 민족의 식민지화는 어쩌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대한제국기 고종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 특사를 파견하고 조선의 중립국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저자가 보기에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을 확률은 희박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 영토에 필사적인 관심을 가진 나라는 일본 하나뿐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에 구애의 손길을 뻗었지만,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중국이었고, 만주에 정신이 팔려 조선까지 봐줄 형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식민 지배는 일본에 형식적 절차만 남은 수준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숱한 이권을 유럽 열강에 넘기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 시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던 “고종만의 환상”이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또한 고종 양위의 직접적 원인이 된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해서도, 고종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양위 압박에 몰리자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한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민비 암살 음모 혐의로 망명했다가 다시 고종 폐위 음모로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로, 고종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러나 황제 자리가 위험해지자 고종은 일본에 연줄이 많은 박영효에 매달린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고종의 일련의 돌출 행동들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자는 일본 내 강경파에 힘을 실어준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에게 계속 이토 노선을 공격할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원했다. - 265쪽
저자의 이런 주장들이 물론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또한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한다. 다만 저자의 관점에서 구한말 고종이 자리보존을 위해 했던 “술수와 책략”은 결코 조선의 멸망에 결코 이롭게 작용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도 숭고하고 비천한 품격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 국가의 멸망에서도 그 사회의 격조가 나타난다. (……) 조선 왕조 멸망의 책임을 고종 한 사람에게 물을 일은 아니지만, 왕조 멸망에 임해 민족사회를 비참한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그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 268쪽
한국은 여전히 식민지 사회인가?
기회주의자가 승리하고 지배층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
왕조의 개폐는 이민족 지배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10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의 본질은 전통의 단절에 있었고, 전통의 단절로 잃어버린 것이 도덕성이었다.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식민 통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 298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양국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종결이 확정되었다. 일본은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겨받고,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다.
저자는 조선의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안긴 가장 큰 해악이 바로 도덕성을 갖춘 인물보다 기회주의자가 승리하는 구조로 역사가 흘러왔다고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17세기부터 이어온 권력 사유화는 조선의 가장 큰 병폐였지만, 결국 고종의 손으로 뽑힌 을사 7적은 조선을 판 대가로 일본 통치하에서 권력을 누렸다. 홀로 조약을 반대한 한규설은 쫓겨나고 한말 유생의 꿋꿋한 의를 보여준 최익현과 황현은 죽음을 택했다. 이후 역사는 지배자와 그들의 취향에 맞는 기회주의자들의 뜻에 따라 움직여왔다.
저자가 비록 유교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책 전체 서술에서 유교 정치를 강조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도덕성 부재의 근원을 살피면 100년 전 조선 사회의 유교 전통의 단절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도덕 수준의 틀을 갖추지 못하는 한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라는 저자의 일갈은 유효해 보인다.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299쪽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2.개항기.구한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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